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이 태어나고 자랐던 흑석동 그의 생가터다.
그곳에 흑석동 천주교성당이 들어섰다.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은
그의 고향 흑석리를 그리워하는 시를 담는다.
바로 <고향은 그리워도>다.
나는 내 고향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너머련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5대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이 든 그 산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잡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취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심훈의 흑석동 집 후원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나 보다.
손수 가꾸던 화단도 있었던 것 같다.
개나리 울타리에 꽃피던 뒷동산이 있던 흑석동은
1930년대 당시 신혼부부의 선망의 대상이던 문화주택도 등장하고,
지금의 효사정 자리에 있던 신사(한강신사 또는 웅진신사)도
등장하면서 변해간다.
고향에 대한 실망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고향은 그리워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해방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효사정 언덕 넘어 한강을 즐겨 찾아
젊은 날을 보낸 것으로 전한다.
1920년 1월, 그때는 한강이 꽁꽁 얼어 붙었다.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 밑을 넘나들면서 스케이트를 즐겼다.
그 겨울철의 추억은 그의 일기에 나온다.
그때 한강은 여름에는 수영장이었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서울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심훈은 1901년 9월12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난다.
조상 숭배의 관념이 철저한 지주 집안의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가정의 출생으로 온후한 성품을 지녔고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심훈의 본명은 대섭(大燮)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에는 백랑(白浪), 1920년 이후에 훈(熏)이라고 썼다.
1915년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여,
작곡가 윤극영과 은행가 윤기동과 함께 미남 행렬 속에서 명석함을 자랑했다.
1917년 3월 중매로 왕족인 이해승의 누이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심훈이 해영(海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 뒤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나오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퇴학 처분을 당했다.
모교인 서울 경기고에서 제적된 지 86년 만인 2005년 명예 졸업장을 받는다.
심훈의 경기고보 동창의 면면은 참으로 화려했다.
한국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은 심훈의 동기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일왕(일본 천황) 폭살계획
모의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돼 해방된 이후인 1945년 10월까지 무려 26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무정부주의자 박열은 심훈의 경기고보 1년 후배다.
심훈은 서대문감옥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양한묵(천도교, 1862~1919)과
천도교경성교구장 장기렴의 순국을 목도하면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더 불태우게 된다.
감옥에서 나와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던 심훈은 얼마 안 있어 중국으로 망명한다.
어색한 청복으로 변장하고 만주 봉천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한 심훈은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우당 이회영(1867~1932)과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