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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을 딛고 인내의 믿음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의 삶을 바라보며
연단과 징계의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을 단련하였습니다.
고난의 풀무와 징계의 연단에 깨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은혜와 복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마음을 단련하는 것은
생명의 은혜를 얻기 위한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교훈의 본이 없고 경계의 거울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외인이요, 나그네며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정도로 장인의 인내가 절실합니다.
당근과 채찍은 성경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당근과 채찍의 정서는 연단과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정관입니다.
신명기의 복과 저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시고 하나님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당근과 책찍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과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풀무의 연단이 되었고 말세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고난과 연단과 징계는
사람 막대기요, 인생 채찍입니다.
때로는 연단과 징계를 통하여 온전하여 지지만
때로는 타산지석의 돌이 되고 백면서생의 글이 됩니다.
다윗은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성숙하였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베드로는 말씀하였습니다.(벧후2:6-7)
유다서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유1:7)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의 고난을 은혜의 기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신명기는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8:5-6)
욥기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욥5:17)
시편 94편의 시인은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고 말씀하였습니다.(시94:12-13
욥기서는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욥33:16-18)
시편119편의 시인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말씀하였으며(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씀하였습니다.(시119:71)
사도 바울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고전11:32)
히브리서는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히12:5-8)
잠언서는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며
장계와 채찍의 보고로 가득한 잠언 그 자체입니다.
☞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9:7-9)
☞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잠10:13)
☞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잠10:16-17)
☞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12:1)
☞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잠15:10)
☞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잠16:22)
☞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17:3)
☞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19:18)
☞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잠19:29)
☞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잠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잠26:3)
☞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잠29:17-19)
참으로 욥기서의 욥은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욥7:18-21)
미가서는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미6:9)
히브리서는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히12:10-14)
또한 히브리서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히10:35-39)
야고보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약1:4)
또한 야고보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약5:7-11)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벧전5:10)
이사야서는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0-11)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2)
요한 계시록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계14:12)
이렇게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믿음으로
우리 구주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온전히 얻을 것입니다.
욥기서는 풍족할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같이 쏟으시리라
그가 철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욥20:22-29)
시편 17편의 시인은 악인의 압제에서 영혼의 구원을 기도하며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17:1315)
사도 바울은 교회의 사이비를 경계하며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롬16:17-18)
오늘날 천주교의 아성과 대형 교회의 아성은 중세의 카톨릭의 전철을 밟으며
유신론의 옷을 입은 범신론적 유물론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방신전의 모습이요, 맘몬의 굿당이 된지 오래여서
사도 바울이 지적한대로 말씀의 채찍으로 경계와 견책을 받아 새로와져야 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17-24)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속의 콘크리트, 성공과 번영, 그 종교적 욕망에 사로잡혀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간절히 외치는 그 진리의 복음을 외면하였습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5-21)
참으로 사도 바울은 정체된 교회가 아니라
움직이는 교회의 본이 되었습니다.
버리고 쫓아가고 달리는 바울의 모습은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고 세속의 성공과 번영의 틀에서 벗어나고 맘몬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오직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겼고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그리스도 안의 믿음, 그 의를 붙잡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을 달려 믿음의 경주를 온전히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확신으로 넘쳤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전도요, 선교요,
움직이는 교회로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맘몬의 굿당이 되어서
콘크리트 철벽으로 쳐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고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은 세상을 탐하는 종교적 욕망과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강단의 복음을 버렸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타성에 젖은 교회당이 아니라
율법과 세속의 맘몬 신앙에서 벗어나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그 말씀의 순종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충만하였던 초대 교회는
솔로몬과 스룹바벨과 헤롯의 예루살렘 성전을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북왕국의 엘리야와 엘리사는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한번도 드린 적이 없지만
가장 위대한 선지자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실로의 성막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긴 가운데서도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여 이스라엘을 바알 신앙에서 벗어나
오직 여호와만 섬기게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도둑의 소굴이라고 말하면서 그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며
온갖 고난을 당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선지자로 완전하였습니다.
다니엘과 에스겔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없는 바벨론의 포로된 상황 가운데서
출애굽의 신앙과 그 증거를 가졌으며 하나님의 신탁을 가졌고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며 종교개혁의 완성을 일구었습니다.
실로의 성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을 뛰어넘는
사무엘과 엘리야와 엘리사와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다니엘과 에스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구원 경륜의 그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주일성수와 교조적 십일조는 교회의 성전화,
곧 복음의 율법화를 이루는 옛 것으로 돌아가는 종교적 회귀본능이요,
살아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사도 바울이 지향하였던
옛 것을 버리고 벗어 버리고 쫓아가고 달려가는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성서의 당근과 채찍의 글은
말씀의 연단으로 징계를 받고, 경계를 받고, 교훈을 받고, 견책을 받는 고난의 풀무가 될 것입니다.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정체된 교회는 사이비의 온상과 맘몬의 굿당이 될 것이요,
움직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 처음 입은 옷 곧 이단과 사이비의 사슬과 좌파적 이념에서 벗어나기 어렵듯이
발을 깊이 들여 놓은 교회의 성전화, 곧 복음의 율법화를 이루는
맘몬의 굿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강단의 설교만 듣는 신앙은 노예적 광신과 교조적 신앙에서 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성경의 말씀을 읽고 또 읽어 깊이 묵상하면 이 모든 거짓이 깨달아 지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 바라 봅니다.
시편 17편 기자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였고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와같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의 온전한 구원을 바라며
푯대를 향하여 경주하는 완전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본을 달리는 복음의 교회, 그 실상을 보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히12:1-2)
한결같이 성서지대, 그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복음과 믿음의 진보를 이루었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여리고 성을 건축하고 실로의 성막을 복원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티브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참으로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의 교회의 성도는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을 잃어 버리고
언제까지 이단과 시이비 그 맘몬의 굿당에서 노예적 광신의 칼춤을 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