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께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 인가 하는 것은 80년대 200주년 기념 행사와
103위 성인 시성식그리고 세계 성체대회 라는 세기적 사건을 계기로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한 교황의 신뢰와 기대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뜻은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베틀레헴이 되어 달라는
교황의 간절한 호소에 잘 들어 나고 있다.
내가 중국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1년 전의 일이다.
중국 북간도 땅 연길에 한국인들이 연변과학기술대한교를 세우고
1992년 도에 개교 하면서 설립이사겸
교수로 강의를 하면서 시작 된 것이다.
내가 중국선교와 북한선교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시작 하게된 큰 동기는 14년전 북한땅 평양에서 열였던
IPU(Interparliamentary Union Conference, 국제의원연맹총회)
총회에 한국 국회대표로 참석하면서 시작 되었다.
평양에 있는 장충 성당 교우들과의 만남은 잠자고 있던
나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뇌관이 되고 말았다.
물론 평양 장충성당은 본당으로나 공소로서 축성 된바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손잡고 기도 할때
(마태 18;19-20) 성령께서 뜨겁게 활동 하시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은 박해시대 100 여년간
어느곳에 있던지 어느 곳에 가던지
항상 죽음과 함게 살아온 삶이 었다.
그것은 19세기 암흙의 시대의 일 이었다.
그런데 20세기, 21세기 인간 문명 문화 그리고
신앙과 자유의 물결이, 바람이 지구를 강타 하고 있는 오늘날
한반도의 북쪽 에서는 200 년전 보다 더 모질고
피로 얼룩진 순교의 삶보다 더 숨가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살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어쩌면 이조시대의 박해보다 숨을 곳도 없고
감출수도 업는 삶을 살고 있는 북한 땅의 형제, 자매들을
만난다는 것은 눈물 나는 일이 었다.
200 년 전보다 더 가혹하고 무서운 형벌과 죽음에
짓 눌려 기도할 자유 조차 없고 숨쉴수 있는 자유만을
겨우 누리며 살아 가는 북한 신자들의 고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생각 할때 마다 가슴은 짓 눌려 오고 마음은 아파 오는 것이다.
그때 마침 나에게는 강요된(?) 정치방학의 계절이 순리처럼 다가 왔다.
하느님께서 인도 하시는 곳은 중국 대륙 이었다.
그것도 북간도 땅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대신
내몸은 육중한 기차에 실려 중국 북경에서
북간도 연길로 달리고 있었다.
북경을 떠나 북간도 연길로 가는 기차는
32시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래서 나의 북방선교의 시간은
시작 된 것이다.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간도땅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시계 바늘을
한 30년 뒤로 돌려 놓은 낙후된 문명의 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도문 훈춘 경신 삼합 백두산 천지 두만강 강바람 너머
북녘 땅에서 들려 올듯한 비탄과 구원의 기도 소리에 애태우며
귀 귀 울 이고 그들의 사무쳐 지치고 또 지친 영혼의 아픔을
느낄때 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을 떠올리곤 하였다.
부제품을 받기 1년전 23세의 신학생 김대건은
장춘 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선교촌 소팔 가자 성당을 출발 한다
때로는 중국식 썰매를 타기도 하지만 대부분 왕복 5천리 길을
도보로 걸어 가야 하는 어렵고 위험 스럽고
살갓을 떼어가는 엄동설한과의 싸움 이었다.
그가 찾은 곳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 땅이 바라보이는
지금의 훈춘 경신 같은 곳 이었고 , 그가 가고자 했던
조선 땅은 철옹성처럼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던
성난 죽음의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북녘 땅은 170 년전 그때 그 시절 보다
더욱 무섭게 성나 있는 난폭 하다 못해 잔인한 땅이라니
이 얼마나 아프고도 아픈 일인가.
내가 북간도 땅에서 맺은 많은 인연들 중에 가장 깊은
사연을 맺은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지철근 토마 형제요, 다른 한 사람은 심순옥 아레따 자매다.
모두 연길천주교회 사람들이다.
심순옥 자매는 나를 통해서 영세를 받은 교우이고
지철근 형제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영세는 받았고,
연길 천주교회의 중심적 지도자로서, 연변 및 연길천주교회
애국교회 교무위원회 비서라는 중책을 맞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며 뜨겁게 변화되었고,
지토마는 말씀 봉사자로, 심 아레따는 찾기힘든
유능한 음악 봉사자로 나의 북간도 선교 활동에
양 날개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 뒤에도 그들은 나의 분신처럼 성령 충만한
하느님의 아들딸로 줄기차게 봉사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천주교회의 참신 앙을 만나고
체험 한 것은 한국에서의 3박 4일 꾸르실료 교육 이었다.
나는 지 토마 형제를 안내하여 절두산 성지를 먼저 순례케 하였다.
북간도 땅, 특히 김대건과 훈춘 천주교회와 경신 공소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는 감회가 특별 하다고 울 먹였다.
그리고 서울대 교구 꾸르실료 남성 171차 교육이 시작 된 것이다.
나는 그가 확실하게 변화될 줄로 믿었지만 한편 긴장도 되었다.
사실 중국 조선족들은 말은 조선말을 하지만
사고방식은 완전히 중국 사람이다. 3박 4일후 그의 고백은 명쾌하였다.
그림 편지 물적 빨랑까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수 있는 감동 그 자체였고, 어둠속에 예수님의 고통을
연상케 하는 양팔기도의 충격, 성체조배에서 한강물 처럼
넘치는 살아 계신 예수님 체험, 마냐니따의 신비와
클라우수라의 기쁨과 사랑의 함창, 이 모든 체험과 느낌은
하느님만이 예비 해 주실수 있는 신비의 선물인 것이다.
그는 그신비를 강열 하게 느끼고 감사 한다는 것이다.
중국 17억 인구중 최초의 끄르실리스타가 탄생 하는 순간 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부르실때를 기다리며 북간도 땅에서
기도 생활에 몰두 하고 있다. 심순옥 아레따 자매도
대학 다니는 아들과 함께 교육자의 자격으로 한국에
초청되어 왔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녀는 머리도 명석 했지만
음악과 율동 봉사에 뛰어 난 기량을 발휘 하게 된다.
그녀는 서울대교구 여성 185차 를 수려 한다.
그녀 역시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천주교 신자 라는 이유하나 만으로 수많은 영적 물적
빨랑까를 받으면서 가톨릭의 끄르실료 운동 만이 해 낼수 있는
일이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머무를 때는 종종 울뜨레아 모임에도 참석 하였는데
북간도로 돌아 간후 역시 기도 생활에 만 충실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순응 하며 아쉬움 속에 살고 있다.
그녀도 하느님의 부르시는 봉사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 리고 있다.
두 사람의 꾸르실리스타를 씨앗으로 삼아
중국 땅 북간도에 3박 4일의 꾸 르실료 교육의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느낀다.
결코 머지 않은 장래에 양팔기도, 성체조배,
마냐니따의 정수를 체험 하게되고 진미를 알게 될날,
그래서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커가는 날 이 곧
한국 울뜨레아 회원들 앞에 빠른 속도로 다가 올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