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열전
박인환의 문학과 삶
긴 겨울의 포신이 드리워졌던 망우리 산자락엔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고개를 디밀고 있다. 이미 봄의 전령사인 새싹들은 큰 키를 자랑이라도 하듯 키 재기를 하고 있고 그 위로 봄의 열기가 훅하고 뿜어져 나온다. 봄은 그렇게 겨울의 진저리를 몰아내고 노곤함으로 한 잔의 술을 뿌린다. 그 술은 노래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면’ 전문
*******************************************************************************************************************
그의 묘비에는 ‘세월이 가면’ 1연이 가버린 그를 쓸쓸하게 기린다. 1956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9월에 세워진 묘비는 풍파와 세파에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있다.
그의 생에는 짧다. 겨우 31년이다. 이상李箱-김해경金海卿, 1910~1937-보다 조금 더 살았다. 그래봐야 4년이다. 박인환은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1956년 3월 ‘죽은 아포롱’을 발표한 3일 후 세상을 떠났으니 시의 이력 10년, 참으로 짧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10년의 세월동안 그만큼 사후 조명을 받은 시인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비평의 대상이 돼 평론가들에게 조명을 받은 게 아니다. 대중에겐 읽혀지는 시인이지만 비평계나 시인론 혹은 평론집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루어졌다면 김수영의 시인론에서 박인환이 묻어나오거나 김경린이나 김규동의 글에 의해 언급되는 게 고작이다.
해방이전에 등단했던 김수영, 김춘수, 신동엽 등이 사후에도 끊임없이 비평의 대상이었던 데 비해 박인환은 열외였다. 박인환이 시론의 대상으로 거론된 게 극히 미비했다면 이는 박인한의 불우한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 그는 일본어로 교육받고 자랐으며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우리말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제대로 갖지 못한 불우한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보니 우리말을 쓰는 데 서툴다는 게 시인으로서의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 김수영은 종종 박인환을 가리켜 우리말이 서툴다고 놀려대곤 했지만 김수영이라고 박인환의 그런 서툼을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다. 김수영의 박인환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랬을 뿐이다.
그의 청년기는 6 · 25의 정신적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좀 더 깊고 넓게 세계를 볼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을 전쟁은 앗아갔고 대신 추상적 센티멘털리즘과 울분의 세계에 침잠하게 했다. 시인으로서의 박인환은 분명 불행이었다. 그만큼 짧은 시간을 치열하게 살다간 시인은 극히 작다.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7년, 박인환은 김경린을 만난다. 만났다기 보단 찾아갔다고 해야 옳겠다. 그해 가을, 박인환은 김경린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첫 대면에서 박인환은 일본에서 활동했던 그의 모더니즘운동단체 ‘바우VOU’그룹을 얘기하며 자신도 김경린의 모더니즘의 시를 읽어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명동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주변의 다방과 인환이 살던 원서동의 작은 다방을 전전하며 현대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한 해가 가고 1948년이 열리면서 두 사람은 문단의 선배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은 1930년대 모더니즘의 시를 쓴 장만영과 김기림 그리고 정지용도 만났고 특히 장만영은 두 사람의 모더니즘운동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하지만 김기림은 모더니즘이라는 문을 닫고 이데올로기의 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생전의 박인환은 선배문인들을 만나면서도 항상 ‘씨’라는 호칭 대신 ‘형’이라는 호칭을 써서 좀은 기피대상이었다. 그러나 김경린은 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집념과 자질을 높이 평가해 언제나 방패막이가 되어주곤 했다.
해방 이후 문단은 상호 교류가 활성화되지 않아서 젊은 시인들과 선배시인들이 모여 동인활동을 하지 않았다. 외국의 경우,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 일본의 소노 가쓰에 같은 대시인들이 20대의 시인들과 동인지를 만들며 시작활동을 해갔지만 우리 시단은 그런 모임을 비껴갔다.
박인환과 김경린, 두 사람은 모더니즘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경향이 다른 시인들과의 동인활동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을 만나 활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들은 서로의 작품들을 모아 1948년 4월에 ‘신시론’ 1호를 발간했다. 참으로 대견한 동인지였다. 1949년이 열리자 박인환은 뛰어다니면서 작품들을 모았고 김경린은 편집과 장정을 맡아 그해 4월 앤솔러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다. 동인지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
그들은 어렵사리 동인지를 만들었지만 판매는 제로였다. 그러다보니 다음 동인지를 만들 재원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동인지를 만든다 해도 동인 각자가 십시일반 도움을 주지만 그때야 시인들이 모여 동인지를 만든다는 그 사실 하나를 자부심으로 삼던 시절이니 재원이야 언감생심, 꿈꾸기도 어려울 때다. 그래도 역설적이게 가장 팔리지 않는 동인지를 만든다는 신념은 강했다. 좋게 말해 도전이고 나쁘게 말해 무모다. 그러나 그 무모가 오늘날의 앤솔러지 토양을 키워냈다.
박인환, 김경린, 김규동, 김수영, 양병식 등이 모여 만든 ‘신시론’이 세상에 나올 때엔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이 만든 합동시집 ‘청록집’이 출간되어 화제를 불러 모을 때라 당연히 박인환도 시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잠시 ‘신시론’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를 알아보자. 동인지를 출간한다고 했지만 그 시절 재원을 어디서 마련할지 앞이 깜깜할 때 그들은 장만영을 찾아갔다. 장만영은 그 시절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을 운영하며 자신의 시집 ‘유년송幼年頌’을 발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장만영에게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자 흔쾌히 산호장에서 ‘신시론’을 출간해 주었다. 출간된 ‘신시론’은 국판 16페이지의 작은 분량이었지만 내용은 촘촘하게 편집을 해서 상당한 무게를 느끼게 했다.
이게 인연이 되었는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1955년, 장만영의 산호장에서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해주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운명은 기박했다. ‘박인환 선시집’이 제본소에서 제본을 하는 중에 화재를 당해 일부가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산호장 판본은 귀한 시집이 되고 말았지만 시집이 세상에 나온 날 출판기념회장에는 공초를 비롯해 김경린, 복해숙, 홍효민 등이 모여 그의 시집 출간을 축하해주었다.
*********************************************************************************************************************
박인환의 선시집에 들어있는 시 몇 편의 일화가 전해진다. ‘서적과 풍경’ ‘검은 신이여’ ‘세 사람의 가족’ ‘최후의 회화’ ‘자본가에게’ ‘회상의 긴 계곡’ 등 6편은 앤솔러지 후반기에 실으려고 썼는데 전쟁이 나면서 이 시들을 자기 집 마당에 묻고 피난을 갔다. 그가 종군작가로 활동하는 중에 잠시 서울에 들렸다가 마당에서 이 시들을 캐내어 선시집에 실을 수 있었다. 이미 전쟁으로 인해 앤솔러지활동은 중지되었다.
이후 1976년, 근역서재에서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를 출간했다. 실로 21년만이다. 시집 ‘목마와 숙녀’의 판본은 산호장 판본을 그대로 했으며 다만 빠진 7편의 시가 더 추가되었다.
두 사람은 앤솔러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돈이 없어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러자 김경린은 친구를 찾아갔다. 조그만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는 선뜻 도시문화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앤솔러지를 출간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출간된 동인지 ‘신시론’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시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잠시 옆으로 빠져가지만 박인환을 얘기하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을 빠뜨릴 수가 없어 그의 곁에 있던 그리운 그 이름들을 적어본다.
김광섭, 김광균, 장만영, 김수영,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박태진, 구상, 양병식, 이봉래, 조향, 김영택, 송지영, 이봉구, 이진섭, 이혜복, 전봉건, 조병화, 박영준, 이한직, 길영주, 박일영, 조우식, 이시우, 설정식, 임호권, 이흡 등과 특히 대구피난시절 종군 작가단으로 활동했던 김팔봉, 최태응, 최독견, 장덕조, 조영암, 정비석, 김영수, 김동진, 윤백남, 염상섭, 이무영, 안수길, 박계주, 박연희, 이종환,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곽하신, 박두진, 박목월, 김윤성, 유쥬현, 이상로, 방기환, 황순원, 김동리, 전숙희, 박훈산 등이다. 전쟁은 그들을 한 몸이 되게 했다. 비록 육군, 공군, 해군 등의 종군기자였지만.
*********************************************************************************************************************
회랑의 그림자
시인 김규동은 어느 글에서 박인환을 회고하며 ‘회랑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인물’이라고 했다. 박인환은 일변 언변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그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정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항상 머뭇거리며 아주 서서히 아는 이에게 다가가는 사람이다. 그만큼 숫기가 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박인환도 종로에서 서점을 했던 오장환을 만나면서 시적변화를 꾀한다. 어찌 보면 박인환의 시는 정지용에 가까우리라 여겼는데 오장환에 가깝다는 건 기이한 일이다. 이것은 오장환의 시풍과 하려한 리듬이 그의 시법에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신의 고고함도 한몫을 했을 수 있다. 또 하난 김기림과 김광균의 시들이 박인환의 시법에 큰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가 1946년에 발표한 ‘거리’도 오장환의 시풍이 물씬 묻어난다.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에 씻겨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 1, 2, 3 연
박인환은 거리처럼 30년대의 전통시를 띄어 넘어 자신의 시적 영토를 확장해갔다. 비록 시적 영토가 지치고 피로했다곤 해도 다른 동인들과는 또 다른 그만의 영역을 구축해냈다.
이봉래가 서로의 시적 자유를 존중하자고 말할 때 조향은 기성문단이나 다른 매체와의 타협을 거부할라치면 박인환은 은근 슬 적 이봉래에게 우리 술이나 마시러가자며 그 자리의 불편함을 해소했다. 그래서 일까. 그의 삶은 영화와 음악과 그림 그리고 시를 마음에 담아내는 것으로 지상의 행복으로 여겼다.
********************************************************************************************************************
부산피난시절, 이봉래가 없었다면 몇몇 문인들 특히 박인환은 매일을 힘겨워했을지도 모른다. 어디 그 시절 박인환만이 그랬겠는가. 피난 가있는 문인들 거의가 그랬을 것이다.
박인환을 감싸준 문인들 중 특히나 이봉구, 양병식, 박태진, 김수영 등은 진한 우정의 발로였고 장만영도 그와 가까이서 감싸 안았다. 그중에서도 이진섭은 더했다. 어렵던 시절, 박인환이 조니 워커를 좋아하는 걸 잘 알기에 그의 누나가 경영하는 다방 ‘휘가로’에 인환을 데리고 가선 조니 워커 한 병을 그의 품에 넣어주곤 했다. 박인환이 조니 워커를 좋아하는 거야 다 아는 일이지만 어렵던 피난시절, 그런 우정을 줄 수 있다는 건 문인들만이 나눌 수 있는 가슴 시린 풍경이다.
박인환은 책을 좋아한다. 그가 젊은 날 서점을 했대서가 아니라 유독 그는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걸 수집벽이라고 해야 하나. 이봉구나 장만영, 김광균이 애서가라면 그는 수집가에 가까웠다. 그가 빌려가는 책은 그의 것이지 좀 체로 돌려주는 법이 없다. 이봉래도 마찬가지다. 한 번 빌려 가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책에 있어서만큼은 욕심이 과하지만 그 또한 두 사람만의 특질인 걸 어찌하랴. 이에 비해 김수영이나 김경린, 조향은 빌려간 책은 꼭 돌려주는 신사형이다.
*********************************************************************************************************************
죽은 아포롱
박인환이 이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한 게 1957년 3월 17일이다. 그리고 20일 이른 저녁 9시, 박인환은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이 시의 부제가 묘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박인환은 이 시의 부제처럼 동료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쓰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죽은 아포롱’-이상李箱, 그가 떠난 날에-은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시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자신은 운명하기 3일 전까지 술을 마셨다. 마셨다고 했지만 그때의 박인환의 술은 폭음이었다.
그의 시 ‘죽은 아포롱’을 얘기하면서 그 시를 읽고 싶어서 1976년 근역서재 판의 ‘목마와 숙녀’를 찾아봤지만 ‘죽은 아포롱’은 빠져있다. 특히 1948년에 쓴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가 실리지 않았다. 왜 이 시가 제외됐을까 의아해 하는 건 순진무구다. 독재시대, 이런 시를 시집에 실리 게 했을까. 아니다. 선동적이라고 해서 제외시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1991년 미래사 판의 ‘목마와 숙녀’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래사 판의 시집에도 ‘죽은 아포롱’의 부제는 없었다. 이 시의 부제는 장만영이 운영했던 출판사 산호장 1955년 판본에만 실렸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은 자기의 시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다는 걸 알면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오늘은 3월 열이렛날
그래서 나는 망각의 술을 마셔야 한다
여급 〈마유미〉가 없어도
오후 세시 이십 오분에는
벗들과 〈제비〉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그날 당신은
동경 제국대학부속병원에서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
허망한 서울의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운명이여
얼마나 애태운 일이냐
권태와 인간의 날개
당신은 싸늘한 지하에 있으면서도
성좌星座를 간직하고 있다
정신의 수렵을 위해 죽은
〈람보〉와도 같이
당신은 나에게
환상과 흥분과
열병과 착각을 알려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문학에
따뜻한 손을 빌려준
정신의 황제
무한한 수면睡眠
반역과 영광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李箱〉이라고
‘죽은 아포롱’ 전문
*******************************************************************************************************************
시인의 생에는 짧았다. 그러나 그는 멋진 댄디가 되어 10년 동안 명동을 누볐다. 박인환, 그만큼 짧은 시간에 시와 술과 예술을 노래하며 살다간 시인은 많지 않다. 그의 생애가 비록 짧았지만 그는 가장 축복 받은 시인으로 삶을 살았다.
이런 박인환을 이봉구는 이렇게 추억했다.
“초조와 흥분 때문에 인환의 성격은 칼날처럼 푸르렀다.
멋과 기분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었던 인환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두발頭髮의 형까지도 ‘상고머리’로 깎아 태연자약 명동거리를 돌아다니었다. 험프리 보거트를 본 딴 머리라고 기분을 내면서, ‘머리가 길어야 예술가답다는 견해는 이미 낡은 세대의 유물이야. 구역질나서 볼 수가 없어-’ 큰 소리로 남의 머리까지 시비하려 들었다.”
이봉구의 추억담은 계속됐다.
“대포 잔을 들다말고 뛰어나와 거리에서 서성거리며 화를 내기가 일수였다. 스탠드바에서 봄이면 진 피즈, 가을이면 하이볼, 그리고 조니 워커, 인환은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렇지 못하고 그 값싼 대포 술도 마음대로 안 되니 이거 부끄러워 살맛이 없다고 비통한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밤낮 그 멋과 기분바람에 술타령을 하나 인환의 술은 풋술이었다.”
그런데 김차영과는 술 보다는 문학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이봉구와는 술과 낭만을 얘기했다면 김차영과의 만남에선 술보다는 신사로서의 이미지즘을 중시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모던보이로서의 박인환은 분명 남다른 개성이 있다.
박인환, 그는 갔지만 그가 드리운 긴 그림자는 세월이 가도 아름다운 소네트로 남아 ‘세월이 가면’으로 불러지고 있다.
********************************************************************************************************************
마리서사 시절
박인환은 영화광이다. 그가 영화평론가협회를 만들었다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일보에서 논설을 쓰는 오종식을 중심으로 유한철, 박인환, 김규동, 이진섭, 허백년, 이봉래, 유두연 등이 모여 한때 영평회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족적을 남긴 건 아니다. 그들은 모여서 영화얘기보다는 술 마시는 일에 더 열성이었다. 그러니 영화는 자연스레 뒷전이 됐다. 그래도 술이 불콰해지면 유두연은 무성영화의 변사를 흉내 내 좌중을 웃겼고 박인환은 감정을 섞어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를 얘기했고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의 감동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김규동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관에서 ‘제3의 사나이’ 열리든 날, 박인환이 갑자기 일어나 “여깁니다. 이것이 영화예요! 백철씨 아십니까!” 라고 소리쳐서 모두들 웃긴 일이 있는데, 뒷전에 있던 백철 선생이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했으니, 모두 기가 막혀서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사 박인환은 감격에 젖게 되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열정에 빠지곤 했다. 그는 종종 언론에 영화비평을 썼다. 그저 호구지책으로 여기저기에 글을 썼을 따름이다. 다만 이봉래만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훗날 이봉래가 영화 연출가가 된 것은 당연지사다.
박인환은 경기중학교 -5년제-때부터 영화와 음악 미술, 그리고 시를 몹시 좋아했다. 조숙한 그의 방에는 영화포스터며 습작 시가 책상에 쌓여갔고 공부보다는 예능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런 탓이라 해야 하나. 인환은 1941년 3월에 경기중학을 자퇴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영화 때문이다.
*********************************************************************************************************************
그는 두 번이나 학교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마리서사를 열었다. 혹자는 마리서사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말리서사라고 부르지만 어쨌거나 그가 말리서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박인환은 해방 전에 3년제인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인환이 일본으로 건너 가 의사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본인이 평양의전을 고집했다고 전해진다.
해방되던 그 해가 저물어갈 즈음 그는 아버지에게서 3만원을, 작은 이모에게서 2만원을 얻어 종로 3가 2번지 낙원동 입구에 서점을 열었다.
말리서사를 경경해보려 한 건 책을 좋아 해서지만 낙원동 입구에 터를 잡은 건 이모부가 경영하는 포목점이 바로 옆 자리였기에 그랬으리라.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이모부가 곁에 있으니까 안심도 됐을 테고 박인환도 일정 부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가 약관의 나이 20세 때 문을 연 말리서사는 그의 휴식처이자 사유의 공간이었다. 그는 여러 다양한 책들을 접하면서 시인, 소설가, 언론인 등 많은 문인들을 만나게 됐고 손님으로 온 이정숙씨와 결혼도 했다.
그가 만난 문인들은 헤아릴 수도 없지만 말리서사 시절에 만난 문인들이 태반이다. 이봉구, 김광균, 김기림, 박영준, 송지영, 이한직, 김병욱, 화가 최재덕, 양병식, 화가 길영주, 송기태, 배인철, 설정식, 이시우, 김수영, 이흡, 임호권, 조우식, 박일영 등이다. 물론 박영준, 임호권은 말리서사 이전부터 친교를 가졌다. 이들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는 박일영이다.
같은 사람이면서도 자신이 가진 영혼은 꽃피우지 못한 채 그 영혼을 타인에게서 꽃피우게 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분명 자신은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가졌으면서도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나락으로 빠져드는 사람 그가 바로 기인한 천재 박일영이다.
********************************************************************************************************************
인디영화의 새로운 개척자, 미국의 고다르라는 애칭을 얻은 할 하틀러가 만든 1997년 작품 ‘바보 헨리’도 그런 범주에 드는 영화다. 청소부 일을 하며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와 넘쳐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누이와 함께 사는 사이먼은 어느 날 지하셋방에 헨리가 이사를 오면서 모든 게 난장판이 되고 만다. 독설과 폭언 그리고 맥주가 없으면 세상살이가 재미없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맥주를 마셔대는 헨리, 그는 자서전을 쓴다고 자랑을 하지만 기실 그의 자서전을 읽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헨리는 사이먼의 낙서를 읽은 후 사이먼이 천재라고 부추긴다. 자신이 천재라는 말에 자신을 얻은 사이먼은 시를 쓰고 그 시는 학생들이 만드는 교지에 발표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끈다. 사이먼의 시는 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엮어져 나온다. 그의 책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드디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헨리의 자서전은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를 받는다. 형편없는 글이라는 것이다.
정작 ‘바보 헨리’는 자기가 쓴 자서전이야 말로 가장 찬사 받아야할 글이라고 여기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글에 찬사는커녕 비아냥거림만을 쏟아낸다. 그렇다. 세상살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치되기 마련이다. 헨리는 사이먼에게 자신감을 선사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감을 잃고 바닥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만약 박일영이 없었다면 댄디 박인환이 멋쟁이로 명동을 활보하며 그의 시대를 빛냈을까. 아니다. 박인환은 일정 부분 박일영에게 빚지고 있다. 어쨌거나 말리서사 얘기를 계속하자.
김수영은 그가 쓴 마리서사에서 자칭 초현실주의화가라는 박일영이 박인환의 서점 이름을 ‘군함 말리軍艦 茉莉에서 따준 것’이라고 밝혔다.
부인 이정숙씨의 회고에 의하면 박일영은 임호권씨가 사는 재동 근처에 살았으며 차림새 또한 특이해 마치 예술가를 연상케 했다. 해방이 되고 사회가 어수선할 때라 그림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박일영은 영화관의 간판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나이는 박인환보다 몇 살 더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 안자이 후유에가 쓴 ‘군함 말리’는 그가 31세 때 펴낸 첫 시집으로 계간지 ‘시와 시론’의 동인이 된 다음 해, 1929년 4월 ‘현대예술과 비평 총서’ 첫째 권으로 고오세이가꾸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시집 제목도 ‘군함 말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