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를 엿보다
진연후
‘지구의’를 한바퀴 돌리며 내가 만나는 세상을 생각한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 다른 삶을 생각한다. 늘 다른 세계가 궁금했다. 능력만 있으면 세계가 하나라는 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세상인데 난 그럴 수 있는 것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생각만은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키워온 덕분일까. ‘에스페라토’, 기회가 될 수 있는 반가운 소리가 마음을 흔들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에스페란토란 1887년에 폴란드 안과의사 자멘호프(Ludoviko Lazaro Zamen hof. 1859~1917) 박사가 창안한 국제 공용어이다.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에스페란토는 인종, 종교, 이념, 국적을 초월하여 세계 모든 사람들이 특정 민족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가능케 하려는 언어이다.
외국어에 대한 부담을 애써 떠올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사실에 들떠서 삼월 한 달간 토요일 오후를 학생이 되어 행복하게 보냈다. 몰랐던 것을 알아 가는 재미, 앞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일에 대한 기대, 낯선 만남에 대한 흥분 등 뭔가를 시작할 때 발생하는 것들에 매력을 느끼며 감사할 일들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기초적인 문법을 조금 배우고 에스페란토 연수에 참가했다. 아무리 배우기 쉽다고 해도 하나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문법도 필요하고 회화도 해야 하니 단시간에 이루려고 하는 것은 무지함의 욕심이다. 손가락 끝으로 맛만 잠깐 보고 나니 남들은 어떤 맛을 느끼는가 궁금해졌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먼저 사람을 만나려고 용기를 냈다.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는 남강 서원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 모임에는 외국인을 포함해 80여 명 정도가 모였다. 물론 나는 초보자로 분위기 파악조차 힘들었지만 그런 대로 모임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첫날, 도착하여 접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데 말이 안 되는 나는 그저 얌전히 고개만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 미국, 불가리아, 그리고 폴란드 사람이 참가한 좋은 기회였으나 한국사람 옆에만 졸졸 따라다녀 성격부터 바꿔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각각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조를 만들어 공부를 한다고 했다. 나는 일본인 십여 명과 한국인 네 명이 모인 초보 반에 들어가 꼬박 두 시간 동안 문법 설명을 들었다. 밤에는 요리경연대회를 통해 다른 나라의 음식도 먹어 보고, 우리 음식인 화전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캠프화이어도 하고 에스페란토어로 번역한 우리나라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밤새도록 몇 개 나라의 사람들이 한 가지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기하기만 한 풍경이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답답함을 새로운 계획으로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잘하는 사람들과 초보자들이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는 더듬더듬 단어를 찾고 있으면 선배들이 도와주어 문장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어쩌다 초보자끼리 만나면 사전을 찾아가며 가장 기본적인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아침 식사 후 세 시간 동안 또다시 수준별 수없이 진행되었다. 반에 따라 에스페란토 노래를 배우기도 하고, 사회문제에 관한 주제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또다시 초급반에 들어가 나머지 문법을 배웠다.
외국인들과 에스페란토어로 대화를 하는 선배들을 통해 언어의 통일이 이렇게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확인한다. ‘민족 2언어주의’에 입각하여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운 에스페란토 언어의 사용을 주창하는 세계 언어 평등권 운동이라는 ‘에스페란토주의’에 나도 참여해 보고 싶어졌다.
에스페란토어는 민족어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같은 초보시절이 있고 민족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단다. 영어나 일어가 아닌, 어느 힘 있는 나라의 말이 아닌 제 3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말에 있어서만큼은 평등함을 보여주는 것이니 끌리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것과 더불어 언어감도 느린 내가 일어, 영어, 불어, 독어 등을 어떻게 배울 생각이나 하겠는가. 에스페란토는 세계 62개국에 가맹국협회가 있고 약 120개국에 개인 회원이 있어 세계적 교류를 할 수 있다니 참으로 매력적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 뭘 해야 할까?”
“먼저, 자신부터, 가정에서부터 평화가 있어야지.”
가끔 걱정거리가 있을 때 친구와 주고받는 결론이다. 가을에 태어난 나의 별자리는 천칭자리이다. 천칭자리의 수호성은 금성으로 금성은 아름다움과 평화를 지니게 하고 저울의 특성을 지닌 천칭자리는 합리성, 공정성을 지니게 한단다. 이 둘의 조화로 이성적이고, 우아하며 평화로운 삶을 원하고 쉽게 화를 내지 않으며, 평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단다. 여유를 갖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것이 천칭자리의 매력이라고 한다.
에스페란토의 매력에 끌려 천칭자리의 매력을 갖추게 될 지 모르겠다. 아무튼 난 평화를 사랑한다. 내 안의 평화를 꿈꾸며 다른 세계에 두 발을 조심스레 들여놓으려 한다.
범우사 ‘책과 인생’ 2003년 11월호 수록
한국산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