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사이자 휴머니스트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는 비교 우위론을 통해 자유무역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스스로 조정하여 사회는 안정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유럽의 1,2 차 세계대전으로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유럽 각국은 최소한의 식량 자급을 위하여 농업 부분만은 보호 무역을 하게 되었고, 지금 유럽은 대부분의 나라들이 농업 부분만큼은 스스로 지키고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농업 부분을 전부 FTA협정으로 와해 시켰다.
비상시기에는 석유는 없어도 생존할 수 있지만 식량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이다.
농업을 내팽개친 것은 보수 정부나 진보 정부나 마찬가지였다.
칼 맑스나 아담 스미스나 식민지를 통한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지독한 혐오감을 가졌다.
아담 스미스는 그것을 자기 조정이 가능한 자유경쟁 시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했고,
맑스는 국가나 자본가의 착취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아담스미스와 맑스의 차이는 바로 노동에 대한 다른 견해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의 상품화에 찬성, 맑스는 노동이 상품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반대한 아담 스미스나 맑스도 세계대전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의 이론으로는 도무지 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아담 스미스는, 세계무역을 위한 금본위제도를 완벽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각국의 금의 보유량과 화폐의 가치와 상품 가격이 자동으로 조정된다는 것은 유토피아였다.
결국, 유럽 각국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이른바 세계대전이다.
좌파나 우파나 지나친 식민지 쟁탈전에서 원인을 찾았다.
유럽 각국의 경제가 마비되고 세계무역이 불통이 된 이면에 금본위제도의 환상이 깨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과거의 시장과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시스템이라는 것을 좌·우파 아무도 몰랐다.
시장이 발전해서 자본주의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아담 스미스나 맑스는 같았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장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을 팔아넘길 수 있는 괴물이다.
맑스는 순진했다.
그런 시장을 민주주적인 틀 속에 가두어 놓으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도저히 민주적인 틀 속에 있을 수 없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시장이다.
그 시장을 그대로 두고 민주주의라니,
자본주의자들이 만들어 놓고 그들의 시스템으로 무장된 정치적 소굴 의회에서 민주주의라니.
시장과 민주주의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히틀러는 그래서 시장과 민주주의를 다때려 부순거다.
그게 파시즘이란 거다.
복지사회를 이야기하는 사민주의자들은 아직도 정신 못차렸다.
시장을 그대로 두고 잠시 복지사회는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장과 민주주의는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는 사이란 걸 알아야 한다.
모든 갈등의 원인은 자본주의자들이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사민주의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