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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진아 안녕!
질문 감사하구나.. 안식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음도 애진이를 향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인줄 믿는다. 애진이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안식의 개념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있는 많은 한국교회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안식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애진이가 속한 지상교회의 회복을 위한 지체로서의 당연한 귀결이며,또한 지상교회를 향한 필연적인 기도의 조건이기에 아래에 제시할 안식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래의 글들은 애진이의 안식의 바른 이해에 대해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글의 소재는 나에게도 신앙의 큰 지침이 되어 주셨던 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이천우 목사님의 싸이트에서 발췌한 장수민 목사님의 안식에 대한 글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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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안식일의 신약적 적용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세기 2장 1-3절)
이 시대의 교회는 안식일, 곧 주일을 성수하는 문제에 대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을 쉬고 노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안하고 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창조 세계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십니다. 이런 원리를 따라 성도들이 지키는 안식의 원리는 게으름과 나태인 것이 아니고, 더더욱 바쁘고 열심을 내는 데서 오는 안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구원의 원리
육일 창조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속에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왜 교회라고 하는 형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모범을 계승하여야 합니다. 이 두 문제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함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구원의 원리'와 '하나님의 나라 사상'이 피차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관계를 묶어주는 중요한 원리는 연합 개념입니다.
인류가 처음에 지음을 받았을 때 그는 단순히 개인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묘하신 신비의 경륜으로서 인류를 지으셨고 또한 거기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거룩한 생명을 공유한 지체들이 피차 연합함으로 신비스럽게 일체를 이름으로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적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신비적 연합'이 바로 핵심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근본이고, 계속해서 그분의 생명을 공유한 다른 지체들과도 연합하여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회가 우주적으로 건설되게 하시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내실 때 가지신 생각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하여 '신비적 일체'에 대한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동일한 의미로 '교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란 단순히 기독교적 양상을 띄는 종교인들이 모여서 적당한 조직을 구성하고, 거기에 입각하여 나름대로의 교회적인 사역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서는 결코 형성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서 한 몸으로 연합하는 사실을 반석으로 하는 데서 나오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마 16:18).
태초의 에덴 동산에 전개되어졌던 하나님의 나라의 상황이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전형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신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사실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아이디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셔서 성취하신 일은, 사실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그 일 - 하나님의 나라를 공동체적으로 이루는 일 - 의 회복과 완성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출발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요, 그리하여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하여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담 부부는 이 일을 보존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만일 당시의 시점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다리를 딛고 올라감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체를 구현하는 그 영광의 정점에까지 발전하여 갔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상은 온전히 성취될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으로서의 아담과 하와의 존재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는 곧 교회였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한 정점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이렇게 최초의 인간은 교회의 충만한 구현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의도되어졌으며,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를 다시금 회복하셨습니다. 이 중요한 원리를 깨달은 바울은 말하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에베소서 3:9-11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가 된 것은 영원부터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경륜으로서의 비밀"이라고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일 창조 역사 당시 때부터 의도되었던 '비밀의 경륜'(administration of the mystery)입니다(9절). 태초의 인간 아담은 바로 이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이후에 존재하게 될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그렇게 존재하였습니다.
참으로 아담은 개인의 자격 혹은 단순히 한 인간의 신분으로써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신비적 연합의 사회를 구성하는 그 출발자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실패했고, 따라서 후손들에게 생명이 아닌, 심판과 저주를 물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를 대표한 대리인으로의 지위를 지키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를 통하여 번식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실패를 영원히 회복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태초의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곧 '교회적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고려하면 우리가 교회를 이룸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체가 되는 관계를 추구해 나간다는 것이, 쉽게 잘못 생각하고 있듯이 개인적인 경건성의 발휘를 통하여 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교회 공동체적으로 되는 것이며, 또한 자기가 속한 시대와만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모든 시간과 관련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태초부터 종말의 때까지의 역사 속에서 택함을 입은 자로 존재하는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는 공동체인 까닭에, 과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는 시간으로서의 역사의 연속성을 두고서 달성되어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 때문에 한 시대의 한 지교회가 교회다웁게 존재해 나가는 일은 자연히 역사적인 성격과 사회적인 성격을 수반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으로서의 교회를 구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은, 역사의 진행이라는 가도 위에서 성취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또한 개인주의를 벗어나 오직 공동의 사회로서 다 함께 성취해 나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연합됨을 통하여서만이 발생하며, 개인의 성숙은 공동체의 성숙과 더불어 이루어지며, 개인의 사명 또한 공동체의 시대적 사명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안식일 계시
이제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암시 역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때의 상황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제 칠일 째에 이르러 더 이상의 사역이 필요치 않게 됨으로 인하여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일곱 째날이 이르자 특별한 계시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安息)하셨기 때문입니다(창 2:1-3). 또한 여호와께서는 이 날을 특별히 다른 날과 구별하여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구별됨으로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란 '구별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날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으로 쉬셨기 때문인 것이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날을 대대로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놀라운 역사를 인식하고, 당신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크신 사랑과 은총을 되새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태초의 인간은 비록 평소에 신성한 노동의 의무를 지고 있을지라도, 이 날만은 다른 날들과 구별하여 사용하여야 했습니다. 즉 이 날을 거룩히 여겨 안식을 누려야 하였습니다. 이 평온한 쉼의 날, 곧 안식의 날이 있음으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더더욱 깊이 알고 또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안식일이 제공해 주는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까지도 죄로 말미암아 여지 없이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친 안식일 규례는, 백성들을 하나님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온갖 무거운 짐이 되어 백성들을 짓눌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실례를 들라치면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불행한 것은 이런 일이 이 시대의 교회를 통해서까지 잘못 되풀이 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주일을 지킬 때에 구약시대 사람들이 지켰던 방식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답습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제법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경우를 보면, 주일을 이해함에 있어서 구약시대 때의 안식일이란 것이 단순히 일요일로 변경된 차원에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도의 생각밖에 가지지 못한 까닭에 보통 주일을 지킨다고 할 때에, 그 모습이란 것이 구약시대 사람들이 지켰던 정도의 형식과 습관을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안식일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초래되는 현상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이상한 방식으로 갖 가지 안식일 규례를 만들어내었고, 엄격히 요구함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이들의 안식일 개념은 창조와 구속의 원리에 기반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는 원리
그러면 이 시대의 교회는 과연 창조 역사에서 나타난 안식일의 원리를 어떤 방식으로 적용해야 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안식일과 주일은 어떤 원리 안에서 연속성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이 창조 원리와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 규례는 창조시부터 제정되었습니다. 죄와 상관이 없던 때부터 이 질서는 창조 원리에 속하여 시작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을 친히 지키셨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를 안식하는 이 원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고, 다음날에 쉬신 사실로부터 취해진 것입니다.
둘째, 창조의 질서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재창조 사역인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구속 사역의 목적은 타락한 창조 세계를 처음의 상태와 목에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까닭에 구속이 적용되는 세계 속에서 안식일의 원리는 당연히 구현되어야 한다고 사실은 자명해집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넷째 계명을 통하여 분명하게 명시되었는데(출 20:11), 이때 이 안식일 준수 명령은 구속의 사실에다 근거를 둡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모세는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이 안식일 명령이 갖는 구속적 전거와 제제를 분명하게 밝혔고, 둘을 서로 연결시켰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셋째, 이스라엘에 있어서 출애굽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더 큰 구속의 유비요, 모형입니다. 이런 까닭에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안식일 계명은 유효하며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주일날로 바뀌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원리 때문에 합당한 근거가 있고, 따라서 바뀌는 것이 당연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출애굽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런데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부활을 통하여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칭의의 근거가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은 부활하신 사실을 통하여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주일날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합당하고, 당연히 이날을 진정한 안식일로 여겨야 합니다.
넷째, 신약시대의 안식일인 주일을 지키는 원리는 삼중적입니다. 과거와 관련해서는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이는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는 근거로 작용합니다. 현재적으로는 성도에게 이루어진 영적 부활의 기쁨 - 이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을 가리킨다 - 을 실제로 누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이 이루어 나가시는 왕노릇하는 권세에 참여합니다. 미래적으로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유업을 맛보고 바라봅니다. 이 안식을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게 될 참 안식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히 4:9). 그런데 이 일은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어전에 부복하여 그분을 알현하는 바, 예배를 통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집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가운데 하루인 주일날은 분명 엿새 간의 노동으로부터 따로 떼어짐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 날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됨으로 거룩해져야 합니다.
맺는 말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안식일, 곧 주일을 성수하는 문제에 대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을 쉬고 노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안하고 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창조 세계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십니다. 이런 원리를 따라 성도들이 지키는 안식의 원리는 게으름과 나태인 것이 아니고, 더더욱 바쁘고 열심을 내는 데서 오는 안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엿새 동안의 일로부터 분명히 구별되는 휴식이어야 하되, 하나님 안에서의 휴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의 쉼이나 노동의 그침을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보다 특별한 어떤 목적을 위한 안식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때에 성도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쉼을 맛볼 것이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자유의 의미를 이론으로만 아는 까닭에 이를 악용함으로, 나태와 방종의 악을 가리우는 기회로 삼는 자들은 안식의 미명 아래 단순히 휴식하고 노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신 자유를 실제로 맛볼 때에 특별히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증대시켜 나가는 데에서 이것의 의미를 찾는 자들은, 안식의 참 맛을 더더욱 증대시키고 누리기 위하여 예배와 묵상과 기도와 찬양에 마음과 뜻을 다하여 힘 쓸 것입니다. 아멘.(*)
(본 1강은 장수민목사의 '안식일의 신약적 적용' 을 텍스트로 삼아 만든 것임)
첫댓글 아... 그렇구나...먼저 제 맘을 다시금 확인하고 잡아야 될 것 같아요. 일요일날 바쁜다는 것을.. 결코 무의미한 노동마냥 그저 지쳐 헥헥 거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 주님을 위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그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제 스스로가 매 순간 주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준비 한다면 변화가 있을것 같아요. 이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