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하늘나라로 가는 길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즉답 대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셨다. 하늘나라에 자리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건 그곳이 무한히 넓어서가 아니라 그곳으로 들어간 영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주님이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어도 그렇다(마태 7,21-22). 세례와 견진 성사로 머리에 새겨진 인호가 곧 하늘나라 시민권이 아니고, 신부 수녀라고 해서 또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늘나라에 그냥 들어가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형제 누이 어머니이고, 그런 이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12,50).
세상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교 창시자라고 부르지만 정작 예수님은 종교를 만들 생각이 없으셨다. 그럴 거였으면 예배당을 짓고 교리를 만드셨을 거다. 그 대신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아픈 사람은 고쳐주고 마귀를 내쫓아서 온전하게 해주셨다. 그것은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온전해진다는 걸 미리 살짝 보여주신 거였다. 그러니 진짜 하늘나라는 얼마나 아름답고 거기 있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그것들이 진짜 하늘나라의 예고편이나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더라면 죽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켰을 거다. 그런데 많은 기적을 목격하고 풍랑 속에서 물 위를 걸어 본 적이 있는 베드로도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한 걸 보면 그냥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닌가 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무엇일까? 근데 왜 예수님은 비유로만 가르치셨을까? 아마도 하늘나라의 신비는 다 드러나 있지만 가려져 있고, 누구나 다 복음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하느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과 초대라고 여기지 않고, 계명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고, 하느님은 좋지만 이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거다. 좁은 문은 실천이고 실행이다. 특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가장 작은 이들에게는 무조건 잘해주고,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애증(愛憎)으로 잘 지고 가는 거다. 이웃사랑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도 모두 수고스럽다. 그래서 사랑은 수고하는 거다.
이웃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은 아니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특히 연민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바오로 사도는 어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했고 오늘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주인과 종 관계를 말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부부 부모와 자식 고용주와 피고용자 등 여러 가지 관계에 얽혀 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형제자매다. 거기에서는 부모도 없는데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 강을 건널 때 강둑 위에 내가 여기서 사는 동안 잘해줬던 이름 없는 동물들이 도열해서 나를 반겨줄 거라는 예언에 다시 가슴이 뛴다. 내가 잘 대해줬던 작은 이들은 그 자리에 없을 수 있고, 나는 나의 선행을 기억하지 못해도 하느님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하셨다가 누르고 흔들어 채워서 넘치도록 아주 후하게 쳐주신다(루카 6,38). 예수님은 좋은 일만 하셨는데 수난을 당하셨고, 다른 이들은 살려내셨지만 정작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일을 겪는다. 그러면 그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내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고, 사실 성인들과 순교자들도 똑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마태 5,12).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하늘나라로 가는 옳은 길을 가고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의지와 결심만으로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천상 은총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니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믿음을 지켜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