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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은 옛부터 교통, 체신, 행정의 중심지요. 국방의 요새지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
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해지고, 많은 교우들이 있던 곳이었다.
비교적 높은 직계의 수령이 있던 이곳 홍성은 기록상 충청도에서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 읍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군청, 객사, 동헌 등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읍성은 아직
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
로전해 준다.
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내포 지역에서 박해가 발생하였을 때 홍주에서도 신자
들이 박해를 입었다. 이때 성화 집안과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되었는데, 성화 집
안은 배교하여 풀려났고, 원시장은 신앙을 증거하다가 끝내 1792년 12월 순교하였
다. 1794년에도 홍주에서 새로이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혹심하
였는지, 그 범위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때 박형화 바오로가
배교하였다.
1797년 윤 6월에 한용화가 충청 감사로 부임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 사사로이 박
해를 일으켰는데, 이 정사박해는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태영과 김이영에게로
이어졌고, 무오.기미년(1798∼1799)에 특히 심하였다. 이 여파로 홍주 고을 응
정리에 살던 원 야고보가 덕산 포졸들에게 붙잡혀 형벌을 받은 다음 홍주 진영
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거기서 여러 차례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였고, 두세 번 무서운 고문을 당한
뒤 다시 덕산으로 환송되었다. 또한 방 프란치스코가 1798년에 홍주에서 잡혀
6개월 동안 매우 많은 형벌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료
2명을 권면하여 셋이 함께 홍주 읍내에서 1798년 12월 16일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로부터 정해박해(182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김귀동, 윤
바오로, 한 토마스, 황일광(알렉시오), 이여삼(바오로) 등 5명의 신자들이 박해
를 받아 홍주에서 순교하였고, 기해박해(1839년)로부터 병오박해(1846년)에 이
르는 기간 동안에는 유 바오로, 최대종(요셉)등 2명이 박해를 입엄 홍주에서 순
교하였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진후(비오)가 홍주에서 잡혀 문초와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1866∼1878년)때는 김선양(요셉), 김치
문(치로), 이화심(안드레아)등 모두 96명이 홍주에서 모진 박해를 받아 순교하
였다. 박해기 동안에 홍성에서 순교한 신자는 모두 합해 약 107명에 달한다.
무명 순교자들까지 합치면 홍성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는 107명보다
훨씬 더 많다. 충청도에서 공주 다음으로 홍성에서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홍성 순교자 107명 가운데 5명은 사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67명은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거나 옥사하였으며, 4명은 생매장을 당하였고, 1명은
매맞아 죽었다. 그 나머지는 어떤 형벌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67명이라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해 홍주의 최대 순교지라고 할 수 있는 감옥 터는 현 검찰청
이 있는 자리로 1871년에 제작된 [홍주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감옥의 위치와 일치한다.
5명이 참수를 당한 사형장 터는 북문이 있던 자리 건너편이다. 구한말에 많은 동학도
들을 붙잡아 처형할 때 홍주 목사가 북문 위에 올라가 그 처형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홍주지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현재 군청에서 덕산 가는 길로 가다보면 다
리가 하나 나오는데, 이 다리 못 미친 곳에 북문이 있었으므로 이 다리 건너편이 사형
장이었다.
이 사형장 근처에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갖다 버리거나 가매장했던 장소도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4명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는 사형장을 지나 좀더 먼 곳에 있었
을 것이나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또한 1명이 매맞아 죽은 장소는 진영의 영장이
집무하던 전영 동헌 앞이거나 목사가 집무하던 동헌(안회당) 앞이었을 것이다.
안회당
홍주 지방에 박해가 시작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이다. 당시
홍주에 살고 있던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면천 감옥에 많은 신자들이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신자들을 격려하고, 무고하게 감옥에 가둔 것을 관자에게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이곳에서는 또한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의 기반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한 강완숙 골롬바도 잡혀왔다가 풀려났다.
기록상으로 홍주 지방에서 처음 순교한 사람은 1793년 원시장 베드로이다. 홍주
원정리에 사는 원 베드로는 이곳 관아에서 모진 혹형을 받고 성 밖에 버려져 얼어
죽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80여 년간 잡혀온 수많은 교우들이 처형되어 죽어갔던 순
교의 현장이다.
1861년 홍주 지방은 성모 성탄 구역으로 지정되어 성 다블루 안 주교가 담당했고,
1866년과 그 후 2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만도
80여 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잘 보존된 동문인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했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성 밖으로 내다
버렸다.
그외에도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주를
기억하는 한국 순교성인으로는 황새바위에서 자신의 팔을 물어뜯으며 신앙을 증거하
신 홍주거더리의 성 손자선(토마스)이 있다
홍성은 예로부터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과 사육신의 하나
인 성삼문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홍성의 역사를 찾는 순례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우국 열사
들의 향기를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에 쌓은 8백 10미터 규모의 성곽으로 축조 연대
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다. 대원군의 친필이 남아 있는 홍주 아문, 홍주성의 동
문인 조양문과 함께 사적 제 231호로 지정돼 있다 .홍주 읍성 내에는 군청과 함께
감옥 터, 객사, 동헌 등이 있어 교우들을 고문하던 곳으로 쓰였고 때로는 처형지로
도 이용됐다.
홍성읍 시가지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
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홍주 아문(洪州衙門)으로 여기에는 대원군이 친필로 쓴 현관이 붙어 있다. 홍주 아
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장
소이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 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
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 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는 홍성에서
도 발견된다. 척화비는 홍성읍에서 차를 타고 서산 방면으로 15분 가량 달리면 구항 면사
무소 건너편 산자락에 철책이 둘러쳐진 채로 서 있다. 산허리를 돌아 나오는 세찬 세월의
바람에 척화비의 글자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당시의 서슬 퍼런 박해의 기억과 굳은
신앙을 아직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준다.
17개의 군과 현의 군사권을 관할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홍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문 쪽에 있는 전영 아문이 바로 영장이 집무하던 곳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영장이 취조하였다. 특별한 경우에만 목사가 신자들을 불러서 신문하였다. 따라서 안
회당 앞과 전영 동헌 앞이 모두 성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끌
려와 매를 맞으며 신앙을 증거했던 전영 동헌 앞이 성지로서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
겠다.
전영 동헌이 있던 자리는 옛 홍성우편국 사무실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 한국 통신공사
건물이 세워져 있는 자리라고 한다. 요컨대 감옥이 있었던 현 검찰청 자리, 북문 건
너편의 사형장 터와 그 인근의 가매장 및 생매장 터,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
고 때려 죽였던 진영 동헌 터인 옛 홍성 우편국 사무실 자리와 안회당 앞마당 등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성지(聖趾)가 된다고 하겠다.
- 한국의 성지 -
첫댓글 [천주교회사및순교자료] 방에..정사박해에 관한 자료를 올리다보니..."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내포 지역에서 박해가 발생하였을 때 홍주에서도 신자들이 박해를 입었다. 이때 성화 집안과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되었는데, 성화 집안은 배교하여 풀려났고, 원시장은 신앙을 증거하다가 끝내 1792년 12월 순교하였다"는 말씀이 생각나서..사진 한 장을 옮겨갑니다../밟으신 성지순례의 사진들이..103위 한국순교성인분들을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사진과 옮긴 글들이~도움이 되기를! 무명순교자분들의 전구하심을 청해봅니다.주님! 필구 아오스딩 형제님을 위하여 빌어주소서~!간절함을 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