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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짐에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
- 영화 {밀양} 읽기 -
조하무(현저교회)
당신의 삶의 무게는 당신이 감당하기에 만만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하지만 혹시 당신이 말하는 그 행복이 당신의 과거의 진실을 제 편리할 대로 적당히 가공하여 짜깁기한 것이라면 그 안에서 당신은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인간은 그렇게라도 거짓된 행복을 내 것이라 우기면서라도 우리의 남은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에서 기본 모티브를 차용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감당하기 힘든 불행 속에서 내 자신과 내 인생이 무너져 가고 있을 때,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몸부림치는 한 인생을 잘 그려낸 영화이다.
1. 허위의식일지라도,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했다.
장마비에 어느 날 견고해 보이던 축대가 맥없이 무너지듯, 갑자기 다가온 불행은 견고해 보이던 내 인생을 뿌리부터 무너뜨린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으로 인해 갑자기 붕괴해버린 내 인생, 하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있기에 살아내야 하는 인생, 이때 부서진 파편으로 가득한 그 인생의 한 자락을 쥐고 우리는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가장 선택하기 쉬운 방법은 우선 남아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과거를 잊고 새로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억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지금의 삶에 필요한 대로 주관적 재구성하여 앞으로의 행복에 밑거름으로 삼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만일 내가 좀더 자존심이 강하고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면 나의 불행을 떠넘길 어떤 대상, 곧 희생양을 만들어 내 불행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에게 복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좀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삶의 진실을 진지하게 성찰해 가며 길을 찾을 수도 있겠다.
영화는 맑은 하늘에 잔잔히도 햇볕이 따사로운(密陽) 어느 날, 남편을 잃은 미망인 신애(전도연 分)가 밀양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속적 욕망의 도시 서울을 떠나 한적한 밀양으로 이주하는 이유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남편 살아생전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미망인의 아름다운 순애보....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신애의 말은 사실 허위의식임이 드러난다. 남편의 외도가 그의 죽음만큼이나 자명함에도 신애는 그 진실을 거부하고 그가 자신과 가정을 사랑했었다는 허위의식 속에 살아가고자 몸부림친다. 왜냐하면 그 허위의식이 지금의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밀양으로 이사온 것은 남편의 외도와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자신의 인생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자신과 자기 가정의 객관적 진실을 모르는 곳,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를 위한 가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죽은 남편을 아직도 사랑하는 아내로서, 남편의 분신과도 같은 어린 아들과 함께 존재의 의미를 이어가는 순수한 미망인으로서 자신을 재구성하기 위해서였다.
밀양에서의 새로운 삶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동네 마당발 종찬(송강호 分)의 도움으로 피아노학원 자리도 얻고 이웃과도 사귄다. 이 사귐의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는 전혀 숨길 것이 못 된다. 자신의 조작된 과거는 오직 자신이 새 삶을 구성할 때 꼭 필요한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을 못 잊어 그의 고향으로 내려온 애처로운 미망인'이라는 앞으로의 행복을 위한 타이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허위의식일지라도 이제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약국집 부인의 "당신같이 불행한 사람은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에 단호히 거부한다. 새롭게 재구성된 과거가 이어주는 현재와 미래에서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이미지의 재구성에는 '부유한 미망인'의 이미지도 추가하여 괜시리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닌다. (그녀는 종찬이 급조한 '상장'도 떼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재구성된 이미지는 지나치게 성공하여 또 다른 불행을 불러들인다. 그녀를 돈 많은 과부로 오인한 웅변학원 원장이 그녀의 생존의 이유였던 아들을 유괴, 살해하고 만다. 이로 인해 그녀에게 남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했던 그녀의 허위의식은 맥없이 무너지고 또 다시 그녀의 생은 허물어진다.
2.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종교담론일지라도, 허물어진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했다.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아들의 죽음 앞에서조차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지 못했던 신애는, 그로부터 목에 무언가 걸려있는 듯 가슴이 답답한 매핵기(梅核氣)를 느낀다. 이 답답함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곳, 아니 통곡이 허가된 곳, 통곡이 일상화된 곳, 통곡이 새로운 가치를 확보해주는 곳, 곧 종교에 귀의한다. 그녀는 이제 다 허물어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다소 상투적일지라도 종교적 담론에 귀의한다.
물론 그의 통곡이 그의 회심과 거듭남을 보증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그녀는 종교적 담론에 의지하여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따라 교회에 등록한 종찬에게 "정말 신앙이 있는 거냐구요?"라고 강하게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은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강변하며 자신을 차별화시킨다. 늘 그러하듯 다른 이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자는 그 자신 이미 신앙의 담지자임을 저절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자에게 그 누가 감히 신앙고백을 되물을 수 있을까?
그녀는 '거듭남', '마음의 평화', '주님의 섭리' 등의 종교적 언명들에 내재된 깊이를 진정으로 체험/이해했다기보다는 그 담론들이 지닌 표층적 상투성에 기대어 자신을 재구성한다.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숭고한 신앙적 주체가 되어간다. 외식(外式)과 상투성에 기댄 허위의식.... 비록 그것이 외식이며 상투적일지라도 종교담론의 일반 형식에 맞춰 사는 삶이 편안하다. 아직도 그녀는 변하지 않는다. 불행에 대항하는 그녀의 양식은 아직도 '허위의식 속에서 안식 얻기'이다. 다만 이제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종교의 표층적 담론들 속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거듭난 숭고한 신앙인의 길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종교적 틀에 끼워 맞춘 자신의 이미지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한가지를 증명해야 했다. 곧 원수 사랑의 실천양식으로서의 '용서'라는 통과의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처참하게 파괴한 아들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것이 아닌 통례의례였기에 객관적 증명이 필요하다. 그녀는 굳이 살인범이 복역하는 교도소까지 찾아가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용서의 의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이 의식은 실패하고 만다. 내 앞에서 나의 용서에 감읍하며 눈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할 그 살인범은 불행하게도(?) 교도소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환한 얼굴로 자신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피해자인 자신만이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용서의 권리마저 빼앗기고 만 것이다.
심한 배신감에 멍해진 그녀는 하나님께 절규한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리는 하나님에게도 없다구요."
3. 신(神)일지라도, 내 생존을 위해서는 복수의 대상(희생양)이 필요했다.
신애는, 살인자로써 사형 혹은 무기수로 남은 생을 살아내야만 했던 유괴범 역시 자신의 실존을 위해서는 상투적일지라도 종교적 담론에 귀의를 해야만 했을지도 모를 상황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지독한 배신감에 젖어 심한 혼돈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만이 배타적으로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용서의 권리를 월권한 하나님을 향해 배신감에 젖어 이제 복수를 시도한다. 원본인 소설에서 여주인공은 자살로 자신의 절망을 표현함으로 생의 종지부를 찍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위해 복수에 나선다. 비록 그 복수의 대상이 하나님일지라도 복수의 일념이 있는 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복수는 생을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그녀는 서서히 무너짐에 저항하는 두 번째 양식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그녀의 복수는 자기 파괴적이다. 모범적 신앙인을 유혹하고, 구역원들의 호의에 찬 기도회를 증오하며, 교회의 집회를 기만이라고 훼방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매핵기와 구토증세....
결국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그녀는 아들 유괴사건의 충격을 재 경험하며 살기 위한 최후의 저항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그 자살 시도는 그녀가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었기에 결국 거리로 나가 "살려달라"고 호소한다.
4. 과거의 망령이 끈질길지라도, 자신의 진실을 남의 이목(耳目)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는 신애를 맞이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길에서 종찬은 신애의 동생으로부터 신애가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예요?" 신애에게 했던 대답을 똑같이 반복하는 종찬의 말에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서울이 아닌 밀양에서도 똑같이 계속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애가 바뀌었다. 그녀는 퇴원함과 동시에 길어진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한다. 곧 허위의식과 속 빈 상투성으로 가득 찬 자신의 과거를 이제 그만 단절하고 싶어진 걸까?
그러나 그녀가 찾아간 미용실에서는 아직도 과거의 끈이 끈질기게 얽혀있음을 보게 된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범죄로 인해 힘겨운 삶을 살아온 딸, 아마도 살인자의 딸이라는 손가락질로 더욱 삶이 파괴되었을 그 딸이 일하는 곳이었다. 그녀에게도 역시 삶의 무게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신애는 그녀의 손에 자신의 머리카락 자르기를 맡겼다가 다 자르지 못한 채 그곳을 뛰쳐나온다. 자신의 과거, 그 아픔과 허위의식 그리고 속 빈 상투성에 기댄 거짓들은 결국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이기에 남의 손을 빌어서는 결코 단절시킬 수 없는 것....
집으로 돌아온 신애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마치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은 자신이 아님을 안 듯, 그래서 자기 스스로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진정한 자신임을 이제야 깨달은 듯.... 그녀는 '자신의 스타일이 아닌' 종찬이 들어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천천히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무너짐에 대항하는 그녀의 세 번째 양식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위로가 될 만한 사실은 환하게 리모델링을 마친 옷가게이다. 신애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던 그 조언이 받아들여져 이제는 신애를 이웃으로 환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애의 새로운 삶은 정작 이렇게 씨 뿌려져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5. 불안하고 불편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비춰진 기독교의 모습은 교회의 성찰을 위해 필요하다.
녹음기를 통해 듣는 내 목소리가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지듯, 누구나 객관적 시선 앞에 드러나면 어딘지 어색하게 보이며 나와 독립되어 있는 듯이 느끼게 마련이다. 영화 {밀양}에서 그려진 기독교인/교회의 모습은 어딘지 불편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은 이 영화가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이런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목회자와 기독교인의 자문을 얻었을 뿐 아니라, 밀양시내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다큐로 촬영해 분석하기까지 했으며, 또 부흥회 장면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전국의 부흥회 현장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더구나 주인공 신애와 같이 배신감을 느껴 교회를 등지는 교인을 우리는 간혹 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느끼는 우리의 불편함이나 불안감이, 이 영화가 기독교에 대해 대놓고 악의적이거나 희화화를 통해 조롱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한국교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면, 이 영화가 기독교 우호적이냐 비판적이냐를 묻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자신에 대한 좀더 깊은 성찰이 아닐까?
"신애씨처럼 불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해요"라고 전도하는 여약사의 모습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그 '무례함'의 정체는 일방주의 아니었을까? 상대방의 아픔과 삶에 대한 공감 속에서 그를 이해하고 그를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나 중심의 전도방법, 이런 공격적인 전도는 상대방에게 심리적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은혜 받음과 감정과잉의 경계가 모호한 부흥회, 우리는 오히려 영적 부흥을 원하기보다는 감정의 과잉을 통한 카타르시스라는 값싼 은혜만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이성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은 기회가 없어 타락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우리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던 것이 아닐까? 적당히 유머러스한, 그래서 더욱 다가갈 수 없는 표피적 친교,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 모습만으로 신앙을 평가해온 신앙의 내면화 부재현상, 치유목회를 말하지만 정작 트라우마가 될 상처의 치유에는 너무도 무력한 표층적 종교 현상들.... 치유(healing)를 위한 목회과정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지탱(sustaining)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형식적이며 상투적인 종교담론, 그럼에도 형식이 내용을 담보할 때가 있음은 기억되어야 할 것 같다. 콩과 콩깍지, 어느 것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콩을 선택할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콩이 자라기까지 콩을 보호하여 키워주는 콩깍지의 역할은 계속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종교 담론들이 형식적이고 상투적으로 보일지라도 진리에의 추구가 깊어짐에 따라 그 형식성과 상투성을 꿰뚫고 들어가 그 안에서 우리는 참다운 종교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당신에게 진리의 무게는 감당하기에 만만한가?
** 이 글은 [동문회보]에 실릴 예정인데, 먼저 우리 홈피에 올립니다.
첫댓글 무척 긴 글이지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