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15일,
북한 귀순자 이한영 피살
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1997년 2월15일 자신의 집 앞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고 열흘 뒤 숨졌다. 그의 본명은 리일남이었다.
1960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한영은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의 아들이다. 이한영은 1978년
모스크바 외국어대 어문학부를 전공한 엘리트 출신으로 프랑스어 연수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들어간 뒤 1982년 9월 서방으로 탈출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 한국에 망명했다.
남한에서의 이한영(좌)과 1981년 평양에서 촬영된 김정일의 가족사진. 김정일이 장남인 정남과
의자에 앉아 있다. 뒷줄 왼쪽부터 성혜랑(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언니), 성 씨의 자녀 이남옥, 이한영 (우)
정부가 2013년 초 공개한 이한영 망명 외교문서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씨의 망명은
1982년 9월 28일 오전 9시 50분 스위스 제네바 대표부에 그가 전화로 망명 의사를 밝히면서 시작된다.
제네바 대표부는 즉각 이 씨의 신병을 확보했고 긴급 전문을 통해 서울 외무부 본부에 알렸다.
대표부는 전문에서 “스웨터에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서류는 숙소에 두고 왔다”고 보고했다.
이 씨는 스위스에서 프랑스, 벨기에, 독일, 필리핀, 대만을 경유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나흘 만인
10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정부는 북한의 방해공작에 대비해 해당 공관에 철저한 기밀 유지를
요구하고, 관련 문서를 파기할 것을 지시하는 등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귀순 후 이듬해까지 안기부의 조사를 받은 이한영은 본명을 버리고 '한국과 더불어 영원히 산다'는
뜻의 이름 '이한영'으로 개명하고 생일(4월2일)도 귀순한 9월28일로 호적을 바꿨다.
안기부는 이한영에게 아파트와 당시로는 거금인 1억원의 정착금을 지원했다.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북한 최상류층의 생활에 젖어 방탕한 생활로 돈을 탕진했다.
급기야 그해 가을 '내가 그리던 자유는 이런 게 아니었다'는 유서를 써놓은 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한영은 1985년 안기부의 권유로 성형수술을 받았다. 얼굴까지 바꾼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인정받아 1987년 12월 KBS 사회교육방송 러시아어 담당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
후배의 소개로 만난 CF모델 출신 김모씨를 만나 1988년 12월 결혼했고 1990년 1월 딸을 낳았다.
사업에 뜻이 많았던 이한영은 KBS를 나와 주택조합 건축에 손을 대 한때 24억원의 거금을
만지기도 했지만, 1993년 3월 10억원대 횡령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94년 2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그는 민사소송에서 패소, 방배동 집 등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94년 5월
분당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이후 약 1년간 부산에 내려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안기부마저 1995년 10월 이한영에게 "우리는 할 일을 다했으니 더 이상 당신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 이때부터 이한영은 각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증언 및 원고를 게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1996년에는 북한 최고 권력층의 실상을 속속들이 밝힌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자서전격 책을 발간했다. 1996년 2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성혜림
망명설’도 그가 언론에 흘려준 정보였다. 그러나 ‘성혜림 망명설’은 결국 오보로 판명 났다.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만 3국으로 망명하고 성혜림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북한 측 보호를
받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언론에 노출이 빈번해지면서 이한영은 불안한 생활을 이어갔다. 얼굴이 알려지면서 북한의 보복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한영은 부인과 딸을 처가에 맡기고 친구 집과 호텔 등을
전전하며 오퍼상을 시작, 새로운 출발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신문,
잡지와의 인터뷰는 물론 TV 출연도 마다하지 않고 했으며, 1996년 6월 초 MBC TV에 출연한 데
이어 SBS TV의 ‘이주일 쇼’에도 출연했다. ‘이주일 쇼’에서는 자신이 북한에서 겪었던 일과
이모부인 김정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얼굴을 성형수술해 잠적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결국 이한영은 1997년 2월15일 대학시절 지인 김모씨의 성남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괴한 2명의
총격을 받고 열흘만에 사망했다. 이한영 피살 사건은 황장엽 당시 북한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태
직후 일어나 '북한의 보복 테러'라는 설이 제기됐으나 진범이 붙잡히지 않아 사건 진상이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
안기부는 1997년 11월 20일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사건을 발표하면서 “남파간첩 최정남을
조사한 결과, 이한영씨 피격 사망사건은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인 최순호 등 2명의
특수공작조가 사건발생 한달 전에 남파돼 일으킨 사건으로 나타났다” 고 밝혀 충격을 던져주었다.
부부간첩단은 이어 이 씨를 살해하고 돌아온 암살범들이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고
재(再)남파를 위해 성형수술까지 받았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안기부는 1997년 11월 19일
이 씨가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테러 전문요원에 의해 사살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사건은 발생 11년 만인 2008년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2008년 8월 대법원은 이씨가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씨의 아내 김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9699만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씨도 국가안전기획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인터뷰와 TV
출연 등을 통해 노출한 책임이 있다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