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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북정맥 구간별 산행기
▲▲▲ 한북정맥 제 1 구간(장명산~성동고개) ▲▲▲
1. 산 행 일 : 2011. 3. 6(일)
2. 산 행 지 : 파주(장명산, 고봉산)
3. 날 씨 : 맑음
4. 참 가 자 :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홍영표
5. 준 비 물 :
[1] 전 체 -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6. 회 비 : 50,000원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3.28km
[2] 산행개요 :
한북정맥 첫 출발지인 이번 구간은 13.28㎞로 5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한다. 이번 구간에서 가장 높은 봉이 고봉산(208.8m)으로 힘든 곳이 거의 없다. 산 오름보다는 오히려 시내를 통과해야 하고 신시가지 조성공사로 정맥 길이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 많아 정맥 길을 찾을 수 없어 난감하고 산행의 묘미나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아쉬움도 있지만 사라진 맥을 찾아 간다는 자부심도 생긴다.
출발지 장명산은 산이 잘려 나갔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확인하면 정상은 102m의 고도다. GPS 산행경로를 확인해 본 바, 정상으로 향해야 할 오름길 8부 능선 쯤에서 산이 잘려나가고, 절개지 아래 넓은 인공 안부 공터가 생겼다. 감시탑이 있는 봉우리를 정상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이곳의 고도가 80m를 넘지 않으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위치상으로도 정상과 100m 정도 떨어져 있어 설득력이 없다.
다민 인공 안부를 지나 북쪽에 화생방 깃대가 솟은 봉우리가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정맥꾼들이 이 봉우리를 장명산 정상으로 삼고 있다. 곡릉천이 훤히 내려보이고, 조망이 약간 트여 있어 남쪽 봉우리보다 훨씬 낫다.
장명산을 지나 핑고개로 내려서면 시 외곽의 마을을 지나게 되고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이후로는 교하신도시 조성지구로 새로 뚫린 도로와 아파트 숲으로 脈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일산가구단지와 큰마을 아파트를 통과하면 비로소 산을 대하게 되는데 이 역시 고도가 108m 오르는데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군부대 철망을 잠시 따라가다 보면 금정굴이 나온다. 금정굴을 지나면 중산고개로 도로를 횡단하면 이번 산행의 최고봉인 고봉산을 오르게 된다. 고봉산 정상은 국가시설물 철탑이 있어 사면 길로 진행을 해야 한다. 고봉산 사거리에서 시맨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 만경사 입구를 지나 잠시 더 진행을 하면 이번 산행의 목적지 성동고개(잣골고개)에 도착을 하게 된다.
[3] 구간별 거리
곡릉천←(0.5)→장명산←(0.5)→핑고개←(6.3)→310번도로←(2.3)→중산고개←(1.5)→고봉산 삼거리←(1.7)→만경사←(0.48)→성동고개
[4] 산행 코스 및 시간
(1) 산행지 이동
① 교통편 : 승용차(홍영표)
② 이동경로 :
(2) 산행코스 및 시간
곡릉천(오도1리)-<10분>- 장명산(향나무)-<10분>-산불감시탑-<10분>-핑고개-<7분>-갈림길(이정표)-<2분>-교하중교-<7분>-성재암(갈림길,이정표,우측길)-<8분>-성재암표석(포장도로)-<14분>-파평윤씨묘역입구(표석)-<10분>-생명교회(마트)-<5분>-월드메르디앙-<20분>-인력개발원-<11분>-사거리('가람마을')-<30분>-골프연습장(좌측옆길)-<15분>사거리(일산가구단지입구,횡단보도건너가구단지길)-<5분>-큰마을교(전철위교량)-<12분>-포장길(큰마을,예담교회)-<7분>-108봉(삼각점,조망,좌측능선길)-<4분>-철조망길-<9분>-금정굴(능선, 안내판,직진)-<6분>-중산고개(98번지방도,고봉산주유소,횡단보도건너산길)-<1분>-갈림길(포장도로,좌측포장길)-<9분>-헬기장-<7분>-영천사(암자)-고봉산전갈림길(208.8m,군부대,이정표,영천사방향직진)-<5분>-만경사(표지석,이정표,직진내림길)-<10분>-성동고개(잣골고개)
(3) 산행 후
(4) 탈출로 및 편의사항
8. 산 행 기
[1] 산행 전
3월 4일, 박상호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3월 6일(일요일)부터『漢北正脈』산행을 시작하자고 한다. 박기양, 안상경, 홍영표교장도 동참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전부터 낙남정맥을 종주하며 한북정맥도 동시에 진행을 하자고 약속을 한터라 쾌히 응낙을 했다.
다음 날(토)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와 쉬고 있는데 知人(조성환)으로부터 전화, 저녁 때 시간 있으면 이스리 한 잔을 함께하고 싶단다. 거절하기도 어려워 시간 맞추어 약속 장소로 나가 이스리 몇 잔을 하다 보니 취흥이 도도해 진다.
내일 산행 걱정을 하며 21시를 훌쩍 넘겨 집으로 돌아 와 집사람에게 간식을 부탁하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05 : 00시, 알람소리에 급히 일어나 산행 준비.
05 : 55분, 출발지 북수원 홈풀러스 앞 도착. 김밥 두 줄을 사서 배낭에 넣고 밖에 나오니 박사장, 안교장 도착 했는데 박교장과 홍교장이 보이지 않는다. 박교장은 급한 일이 있어 못가고 홍교장은 미리 와 차를 대기하고 있었는데 미처 살피지를 못했다.
06 : 10분, 승차(홍교장 차 운행)하자 곧이어 출발을 했다. 어제 이스리 잔을 지나치게 부딪쳤는지 이내 非夢似夢으로 빠져든다.
07 : 30분경 파주 교하읍에 도착, 「유가원설농탕(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979-1 ☎ 948-5353, 948-2700)」집에 들려 설농탕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입안이 깔깔했지만 산행을 생각해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장명산(오도1리)』으로 이동을 했다.
[2] 산행 출발지 오도리 곡릉천
(1) 교하면 오도리
08 : 05분, 「곡릉천」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탱크 저지를 위해 설치해 놓은 옹벽을 지나면 집이 서너 채 있는「오도리」마을에 도착을 하게 된다. 오늘 산행의 출발지가 된다. 우선 탱크방어벽을 설치 해 놓은 곡릉천 둑에 차를 주차시키고 산행 준비를 했다.
장명산 들머리 『오도리(吾道里)』는 조선시대 교하군 청암면 지역으로, 오두말 또는 오도촌이라 하였는데 방촌 황희의 예장 당시 문종의 교시에 힘입어 이 마을 선비들이 문학에 전념하여 정도를 받아 널리 이름을 떨치자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따라 대골, 메누미, 당하리, 당재를 병합하여 오도리라 해서 파주군 청석면에 소속되었다가, 1934년 와석면과 청석면이 합하여 교하면 이 되자 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지명총람 권 18, p272
(2) 곡릉천
그리고 한북정맥이 소멸하는 『곡릉천』은 경기도 양주군·고양시·파주시를 서류하여 한강에 흘러드는 강으로 일명 「가둔천(佳鈍川)」이라고도 한다. 길이 53.75km.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있는 챌봉(51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고양시 고봉동, 파주시 조리면, 금촌읍 일대를 지나 파주시 탄현면 송촌리 북쪽에서 한강 하류 동쪽으로 흘러든다.
이 강의 중류지역인 고양 부근은 심천(深川), 조리면 부근은 봉일천(奉日川), 금촌읍 남쪽은 금성진(金城津), 하류인 교하부근은 방천(防川)이라 부른다.
조선 제8대 예종의 추존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이 조리면에 들어선 후, 공릉천(恭陵川)으로 부른 것이 곡릉천으로 변하면서 한자 표기도 바뀌어진 듯하다. 이 강유역에는 봉일천의 공릉을 비롯, 공양왕릉, 서삼릉(西三陵:禧陵·孝陵·睿陵), 일영의 온릉(溫陵), 탄현면의 장릉(長陵), 백제의 최영장군 묘 등 많은 능묘가 산재해 있다. 그리고 서울 근교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송추유원지와 일영유원지가 있어 도시인들의 휴식처를 제공해 준다.
이 강유역의 주산물인 쌀은 예로부터 교하미(交河米)라 하여 여주미·이천미에 비견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였다. 특히 강에서 잡은 게는 궁중에 올리던 진상품이었다. 이곳의 강변을 따라 남과 북을 이어주는 통일로(統一路)가 개설되어 있으며, 이 도로는 예로부터 서울-평양 간을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출처> 곡릉천사람들
[3] 吾道里 都堂 山神祭 터
08 : 20분, 한북정맥 출발점 들머리에서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한 후 계단을 밟고 올라 진행하기를 10여 분, 吾道里 都堂 山神祭를 올리는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제단으로 쓰이는 넓은 반석(약 2×1.5m 자연석) 뒤로 향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경고문에「이 지역은 오도리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대대로 해마다 都堂 山神祭를 올리는 곳으로서 제단 내에 있는 향나무는 교하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만약에 훼손할 때는 神의 詛呪와 법적조치는 물론 주민들의 거대한 징벌이 있을 것을 강력히 경고함. / 1997년 12월 3일 / 교하면장, 주민일동」라고 경고를 해 놓았다.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한북정맥 종주를 시작하는 우리로서는 이 신령스러운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祭壇(磐石)에 술 한 잔 올리고 한북정맥 종주를 아무 탈 없이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도당 산신령께 큰 절을 올렸다.
◆「都堂굿」이란?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행해지는 마을 굿의 하나로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과 풍요를 목적으로 해마다 또는 해를 걸러 정초나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마을에서 행하는 굿이다.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에서 강신무들이 행하는 굿과 수원·인천 등지에서 세습무들이 하는 굿으로 나눌 수 있다. 굿을 하기에 앞서 마을에서는 주민 가운데 초상이나 해산을 치르지 않은 깨끗한 사람을 골라 제관으로 선정하고 추렴을 해 비용을 마련하며, 택일을 한 뒤에는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는 등의 준비를 한다.
도당굿은 堂골 무당이 중심이 되어 의례를 담당하는데, 강신무권과 세습무권의 굿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골격은 유사하다. 먼저 부정굿으로 굿당의 부정을 깨끗이 한 후 도당신을 모신다. 이때에는 주민중의 하나가 대를 잡아 신이 오신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어 굿패들은 돌돌이를 하는데 이는 도당신을 앞세우고 무악을 올리면서 마을의 사방과 우물,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잡귀를 몰아내고 마을을 정화하는 의식이다. 굿당으로 돌아오면 무속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여러 신들을 모시게 되는데 복을 주는 제석, 마을의 신인 본향, 천연두신인 손님, 장수신으로 마을의 잡귀를 쫓아주는 군웅 등을 모셔 굿을 한 뒤 뒷전으로 수비를 풀어먹이면 굿은 모두 끝나게 된다.
도당굿은 남부의 당산굿이나 북부의 대동굿, 동해안지역의 별신굿 등과 유사한 마을굿으로 제의인 동시에 축제로서 마을 구성원들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기·예능보유자에 오수복(吳壽福)·조한춘(趙漢春, 1995 해제)이 있다.
<출처>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5d0190a
[4] 漢北正脈의 끝지점 『長命山』
도당 산신제 제단을 뒤로하고 넓게 난 길을 따라 진행하다보니 좌측으로 산 하나가 완전히 잘려나간 절개지가 보인다. 교하 건축 폐기물 매립지다. 절개지 좌측으로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폐기물 매립지 공사로 갈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지나 온 도당 산신제 터가『장명산』인가 아니면 절개지 옆에 있는 산이『장명산』인가 의구심을 가지며 가기 쉬운 넓은 길을 따라 진행을 했다. 산행 후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니 매립지 좌측의 봉우리가 『長命山』산이다. 정맥산행을 한다면서 시작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2구간 산행 때 漢北正脈이 脈을 다하는『長命山』頂上에 꼭 흔적을 남겨야 할 것 같다.
『장명산(長命山), 101.1m』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오도리와 당하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임진왜란 때 「장명(長命)」이란 장수가 이곳에서 왜병을 무찔렀다고 한다.
<출처> 한국지명총람 권 18, p 263
아마도 『長命山』이란 地名은 이 장수의 이름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장명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 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 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 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아이를 갖지 못한 양반님네 부인들이 매년 음력 9월 9일 에 장명산에 내려와서 약수 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어서 아이를 갖게 된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구절초는 여자의 냉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출처> 파주문화원 향토자료 한마당
http://www.pajucc.or.kr/renew_html/index.php
[5] 동네 길인가 정맥 길인가
도당 산신제 터를 뒤로한지 약 10여분 후(10 : 00)을 해 「미진사」앞을 지나 포장도로를 우측에 두고 산길로 진행을 했다. 잠시 후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포장도로로 내려서서 직진을 하니 7095부대 제2포대(백마혼) 후문?이 나온다.(10 : 05분경) 후미로 따라오던 박사장, 앞서가고 있는 우리를 불러 세우며 되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까지 후진,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무심코 직진을 한 것이다. 마을길을 지날 때 흔히 하는 알바다.
[6] 핑고개(氷峴洞)
10 : 12분경, 2차선 포장도로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핑고개』다.『핑고개』! 이름도 참 요상하다.
산행 후 『핑고개』지명이 궁금하여 인터넷 여러 곳을 뒤졌으나 마땅한 설명이 없다. 한국 지명총람 교하면 교하리편(권 18, p269)을 찾아보니『핑고재=빙현, 氷峴洞』은 함박골(동편말=교하 동쪽에 있는 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氷庫(얼음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빙(氷)」을 다소 거세게 발음한데서「핑고개」로 불려 지지 않았나 싶다.
[7] 성재암(聖在菴)
핑고개를 뒤로한지 몇 걸음, 교하중학교 교문 도착했다. 교하중학교는 漢水以北, 북한과의 접경지역으로 학교 이름만 익히 들어온 터라 어떤 학교인가 싶어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생각과는 달리 학교의 규모가 꾀 크다. 그리고 시설도 도심 학교를 능가하지 않나 싶다.
학교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군부대 울타리를 끼고 쉬엄쉬엄 진행하니『성재암』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성재암(聖在菴)』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 279번지」에 있는 암자로 조선왕조 세조(재위-1455~1468) 비 「정희왕후 윤씨」가 창건한 가람이라고 한다.
戊辰年((1448년) 妃의 친정아버지 파평부원군(윤번)이 卒하고 丙子年((1456)에 친정어머니 흥령부대부인 仁川李氏가 卒하매 애통한 나머지 의경세자(성종의 생부, 추존 덕종대왕)을 보내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36칸의 가람을 창건하여 『성재암』이라 賜額하였다. 그리고 왕비께서 木佛을 조성하여 봉안하시고 수행하는 스님 20여분을 상주케 하였다.
파평윤씨 종중은 경내에 파평부원군 내외분의 재실인 본방능재를 짓고 족보편찬 사업도 하였던 곳이다. 중종(재위-1506~1544) 29년 甲午年(1534)에 왕비 문정왕후의 친정아버지 파산부원군 윤지임이 卒하매 수행하는 스님을 더 많이 상주케 하므로 더 번창하다가 乙丑年(1565) 문정왕후가 붕어하시고 숭유억불책과 왜란·호란 등으로 점점 쇠락하다가 왜정말기 끝까지 수호하던 강덕홍 스님이 광탄 보광사 수구암으로 목불상을 옮겨 모신 후 사실상 폐찰이 되다시피 되고 6.25사변으로 남은 건물마저 헐려진 것을 1994년 파평윤씨교하종중에서 현 위치 부지 500평을 시주하여 성재암을 중건하고 1996년 수구암에서 목불상을 환봉하여 모시고 후일 또 파평윤씨 교하종중에서 2000여 평의 땅을 사용 승낙 하니 금일에 이르러서야 옛 가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게 된 것이다.
경내에는 약 550년 된 「聖在井」이라는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다. <퍼온글>
[8] 坡州市 多栗里 및 堂下里 支石墓
마음과 시간 여유를 갖지 못해 성재암을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 잠시 내려가니『다율리 및 당하리 지석묘군 0.2km』표지판과 「
坡平尹氏 貞靖公波 墓域 入口」표지석이 눈에 띈다. 선사시대 유적지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지석묘 표지판을 세워 놓은 삼거리에서 약 20m 떨어져 있는 지석묘를 찾았다.
보호 철책 안에 투박한 석판 하나
가 놓여 있고 철책 밖에는 지석묘에 대한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파주 다율리 및 당하리 지석묘군(坡州市 多栗里 및 堂下里 支石墓群)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산4-1, 당하리5-1, 교하리49-1
고인돌(지석묘)이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굄돌을 지상에 세워서 돌방을 이루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 놓는 탁자식과 무덤방이 땅속에 있으면서 받침돌에 덮개돌이 놓인 바둑판식, 맨 땅 위에 덮개돌이 놓인 개석식으로 구분된다. 현재 우리나라 전역에 약 3萬 基정도 남아 있다.
다율리, 당하리 고인돌은 여러 형태의 고인돌 군으로 다율리와 당하리가 연결되는 산줄기 외 구릉 능선에 일정한 방향으로 100여기가 남아 있었다. 대부분 군사시설물과 교하중학교를 만들 때 파괴되어, 현재는 25기만이 남아 있다. 」라고 안내를 해 놓았다.
坡州市 多栗里 및 堂下里 유적은 1993년 발
굴 조사되었는데 형식은 개석식 고이돌이며, 무덤방은 풍화 암반을 조금 판 다음 막돌을 쌓아 만들었다. 껴묻거리(주검을 묻을 때 연모나 그릇 또는 장식품을 함께 묻는 일. 부장)는 간돌검을 비롯하여 돌끌 돌화살촉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고인돌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사된 집터 안에서는 완전한 구멍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민무늬토기 간돌검 반달돌칼 가락바퀴(물레로 실을 자을 때 쓰이는 가락에 끼워 그 회전을 돕는 바퀴. 방추차) 등이 발견되었다. 한편 발굴된 다율리 고인돌 일부는 경기도청 통일로 온양민속박물관에 이전 복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 지석묘가 산재되어 있는「다율리(多栗里)와 당하리(堂下里)」는 어떤 마을인가?
『다율리(多栗里=한바미, 한밤, 일야미, 다율)』는 조선시대 교하군 청암면 지역으로, 밤이 많이 나므로 한바미 (一夜味)·한밤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다율리 일부 지역은 와석면 목동리로 떨어져 나가고 그 나머지를 그대로 다율리라 하여 파주군 청석면에 소속되었다. 1934년 와석면과 청석면이 합 하여 교하면이 되자 이에 편제되었으며 『당하리(堂下里=당아래, 당하)』는 조선시대 교하군 와동면 지역으로, 산제당 아래가 되므로 당아래 또는 당하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당하리 일부 지역이 교하리로 떨어져 나가고 그 나머지를 그대로 당하리라 해서 파주군 와 석면에 소속되었다. 1934년 와석면과 청석면이 합하여 교하면이 되자 이에 편제되었다고 한다.
[9] 큰마을이 저기다.
지석묘를 돌아보고 다시 삼거리로 나와 편안한 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여「생명교회」를 지나고 5분여를 더 가니 신축 아파트 단지(월드메르디앙)가 나온다. 박사장, 지도를 보며 정맥길을 찾는 동안 아파트 단지 공원에서 홍교장이 꺼내 놓은 빵과 가래떡으로 간식을 하며 휴식.
넉넉하게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 11 : 05분,「경기인력개발원」건물을 지나 가람마을 사거리에 도착을 했다. 도로가 새로 뚫리고 신축 아파트와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교하 신도시 지역이라 안내를 맡은 박사장, 지도를 연신 보면서도 정맥 길을 찾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가다 쉬기를 거듭하며 골프연습장을 지나 일산가구단지 사거리에 도착했다. 좌측으로, 우측으로, 직진을 해야 할 지 한참 망설이다 우측 큰마을 아파트를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비로소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찾은 모양이다.
[10] 교하 신도시를 벗어나다.
11 : 50분 큰마을 아파트 단지 입구 광성교회 앞 도착, 예배가 막 끝났는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사람들 틈을 겨우 비집고 나와 큰마을 아파트 단지로 진입, 큰마을 슈퍼에서 직진, 아파트 정문을 통과니 호곡중학교 건물이 나타난다. 호곡중학교 뒷길을 따라 잠시 진행을 하니 소나무 숲을 이룬 산길 오르막이 시작된다. 비로소 도심을 벗어난 모양이다.
[11] 108봉에서의 조망
모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오르기를 약 7분, 군부대 철망이 설치된 능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좌측으로 진행, 12 : 20분, 峰에 올랐다. 108봉이라 표시 된 코팅지가 나무에 매달려 있고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다. 조망도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다. 휴식 겸 주변 조망을 하고 삼거리 벤취로 되돌아 와 김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군부대 철망을 따라 우측으로 진행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곳을 찾는지 운동시설도 마련이 되 있다. 운동시설물을 뒤로하고 잠시 더 진행하니 폐 골프 연습장이 나온다.
[12] 6.25때 양민학살의 현장 『금정굴』
12 : 40분, 6.25때 양민학살의 현장이라는 안내판과 고양, 일산 양민학살 유가족회 사무실이라는 판자건물이 있는『금정굴』에 도착했다.
소나무에는 양민학살에 대한 대형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이곳에 위치한 금정굴은 1950년 6.25전쟁 중 9. 28 수복으로 점령중인 북한군이 후퇴하자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부역자 가족들 남.여 노소를 비롯 억울한 사람들이 반공단체와 경찰에 의해 대량으로 집단 학살 된 곳이다. 수복 후에는 실제 죄익활동자는 월북한 후여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죄가 없어 피신할 필요가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개인감정을 가진 사람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 학살담당 책임자인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은 불법 학살자에 대한 책임으로 파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그 후로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재산도 잃고 사회적 활동도 마음대로 하지못하며 온갖 어려움을 겪고 살아오고 있고 44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 와서 떳떳하게 성묘한번 데대로 못하고 있다. 이에 일부나마 유가족들이 모여 “일산 금정굴 가족회”를 결성하고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및 유골의 발굴 안장을 추진하고 대통령과 국회 등 각계 요로에 “청원서 · 탄원서”를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라서 언젠가는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며 후손들의 명예회복과 나아가 “용서와 화해”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민족의 숙원인 조국의 평화통일에 미력이나마 기여하고자 안내문을 세우게 되었다. / 1994. 6. 11 / 고양 · 일산(금정굴) 양민피학살 유가족회 / 대표 : 서병규, 총무 : 마임순, 사무장 : 김국환 / 전화 (02) 305-4683, (02) 546-5716, (0348) 941-6811」라는 금정굴 양민학살에 대한 안내문을 세우게 된 연유를 제시해 놓았다.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을 認知하지 못한 터라 안내문과 사무실 벽에 부착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니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워 진다.
◆ 금정굴(6.25때 양민학살 현장)
고양시 탄현동 고봉산 기슭에 소재한 금정굴(일제시대 건설된 수직 폐광굴)은 1950년 10월∼11월(약 1개월간) 오전 11:00∼12:00 사이 1950년 9.28일 수복 후 임의로 조직된 치안대, 태극단, 경찰 등이 부역을 한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물론 소극적인 부역자 및 개인감정이 있는 사람까지 포함)들을 당시 경찰서장인 이무영과 치안대장 이경하의 주도와 지시 하에 적법절차 없이 경찰서 창고에 가두고 모진 고문과 식사도 제공치 않으면서 이 금정굴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고양군에서 사망한 피학살자 수는 약 1,000여명 이상이며 여자와 어린이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정굴』이 있는 이 산을『황룡산(黃龍山)』이라고 한다. 『황룡산(黃龍山)』은 「성석동」과 「탄현동」 및 「파주시」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134m의 산으로 『고봉산』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북쪽으로 이어져 있으며 일산구의 가장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 아래에 이천우 선생의 묘와 용강서원이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경의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황룡산(黃龍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성석동 두테비 마을의 두꺼비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부터 황룡산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 두테비 마을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의해 매년 피해를 보았다.
이무기가 유독 이 마을의 사람들을 괴롭힌 것은 황룡산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려는 순간, 두테비 마을 사람의 부정한 모습이 목격되어 용으로 승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이무기는 두테비 마을 사람들을 해쳤다. 이무기가 나타날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부근을 지나던 한 장수가 이무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큰 두꺼비이니 마을 사람이 모두 힘을 합쳐 황룡산이 바라다 보이는 산꼭대기에 이무기를 물리칠 두꺼비상을 만들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바위를 만드니 과연 이 두꺼비를 무서워한 이무기는 나타나지 못하고 그 후론 해코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출처> 일산의 지명 유래 및 설화
http://www.ziwol.net/ziwol/ilsan/pointsulha.htm
[13] 중산고개
12 : 45분, 금정굴과 양민학살 진상규명 안내, 그리고 사진자료 등을 살펴 본 후 고봉산 삼거리 고개마루에 내려섰다. 『중산고개』에 도착을 한 것이다. 98번 국도 6차선 도로가 지나는 고봉산삼거리『중산고개』는 일산동구와 서구의 결계가 되는 곳이다. 도로 건너편에 고봉산 SK주유소가 있고 그 옆으로 순두부 마을, 고봉산 명가 쌈밥, 그리고 산자락 밑에 중산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중산」이란 명칭은 고봉산이 오래전부터 고양지역의 역사와 행정의 중심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며 시 승격전에 이 지역을 중면이라 부른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출처> http://dong.goyang.go.kr/jungsan/main.html
[14] 고봉산 오르는 길
도로를 횡단하여 순두부 마을과 고봉산 명가 쌈밥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가니 「고봉정」이 나온다. 탄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봉정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오르기를 3분, 헬기장을 지나 잠시 오르니「장사바위」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약 50여 m를 올랐는가? 두 개의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인 모양이다.
「장수바위」를 뒤로한지 5, 6분, 통신탑이 우뚝 솟아 있는 고봉산 정상 밑 삼거리에 도착했다.
[15] 고봉산(高峰山, 208.3m)
『고봉산(高峰山, 208.3m)』은 일산구 일산2동과 고봉동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양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또한 일산동 중산마을과 성석동 잣골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산 아래에는 중산말, 잣골, 사당말, 등의 자연촌락이 있다.
고봉산을 테미산, 퇴뫼산, 태매산, 대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봉산 일대는 한강과 북쪽지방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漢城을 점령하는데 전략적 요충지로 이곳을 관리 하였으며 고봉산 봉수대는 봉수 중에 가장 큰 직봉으로 5개의 봉혈이 있고, 나라의 제4노선 봉수대로 파주 형제봉(고령산)에서 받아 동남쪽 방향으로 봉수 전달하든 곳이다.
◆ 高峰山과 韓氏 美女
봉수(烽燧)와 관련하여 고구려 왕자와 이곳에 살던 미녀 한주(韓珠)라는 아가씨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고구려로부터 되찾은 이 고장을 백제가 다스리던 시절 개백현[고양시]에는 미모가 뛰어나기로 이름난 한주(韓珠)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어느 봄날 한주 아가씨가 나들이 나갔다가 얼굴이 준수하게 생긴 청년을 만나서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청년은 백제에게 빼앗긴 이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변복을 하고 숨어든 고구려의 태자였다. 한주 아가씨와 결혼을 굳게 언약한 왕자는 고구려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구려 22대 안장왕(安藏王)이었다. 한(韓) 처자와 약속한 대로 안장왕은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을밀 장군에게 결사대 20명을 주어 한주를 탐하는 이 고장 태수를 죽이고 사랑하는 여인 한주(韓珠)를 구하게 하였다. 한주를 구한 을밀 장군은 높은 산에 올라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안장왕에게 봉화를 올려 구함을 받아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烽火를 올린 이 산을 『고봉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런 전설을 두고 향토학자들이 고양시와 파주시에 있는 지명과 연관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逢日川’(봉일천)은 왕을 만난 날이라 해서 逢日川(봉일천)이요, 옛날 이 고장에 있던 '王逢‘(왕봉)이라는 지명은 임금 ‘王’(왕), 만날 ‘逢’(봉)으로 위 전설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봉산(高峰山)'의 '高峰'(고봉)도 ‘高逢’(고봉)과 음이 같아서 고구려 '高', 만날 '逢'으로 고구려 왕을 만났다는 위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 고봉산의 또 다른 이름 『태미산』
『고봉산』을 일명 『태미산』이라고도 하는데 『태미산』이라 부르게 된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옛날에 심학산(파주)과 고봉산(고양)에 각각 두 장수가 살고 있었다. 고봉산 장사는 몸집이 크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반면에 심학산 장사는 고봉산 장사보다는 체구가 작고 심약한 장사였다. 그 체구를 믿고 고봉산 장사가 심학산 장사를 만나면 항상 무시하고 놀렸다. 심학산이 육산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 장사가 고봉산의 바위들을 심학산으로 옮기며 산을 꾸미고 있는데 고봉산 장사는 이를 빈정대며 계속 놀렸다. 이에 격분한 심학산 장사가 불같이 화가 나서 옮기던 바위를 고봉산 장사에게 힘껏 던져서 그를 쓰러뜨렸다. 그래서 고봉산 정상이 움푹 파이게 되었는데 이를 멀리서 보면 이마에 테를 두른 것 같이 보인다 해서 고봉산을 『태미산』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16] 高峰山城
고봉산 정상은 군사 시설물 통신탑이 있어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측 산허리로 돌아나갔다. 「영천사」표지판과 5895부대 입구 삼거리고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13 : 19)했다. 차를 파는 아주머니도 있고 5895부대 입구 맞은편으로 큰 길이 나있고 사람들의 왕래도 많다. 더하여 낡은 표시기도 보이고 --- 정맥길이라 생각하고 5895부대 입구 맞은편 길로 진행, 곧이어 넓은 헬기장(13 : 19)이 나온다. 헬기장에는 삼각점과 체육 기구, 그리고「고봉산성」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 고봉산성(高峰山城)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 유적 성격 및 규모 : 테뫼식 석축 산성(해발 208.8m, 둘레 360m
고봉산은 평야지대에 솟아 있어 사방이 잘 조망되는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고양현 고적조에 의하면 ‘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피우고 고구려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훗날 ‘왕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와 관련된 한씨 미녀와 안정왕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산성은 고봉산의 9부 능선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남북이 긴 장타원형이며 성벽은 동쪽과 남쪽 성벽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주로 30~40cm 크기로 지석된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했으며, 일부분에서는 쐐기돌을 사용한 흔적도 확인된다. 성의 남서쪽 회절부에는 치성(雉城) 1기가 남아 있다. 치성의 쪽은 약 10m 가량이며 바깥쪽으로 15~20m 크기의 반원형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자리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성 내부에 조성된 유구의 흔적은 군사시설로 인하여 찾아보기 어렵고, 군 시설의 외곽에 성벽을 따라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 군부대 아래쪽의 참호 주변에서 많은 양의 통일신라 경질 토기 파편과 기와편이 확인되고 있다. <고양시>」라 안내를 해 놓았다.
[17] 『성동재』는 어딘가?
급히 산성 안내판을 훑어보고 헬기장을 가로질러 진행, 잠시 후 또 하나의 헬기장을 지나 내리막 길 삼거리에 도착을 했다. 이쯤이면 정맥 표지기가 하나쯤을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잘못 가고 있는 듯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지도에 표시 된『성동재』를 물어보니 모른다고 한다. 몇 사람을 잡고 물어도 같은 대답이다. 다행히 한 사람이 지도를 보더니 되돌아 가 시멘트포장길을 따라가라고 일러준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가던 길은 고양 올레길이였다.
부대 입구 사거리로 되돌아 와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니 정맥 표지기가 눈에 띈다. 13 : 45분경, 『만경사』 입구에 도착(13 : 45)했다. 『만경사』입구에는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고 규모가 작은 사찰이다.
13 : 55분, 오늘 산행의 종착지 『성동재』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고개 마루에는 성석동, 증산동, 만경사 입구, 석수오리 등 여러 개의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고 길을 건너로 참빛교회가 있다. 고봉산 오르는 만경사 입구에서 좌측으로 약 30m를 내려가「잣골」 버스정류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201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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