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을 현직 관료에게만 나누어주는 제도이다. 고려말에 마련된 과전법(科田法)이 조선 건국 직후부터 그 모순을 드러내자 1466년(세조 12)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전의 과전은 현직 관리뿐만 아니라 산관(散官)에게도 분급되어 점차 과전에 충당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과전을 폐지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분급하는 직전을 설치했다. 과전의 부족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그 분급대상이 산관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관인지배층이었고, 무엇보다도 당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수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과전은 관직과 결부되어 수수(授受)되는 토지이므로 관직 자체가 세습될 수 없는 이상 원리상으로는 상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전법의 규정에 의하면 관직자가 한 번 받은 과전은 그가 직역봉공자(職役奉供者)로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한 종신토록 지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에는 정부의 승인 아래 그의 처와 자식에게 수신전(守信田) 및 휼양전(恤養田)의 이름으로 전수될 수 있어서 사실상 세전(世傳)이 가능했다. 과전을 받은 자가 죽더라도 그의 처가 수절하면 남편의 과전을 수신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수받을 수 있었고,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부전(夫田) 전액을, 없을 경우 반액을 받았다. 부모가 모두 죽더라도 과전은 자식에게 휼양전의 이름으로 전수되었다. 20세 미만이면 부전(父田)의 전액을 받고 20세가 되면 각각 자기 관직의 과등(科等)에 따라 받았으며, 딸은 남편이 정해지면 남편의 과등에 따라 받고 나머지는 회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과전이 부족하여 신진관료들에게도 전액을 분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신전이나 휼양전의 액수 이외에 나머지 토지를 회수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조선 초기를 통해 과전의 전수조건이 완화되고 전수의 대상도 확대되면서 점차 세전이 확대되는 추세였다. 더구나 수신전·휼양전은 처가 재가하거나 자식이 성장하고 결혼한 뒤에도 불법으로 점유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 수조권을 개인에게 분급하는 사전(私田)을 경기도에 한한다는 운영원칙과 과전에 우선하여 공신전(功臣田)을 분급했기 때문에 경기도 일대에 과전지급의 부족현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새로 임용되는 관리들의 경우 과전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일부만 받게 되어 불만이 늘어났다. 그 해결책으로 채택한 진고체수법(陳告遞受法)은 수조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불법으로 수조지를 점유한 사례를 직접 발견해 관(官)에 신고한 뒤 그 땅을 체수받게 하는 방법으로, 국가는 이 사실을 확인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 제도는 그 자체에 이미 과전 점유의 불균형을 내포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과전 점유를 둘러싸고 양반층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심해졌다. 결국 과전을 몰수하고 새로운 기준으로 재분배하는 제2의 사전개혁이 요구되었다. 이에 강력한 정권을 세운 세조대에 이르러 수신전·휼양전의 이름으로 세습되던 과전을 몰수하여 '직전'이라는 이름으로 현직 관리에게만 재분배했다. 그 지급액은 과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해마다 10월 마지막 날 이전에 관직을 받은 사람에 한정하여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직전제의 실시는 양반지배층의 수조권의 세습을 부정한 것으로, 전주권(田主權)이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또 그 뒷면에 농민경제의 성장과 전객(佃客) 농민의 성숙이 가져왔을 사적 토지소유의 강화와 성장이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직전의 조(租)는 처음에는 수조권을 받은 전주인 관료가 직접 거두었으나, 토지의 지급액이 줄고 수조권 행사가 재직기간으로 한정됨에 따라 그 수탈이 더욱 심해지자 차츰 전주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먼저 수조율과 고초(藁草)의 징수량을 정해주는 한편, 전주의 직접적인 답험손실(踏驗損實)을 금하고 수령의 책임 아래 이루어지도록 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객이 남징(濫徵)하는 관리를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도록 하고, 만약 사실이라고 판명이 되면 관리가 수취해간 모든 것을 몰수할 뿐 아니라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직전까지 몰수하는 강경한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마침내 1470년(성종 1)에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라 하여 국가가 경작농민(전객)에게서 조(뒤에 직전세라 함)를 거두어 수조권자에게 주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직전법 역시 항구적인 제도가 될 수 없었다. 직전세가 실시되면서 이제 직전의 분급은 녹봉에 대한 가급(加給)의 의미로 변했고, 점차 그 존재의의도 퇴색해져갔다. 직전으로 분급될 토지가 다른 명목으로 우선 분급되어 직전에 충당할 토지가 부족해졌으며, 관료와 종친의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성종초부터는 직전의 부족현상이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존속되어왔던 점유 직전을 줄이고 군자미(軍資米)로 보충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흉년과 재정궁핍으로 한때 직전의 지급이 중단되거나 그 규모가 줄어들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직전이 폐지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16세기 전반에 직전·공신전·별사전(別賜田) 등 주요사전의 총액은 1만 결(結) 안팎이었는데, 이 액수는 태종초 과전 8만 4,100여 결, 공신전 3만 1,200여 결, 합쳐서 11만 5,340여 결이었던 것에 비해 거의 1/12로 줄어든 셈이었다. 명종 연간에 거듭된 흉년과 왜구 및 여진족의 침략에 따른 재정의 악화로 직전세가 장기간 분급되지 못해 유명무실해졌으며, 결국 1556년(명종 11)에 사실상 폐지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는 법제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렇게 직전의 폐지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에 대한 당시 양반 관료들의 반대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직전이 그들에게 이미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직전 1결당 전조(田租) 4두(斗)인데 그중에서 2두는 다시 국가에 조세로 내야 하므로 정1품의 실수입이 최고 15석이 안 되는 상황에서 직전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전법의 폐지는 고려 이전부터 과전법에 이르기까지 중세사회의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던 수조권분급제의 소멸을 의미하며, 이로써 수조권에 의한 토지지배와 그 아래 실제 소유자가 전객으로 파악되던 전주전객제는 해체되고 현실의 소유자가 전주가 되었다. 이제 토지지배관계에서는 수조권이 없어지고 소유권만 남았다. 이는 사적 토지소유에 입각해 성장하고 있던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의 확대였으며, 지주와 전호의 대항관계를 기본 구성으로 하는 사회경제체제의 확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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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번 읽음...과전법이 패치된 연유와 직전법에 있어서의 관리들의 대응...중요한듯함 ...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