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들기 전부터 설날과 추석에는 큰집식구들과 함께 어김없이 북산의 공동묘지에 가서 큰어머니께 절을 올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추석날이었을 것이다. 큰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마치고 앞서 내려가시던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어느 뫼 옆에서 걸음을 멈추셨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과 내 또래의 아이들 셋이 성묘를 하고 있었다. 빛바랜 돗자리 위에 차려진 초라한 제물이 눈길을 잡았다. 거무튀튀한 보리개떡과 찐 옥수수와 삶은 고구마가 낡아빠진 사기대접들에 담겨있고 보시기에는 막걸리가 반쯤 차있었다. 그들 가족이 성묘를 마칠 때를 기다려 백부님이 먼저 말을 꺼내셨다.
“없이 살아도 이렇게 정성을 다하니 자네 씨는 반드시 복을 받고 살 걸세.”
“맑은 술에 흰떡 한 접시 올려드리지 못하니 부모님 뵐 낯이 없습니다.”
우리는 백부님의 지시에 따라 보따리를 풀어 시루떡과 사과와 배, 구운 생선과 전붙이를 그 가족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가는 동안 어느 결에 그들의 부끄러움은 내 것이 되어있었다. 허다한 사람이 저마다 정성스럽게 마련해온 온갖 제물을 진설하여 성묘를 하고나서 왁자하게 잔치판을 벌이고 가는 공동묘지의 어중에서 보리떡과 찐 옥수수와 삶은 고구마를 차려놓고 성묘를 하는 꿋꿋한 보짱이 생각날 때마다 낯이 붉어졌다. 어느 해에 찐 옥수수의 산소가 사라졌다. 타관에서 성공하여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올해도 막내는 아버지 추모예배가 끝날 때쯤 올 것이다. 술 한 잔 올려드리지 못하는 추모예배에 끼여 낯선 기도와 찬송을 겪고 있어야 하는 어색한 이방인의 서운함이 묻어온다. 막내는 전통 격식대로 제물을 차려놓고 잔을 올려야 제대로 된 제사라는 지조를 간직할 것이다. 제사 예법 때문에 혈육의 정이 엷어져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저 먼 곳에 잠들어있는 부조의 영혼은 옛 집에 올 수가 없다. 설령 영혼이 온다 해도 육체가 없기에 한 모금의 술도 마실 수 없으니 잔을 올리고 수저를 달그락거려 안주를 집어드려도 소용없는 노릇이다. 온갖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드려도 정성만이 가련할 뿐 돌아가신 조상님께는 허사이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 따로 있다. 나 자신의 행실을 바로 세우는 것도 부모 사후의 효도이겠으나 하늘복음을 저승의 부모님께 전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효도이다. 예수님은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작은 섬의 뒤편 썰물 진 모래톱 여기저기서 돼지머리들이 실없이 웃고 있었다. 모래밭에 반쯤 묻힌 돼지의 눈도 웃고 있었다. 돼지머리는 일찍이 도통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용왕님께 바쳐진 신성한 제물일 터인데 접근하기 무섭게 악취가 눈을 쏜다. 잘난 사람일수록 번번이 돼지머리에 절을 한다. 시민의 대표와 사장과 기관단체장과 동아리 회장과 주인장으로 나서서 돼지머리에 공손히 예를 올리고 지갑을 열어 기꺼이 그 입에 고액지폐까지 물려드린다. 사람이 돼지머리에 절을 하는 까닭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보다는 돼지머리가 더 정직해보이고 눈앞에 현신하지 않는 신보다 더 믿음직스럽기 때문이리라. 신에게 바친 제물은 돌려받을 길이 없지만 돼지 입에 물려 준 고액권은 곧장 회수할 수 있다. 새 차를 사도 고사, 배를 뭇어도 고사, 건물을 지을 때나 새로 사업장을 열 때에도 돼지머리를 모셔온다. 플라스틱 돼지머리도 등장했다. 플라스틱 돼지머리가 내려주는 복은 아마 모조품일 것이다. 재앙은 저리 가고 복락이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웃고 있는 돼지머리를 숭배한다. 돼지머리 너머의 가랑이 찢어지는 욕망에 절을 한다.
6천 년 전의 일이었다.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올렸고 그의 아우 아벨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경에 기록된 인류최초의 제사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어느 크리스천은 카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잘못이었다고 우기면서도 카인의 소산이 부정한 제물이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오랜 세월에 무엇 하나 보여주지 못하는 무지한 입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카인은 처음부터 살인을 저지르며 거짓을 말하는 사탄의 소속이었다.
자신의 의식주를 풍성하게 해달라고 드리는 제사가 있다. 욕심을 버리고 세상에 참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드리는 제사도 있다. 욕심을 부리면 다른 사람의 몫을 탐할 수밖에 없어 서로 미워하여 싸우게 되어 있다. 제사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창조주의 뜻을 새겨야 한다. 내세관이 없는 유교는 죽은 자의 영혼을 논하지 않으니 제사는 유교의 산물이 아니다. 조상의 신위를 모셔놓고 드리는 제사법은 한 시대 치세의 이념과 사람의 욕심을 효와 수복으로 눈가림한 변종이다.
성경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명령이 없다.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이야기도 없다. 정성스럽게 제물을 차려놓고 그 앞에서 절하며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효를 이룰 수는 없다. 사람들은 부조의 유체를 좋은 자리에 모신다며 자신이 받을 복의 크기를 가늠한다. 사람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시어 효를 새긴다고 말하면서 선조의 혼령이 복을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는 그런 제사를 고사(固辭)하고 조상의 영혼이 좋은 부활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다. 짐승에게 복을 비는 무지한 고사(告祀)를 고사(枯死)시키고 진정으로 절대자께 부복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