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13
5월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부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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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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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kAvVJnHEZo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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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이제 다시 한 번 고개를 쳐들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찌 그리도 흥미진진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동업자^^ 입장에서 감탄이 절로 날 명설교의 연속이 복음서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처럼 장황하지도 않습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손에 잡힐 듯, 피부에 와닿은 듯, 그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고 감지하기 쉬운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감미로웠던지 그분 가시는 곳마다 오천 명, 만 명은 기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학교 교육이 전무한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 할지라도, 일단 당신 것으로 잘 소화 시키셨습니다. 잘 갈고 다듬은 다음 알아듣기 쉽게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쉽게 가르치시기 위해 단골로 사용하신 문학적 기법이 있었으니, 극단적 비교 대조법입니다. 예를 들면 자비심이라고는 단1도 없는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간 바리사이(교만으로 가득 찬)와 세리(울며 가슴 치는)의 비유입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비유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이렇게 비교·대조법의 달인이신 예수님께서 오늘은 또 다른 비교·대조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복음 6장 27절)
오늘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극단적이니 둘을 비교·대조하십니다.
지난 세월 돌아보니 착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아서 그랬겠지요. 썩어 없어질 양식을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으로 착각했습니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양식, 잠시 스쳐 지나가는 양식, 며칠만 지나도 부패할 양식을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으로 착각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부질없는 세상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갈채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마치 부초처럼 손에 쥔 물 한 줌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말 유한한 재물들, 세속적 영달에 혈안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고개를 쳐들어야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추구해야겠습니다. 고맙게도 매일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 마치 한 줄기 미풍처럼 수시로 우리 귓전을 살랑이며 맴도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더욱 집중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자비하신 주님 품으로 건너 간다 할지라도 영원히 우리 앞에 남을 불멸의 선행과 봉사 이웃 사람의 실천에 더 마음을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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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굳이 멀리 가실 필요 없습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바라셨던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백성들 사이에 분명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예표를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시켜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뵙는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중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놀랍고도 신기한 기적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한번 맛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 더 크고 대단하고 특별한 기적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군중은 대단한 능력자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께서 어쩌면 이 암담하고 부조리한 이스라엘의 고통스런 현실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기대 말입니다.
이런 군중의 심리를 잘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정곡을 찌르는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장 26절)
예수님께서는 육적이고 물질적인 만족 때문에 당신을 쫓아다니는 군중을 꾸짖으시며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양식을 찾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복음 6장 27절)
오늘날에도 뭔가 특별한 것, 뭔가 신기한 현상을 쫓아 멀리까지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구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특별하고 황홀한 신비 체험, 마치 거짓말처럼 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한 순간에 벗어나는 것... 이런 것들은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세상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굳이 멀리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본당 성당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현존하십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매일 봉헌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고백소 안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람직한 신앙이 어떤 것일까, 묵상해봅니다.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광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그런 신앙은 점검이 좀 필요한 신앙인 듯합니다.
한 지도자가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장되게 포장되는 신앙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나 존엄성이 훼손되는 그런 신앙 역시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이성이 잘 조화된 신앙,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본 상식과 예의가 존중되는 신앙,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다 성취되기보다 돌탑 쌓듯이 오랜 세월을 두고 꾸준히 쌓아 올라가는 그런 신앙,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희망하며 나 자신의 비참함을 견뎌내는 신앙... 이런 신앙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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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상반기 돈보스코청소년영성사목연구소 기획강의 ‘효과적인 부모 역할’
장소: 살레시오회 관구관 7층 대강당(영등포구 여의대방로65)
참가비: 각 회당 1만원
문의: 02) 828-3549
5월 11일(수) 이지혜 기자, 엄마의 삶(가톨릭평화신문, ‘엄마 일기’ 저자)
5월 25일(수) 양승국 신부, 아버지의 역할(살레시오회 내리 공동체 원장)
6월 15일(수) 이진옥 박사, 내 자녀의 또 다른 이름 ‘민지(MZ)’(DB연구원)
6월 29일(수) 백준식 수사, 학교 폭력 예방교육(살레시오청소년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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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백사와 산삼의 관계>
저와 함께 공부했던 한 신부가 해 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백사를 잡으러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백사는 예나 지금이나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사를 잡지는 못했고 그냥 뱀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흰 페인트 통에 넣어 빨래 줄에 널어놓았다고 합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백사를 잡아왔다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까지 불러 세워 자랑했습니다. 아들은 뱀을 잡느라 고단했는지 마루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혀가 검은 색이더랍니다. 옆에 있던 흰 페인트 통을 보시고 상황을 파악하신 아버지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잠자던 아이를 매우 혼냈다는 것입니다.뱀에 흰 페인트를 칠하면 백사가 될까요? 백사는 일반적으로 산삼을 먹고 사는 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백사가 발견된 곳에는 산삼 밭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원도 정선에서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이 산삼을 갉아먹고 있는 백사를 발견해 산삼과 백사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산삼에 있는 성분이 뱀의 색소를 눈만 빼 놓고 다 빠져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뱀도 몸에 좋다고 하는데 산삼을 먹은 뱀이니 얼마나 몸에 좋겠습니까?
그러나 페인트칠을 한 뱀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겉만이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를 송두리째 변하게 하는 양식을 먹어야 내가 진정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많은 이들에게 그들이 당신을 찾아온 것은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빵은 육체를 배불리고 육체를 살리는 양식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변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한 빵의 기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기적의 의미는 바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변화시켜 나갔던 것처럼, 성체와 성혈을 영하며 우리 영혼을 변화시켜야만 가나안 땅인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육체에만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아닌 영혼이 변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만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페인트를 칠한다고 뱀이 백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빵만 먹는다고 영혼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 존재가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남편을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이랍니다. 첫째, 남편을 화나게 하라. 둘째, 과식하게 하라. 셋째, 과음하게 하라. 넷째, 담배를 많이 피우게 하라. 다섯째, 커피를 탈 때 설탕을 듬뿍 넣어라. 사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건강에 좋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건강에 좋은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네 개가 다 먹는 것이지만 가장 처음 것은 영혼에 관련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남편을 빨리 죽게 만드는 방법일 것입니다. 먹는 것에 따라 그냥 뱀도 되고 귀한 백사도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즉 말씀과 성체를 자주 영한다는 것, 이것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가장 좋은 준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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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이 말씀은 ‘너희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찾는다.’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현세에서 이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 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것을 위해 나를 찾는다. 나를 원해 나를 찾아야 한다.’라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이 양식이시라는 진리를 암시하신다. 즉 “빵의 기적을 통하여 길이 남아 영혼을 기르는 음식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즉시 덧없는 음식을 찾고 있다. 너희는 육체 대신 영을 살지게 하는 음식으로 인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절)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그 양식을 주실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이 변화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은총을 받는다. 빵의 기적 의미는 우리의 참 생명을 위한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엉뚱한 것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양식을 얻고자 힘써야 한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는 이는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드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는 누군가?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이는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겨야(1코린 1,31 참조) 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아드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주셨다. 이것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러한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현세적인 만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즉 참된 생명,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듣고 실천해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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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6,24-25)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요한 6,11), 그 빵과 물고기를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그런데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산으로 가셨고,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는 일을 자기들끼리 의논만 하다가 멈추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을 찾아서 카파르나움으로 간 사람들은 의논만 하다가 멈춘 그 일을 실행하려고 간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갔을 것입니다.)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은 “어떻게(어떤 방법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너가셨다는 것을(요한 6,16-21)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먼저 카파르나움에 가신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먼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면서, 정말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임금이 되어 달라고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으로 해석됩니다.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내가 행한 ‘빵의 기적’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입니다.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는 “육신의 배를 채우는 빵만 원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9) 이 말에서,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찾지 말고”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력, 재물, 출세, 성공 등은 ‘썩어 없어질 양식’일 뿐입니다. 그런 것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을 허비하는 일입니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여라.”입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메시아시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29)
사람들은 ‘힘써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떤 ‘일’을 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고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해석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만일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빌고 있다면, 그것은 유일하게 중요하고 귀한 것을 외면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찾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은 이야기에 나오는 대화와 비슷합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8,18)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재물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완전히 버리라는 뜻이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일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나를 믿어라.”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 수가 없어서,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루카 18,23)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면서 떠나버립니다.(요한 6,60-66)>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너무 막연하고, 비현실적이고,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으로 바꿔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고통이나 어려움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지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소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은, 눈앞의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마취제가 아니라, 그 고통들을 극복하고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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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길에 나무를 봅니다. 꽃이 예쁘고, 열매가 큰 나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줄기가 튼실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양분을 꽃과 열매에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활엽수와 침엽수들은 줄기가 튼실합니다. 목재로 쓰기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양분을 나눠줄 꽃과 열매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도 창조하셨고, 목재로 쓰기에 적합한 나무도 창조하셨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을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감사드리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꽃과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아직 인생의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면 누군가를 위한 거름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을 말씀하셨습니다. 10개의 동전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찾으면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며칠 전에 비슷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신문 홍보를 가려고 자동차 키를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방에도, 거실에도, 책상에도, 주머니에도 자동차 키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도 한번 잃어버린 경험이 있기에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자동차 키를 복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제가 머문 곳이 두 곳이 있었습니다. 한 곳은 식당이고, 다른 한 곳은 성당이었습니다. 자동차 키를 복사하기 전에 먼저 식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종업원이 웃으면서 자동차 키를 보여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비유의 말씀이 제 삶으로 쑥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 또한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삶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람들은 신실한 스테파노 부제를 모함합니다. 스테파노 부제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모함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모함합니다. 성서에 보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산나는 두 노인으로부터 부정한 행동을 했다는 모함을 받았습니다. 나봇은 아합 왕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모함을 받고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습니다. 아벨은 카인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들판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비단 성서에만 억울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에도 억울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간첩으로 누명을 써서 평생 감옥에 있었던 분도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던 분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희생당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억울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들의 눈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무엇이 썩어 없어질 양식일까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탑에는 시기와 질투, 교만과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리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은 블랙홀이 되어서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생명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일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이 모든 곳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느님의 일은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녹아 음식에 맛을 주듯이 하느님의 일은 희생과 봉사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빵 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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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예정출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바라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이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갈증을 해소시킬 물을 청하는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구하라고 하시며 당신 자신을 제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께서는 5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베푼 후에 따라온 군중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내어 놓으신 당신 자신의 몸을 성찬의 식탁에서 받아 모십니다.
매일매일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은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 말씀과 성체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현세를 극복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아쉽지도 않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거나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위로요 피난처입니다.
비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합니다. 세상사에 낙담할 때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그 모든 시련과 어려움, 좌절을 극복하며 이겨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께 둡니다. 그분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있고 우리에게 평화와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살아가면서 많은 헛된 것들을 추구합니다. 육체적인 쾌락을 쫒기도 하고, 허구에 찬 욕심으로 재물을 채우려고 바둥거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리싸움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리고 지나친 욕심으로 오히려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이들을 가까이서 보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욕심은 이 세상 삶에 마치 모든 것이 있는 양 집착하며 살아갈 때 생겨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 세상에서, 썩어 없어질 육신에 온갖 욕심을 둘 때 생겨납니다.
인간의 삶은 비록 현세를 살더라도 주님이 함께하는 영원한 낙원에 이르기 전까지는 불안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현세를 살면서도 미래에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으로 현세를 다스려 나가고 이겨냅니다.
신앙인의 삶은 인생 여정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에 희망으로 차있습니다. 세상 재물도 신앙의 가르침 안에서 사용합니다. 육신의 욕망, 욕구도 신앙의 가르침 안에서 다스려나갑니다.
현세의 음식은 잠시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만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계속 탐욕을 부리고 욕심으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갈망합니다. 그러면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영혼의 양식으로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줍니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헛되고 헛된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불사불명의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생명으로 충만케 합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의 양식으로 채워주며 지혜로 눈떠 살아가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찾는 우리를 빈손으로 되돌려 보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삶은 바른 길을 걸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삶이 영원히 이어질때 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구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세적 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으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부활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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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요안 요한 신부님]
미사를 드리다 보면 영성체 때 가끔 엄마 손을 잡고 따라 나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자기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면 서운한 표정을 짓고 돌아갑니다.
어떤 아이는 칭얼대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엄마 입에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자 떼를 씁니다. 무엇이든 나누어 먹고 자기들에게 먼저 주는 엄마인데 그것만큼은 먹고 입을 싹 닫는 것입니다.
어느 날 미사가 끝난 후, 한 꼬마가 100원 짜리 동전 하나를 가져오더니 아까 그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팔라는 것이죠. 얼마나 귀여웠던지요.
"그 작은 빵은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을 모시려면 기도도 해야 하고 또 착하게 살아야 한단다." 하고 말을 했답니다.
꼬마가 얘기하길, "자기는 엄마랑 매일기도하고 엄마 말도 잘 듣는데 왜 안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대답이 없어 "이다음에 크면 주겠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꼬마에게는 성체를 줄 수 없었던가? 청취자 여러분과 함께 묵상을 나누고 싶은 주제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신자가 되어야만 미사 중 성찬의 전례에 참여할 수 있었답니다. 미사성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박해받는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고, '몸을 주고 피를 쏟은' 예수를 따라 살겠다는 신앙의 표현이었고, 예수가 했던 것처럼 서로 섬김으로써, 서로 나눔으로써 모두가 하나됨을 긍정하는 것이었고, 형제적 봉사와 친교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먹으라고 내어놓는 그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는 이는 내 힘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안에서 살겠고 그도 내 안에서 살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떠나야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고, 생명을 먹기 위해서는 너희도 생명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너희도 서로 섬김으로써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너희도 나처럼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아감이 너무도 힘들었기에, "도대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하며 떠나게 됩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섞어 없으질 양식을 얻어 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여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성체를 달라는 꼬마에게 성체를 줄 수 없음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시면서 어떤 마음으로 받아 모시고 있습니까? 영원히 살게 하여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주시고자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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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은 예수님을 만나러 카파르나움으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보고는 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만 열광한 것입니다.
그런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푼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또한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빵을 많게 하는 것과 같은 현세적인 풍요로움만 추구한다면, 이는 썩어 없어질 양식만 구하는 행위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런데 군중은 아직도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 한 가지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를 먼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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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이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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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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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홀로 먹을까 함께 먹을까>
2022. 05. 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6,22-29 (생명의 빵)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홀로 먹을까 함께 먹을까>
홀로 먹으면
나만 보이고
함께 먹으면
모두 보이지
홀로 먹으면
나만 배부르고
함께 먹으면
모두 배부르지
홀로 먹으면
잠깐 배부르고
함께 먹으면
오래 배부르지
홀로 먹으면
먹는 것이 전쟁이고
함께 먹으면
먹는 것이 평화이지
홀로 먹으면
이내 썩어 없어지고
함께 먹으면
길이 남아 영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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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밥을 먹어야 산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무엇을 먹든 먹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 있겠지만 일시적입니다. 단식을 한다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양을 보충시켜야 합니다. 음식을 통해서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삽니다. 영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 6,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에 관심을 두어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간절함에 귀 기울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시는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먼저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마태4,4).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양식 그 너머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완성하게 됩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믿음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요한 6,29) 결국,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나의 생각, 나의 계획,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찾으려는 ‘버림의 자유’ 안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 적인 것이, 육신 적인 것과 최고의 것이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의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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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군중이 요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일러줍니다. 세리와 군인들도 요한에게 다가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그들에게도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0-14) 이런 요한의 답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며,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한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건네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의 답변처럼, 착하고 바른 일, 곧 선행과 자선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를 선행과 자선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계신 분들을 때때로 봅니다. 물론 선행과 자선이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외적 활동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역사적 인물이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관한 그 믿음이 여러분 안에 얼마나,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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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힘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그때에 아시아 출신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와 유대인 사이의 논쟁을 소개하는데 내일 스테파노는 이 논쟁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폭력을 쓰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할까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이런 주제가 되겠습니다.
폭력은 힘으로 치면 제일 차원이 낮은 힘이고, 폭력밖에는 다른 힘이 없는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경우나
말이 안 되니 주먹을 쓰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그의 힘이기에 폭력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힘인 사람은 물리적인 힘은 물론이고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인 폭력도 가하지 않으며,
상대가 원치 않은 것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사랑만이 그의 힘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스테파노처럼 싸움에 결코 지지 않지만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스테파노가 우리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힘이 있는지. 폭력이 없는 까지는 좋은데 하느님의 힘마저 없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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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생명의 빵인 성체!>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양식, 이 세상 떠날 때 결코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얻으려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천 여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또 하나의 제자들인 우리들이나 할 것 없이 썩어 없어질 것에 너무 집착해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매일 겸손하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대 위로 우리에게 오시는 생명의 양식(빵)이신 예수님! 이런 예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향해 있는가? 예수님은 적당히 믿으면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먹고 마시는 일에만 더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은지?
생명의 양식인 성체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타나시오 성인은 초대 교회 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 이단과 맞서 싸우면서 정통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를 지켜낸 성인이십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매일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매일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나에게 내려오십니다.
이런 하느님과 이런 예수님께 깊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매일 겸손한 모습으로, 준비된 합당한 자세로 예수님을 받아 먹고 힘을 내어 봅시다! 그래서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처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하느님의 형제자매들이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6,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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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자 오즈렘 에이덕(Ozlem Ayduk)과 미시간 대학의 이선 크로스(Ethan Kross)가 벽에 붙은 파리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에 유래한 벽에 붙은 파리 효과(Fly-on-the-wall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갇혀 있을 때, 그 안에서 빠져나와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 고민이 아무리 크더라도 벽에 붙은 파리가 듣는다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여길 것처럼, 제삼자의 객관적 시선으로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인칭 시점에서 부정적 상황을 떠올리면 혈압과 심박수가 올라가면서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삼인칭 시점으로 보면 감정의 변화도 줄어들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찾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자고 하신 것도 일인칭 시점인 ‘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새로운 ‘나’를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더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나만을 떠올리고, 내 탓만 따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지게 됩니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 요구의 만족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호칭에서도 ‘랍비’라고 말합니다. 이는 대체로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모를 때 부르던 사회적 존칭이었습니다. 즉,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했습니다. 바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면,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연결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연결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는데, 연결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음은 아니었을까요?
객관적으로 주님과 나의 관계를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시선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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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여정>
-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만남 -
수십 년이 지났어도 매해 봄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샛노란 민들레꽃과 연보라 제비꽃을 보며 써놨던, 수차례 인용했던 두 시가 오늘 말씀 묵상중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제목은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며 “꽃자리”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꽃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라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자아초월 여정의 꽃자리를 살았던 분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고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철학자 칸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있고, 나의 가슴에는 단 하나의 도덕률이 있다.”말했으며 묘비에도 “머리위에 별바다, 가슴속에 도덕률”이라 씌어 있다 합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참으로 강인한 믿음과 정신력을 지닌 분으로 5차례의 유배중에도 한결같이 77세 천수를 누리며 참으로 제 역할에 충실했던 경이로웠던 분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하여 불굴의 투쟁을 펼쳤던 분으로, 땅에서도 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어디에서든 좌절함이 없이 꽃자리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유배중 사막에 머물때는 파코미우스와 안토니우스 만났으며 수도자들의 교과서같은 “안토니오의 전기”를 집필했던 분입니다.
현재 신약성경을 27권으로 분류 확정한 것도 성인의 공로입니다. 영국의 성인, 헨리 뉴먼도 그가 “그리스도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말합니다.
그리하여 성 아타나시우스는 성 대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지안주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의 4대교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예나 이제도 그랬고 앞으로의 역사도 두 부류의 사람들의 대결로 이뤄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에 속한 사람들과 아래에 속한 사람들간의 대결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자아초월의 여정에 오를 때 비로소 아래로부터 무지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 요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이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육적 욕망의 대상에 눈길을 줄 것이 아니라 표징 자체이신 파스카 예수님께 눈길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파스카의 예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날 때 아래의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위에 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파스카 주님과 평생 만남을 보장하는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문답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실제적 행위의 믿음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하는 모든 참된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꽃자리를 사는 성인들입니다.
이런 이들의 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스테파노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가운데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니 말그대로 군계일학의 탁월한 인물입니다. 무수한 적대자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합니다.
말그대로 위에 속한 이와 아래에 속한 이들간의 대결이니 결코 이들이 스테파노를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대자들은 무지한 이들을 선동하고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스테파노를 궁지에 몰아 넣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묘사가 늘 파스카 예수님과 소통하고 있었던 스테파노임을 증거합니다.
‘그러자 최고 의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보였다.’
지상에서 늘 파스카 예수님과의 친교로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스테파노였음을 봅니다. 영문 주석의 마지막 언급도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우리가 매일의 양식을 마련해 달라거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잘 유지시켜 달라고 주님께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경천동지할 부활절의 사건은 우리의 초점을 아래의 작은 관심사들로부터 위로부터 우리에게 파견되는 그분께로 향하게 한다.”
참으로 날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찾고 만남으로 위에 속한 사람이 되어 자아초월의 여정을,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꽂자리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하느님의 일이자 나의 일인지 깨닫습니다. 자아초월의 여정이란 날로 파스카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천상에 속한 참나의 모습으로 실현되어가는 여정을 뜻합니다.
바로 이런 삶을 위해 결정적 도움을 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자아초월의 여정을 북돋아 주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꽃자리를 살게 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시편11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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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3nwtemJ_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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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요한 6, 27)
한 줌
재가 될
우리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들 믿음이다.
창조와
부패 사이에
우리들 삶이
있다.
이와같이
썩어질 것과
없어질 것
사이에서
홀연히
영원한 생명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지를
다시 묻게된다.
혼돈 속에서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말씀의
양식을 먹는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양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양식이다.
생명의 양식으로
하느님의 길을
걷게된다.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를
깨닫게된다.
우리의 죽음을
치유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새롭고도
뜨거운
생명의 다른
시작이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삼키며
살아가는
새로워진
우리들 삶이다.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버리는
사랑의 양식이
결코 아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더럽고
가장 추한
우리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주신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
생명 없는
양식은
가짜다.
참된 양식은
참된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오셨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순간이
영원한 생명이며
영원한 양식이다.
소멸과 탄생을
어루만지는
영원한 양식
주님이시다.
하느님을 먹고
하느님을 사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으로
영원하다.
+++++++++++++++++
(2)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7)
영원한
생명을 열망하는
예수님의 뜨거운
말씀이십니다.
서로에게 생명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도
둘째도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은
변하지 않는
우리를 향한
영원한 사랑입니다.
영원한 빛인
생명의 양식안에
참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일부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생명의 참된
양식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벗게됩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걸어가야 할 길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완성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오늘도
먹습니다.
생명의 양식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오늘 되십시오.
마지막도 영원한
생명의 양식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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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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