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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도 이 끝내지 못한 미흡함 때문에 글이 글이 아니고 밑줄긋기도 의미를 잃은 이유,
그것은 문학기행의 후기가 아직 남았다는 데서 오는 짜투리의 저항.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스스로 부담감을 느끼지도 않았건만 문학기행의 후기는 이상하게 어렵습니다.
실은...저, 아주 열심히 다음날 글을 다 썼더랬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씩 이상하게 열심히 한 노력의 징후가 헛되이 날아가는 '기계치'만 아는 산고가 있습니다.
제가 사진 13장에 꼭지글 12개를 다 쓰고 새로운 페이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잘라내기.
새로 붙이기만 하면 되는 컴터의 기능에 위배되는 어떤 짓을 하고 맙니다.
참 부끄러운 지능의 아줌마가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불길하던 '잘라내기'의 이름 그대로 잘린 제 글들이 아낌없이 가위질 된 후 처음 든 생각은 뭐였을까요?
그 순간의 생생하던 체험이 사실은 두번째라는 겁니다.
두. 번. 째.
뭐,,,얼굴로 혈소판이 응고되는 듯한 '핏기가심'이 잠시 있었을 뿐, 아주 깔끔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럴 땐 상당히 쿨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미소도 보내 줍니다.
잘리어진 글을 복구시키려던 첫.번.째의 허튼 짓을 간단한 작업으로 확인하는 단순작업만 하고 바로 끝!내 버렸습니다.
전 아주 '기계치'랍니다. 남편이 전기기술이 있지 않았다면 우린 아마 더 자주 헐뜯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컴퓨터는 실행을 잘 하는 기계이고 인간성에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 차렸습니다.
잘린 글 두 번째만에 인생에 아쉬움으로 연연해하지 않을 비책을 발견한 사람처럼 당당하게 포기했습니다.
'그래 그 글은 내 진정성에 위배되는 뭔가가 있었던 거야.'
'약간 억지스럽더니만, 이리 되려고 그랬던 거지...'
포기는 확실히 아릿하지만 생활을 발견하게 하는 묘미도 주었습니다.
당장 집안 청소를 수행했고 청소야말로 잊게하는 최상의 시스템을 갖추었음에 저항하지 않았고,
나무늘보처럼 하루종일 뒹굴거나 잠을 자는 게으른 독서주의자의 안락함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월요일이 열리는 날,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뭔가가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뭔가를 꼭 기행문으로 갖다붙이는 참 편리한 합리화는 하지 않겠습니다.
꼭 그랬다는 것도 아니요, 그저 다시 쓰고 싶다는 간편한 이유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사람에겐 하룻밤의 공덕이 함께하는 것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것이 분명한가 봅니다.
전날 밤의 기괴했던 웃음의 포로가 된 이후, 아침의 분위기는 참으로 가족적이었습니다.
모두 간단한 잠을 끄떡없이 이겨내는 이력이 붙은 모습들에서 아침산보의 이슬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늑장을 부리는 막내에게 건네는 인사에서도 바짓가랭이나 옷자락에 묻었을 이슬이 함께 달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 간편한 옷차림처럼 꺼리낌없는 아침의 쌍지암은 선배님들의 달디단 아침인사에서 달게 받았습니다.
그 인사의 배후에 절간의 아름다운 공기가 함께했다는 생각이 들면 아직도 마음이 상큼해집니다.
덩달아 아침밥은 밥맛으로 또 달게 먹었습니다. 웬 밥이 이렇게 맛있을까 감탄도 했습니다.
기억해보니 절밥을 마다했던 적이 없었으며 더 따지고보니 남이 주는 밥을 맛없게 먹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가장 이로운 복이라는 것을 누누이 알고 또 느낍니다.
밥이 끝나면 설거지의 시간. 집안 설거지에서 가장 귀찮아하던 반찬 분류가 당연한 것이 됩니다.
그렇게 많은 반찬을 차리지도 않지만 다른 곳을 가면 왜 평소에 하지 않던 청소나 설거지가 재밌는 여행의 일부처럼
마땅한 것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알 필요도 없지만 참으로 몰라도 좋은 삶의 이해로 오래도록 남기고 싶습니다.
설거지의 반을 뚝딱 나누어 지시던 두 분의 선배님들도 다 그런 마음으로 하셨으리라 짐작합니다.
굳이 남녀의 구분을 그런 것에서 하려들지 않는...복잡함이 싫어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설거지의 개념들...
그것은 여행의 맛이고 여행은 집이 아닌 낯선 여정들로 가득한 곳이므로 그 낯선 개입에 나를 흔쾌히 이입시키는 것.
집이 아니어서 오는 불편을 불편이라 이름짓지 않고 즐거이 일체가 되는 모든 동작들이
결국엔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므로...
나의 여행을 삶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돌계단...한 때 돌하고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집의 마당을 공사하면서였죠.
원래 아래채엔 허름한 집이 있었는데 그걸 헐고 마당을 만들기로 합의한 우리 부부는 밤낮으로 마당에서 놀았(?)습니다.
특히 뭔가의 일에 빠지면 밤 12시도 알지못하는 제 성격이
남편이 가게하러 나간 밤시간을 이용해 우렁이각시처럼 노가다를 했던 겁니다. 돌담을 쌓았던 거죠.
여자 힘으로 무슨 돌담을 쌓아? 하시겠지만, 얼기설기 돌담을 쌓는 그 일이 희안하게 매력 있었습니다.
시골집의 그 엉성한 돌담을 보면 그 엿보이는 멋스러움이 어찌나 좋던지...
남편이 퇴근하기 직전까지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골목길에 뭔 귀신처럼 못난 돌들을 쌓던 저는
확실히 미친 여자였습니다.ㅎㅎ.
오죽이나 못났지만 정성을 들여 쌓았던 돌담이 어느날 밤 와르르 한쪽 귀퉁이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웃집의 나무대문 받침돌 소리로도 내 돌담 무너지나 날마다 놀라던 가슴인데,
실제로 폭삭 주저앉은 돌담을 보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한없이 허물어지며 한참을 굴러가는 그 돌의 소리는...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도 다음날이면 천직처럼 털고 일어나 다시 쌓던 희안한 정신력에 와서는 차라리 제 얘기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
지나고 나니 그것 다 꿈이었지 싶어서요.
그 돌담을 그런데 올초에 다시 헐어야 했습니다. 마당을 채 몇년 구경도 못하고 새로이 황토방을 공사했기 때문입니다.
황토방 공사를 하려면 돌담부터 헐어야 했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합의(?)해줄 수 밖에 없었지요.
아직도 돌만 보면 언제나처럼 그 때의 돌담공사가 생각나고
돌하고 얘기한 것만 같은 기이했던 한 시절을 음미해 보는 겁니다.
추사 김정희
한국인이라면 추사를 몰라서도 아니될 만큼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서예가.
그러나 추사체를 보고 과연 추사체의 진면목을 해석해 낼 자 누구일까? 라는 질문 앞에서는 선뜻 꺼려질 난해한 글씨.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무렵, 동양 서예역사에서 그의 이름에 필적한 산을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을 차지한 몇 안되는 위인의 한 사람.
그러나 우리에게 추사체는 어떤 글씨인가?
추사체의 독특한 필체를 해석해 낼 만한 감정가는 얼마나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손가락에 꼽을만한 전문가도 추사체의 위작을 가려낼 안목이 없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베일의 글씨체.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신비의 대상'이기도 하고
파격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괴이함이 그의 예술적 개성이자 높은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는 평가조차도
알고보면 더욱 모호한 추사체의 경지를, 우리같은 범인의 눈으로 어떻게 해석이 가능하겠는가.
그저 추사체의 기름진 획과 난해의 상징같은 다양한 서체를 보고
이것이 추사체구나, 고개 한 번 주억거려보면 되는 터.
조선후기 실학의 산봉우리를 올라가보는 비유를 했던 어느 학자의 예가 아주 재밌게(그러나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러시아 문학에서 톨스토이라는 거대한 산봉우리를 정상삼아 산마루에 오르면
저 멀리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거봉이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 조선후기 실학사상에서 정약용이라는 실학의 정상을 목표삼아 올라가노라면
저 멀리 추사 김정희라는 거봉이 나타난다 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학문이 비단 추사체라는 글씨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금석학과 고증학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의 석학이었다는 평가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지였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그는 참으로 세계적인 천재였고 그의 시서화의 독특한 경지는
파격의 묘를 살리면서도 구속받지 않는 천하의 자유분방으로 혹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격동으로
글씨가 갈 수 있는 경지를 넘은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연경에서 만난 추사의 스승인 완원과 옹방강의 모습.
완원에게서 사사받은 호가 30대의 추사를 '완당'으로 불리게 하는 특별한 만남이라 했습니다.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인데 80을 바라보면서도 시력이 밝아
정월 초하루 참깨알에 '천하태평'이란 글자를 쓰기도 했다합니다.
또 김정희의 박식함에 탄복하여 '해동제일'이라는 문장으로 칭송을 아끼지 않은 이도 옹방강이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실학자들이 청의 연경으로 사신을 가서 연경의 대학자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청의 문물을 우습게 여기고 명의 사대명분만 따지고 말았다면,
청의 대학자를 만날 운명과 추사 김정희같은 대가들의 학문이 어떻게 꽃피울 수 있었을까요?
그러고보면 정조대왕 시절 실학사상을 꽃피웠던 그 시기는 참으로 근대로 가는 길목의 가장 중요한 기로가 아니었을까?
새삼 그 시기의 문화의 꽃이 감탄스럽습니다. 우리의 문화가 가장 왕성히 꽃피어났던 시기였겠죠.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하며 일가를 이루었던 김한신이
바로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라 하였죠.
기억에 오래 갈 지식, 정확히 하나 또 배웠습니다.
해는 아직 서해바다 반짝이는 물비늘의 싱싱함을 담은 젊은 몸
새만금 지도의 괘를 함께 달리는 바다의 운명 짊어진 넋으로도 모자라
짭쪼롬한 간기를 머금은 새만금 사연에 할말 많은듯 은어를 풀어놓는다.
33km 탁트인 바다를 양옆으로 거느리며 새만금 직선의 길을 달립니다.
오밀조밀한 섬들의 형상도 없는 서해안의 구조에 맞췄는지 직선의 단조로움이 이어졌습니다.
의령에서 진주가는 길이에 버금가는 시간을 거의 직선으로 달리는 동안 엉뚱하게도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라 했던 가우디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끝없이 직선이던 새만금의 도로를 달리다보니 그저 그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소사 앞마당 주차장 화장실은
급한 일 보더라도 하늘 한 번 보고 살아라는
묵언 수행중.
그 때 그 수박은 하필 저마다의 입속으로 사라진 후였습니다.
모두 갈증에 목말라했고
그만하면 눈 깜짝할 사이 다 먹을 수 있는 열댓명의 장정들이었습니다.
하필 이미순 부회장님은 하필이면 그때 화장실에 계셨습니다.
하필 딱 절반의 수박이 남았을 때
딱 맞춰 나왔지만
하필 사람 먼저 보지 않았고
하필 수박 먼저 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던 겁니다.
"인선씨, 나머지 수박 반통은 차에 있나? 갖고 올래?"
수박은 붉은 물로 된 과일이었습니다.
얼굴에 확 뿜지 않게 요령껏 웃느라 좀 힘들었습니다. 그죠 회장님?
못난이 주춧돌들이 봉래루 떡하니 받들고 함께 늙어갑니다.
돌은 사랑받으며 닳은 티는 날지언정
못났다고 제 역할 못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크기가 다르다고 낑낑대는 가엾음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오래전 이렇게 생긴대로 인정해주던 토목잡이들의 혜안이 궁금해집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그 역할에 탈을 내는 엄마인 제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지혜가 거기 깃들었습니다.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의 부엌 문턱이
이채롭고도 편리하게 보입니다.
제가 담고자 했던 것은 이런 씻다만듯한 피로가 베인 창안의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저 멋없이 번듯한 사각틀의 주택도 아니요
잘못 끼어든 차 한대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무채색의 사물들을 압도하는 저 작고도 화려한 와인잔에 담긴 그것
붉게 물드는 해의 영상, 그것이었습니다.
붉게 일렁이는 서해의 해가 최대한의 화려함으로 말미의 여행을 동행해 주었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여행지에선 일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해석되어집니다.
제 생애 드디어 문학기행이 이루어진 특별한 1박 2일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집의 일들이 궁금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보여지는 사물들이 멋스러웠습니다.
무엇을 하든 서두르지 않는 시인들의 보행이 마음에 들었고
그 조급함을 잊어버린 우리의 나이듦이 괜찮았습니다.
사는 이야기로 깊은 밤까지 이어지던 대화의 배경으로
띄엄띄엄 섬처럼 각자의 이부자리를 마련한 모습도 새삼 기억할 만한 풍경입니다.
너무 웃었던 그날밤의 사건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겨우 서너시간의 수면으로 서해로 남해로 깊은 밤을 달려야 했던 두 분의 선배님에게는
이틀간이 제발 정신의 보약이었기를 빌 뿐이고,
모든 선배님들에게 애교도 없이...그러나 저 웃을 일에는 막무가내로 웃던 막내가
지극히 행복했던 여행에 감사한다고... 꼭 그 마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모두모두 여전히 즐거운지를 안부삼아 띄웁니다. bye~
첫댓글 참으로! 그대의 시선은 냉철한 물과 같고 열정은 불과도 같구려. 맞아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직선을 고집하지만 신은 지구처럼 둥근 가슴의 곡선으로 안아주지. 석양의 와인잔을 들어보오 그러면 곡선이 보일테니^^
물과 불의 양면을 가진 아주 소박한 촌아지매이기도 합니다. 직선과 곡선의 해석이 더 멋스럽습니다.
모든 걸 잠시 잊고 떠나자 했던 여행이 다시금 키스님으로하여 잊혀짐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신분을 뛰어넘어 인재를 중용한 정조대왕이 있었기에 실학이 꽃피워졌고 그나마 우리의 근대사는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당시의 창의적 추사체를 예술로 수용한 안목이 시대상이라고 말하기엔 오늘날 우리가 어떤 안목으로 또 그런 예술을 담아내야하는지를 타산지석으로 삼게 합니다. 새만금의 물비늘 만큼 반짝거리는 여행기입니다. 읽고 보니 어쩐지 진한 선홍색 와인 한 잔이 그리워집니다.
추사체를 과거엔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결기가 곧은 단조롭고 정직한 인상의 글을 좋아했었지요. 이제야 그 글의 한없는 단순성과 높은 예술성이 조금은 눈에 들어오는 걸 느낍니다. 사람의 안목도 나이를 먹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를 만나면 곧바로 감정을 투입시켜 보는 것이고 글도 그렇게 만나야 소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통이 필요하면 여행을 해서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 같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잘도 기억하는구료! 술마신 기억밖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살려지지 않을 기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ㅋㅋ
옛날에 한자를 잘 쓰는 사람은 권력을 잡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외 받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남의 나라가 되었다가 또다른 남이 해방을 시켜주어서 오늘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요. 남의 나라말을 좋아해서 생긴 일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일본은 아무 말이나 그 나라 사람이 쓰면 그 나라 사람의 말이 된다고 하면서 일본말을 쓰게 했지요.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지도 않는 의령에 사는 우리라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많이 우리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문인협회라는 두꺼운 옷을 껴입은 이상. 베일, 와인 등 연구가 필요한 단어입니다.
네 좋은 지적에 가슴이 철렁합니다. 바로 이런 꼼꼼한 지적에 글쓰는 이들의 냉정한 자기평가가 뒤따라야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손쉬운 외래에에 젖어서 얕은 경박을 드러낸 꼴입니다. 꼭 새기겠습니다.
혹시 내가 남의 말을 쓰더라도 구박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식의 이모티콘도 쓰면 안되는데... ㅉㅉㅉㅉㅉ
사람마다 같은 여행을 하고도 기억의 차이는 많은가 봅니다.
같은 생각이면서 마음이 같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함께했기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틀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살아가는 마음들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이 공존하지요. 정말 즐거운 여행을 잘 이끌고 다니셨습니다, 소룡님.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많은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같이 즐거워하며 보람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마당이 있고 황토방이 있는 집에 사시는 키스님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사물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과 특히 가우디 같은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신것 같아 부럽습니다. 국내 여행보다는 해외여행을 좋아하는저도 수년만에 같이 간 이번 문학기행에서 우리나라에도 외국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느낀 매우 뜻깊은 날이어서기쁨니다. 쓰신 글을 매우 맛있게 읽었습니다. 다음에 소주한잔 쏘죠 6.27
전 여행이라면 일단 떠나고싶단 소망부터 키우는 습관이 있습니다. 국내도 좋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여행은 좀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짐을 꾸려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여행의 묘미에 특히 예술기행을 하고싶어 죽을 지경입니다.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있지만 언제든 갈 수만은 없는 묘한 현실과의 괴리감. 현실로 갈 수 없는 마음을 '앉아서 삼만리'라고..여행책을 일단 많이 봤습니다. 서서 구만리를보게요..ㅎㅎ 모두가 여행을 떠나면 참으로 진보적이 될 것 같습니다. 그 톡쏘는 낯선 배경이 쉽게 안주하던 삶을 새로이 바꿔주니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