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던 놀이로서 당대(唐代)부터 의식적(儀式的)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재예(才藝)로서 행하였으며, 한국에서는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행하였다.
잔디밭·대청 등에 귀가 달린 청동 항아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동·서로 편을 갈라 10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던져 항아리 속에 넣는다. 화살을 많이 넣은 편이 이기고, 무희들이 춤을 추어 흥을 돋우었다. 궁중에서 왕족들이 투호를 할 때는 임금이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 놀이 안내
① 항아리나 쓰레기통 등의 통과 화살을 준비한다. ② 통과 던지는 자리는 보통 1.5∼3m 정도 거리를 둔다 ③ 한 사람씩 10개의 살을 던지는데 한 개가 들어 가면 10점씩 계산하여 100점 만점으로 한다. ④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이긴다.
팽이를 치며 노는 놀이. 도토리 따위를 돌리며 장난하던 놀이가 발전된 것으로 짐작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으며 중국은 당(唐)나라 때 성행하였고, 한국은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팽이란 축(軸)을 중심으로 둥근 동체가 회전운동하는 장난감으로서 박달나무·대나무처럼 무겁고 단단한 나무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아 만든다.
▣ 놀이 안내
① 팽이싸움: 서로 자기의 팽이를 돌리다가 신호에 맞추어 동시에 상대방 팽이와 힘껏 부딪치게 조작하여 넘어지게 한다. ② 멀리치기: 미리 정한 일정한 선 위에서 신호에 따라 동시에 자기 팽이를 채로 때려 누구의 팽이가 멀리 가서 오래 도는가를 겨룬다. ③ 오래돌리기: 일정시간 동안 팽이를 힘껏 쳐 돌린 뒤 상대방 팽이와 한번 부딪치고 나서 누구의 팽이가 더 오래 도는가를 따진다. ④ 빨리돌아오기: 출발점에서 일정지점까지 누가 팽이를 빨리 몰고 돌아오느냐를 경쟁한다. ⑤ 부딪쳐돌아오기: 팽이를 몰고 가서 장애물에 힘껏 부딪치고 되돌아 멀리 와서 오래 도는 팽이가 이긴다.
널기는 부녀자, 특히 처녀들이 가장 즐겨 행해온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 력 정초에서 보름까지를 비롯해 단오, 한가위 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
뜰안 담장 곁이나 마당 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은 다음 두 사람이 널 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이다.
녹의홍상(綠衣紅裳)의 어여쁜 처녀들이 모여 널 을 뛰는 모습은 젊음의 약동 그 자체였다. 널뛰기는 역동적인 신체 단련의 기회가 적었던 전통 사회의 여성, 특히 처녀들에게 더 없이 유익한 놀이였다고 할 수 있다.
속설에 널뛰기의 기록 은 높은 담장 저 편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도 하고, 바깥출입이 제한된 폐쇄사회에서 여인들이 울 밖의 외간 남자와 바깥 세상을 엿보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 당치 않은 호사가의 말일뿐이다.
다만, 평소 외출할 기회가 없었던 규수들이 이때 높이 뛰어올라 바 깥 세계를 구경하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역사
널뛰기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폐쇄적인 여성관이 자리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여성 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을 것이다.유득공이 쓴《경도잡기(京都雜記)》 에는 널뛰기가 초판희(超板戱)로 표현되어 있다. "정월 초하루 마을 부녀자들이 흰 널판을 짚단 위에 걸쳐놓고, 양쪽 끝에 나눠서서, 세게 굴러 뛰면 대여섯 자까지 올라간다.
그때 패물이 쟁쟁 울리거나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을 즐기니 이것을 널뛰기라고 한다."라는 내용을 통해 보면 지금의 놀이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놀이 방법
보통 집 마당에서 놀기도 하지만, 정초나 정월 대보름 등 온 동네 부녀자들이 모여 놀기 위해서는 수확이 끝난 논이나 밭에 널을 여러 개 설치하고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면서 논다. 널뛰기는 아이들에서부터 중년까지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이 서로 어울려가며 할 수 있는 놀이이지만, 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몸집이 비슷한 사람들이 마주 뛰는 것이 좋다.
놀이감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가마니나 짚단을 뭉쳐서 널밥을 만들고 그 위에 널판을 얹는다. 널판의 넓이와 길이는 다양하지만 널밥의 두께와 비례가 맞아야 한다. 널밥의 부피가 크면 널판도 넓고 길어야 한다.
그때에는 널판의 두께도 어느 정도 두꺼워야 판이 깨지지 않는다. 5,6척 정도 되는 길이의 널판 양끝에 한 사람씩 서서 균형을 맞추어 번갈아 뛰어오른다.
널뛰기는 보통 겨루기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널판 위에서 뛰어 올랐다가 발을 세게 구르면 상대방도 역시 충격을 감소시키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가 높이 뛰어오르게 되고, 만약 균형을 잃어 널판 위에 내려서지 못하면 지게 된다. 널뛰기의 풍경과 놀이적 성격을 보여주는 민요가 있다.
발이 얼얼해질 정도로 널판을 세게 굴러 뛰어오르면 머리가 흔들거리고 댕기는 팔랑거리며 치마 자락도 바람에 날리게 되는 것이다. 또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면 눈이 휘둥그래지고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널판을 구르고 솟구치며 균형을 잡노라면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우리 몸이 활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널뛰기 놀이의 세시 풍속적 의미는 새해에 복을 빌고 건강할 것을 기원하는 축원적 내용을 담고 있다.
널기는 부녀자, 특히 처녀들이 가장 즐겨 행해온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 력 정초에서 보름까지를 비롯해 단오, 한가위 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
뜰안 담장 곁이나 마당 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은 다음 두 사람이 널 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이다.
녹의홍상(綠衣紅裳)의 어여쁜 처녀들이 모여 널 을 뛰는 모습은 젊음의 약동 그 자체였다. 널뛰기는 역동적인 신체 단련의 기회가 적었던 전통 사회의 여성, 특히 처녀들에게 더 없이 유익한 놀이였다고 할 수 있다.
속설에 널뛰기의 기록 은 높은 담장 저 편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도 하고, 바깥출입이 제한된 폐쇄사회에서 여인들이 울 밖의 외간 남자와 바깥 세상을 엿보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 당치 않은 호사가의 말일뿐이다.
다만, 평소 외출할 기회가 없었던 규수들이 이때 높이 뛰어올라 바 깥 세계를 구경하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역사
널뛰기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폐쇄적인 여성관이 자리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여성 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을 것이다.유득공이 쓴《경도잡기(京都雜記)》 에는 널뛰기가 초판희(超板戱)로 표현되어 있다. "정월 초하루 마을 부녀자들이 흰 널판을 짚단 위에 걸쳐놓고, 양쪽 끝에 나눠서서, 세게 굴러 뛰면 대여섯 자까지 올라간다.
그때 패물이 쟁쟁 울리거나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을 즐기니 이것을 널뛰기라고 한다."라는 내용을 통해 보면 지금의 놀이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놀이 방법
보통 집 마당에서 놀기도 하지만, 정초나 정월 대보름 등 온 동네 부녀자들이 모여 놀기 위해서는 수확이 끝난 논이나 밭에 널을 여러 개 설치하고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면서 논다. 널뛰기는 아이들에서부터 중년까지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이 서로 어울려가며 할 수 있는 놀이이지만, 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몸집이 비슷한 사람들이 마주 뛰는 것이 좋다.
놀이감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가마니나 짚단을 뭉쳐서 널밥을 만들고 그 위에 널판을 얹는다. 널판의 넓이와 길이는 다양하지만 널밥의 두께와 비례가 맞아야 한다. 널밥의 부피가 크면 널판도 넓고 길어야 한다.
그때에는 널판의 두께도 어느 정도 두꺼워야 판이 깨지지 않는다. 5,6척 정도 되는 길이의 널판 양끝에 한 사람씩 서서 균형을 맞추어 번갈아 뛰어오른다.
널뛰기는 보통 겨루기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널판 위에서 뛰어 올랐다가 발을 세게 구르면 상대방도 역시 충격을 감소시키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가 높이 뛰어오르게 되고, 만약 균형을 잃어 널판 위에 내려서지 못하면 지게 된다. 널뛰기의 풍경과 놀이적 성격을 보여주는 민요가 있다.
발이 얼얼해질 정도로 널판을 세게 굴러 뛰어오르면 머리가 흔들거리고 댕기는 팔랑거리며 치마 자락도 바람에 날리게 되는 것이다. 또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면 눈이 휘둥그래지고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널판을 구르고 솟구치며 균형을 잡노라면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우리 몸이 활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널뛰기 놀이의 세시 풍속적 의미는 새해에 복을 빌고 건강할 것을 기원하는 축원적 내용을 담고 있다.
널기는 부녀자, 특히 처녀들이 가장 즐겨 행해온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 력 정초에서 보름까지를 비롯해 단오, 한가위 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
뜰안 담장 곁이나 마당 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은 다음 두 사람이 널 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이다.
녹의홍상(綠衣紅裳)의 어여쁜 처녀들이 모여 널 을 뛰는 모습은 젊음의 약동 그 자체였다. 널뛰기는 역동적인 신체 단련의 기회가 적었던 전통 사회의 여성, 특히 처녀들에게 더 없이 유익한 놀이였다고 할 수 있다.
속설에 널뛰기의 기록 은 높은 담장 저 편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도 하고, 바깥출입이 제한된 폐쇄사회에서 여인들이 울 밖의 외간 남자와 바깥 세상을 엿보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 당치 않은 호사가의 말일뿐이다.
다만, 평소 외출할 기회가 없었던 규수들이 이때 높이 뛰어올라 바 깥 세계를 구경하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역사
널뛰기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폐쇄적인 여성관이 자리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의 여성 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을 것이다.유득공이 쓴《경도잡기(京都雜記)》 에는 널뛰기가 초판희(超板戱)로 표현되어 있다. "정월 초하루 마을 부녀자들이 흰 널판을 짚단 위에 걸쳐놓고, 양쪽 끝에 나눠서서, 세게 굴러 뛰면 대여섯 자까지 올라간다.
그때 패물이 쟁쟁 울리거나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을 즐기니 이것을 널뛰기라고 한다."라는 내용을 통해 보면 지금의 놀이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놀이 방법
보통 집 마당에서 놀기도 하지만, 정초나 정월 대보름 등 온 동네 부녀자들이 모여 놀기 위해서는 수확이 끝난 논이나 밭에 널을 여러 개 설치하고 왁자지껄 떠들고 웃으면서 논다. 널뛰기는 아이들에서부터 중년까지 모든 연령층의 여성들이 서로 어울려가며 할 수 있는 놀이이지만, 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몸집이 비슷한 사람들이 마주 뛰는 것이 좋다.
놀이감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가마니나 짚단을 뭉쳐서 널밥을 만들고 그 위에 널판을 얹는다. 널판의 넓이와 길이는 다양하지만 널밥의 두께와 비례가 맞아야 한다. 널밥의 부피가 크면 널판도 넓고 길어야 한다.
그때에는 널판의 두께도 어느 정도 두꺼워야 판이 깨지지 않는다. 5,6척 정도 되는 길이의 널판 양끝에 한 사람씩 서서 균형을 맞추어 번갈아 뛰어오른다.
널뛰기는 보통 겨루기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널판 위에서 뛰어 올랐다가 발을 세게 구르면 상대방도 역시 충격을 감소시키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가 높이 뛰어오르게 되고, 만약 균형을 잃어 널판 위에 내려서지 못하면 지게 된다. 널뛰기의 풍경과 놀이적 성격을 보여주는 민요가 있다.
발이 얼얼해질 정도로 널판을 세게 굴러 뛰어오르면 머리가 흔들거리고 댕기는 팔랑거리며 치마 자락도 바람에 날리게 되는 것이다. 또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면 눈이 휘둥그래지고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널판을 구르고 솟구치며 균형을 잡노라면 그 동안 억눌려 있던 우리 몸이 활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널뛰기 놀이의 세시 풍속적 의미는 새해에 복을 빌고 건강할 것을 기원하는 축원적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전통놀이가 세시명절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화전놀이 역시 삼월 삼짇날과 관련이 된다. 이 날은 중구(重九, 음력9월 9일)에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옛집으로 찾아온다는 호시절인 춘삼월에 드는 명절이다.
산에는 봄을 알리는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나비들과 벌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집안 식구끼리 혹은 가까운 사람끼리 모여 하루를 즐겼다. 이날 남자들은 자연 풍경을 주제로 하여 시를 짓거나 노래를 읊기도 하였으며, 여자들은 들에 나가 음식준비를 하면서 머리를 감기도 하였다.
이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소담해지고 기름기가 돈다고 하였다. 이 때 음식은 진달래꽃을 뜯어다 쌀가루에 반죽하고 참기름을 발라 지져먹는 것인데, 이를 화전(花煎)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화전놀이란 꽃 지짐을 지져먹는 들놀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 화전놀이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놀이지만, 주로 한강 이남에서 성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남북이 긴 우리 나라의 지형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음력 3월이면 중·남부지방에 봄이 훨씬 더 완연하기 때문이다.
(2) 내용
화전놀이는 보통 꽃놀이로 불리기도 하는데, 봄철에 친지들 혹은 친구들끼리 경치 좋은 산이나 물가에 가서 봄의 흥취를 즐기며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기는 놀이를 가리키는 까닭이다.
오늘날로 보자면 야유회에 가까운 성격의 놀이이다. 특히 여성들은 그 동안 규중(閨中)에 갇혀 집안 일에 골몰하던 것에서 잠시 벗어나 인근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 풍물을 감상하며 쌓인 회포를 풀었다.
특히 양반 가의 여성들은 남자들의 시회(詩會) 놀이를 본떠 서로 학식이나 필재(筆才), 시재(詩才)를 자랑하며 풍류를 즐겼다.
즉, 한 사람이 먼저 가사를 짓고 다음 사람을 지정하여 주면 화답하는 형식으로 화전답가(花煎答歌)를 짓는다.
화전놀이의 주체를 보면 처음에는 가족이나 친척 집단들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나들이에서 점 차 친구들이나 뜻이 맞는 사람들간의 놀이로 확대되었다.
특히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부녀자 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유교적 금제(禁制)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화전놀이는 여성들 에게 일 년 중 몇 번 되지 않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나들이로 인정받으면서 여성들의 놀이로서 크게 부각되었다.
(3) 역사
화전놀이의 유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옛 기록에는 화전놀이로 볼 수 있는 내용이 제법 많이 나온다.《 삼국유사 》 김유신조에도 보면, '매년 봄에 온 집안 남녀들이 청연(靑淵)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 때에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고 소나무 꽃(松花)이 골짜기 안 숲 속에 가득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송화가 피는 계절 즉, 음력으로 3-4월에 일가친척이나 친한 사람들끼리 들로 나가 하루를 즐기는 꽃놀이 전통이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사 》 「악지(樂志)」속악(俗樂)편의 양주(楊洲)조에 보면, "고려 한양부는 북쪽으로 화산(華山)과 남쪽으로는 한강에 입하였다. 이 고을 사람들은 남녀가 봄을 만나 놀기 좋은 시 절을 서로 즐기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양주라는 노래의 가사가 나 오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서울지방은 고려시대에 이미 꽃놀이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조사·보고된 서울지방의 세시풍속에도 3월에 화전놀이를 한다 는 내용이 있다. 서울지방에서 3월이면 버드나무와 꽃들이 만개하여, 화창한 날을 택해 친척이 나 친구들끼리 모여 들로 나가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겼다. 《열양세시기 》에는 남산의 잠두 (蠶頭)와 북한산의 필운대, 그리고 세심대가 놀이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되어 있다.
(4) 화전놀이의 과정
조선시대 양반 부녀자들에게 가장 기품있고 풍류적인 놀이는 역시 화전놀이였다. 양가 댁 규중 부녀자들이 청명절을 전후하여 들놀이를 하면서 노래한 것으로 조선 여인의 풍류노래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화전가(花煎歌)이다.
대개는 화전놀이에서 돌아 와 그 날의 흥취와 감회를 오래도록 남겨두기 위해서 짓는 것이 보통이다. 이 화전가에 읊어지는 내용으로는 경승지의 풍물과 가문법도, 여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탄식 등이 주를 차지한다.
때로는 화전놀이의 전체 과정이 나타나 있기도 한데, 화전가에 나타난 놀이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택일을 하면 화전통문을 지어서 온 동네 혹은 인근 동네 가가호호에 화전놀이를 가자고 통기 하게 된다. 이러한 통기를 받은 규중 부녀자들의 설렘과 흥분은 대단하다.
4) 시부모님(舅姑) 승낙
통기를 받은 다음에는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고 시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관문이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층층시하 몸이되어 부모허락 받으려고 / 부모침실 들어가서 두무릎을 꿇고앉아 백배사례 비는말이 모월모일 아무날에 / 화전 가자 통문 오니 명령을 나리시와 부디허락 하옵소서 부모님 하는 말씀 / 효녀로다 너의 말이 백사순종 모든 행실 허락 않고 어찌하리
5) 음식 준비
허락이 떨어진 후 화전놀이 날이 올 때까지 설렘과 기다림 속에서 여러 가지 놀이 준비를 하 게 된다. 집집마다 쌀을 거둬 떡을 하고 묵고 쑤고, 화전을 부칠 때 쓸 밀가루나 파, 기름 등을 준비해 둔다.
6) 몸치장
마침내 화전놀이 날이 왔다. 일년에 한 번 주어지는 나들이 길에 단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굴을 다듬고 화장을 하며 입고 갈 옷과 장식을 고르는 모습이 화전가 속에 잘 나타나 있어 여성들의 들뜬 심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봄나들이 때 보여지는 여성들의 모 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7) 나들이
막상 들로 나가 친구들과 이웃을 만나게 되어 들뜬 마음으로 놀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가까 운 곳의 푸른 산아래 시냇가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 때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북과 같은 악기 도 가져가서 풍물을 치면서 흥겨움 속에서 걸어간다.
8) 화전 굽기
광주리를 가지고 편을 갈라 꽃잎을 따오면 둥글거나 네모진 모양으로 밀가루에 파를 섞어 굽 다가 그 위에 진달래(두견화)를 보기 좋게 무늬처럼 새겨 넣는다. 먹다가 남은 떡과 전은 집에 있는 부모와 어린 동생들, 혹은 남몰래 남편을 위해서 싸가기도 한다.
9) 유흥
먹는 일이 끝이 나면 꽃구경을 하기도 하고 꽃을 따 머리에 꽂거나 입에 물어보기도 한다. 그 리고 산유화, 화초가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글을 하는 사람 들은 지필묵을 가져가서 가사를 짓고 서로 평을 하며 시회(詩會)를 열기도 한다.
10) 귀가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달이 솟을 무렵까지 하루종일 놀다가 드디어 산천과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음 해를 다시 기약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며 귀가하게 된다.
주로 남해안 일대에 전승되어 오는 민속놀이로, 전라도의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도의 영일, 의성, 북쪽으로는 황해도 연백까지 분포되어 있었다. 현재는 전라남도의 해남, 완도, 무안, 진도 등지에서 놀아지고 있다. 강강술래는 우리 나라 여성놀이 중 가장 정서적이며 율동적인 놀이이다. 대개 팔월 한가위 달 밝은 밤에 젊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손에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뛰어 논다.
(2) 역사
강강술래가 언제 어떻게 하여 시작되었는지 유래를 알기는 어려우나 고대 부족사회의 공동축제 등과 같은 모임 때 참가자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뛰어 놀던 단순한 형태의 춤이 그 기원이 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삼국지》[동이전(東夷傳)]에는 마한(馬韓) 풍속에 5월과 10월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들이 모여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셨다고 되어 있다. 이 때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어 손발을 맞추며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고 하여 원무(圓舞) 자체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훨씬 뒤 조선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의 전술과 결부되어 강강술래 놀이의 뜻이나 내용에 대한 폭이 넓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충무공과 강강술래에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명량해전에서 왜적을 무찌를 때 충무공이 거느린 전선(戰船)은 불과 12척이었고, 반면 왜선(倭船)은 350여 척이나 되었다. 중과부적으로 왜적과 맞서기 어렵게 되자 충무공은 아낙네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 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왜적에게 마치 수만의 대군이 산봉우리를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술(擬兵術)을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이 때 아낙네들이 산봉우리를 돌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노래부르며 춤을 춘 것에서 바로 강강술래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설에 따른다면 강강술래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의병술에서 연유되었고, 그 후 충무공의 전승을 기리기 위하여 연중행사로 놀아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강강술래가 놀아지는 지방이 주로 충무공이 왜적과 싸웠던 남해안 일대라는 데서 자연히 충무공의 전술에 유추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강강술래'의 어원에 대해서도 한문에 익숙한 층에서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의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로 풀이하거나 혹은 왜적이 '물을 건너온다('江江水越來)'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순 우리말로 보고 '강강'은 방언으로 원과 관계되며, '술래'는 돈다는 뜻을 갖는 수래, 순유, 순라에서 나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고증된 것은 아니다.
(3) 놀이 성격
강강술래의 놀이적 성격은 가무놀이로 볼 수 있다. 노래에 맞추어 놀이집단이 원무(圓舞)를 추면서 노는 놀이로, 그 연행의 예술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류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집단 원무의 성격은 우선 놀이 주체가 성인여자들이며, 연행 시기가 8월 한가위에 중점적으로 행해졌음을 볼 때 그 제의성(祭儀性)에 주목하게 된다. 원무는 놋다리밟기, 농악처럼 전통적 축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춤 형식이며, 더구나 세계 공통의 형식이다. 이는 보름달(滿月)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달은 여성의 상징으로, 특히 만월은 여성의 생생력(生生力)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4) 놀이 방법
강강술래의 놀이 방법을 보면 바닷가 모래밭이나 마을의 넓은 공터 혹은 추수가 끝난 빈 들에서 수십명의 부녀자들이 손을 맞잡고 둥그런 원을 지어 무리를 이룬다. 이들 중 목청이 빼어난 사람이 앞소리를 매기면 나머지 사람들은 뒷소리를 받으면서 춤을 춘다.
노래는 처음에 느린 가락의 진양조로 시작하다가 점점 빨라져 춤 동작도 여기에 따라 변화한다. 원을 돌 때는 대개 오른쪽으로 돌며, 따라서 발도 오른쪽 발부터 먼저 앞으로 디디고 뛰게 될 때에는 아무 제한없이 마구 뛴다. 발을 디딜 때는 보통 걷는 동작으로 한다.
(5) 강강술래 노래
강강술래의 노래 가사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없고 아무 민요나 4·4조에 맞으면 부른다. 앞소리꾼이 아무 민요나 즉흥적으로 지어서 부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받는 소리인 '강강술래'만 부른다. 노래 가사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들도 있고 그때그때 지어서 부르기도 하여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같은 지방의 노래 가사라 하더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또 부를 때마다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한 번의 놀이가 끝날 때까지 내용상 특별한 관련을 갖지 않는 여러 개의 민요들이 잇달아 불리어진다. 대체로 동일지역의 노래 가사들은 비록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민요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연결 순서나 내용에 있어서만 사소한 차이가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노래가 앞소리꾼의 즉흥적 창작력에 의존하는 한편, 전통적으로 계승되는 큰 틀 안에서 전승됨으로써 지역적 유사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음력 정월 대보름 밤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개천 또는 강에 놓인 다리 위를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노는 놀이를 '다리밟기' 또는 '답교(踏橋)놀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고루 나타나는 놀이이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북을 치거나 장고를 두드리고, 피리, 호적 등을 불며 건너다니는 등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다리밟기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 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왕조 태종 이후에 크게 성행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새해를 맞아 모든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데 그 뜻이 있다.
즉, 사람의 다리(脚)와 발음이 같은 다리(橋)를 밟음으로써 다리 병을 예방하고 그 밖의 여러 질병이나 재난 등을 일소하여 탈없이 한 해를 보내고자 하는 것이 이 놀이의 의미라고 한다.
(2) 역사
17세기 초 이수광의《지봉유설》 에 보면 고려조부터 시작된 보름날 밤의 답교놀이가 태평스러운 시대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가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에법관들이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됐다고 하며, 따라서 당시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 다리를 밟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김매순의 《열양세시기》는서울에서 정월 보름날 저녁에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 동안 액을 막는 것이라 하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촌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늙고 병든 사람 외에는 나오지 않는 이가 없을 만큼 다시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옛 한양에서는 수표교와 광교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장안의 다리는 주로 청계천에 있었고 그 수가 몇 개 되지 않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때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여성들의 답교 풍경을 그린 것이 있으며, 민화에도 부녀자들이 다리밟기를 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타난다.
특히 상류층은 사람들로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날인 14일 밤에 다리밟기를 행했는데,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 하였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이 두 날을 피하여 16일 밤에 답교하였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답교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고 있다.
그 근거가 되고 있는《사원(辭源)》답 가(踏歌)조에는 '오랑캐 풍속(夷俗)에 남녀가 서로 모여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한 사람은 젓대 를 불어서 수십 인이 둘러서서 땅을 밟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것을 답가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이속을 동이(東夷)의 풍속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우리의 답교놀이의 시원에 대한 기 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놀이 성격
다리밟기는 개인의 복락(福樂)이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집단놀이의 하나이다. 사람의 다리(脚)와 건축물로서의 다리(橋)가 음이 같기 때문에 이 다리를 밟고 건너다님으로써 신체의 다리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질병적 사고에 갖다붙인 속신에 불과하다.
남녀유별의 규범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중·후기에 다리밟기를 엄격히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지봉유설》에 보이는 바와 같이, '남녀가 뒤섞여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교의 상황은 유교적 안목에서 보았을 때 매우 난잡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답교놀이는 여성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서조차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참여하는 대단히 강하게 전승되어 온 오랜 관습을 가진 놀이였다.
그러나 남녀상취(男女相聚)의 장소가 왜 하필 다리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이루어 져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풍요를 기원하는 '달-하천(냇가)-여성'의 상징적 공통성에서 근 원을 찾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다리(橋)는 물로 경계를 이루고 분리되어 있는 두 지역 혹은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이다.
우리의 무속(巫俗)에는 "다리굿"이라는 것이 있는데,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제의이다. 이 굿 과정 중에 허공 중에 무명 필을 매어 이것을 망자의 넋을 극락으로 건네주는 다리로 인식하고 있다.
다리밟기의 목적이 사람들이 표면적으 로 인식하는 것과 같이 답교하는 개인의 복락을 구하고 재액과 질병을 막는 것에 있다고 하면, 이는 바로 새로운 시·공간을 맞이하는 정월의 첫 보름에 신의 세계와 현실을 연결시키는 다 리를 통해 신과 교류하고 가호를 기원하는 주술적 제축(祭祝)의 하나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 놀이 방법
다리 병을 피하거나 일년의 액(厄)을 막기 위해 그저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는 것만이 아니라 농악을 앞세우고 무동(舞童)을 서기도 하고, 다리 위나 근처에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함경도 회령에서는 대보름 밤 자기의 나이 수만큼 다리를 밟고 나서 입고 있던 저고리의 동정(襟)을 뜯어 그 끝에 엽전을 맨 다음 다리 밑 구석에 놓아두었으며, 전북 부안에서는 아이들이 답교한 후 짚으로 만든 자루 속에 명태나 돈을 넣어서 다리 끝 아래로 던져버리는 신앙적 행위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서울지방은 있는 다리를 모두 건너거나 12다리를 건너지만, 다리 셋을 건너면 되는 곳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제일 큰 다리나 가장 오래된 다리를 자기 나이 수대로 왕복하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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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 밤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개천 또는 강에 놓인 다리 위를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노는 놀이를 '다리밟기' 또는 '답교(踏橋)놀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고루 나타나는 놀이이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북을 치거나 장고를 두드리고, 피리, 호적 등을 불며 건너다니는 등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다리밟기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 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왕조 태종 이후에 크게 성행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새해를 맞아 모든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데 그 뜻이 있다.
즉, 사람의 다리(脚)와 발음이 같은 다리(橋)를 밟음으로써 다리 병을 예방하고 그 밖의 여러 질병이나 재난 등을 일소하여 탈없이 한 해를 보내고자 하는 것이 이 놀이의 의미라고 한다.
(2) 역사
17세기 초 이수광의《지봉유설》 에 보면 고려조부터 시작된 보름날 밤의 답교놀이가 태평스러운 시대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가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에법관들이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됐다고 하며, 따라서 당시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 다리를 밟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김매순의 《열양세시기》는서울에서 정월 보름날 저녁에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 동안 액을 막는 것이라 하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촌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늙고 병든 사람 외에는 나오지 않는 이가 없을 만큼 다시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옛 한양에서는 수표교와 광교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장안의 다리는 주로 청계천에 있었고 그 수가 몇 개 되지 않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때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여성들의 답교 풍경을 그린 것이 있으며, 민화에도 부녀자들이 다리밟기를 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타난다.
특히 상류층은 사람들로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날인 14일 밤에 다리밟기를 행했는데,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 하였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이 두 날을 피하여 16일 밤에 답교하였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답교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고 있다.
그 근거가 되고 있는《사원(辭源)》답 가(踏歌)조에는 '오랑캐 풍속(夷俗)에 남녀가 서로 모여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한 사람은 젓대 를 불어서 수십 인이 둘러서서 땅을 밟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것을 답가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이속을 동이(東夷)의 풍속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우리의 답교놀이의 시원에 대한 기 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놀이 성격
다리밟기는 개인의 복락(福樂)이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집단놀이의 하나이다. 사람의 다리(脚)와 건축물로서의 다리(橋)가 음이 같기 때문에 이 다리를 밟고 건너다님으로써 신체의 다리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질병적 사고에 갖다붙인 속신에 불과하다.
남녀유별의 규범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중·후기에 다리밟기를 엄격히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지봉유설》에 보이는 바와 같이, '남녀가 뒤섞여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교의 상황은 유교적 안목에서 보았을 때 매우 난잡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답교놀이는 여성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서조차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참여하는 대단히 강하게 전승되어 온 오랜 관습을 가진 놀이였다.
그러나 남녀상취(男女相聚)의 장소가 왜 하필 다리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이루어 져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풍요를 기원하는 '달-하천(냇가)-여성'의 상징적 공통성에서 근 원을 찾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다리(橋)는 물로 경계를 이루고 분리되어 있는 두 지역 혹은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이다.
우리의 무속(巫俗)에는 "다리굿"이라는 것이 있는데,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제의이다. 이 굿 과정 중에 허공 중에 무명 필을 매어 이것을 망자의 넋을 극락으로 건네주는 다리로 인식하고 있다.
다리밟기의 목적이 사람들이 표면적으 로 인식하는 것과 같이 답교하는 개인의 복락을 구하고 재액과 질병을 막는 것에 있다고 하면, 이는 바로 새로운 시·공간을 맞이하는 정월의 첫 보름에 신의 세계와 현실을 연결시키는 다 리를 통해 신과 교류하고 가호를 기원하는 주술적 제축(祭祝)의 하나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 놀이 방법
다리 병을 피하거나 일년의 액(厄)을 막기 위해 그저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는 것만이 아니라 농악을 앞세우고 무동(舞童)을 서기도 하고, 다리 위나 근처에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함경도 회령에서는 대보름 밤 자기의 나이 수만큼 다리를 밟고 나서 입고 있던 저고리의 동정(襟)을 뜯어 그 끝에 엽전을 맨 다음 다리 밑 구석에 놓아두었으며, 전북 부안에서는 아이들이 답교한 후 짚으로 만든 자루 속에 명태나 돈을 넣어서 다리 끝 아래로 던져버리는 신앙적 행위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서울지방은 있는 다리를 모두 건너거나 12다리를 건너지만, 다리 셋을 건너면 되는 곳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제일 큰 다리나 가장 오래된 다리를 자기 나이 수대로 왕복하는 수도 있다.
[
음력 정월 대보름 밤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개천 또는 강에 놓인 다리 위를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면서 노는 놀이를 '다리밟기' 또는 '답교(踏橋)놀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고루 나타나는 놀이이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북을 치거나 장고를 두드리고, 피리, 호적 등을 불며 건너다니는 등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다리밟기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 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왕조 태종 이후에 크게 성행되었다고 한다. 이 놀이는 새해를 맞아 모든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데 그 뜻이 있다.
즉, 사람의 다리(脚)와 발음이 같은 다리(橋)를 밟음으로써 다리 병을 예방하고 그 밖의 여러 질병이나 재난 등을 일소하여 탈없이 한 해를 보내고자 하는 것이 이 놀이의 의미라고 한다.
(2) 역사
17세기 초 이수광의《지봉유설》 에 보면 고려조부터 시작된 보름날 밤의 답교놀이가 태평스러운 시대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가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에법관들이 금해서 체포까지 하게 됐다고 하며, 따라서 당시 풍속에는 부녀자들이 다시 다리를 밟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 김매순의 《열양세시기》는서울에서 정월 보름날 저녁에 열두 다리를 건너면 열두 달 동안 액을 막는 것이라 하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촌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늙고 병든 사람 외에는 나오지 않는 이가 없을 만큼 다시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옛 한양에서는 수표교와 광교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장안의 다리는 주로 청계천에 있었고 그 수가 몇 개 되지 않아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때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여성들의 답교 풍경을 그린 것이 있으며, 민화에도 부녀자들이 다리밟기를 하는 장면들이 종종 나타난다.
특히 상류층은 사람들로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날인 14일 밤에 다리밟기를 행했는데,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 하였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이 두 날을 피하여 16일 밤에 답교하였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답교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고 있다.
그 근거가 되고 있는《사원(辭源)》답 가(踏歌)조에는 '오랑캐 풍속(夷俗)에 남녀가 서로 모여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한 사람은 젓대 를 불어서 수십 인이 둘러서서 땅을 밟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것을 답가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이속을 동이(東夷)의 풍속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우리의 답교놀이의 시원에 대한 기 록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놀이 성격
다리밟기는 개인의 복락(福樂)이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집단놀이의 하나이다. 사람의 다리(脚)와 건축물로서의 다리(橋)가 음이 같기 때문에 이 다리를 밟고 건너다님으로써 신체의 다리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언어질병적 사고에 갖다붙인 속신에 불과하다.
남녀유별의 규범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중·후기에 다리밟기를 엄격히 금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지봉유설》에 보이는 바와 같이, '남녀가 뒤섞여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교의 상황은 유교적 안목에서 보았을 때 매우 난잡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답교놀이는 여성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에서조차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참여하는 대단히 강하게 전승되어 온 오랜 관습을 가진 놀이였다.
그러나 남녀상취(男女相聚)의 장소가 왜 하필 다리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이루어 져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풍요를 기원하는 '달-하천(냇가)-여성'의 상징적 공통성에서 근 원을 찾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다리(橋)는 물로 경계를 이루고 분리되어 있는 두 지역 혹은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이다.
우리의 무속(巫俗)에는 "다리굿"이라는 것이 있는데,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제의이다. 이 굿 과정 중에 허공 중에 무명 필을 매어 이것을 망자의 넋을 극락으로 건네주는 다리로 인식하고 있다.
다리밟기의 목적이 사람들이 표면적으 로 인식하는 것과 같이 답교하는 개인의 복락을 구하고 재액과 질병을 막는 것에 있다고 하면, 이는 바로 새로운 시·공간을 맞이하는 정월의 첫 보름에 신의 세계와 현실을 연결시키는 다 리를 통해 신과 교류하고 가호를 기원하는 주술적 제축(祭祝)의 하나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 놀이 방법
다리 병을 피하거나 일년의 액(厄)을 막기 위해 그저 다리 위를 왔다갔다하는 것만이 아니라 농악을 앞세우고 무동(舞童)을 서기도 하고, 다리 위나 근처에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함경도 회령에서는 대보름 밤 자기의 나이 수만큼 다리를 밟고 나서 입고 있던 저고리의 동정(襟)을 뜯어 그 끝에 엽전을 맨 다음 다리 밑 구석에 놓아두었으며, 전북 부안에서는 아이들이 답교한 후 짚으로 만든 자루 속에 명태나 돈을 넣어서 다리 끝 아래로 던져버리는 신앙적 행위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서울지방은 있는 다리를 모두 건너거나 12다리를 건너지만, 다리 셋을 건너면 되는 곳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제일 큰 다리나 가장 오래된 다리를 자기 나이 수대로 왕복하는 수도 있다.
첫댓글 야 너무 많다
줄여써
줄여도 많다 ㅇ_ㅇ;
응 너무많다 더 줄이지
너무많아서 못 읽겠네...
와 정말 많다
내가 얼마나 찾았던것을 하지만 벌써 오래전에 해버렸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