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생은 대만 무협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김용의 친구이자 김용을 무협계로 끌어들인 사람이기도 하죠. 대만 무협은 양우생과 김용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했고 두 사람이 절필함으로써 망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출판된 김용과는 달리 양우생의 작품은 거의 번역된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있다하더라도 옛날,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무협이 꽤 인기가 좋던 70년대에나 번역이되었었겠지요.
임청하,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백발마녀전'은 양우생의 작품 중 그나마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제 경우는 예전에 동네 책방에 80년대 발행본이 있어서 책으로 읽었습니다만, 도중에 책방 주인이 바뀌면서 새 주인이 버리는 바람에 중간 이후는 읽지 못했었습니다. 최근에야 와레즈를 통해 이 작품을 구해서 뒷 부분을 보는 중이죠.
잡설이 길었군요. 이하로는 편의상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우선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감탄보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왜냐하면 번역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본의 글의 수준은 누구나 몇 번의 습작만 거치면 쓸 수 있는 정도였다. 특히 옛날에 번역된 대부분의 무협이 그렇듯이 지나치게 고어를 많이 사용하는 점이라든가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은 읽으면서 내내 거슬렸던 부분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해 '문학적인 감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백발마녀전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인상을 남긴다.
하나는 역사와의 접목이다. 역사와 무협의 접목은 김용의 장기로 유명하지만, '역사와의 접목'이라는 점만 놓고보면 양우생이 한 수 위다. 김용은 역사와 소설의 영역을 너무 무리해서 연결했다는 느낌을 준다. 역사적 인물을 너무 무리해서 등장시키는 느낌이랄까. 그로 인해 역사적인 맹장들이 무림 고수들에 비해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허다하다(주1). 반면에 양우생은 역사와 강호사를 접목시키되, 무리해서 두 영역을 이어놓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용의 경우 역사와 강호사를 양쪽에 두고 서로를 교차시키는 느낌이 들지만, 양우생의 백발마녀전의 경우는 역사라는 틀 속에서 강호사를 보여준다고 해야겠다. 어느쪽이 더 나은가는 딱 잘라서 말하기 힘들지만, 어느쪽이 더 자연스럽냐고 한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양우생 쪽이다(주2).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백발마녀전의 두 주인공, 탁일향과 연예상의 관계다. 특히 이 부분은 우리나라의 많은 무협작가들이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무협은 우리나라 무협들과는 달리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들보다 반드시 약하거나 뒤떨어지지는 않는다(주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종속적이다. 사조영웅전의 황용같은 여성은 남성들 이상의 지략을 갖고 있고 무예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인공으로써는 곽정에게 종속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후반으로 갈 수록 심해진다. 반면에 백발마녀전의 경우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도적인 인물은 연예상이다. 단순히 무공이 강하다거나 더 호방하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는 주체'라는 거다(주4). 그렇다고 해서 탁일향이 연예상의 행보에 종속되어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물론 탁일향이 연예상에 비해 소극적이긴 하나, 그건 그가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이라는 배경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탁일향과 연예상, 각각이 짊어지고 있는 배경으로 인해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인해 백발마녀전의 두 주인공은,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개성적인등장인물이 아님에도(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것이 분명한 야적 연예상도 지금이 관점에서는 그다지 파격적일 것은 없다고 본다) 굉장히 생생하고 뚜렷한 '사람'이 된다.
아직 소설을 끝까지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쪽지리 감상으로 끝내야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작품은 전형적이지만 흥미로운 스토리에 탄탄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사실적이기에 더 매력적인 등장인물 등으로 인해 상당히 재밌다. 그렇기에 구린 번역도 감수해가며 읽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주1. 대표적인 예로 사조영웅전의 수부타이라든가, 의천도룡기의 서달 등을 들 수 있겠다.
주2. 예를 들어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사실 완전히 강호의 인물이지만 주원장이나 서달, 한림아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과 만나며 그들에게 많은, 그것도 일방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런 영향은 대부분이 좀 부자연스러워보인다. 반면 백발마녀전의 탁일환은 마찬가지로 오삼계와 같은 역사전 인물들과 만나지만 그가 오삼계와 같은 인물에게 어떤 일방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주3. 오히려 고룡의 절대쌍교 처럼 무림의 1,2위를 다투는 고수가 여성인 작품도 간혹 보인다. 측천무후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주4.이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무협 소설은 진산의 사천당문, 결전전야 정도 뿐이다
덧... 역시 컴퓨터로 소설 읽는 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도무지 속도가 안 붙는 군요.
덧2... Eddie Guerrero (1967-2005)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