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3일(토)
* 시작 기도
주님...
밤에 잠을 잘 때조차 나의 무의식 속에서 비존재 세력이 나를 공격하나이다.
아침에 아담 안에서 눈을 떴으나 속히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말씀 앞에 앉사오니 이 종을 온전히 주장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나이다.
오늘 이 하루도 내 발에 등과 내 길에 빛이 되어 주셔서, 어둠의 세력들에 휘둘리지 않도록 나를 붙드소서.
순간순간 나를 미혹하는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나를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나의 옛 사람은 주의 십자가에 못 박고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하게 하옵소서.
삼위 하나님이 서로 긴밀히 관계하시는 그 창세전의 세계로 말씀을 통하여 지금 들어가오니 나를 부인하고 삼위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마 22:34-46
제목 : 율법적 지식과 관념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이 내 안에 있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나의 묵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항상 대립관계에 있다.
전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에 대한 논쟁에서 완패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통쾌해 하였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 중 하나인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을 한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이 율법사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선생님은 헬라어 ‘디다스칼로스’로서 상대를 매우 높이는 존칭어이다.
이 ‘디다스칼로스’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유대교 교사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율법사는 다른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지식과 가르침에 뛰어난 대상으로 추켜 세운 뒤에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될 경우 상대적으로 더 큰 박탈감을 안겨주기 위하여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질문한 것은 율법에 대하여 능통한 율법사 자신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차원에서 질문을 한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는 질문이다.
율법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수백 가지 계명 중에서 어느 계명이 중요하냐고 묻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율법사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그에 대한 대답을 서기관들이 분류해 놓은 계명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계명을 아우르는 최고의 계명인 사랑의 계명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을 하신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누구의 자손이냐?”
그 때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그들 나름대로 아주 훌륭하게 대답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그들의 입을 닫게 만드신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예수님이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고백은 그를 가리켜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크리스투스’이며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이다.
무엇보다 마태복음 1:1절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기록하였다.
특히 마 9:27절에서는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외치면서 말할 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이는 다른 이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선생으로 호칭했지만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아무런 보잘 것 없는 두 소경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이들의 고백과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의 대답이 같지만,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두 소경의 고백은 예수를 주와 메시야로 고백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그냥 혈통적 육신적으로만 예수를 보고 대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시를 통해서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편 110:1절의 말씀을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이용해서 말씀하셨다.
70인역에서는 ‘주께서 내 주께’로 번역을 하였다.
앞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 번째 나오는 ‘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육신적으로는 분명 다윗이 예수님보다 이 세상에 먼저 산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보다 나중에 온 예수님을 가리켜 ‘내 주’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이는 다윗이 오실 그리스도를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미리 보고 고백한 것이다.
(행 2:30-31) 그는(다윗)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대답을 들으시고 그들의 입이 열 개라도 말을 못하게 하신 것은 육신적이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대답하는 바리새인들을 바르게 깨치기 위함이셨다.
이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시편 110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45절)고 하실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구무언이었던 것이다(46절).
어제 묵상에서는 내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이었음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오늘 역시 내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육신적이고 지식적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며 또한 설교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믿음의 고백은 지식과 관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사건이 결코 지식적이고 관념으로 그치면 안 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나 또한 바리새인을 넘어서는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율법에 대한 박사들이다.
그래서 성경말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까지도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율법을 가지고 질문하지 않는가?
나는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한 채로 신앙생활을 하였고 게다가 목사라는 선생의 자리까지 앉아서 가르치는 자로 살아왔다.
하나님의 뜻은 영생이다(요 6:40).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오직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선포하셨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를 아는 것이다(요 17:3).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것이란 곧 교제와 사귐이다.
(요일 2:24-25)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여기서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요일 1:1절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이다.
이 생명의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면 곧 날마다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 안에 거하면 우리 또한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품어주시는 아들과 아버지의 약속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인 것이다.
이를 가리켜 창세전 언약이라고 한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요, 또한 이 뜻을 그대로 이루시고 사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는 죽기에만 합당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인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으며 3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 역시 날마다 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곧 주님의 구속사건에 연합하여 나도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면 날마다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다.
나는 오늘도 이 영생을 누리고자 일어나자마자 말씀 앞에 선다.
그 말씀이 나를 살렸으며 또한 내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누리게 한다.
오늘 하루도 이 말씀 안에 품 잠겨 살길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벌레와 같은 무가치한 자요, 땅의 흙(히, 아파르 : 먼지)으로 지음 받아 썩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안개와 같이 있다가 금세 없어질 자인 나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살리셨나이다.
그것은 바로 창세전 언약인 영생을 우리에게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실하심입니다.
영원한 불구덩이에서 나를 건지시기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이까?
내 안에 우리 주님의 생명이 있나이다.
그 생명은 바로 십자가의 가치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말의 화려함과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려는 이 종, 내 속에서 지식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구하려는 이 초라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직도 내 안에 바리새적 습관이 떠나질 않고 있사오니 이를 제하여 주옵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온전히 주님의 품안에 거하게 하소서.
나의 생명, 나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살리셨으니 이제 나도 주님 안에 거하여 아버지 품에 거하는 자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