수선화 피는 언덕
김미자
계절의 색이 변하고 있다. 무채색 메마른 대지에서 물살이 번지듯 파스텔 톤으로 차오르고 있다. 화려하고 생기롭게, 천천히, 그러다가 일순간 보는 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생명의 신비로움. 여전히 꽃샘바람은 심통스럽지만 너나없이 남풍이 불어오는 길목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한다. 나도 질세라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나섰다.
파도도 세차게 밀려든다. 거센 바람에 어지간히 시달린 탓인지 물살에 짊어지고 달려온 자신의 등짐을 사정없이 바윗돌에 부딪힌다. 은빛으로 산산이 퍼지는 물거품이 바다의 봄꽃처럼 화사하다. 파도의 몸부림이 낯선 모습도 아니건만 그 또한 경이롭다.
두 계절이 맞붙어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 땅을 헤치고 나온 봄의 생명체들이 언덕위로 오라고 유혹하는 눈치다. 한쪽은 바닷가 자갈밭으로 가는 길, 건너편은 너른 꽃밭이 보이는 산길이다. 봄은 하나건만 봄맞이 마중객들은 두 갈래 길에서 잠시 주춤거린다.
발걸음이 산길 쪽으로 향했다. 몇 번 그 바다를 찾을 적마다 언덕길이 있다는 것은 보았지만 바다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갈밭 길만 다녀왔다. 오르막에 발걸음을 옮기자 바람이 사정없이 덤벼든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패딩점퍼도 들썩거린다. 바람에 밀렸다 앞서다 언덕 중간에 서니 서툰 솜씨로 노랑물감을 아무렇게나 쿡쿡 찍어놓은 듯한 수선화가 길 양편에 그림 같은 풍경을 쫙 펼쳐놓고 있었다.
산길을 적잖이 오갔던 적이 있었다. 차 한 대 지나갈만한 좁은 길이었지만 구불 길을 돌고나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풍경은 언제나 새로웠다. 산길에도 거센 바람이 불었다. 군락을 이룬 나무들도 바람의 심술을 견디지 못하고 파도의 요동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듯 윙윙거렸다. 그 소리가 좋다는 환호인지 싫다는 몸부림이었는지 무심했지만, 나무들의 고통 뒤에는 은은한 향내가 바람에 섞여 출렁거리던 내 심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어느 순간에는 만개한 봄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바람만 스쳐도 잠 못 이루던 혹독한 환절기나 다름없었다.
로버트 프로스트 의 시 〈가지 않은 길〉 에서도 두 갈래 길을 다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는 시인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인생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던 탓은 아니었을까. 인생길에는 어떤 길이든 나름대로 희로애락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바람은 모든 자연을 성장시킨다. 세상 모든 아버지처럼 소중하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산길을 오르내려야만 가족을 지킬 수 있었던 휘청거리던 아버지의 등.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크고 작은 바람결에 흔들거리며 살아간다. 그럴수록 견고해지고 짙어지고 남다른 향기를 뿜어낸다. 봄을 기다리는 것도 저마다 탄탄한 인행 행로를 지키고 싶은 뜨거운 욕망을 겨우내 품고 있어서이다. 나 역시도.
어느 곳인지도 모르고 길만 보였다하면 무작정 향했던 방황. 길의 끝에는 나를 포근히 감싸줄 처마 밑에 호롱불 밝힌 반가운 이의 집이 있기를 늘 갈망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추억이라는 단순한 말이 된다. 뚜렷한 기억이 추억이 되기까지 바람은 얼마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쳐 지났을까.
꽃샘추위 속에서 제 몸을 펼쳐야하는 것이 봄의 운명이라면 마음의 등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고 내려오기를 반복해야만 했던 것도 내 운명 속에 필히 들어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세상에 노력으로 안 되는 일 중의 하나가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특별한 일일 것이다.
푸른 바다와 수선화 피는 언덕배기가 펼쳐내는 두 장면의 풍경이 바람의 지휘에 맞춰 반짝이는 봄의 전광판 하나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여린 봄이 천천히 물결친다.
수필과비평 등단(2012년)
부산수필문인협회. 부경수필문인협회 이사.
수필집: 『갈망바다의 언덕』. 『종탑거리』
수 상: 부산문학상. 등대문학상. 부산수필문인협회 본상. 외
이메일: kimmj2468@naver.com
첫댓글 수선화피는 언덕에서 본 생명의 봄맞이를 잘 읽었습니다. 우리 앞의 길 또한 이런저런 바람이 숨어 있지요. 늘 바람과 더불어 흘러가겠지요.😄
봄을 웃게하는 수선화
노오란 언덕에 핀 수선화를 떠 올려보게 됩니다.
수선화 피는언덕 잘 읽었습니다.
인생의 두 갈래 길 어느 길에도 바람은 불겠지요.
그 바람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겠죠.
바람 속에서 봉긋 얼굴내민 수선화를 떠올리며 또 걸어갑니다.
박정희 선생님
조인혜 국장님
최금숙 선생님
감사합니다
좋은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