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밑에 때가 끼인 놈'이라고 하면 먹고 살기 위해 막노동을 하여 먼지를 둘러써도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노가다를 일컫는 말인데 비유적으로는 수중에 돈이 넉넉치 못하니까
돈을 쓰는데 아주 인색한 사람을 낮추어 지칭하는 말이다.
집사람이 퇴근하면서 재래시장인 서동시장에 들러 난장에서 파는 고구마잎 줄거리를 한 단 사왔다.
내가 고구마잎 줄거리 나물을 좋아한다고 사 온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시골에서 자랐으므로 요샛말로 비건이 됐던 것이다.
어머니가 손으로 무쳐 주시는 고구마잎 줄거리 나물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반찬이었다.
어머니는 솜씨가 좋아 터밭에서 나는 채소가 아닌 풀을 뜯어다 무쳐도 꿀맛이었다.
여름에 나는 비름은 살짝 데쳐서 조선장에 무쳐내면 향긋한 비름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서 입에 넣으면 덜지근하다.
뿐만 아니라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새미에서 갓 길러온 물로 물외 매국을 타면 밥 한그릇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거실 한켠에 던져진 고구마 줄거리 다듬는 일은 내몫이다.
집사람이 저녁 11시나 돼서 왔다가 아침 일찍 나가기 출근하기 때문이다. 메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날 이브닝 근무한 다음날 데이 근무시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 해 먹고 출근하기도 바쁘다. 그러니까 주부라고 해도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 와도 손 볼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집지끼미 백수인 내가 거들어 주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침밥을 먹은 후 거실에 있는 검은 비닐팩에 든 고구마 줄거리를 헌 신문지를 펴고 그 위에 펼쳤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공기가 통하지 않는 비닐봉지에 그대로 두면 잎이나 줄기가 물캐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도 어떤 것은 이파리가 누렇게 뜬 것도 눈에 띄었다. 일단 더 이상 상하지 말라고 공기가 잘 통하도록 풀어 헤쳐 놓았다. 그리고는 부엌에서 큰 그릇을 가져와 줄기 외피를 벗기기 시작하였다.
이파리가 반쯤 붙은 줄거리를 손에 들고 먼저 이파리를 뜯어냈다. 이파리가 반쯤 붙은 것은 시장에서 살 때 이파리를 잘 먹지 않으니까 칼로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시골에 있을 땐 이파리도 버리지 않고 삶아서 나물로 무쳐 먹든지 아니면 된장 끓일 때 함께 넣어 먹었다. 고구마는 여름철에는 잎을 따서 반찬을 하고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뿌리를 캐어 가마니에 넣어 야익으로 보관을 했다. 잎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따서 삶아서 말려서 보관하기도 하고 덩굴은 걷어서 그냥 소에게 먹이거나 여물을 쳐서 쇠죽을 끓여 먹이기도 하였다. 알고보면 고구마는 어느것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완전식품이요 보릿고개때는 구황식품이었다.
줄거리를 들고 끝에 붙어 있는 반쯤 잘려나간 이파리를 떼어내니 뽀오얀 눈물 같은 방울이 솟아났다. 식물도 고통을 느끼는 걸까? 신라에 불교를 퍼지개 한 이차돈의 순교의 피가 연상되었다. 하지만 줄거리 하나를 들고 이것 저것 생각에 생각을 물고 시간을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바닥에 놓인 보라빛 줄거리가 내 손질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구마 줄거리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냥 삶아서는 질겨서 먹지 못한다. 아니 먹을 수는 있어도 질겨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고구마 줄거리는 보통 옅은 연두색과 보라색 두 종류가 있다. 연두색은 보라색보다 약간 싱겁다. 집사람이 사온 것은 보라색이었다. 줄거리 끝을 잡고 손톱으로 반으로 쪼개어 90도로 꺾은 다음 아래쪽으로 살짝 잡아당기면 껍질이 벗겨잔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완전히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도중에 떨어지기도 한다. 양쪽으로 벗긴 다음에는 중간쯤에서 부려뜨려서 떨어진 껍질을 마저 벗기면 된다. 몇번 시도하다 보니 차츰 요령이 생겼다. 30분 정도 작업을 했는데도 1/3도 채 벗기지 못했다.
두어시간 걸려서 껍질 벗기는 일을 마쳤다. 뒷마무리를 해야 하므로 껍질을 벗긴 줄거리는 부엌으로 옮겨다 놓고 모아둔 껍질과 이파리는 쓸어서 음식쓰레기통 속에다 갖다 버렸다 그리고는 세면대로 가서 비누로 손을 씻었다. 비누칠을 몇번이나 해도 손톱밑에 묻은 검정색 때는 지워지지가 않았다. 때라기보다는 아마도 고구마줄거리의 보라빛 색깔로 손톱에 물이 든 것이다. 옛날 시골 처녀들이 봉숭화꽃으로 손톱에 붉으스레 물을 들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누가 나더러 손톱에 고구마 물들였다고 하겠는가? 새카만 손톱을 보고서는 당장 '손톱 밑에 때 끼인 놈'이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