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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가까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모든 일에는 상대를 향한 영원한 사랑이 담겨야 한다. 그러면 그 일은 영원한 가치와 생명을 지니게 되고, 그 생명은 다시 영원한 사랑을 잉태하게 된다.”
하늘나라는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들을 닮아 저마다 ‘사랑의 영존체’가 되어야, 영원한 사랑의 자리에 설 수 있고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겠지요. (Hong, 1210)
일과 사랑 / [Audio]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가까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모든 일에는 상대를 향한 영원한 사랑이 담겨야 한다. 그러면 그 일은 영원한 가치와 생명을 지니게 되고, 그 생명은 다시 영원한 사랑을 잉태하게 된다.’”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모든 일을 할 때 상대를 향한 영원한 사랑이 담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노동의 가치, 일의 가치는 단순히 노동시간이나 노동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들어가는 우리의 사랑, 그 이전에 정성, 섬세, 기술 등이 그 기본을 이루겠지요. 그 위에 상대를 향한 영원한 사랑, 영원한 하늘의 사랑이 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그 노동과 일은 영원한 가치와 생명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작품 속에 들어 있는 그 생명이 상대를 감동시켜서, 그에게 다시 영원한 사랑을 잉태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복음서’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영원한 하늘사랑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제자들을 통해서 글로 남겨졌고, 그 글 속에 영원한 가치와 생명이 깃들어서, 그 글을 읽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잉태시키는 것이지요.
사랑에 관한 바울의 인식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3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요. 육적으로 말하면, 외국어를 의미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천사의 말’은 천사가 전해주는 계시를 뜻하기도 하고, 천사들이 쓰는 영계의 언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말씀이 상대의 마음속에 스며들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다시 반복해서 설명한 것이 2절입니다.
2절, “내가 대언의 능력을 지니고 있고 모든 비밀과 온갖 지식을 알며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또한 내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줄지라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누가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 줄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경우라면, 여기서 ‘나누어준다’. ‘내어준다’라는 것은 어떠한 열정이나 인간적 연민에 기반한 행위를 염두에 둔 표현 같습니다.
4절,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악한 것을 도모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8절,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바울의 특징적인 어법이에요. 그분의 심상입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에는 다 긍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은 세속적 사랑이 아니고, 하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왜냐?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대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고 있지만,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깨닫고 있지만, 그때에는 그분께서 나를 명확히 아시는 것처럼 나도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바울의 이분법적인 인식이 여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해서, 대언이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이 사라지겠습니까? 본문의 헬라스어 프로페테이아는 ‘대언자들이 대신 전하는 말씀’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대언도 사라지도 방언도 사라지고 지식도 사라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대신 전해주는 것이 ‘대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직접 들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것일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도 우리에게 대신 전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말씀 역시 우리에게 ‘대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천년의 섭리 속에서 지상에 있는 신앙인들이 방언기도를 그치겠습니까? 하시는 분은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가서 살 때, 과연 그때는 방언이 그치겠습니까?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방언’이기에, 거기에서는 모든 영이 하나님과 더불어 방언으로 대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늘에서도 A, B, C라는 사람의 성장수준이 각각 다를 때, 하나님께서 A에게는 A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B에게는 B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 C에게는 C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또한 C에게 어떤 난처한 상황이 있는데, A나 B도 알아들을 수 있게 “야! 너 그거 고쳐야 해!”하고 말씀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래서 C에게 은밀하게 “너, 이거 고쳐야 한다”하고 말씀하시면, A나 B는 옆에 있다 할지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대언’이나 ‘방언’은 지상에서나 영계에서나 앞으로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식도 사라진다”고 하였는데, 아니, ‘지식’이 없이 어떻게 하늘세계가 운영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대언과 방언과 지식은 하나님 사랑의 영원한 3대 요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들을 갈라치기 하면서,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단언한 것이지요. 이 역시 바울의 이분법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고 대언과 방언과 지식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울의 이분법적 인식 습관인데, 당시 헬라스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예수님이시라면, 이 말씀을 이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언과 방언과 지식도 사랑과 더불어 영원하다. 그러니 대언하기를 힘쓰고 방언하기를 힘쓰고 지식 연마하기를 힘쓰되, 사랑 안에서 그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되도록 무르익히거라” 하셨을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확신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에게 화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위선자들이여! 그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은 버렸다. [그러나] 전자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후자도 마땅히 실천해 왔어야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상이고 어법입니다. “앞의 것도 버리지 말고 뒤의 것도 버리지 마라. 다 좋은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5:17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대,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까지, 그것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율법의 한 획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상입니다. “구약시대의 좋은 것은 티끌만한 것도 다 버릴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보존해서 귀하게 여기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더 추가해서 완성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라는 심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할례도 폐하고 율법도 폐하되, 오직 믿음이 남을 것이다”라는 방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니 구약시대 4000년의 나름대로 원숙한 어법을 쓰며 신앙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귀에 바울의 이분법적인 ‘갈라치기 설교’가 들어올 리 만무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대언도 방언도 지식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무르익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대언도 필요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방언기도도 필요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날로 더 충만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도 그만큼 더 성숙해지고, 영계에서나 지상에서 대언하는 우리의 대언 역시 더 풍요로워지고 깊어지고 섬세해지는 것입니다.
9절에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대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온전한 것이 온다고 해서 부분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의 어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내가 왔다고 해서, 내가 과거의 선지자들을 폐하고 제사장들을 폐하고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바울의 인식 차이입니다.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여러분,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 시절에 배운 자전거, 한글, 영어 알파벳을 그만두셨습니까? 어린아이 때 배운 양치질, 세수하는 법, 교통신호등 읽는 법을 다 버렸습니까? 그런 것은 안 버리는 거예요. 좋은 것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 때 몰랐던 것을 더 배우는 것이지요. 그것이 어른인 것입니다. 오히려 어렸을 때의,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청소년기의 티 없이 맑은 마음을 상실할까 스스로 걱정하지 않습니까?
바울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집 앞의 우물물을 퍼 마시며 성장하던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그가 말씀을 전할 때 자양분이 되어서 귀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라고 설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목적적인 설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 이제 옛 시대의 모든 것은 다 쓰레기로 여긴다. 헛것으로 여긴다. 세상 지식은 다 폐기물로 여긴다”, 이런 어법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서신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민족의 좋은 것도 다 버려야 하는 듯한, 마구 서구인의 흉내를 내야 하는 듯한, 그러한 이상한 형태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이분법의 엄청난 허점이고 한계였습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어린아이 시절의 좋은 추억, 어린 아이 때 배운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 그만두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12절, “(이처럼)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고 있지만, 그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깨닫고 있지만, 그때에는 그분께서 나를 명확히 아시는 것처럼 나도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과거 시대의 좋은 것들을 다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을 새 시대에 맞게 완성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것이 생전의 예수님을 곁에서 가까이 뵙지 못한 바울의 인식의 한계였습니다. 그가 헬라스철학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다 보니, 이러한 세계를 놓쳤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사탄이 이러한 온전한 인식의 능선으로 올라가는 바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13절, “그러나 지금은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으뜸은 사랑입니다.” 여기서도 바울이 “믿음과 희망은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글이 더 참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 중에서도 으뜸은 사랑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랑의 출발선이고, ‘희망’은 사랑의 과정이며, ‘사랑’은 그것들의 오메가 포인트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희망을 없애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대언과 방언과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할수록 상대에 대한 믿음이 더 필요하고, 사랑할수록 상대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지는 것이고, 그 믿음과 그 기대감은 사랑 속에서 결실되고 무르익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것은 사랑의 3대요소입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의 완성체인 것이지요. 무엇이 으뜸이고 무엇이 곁가지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결실은 닮음
아래 단락을 보시면, “하늘나라는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들을 닮아 저마다 ‘사랑의 영존체’가 되어야, 영원한 사랑의 자리에 설 수 있고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겠지요.”
앞에서 우리는 “믿음이 사랑의 출발선이고, 소망은 사랑의 과정이며, 사랑은 그것들의 오메가 포인트이다”라고 정리해 보았는데, 그렇다면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지향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닮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게 된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다 보면 하나님과 성령님을 닮게 되지요? 그렇게 닮아 가는 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배워 가는 우리의 사랑의 목표, 그것은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예수님과 그만큼 더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고 의논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랑도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크게 도와 드릴 수 있고, 더 평안하게 모실 수 있고,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Hong,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