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구 김근성" 제3화 □
우리 친구 김 근 성
장맛비가 시작되는 2008년 6월 18일 수요일 낮. 전전날 본부지역 동기회 월례회에서 의견을 모은 김 근성 군의 문안 방문을 위하여 고교 학창시절 김 근성 군과 가장 가까이 지내 온 오랜 친구인 이 균대 군의 승용차로 이 균대, 김 민수(노송회 지역 총무) 군과 함께 마산을 출발, 최근 부산으로 이사한 박 희철(본부지역 동기회 부회장) 군과 부산대학병원 앞에서 합류하여, 병원 후문 옆을 끼고 감천 방향 까치고갯길로 가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들고 위를 향하여 바라보니 유럽의 성채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거기가 바로 김 근성 군이 있는 정신요양시설 ‘그리스도요양원’이라고 한다.
까치고개 마루 끝에서부터 감천고개 길이 시작되는데, 이 언덕 빼기에 자리 잡고 정신장애우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그리스도요양원은 1953년도에 설립되어 정신분열증, 우울증, 치매, 알콜중독, 정신지체 등의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300여명의 환우들을 보호, 치료, 재활하는 등을 하는 곳.
이 요양소에 왜? 무엇 때문에? 우리 친구 김 근성 군이 와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 면회를 신청하고 기다리니 병동 앞마당에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 균대 군의 말로는 “지금은 담배피우는 시간이니 틀림없이 김 근성 군도 여기 있을 것이다”고 하여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고 있는데, 왠 낯선 노인 같은 이가 씨~익 웃으면서 이 균대 군을 바라보고 다가오지 있지 않은가... 이를 보고 이 균대 군이 “아! 근성아”하며 바로 김 근성 군이라고 하는데...???!!!
고교시절의 어슴프레한 기억과 앨범으로 만 보아 온 모습을 상상하던 나로서는 정말 완전히 바뀐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반백에 앞이마가 완전히 벗겨진 대머리, 그리고 엉성하게 드물게 삐져나온 이빨, 그러나 적당히 살이 오른 신체와 주름살없는 팽팽한 얼굴로 보아 육제적으로는 건강한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다 같이 37년 만에 만나는 우리 친구 김 근성 군과 굳게 악수를 나누고, 마침 비가 그쳐 옥외 마당에서 약간의 담소를 나누면서 연신 피워 담배로 어슬픈 만남을 하게 되었다. 어둔하면서 활기없고 나지막한 말씨는 잘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환한 밝은 모습을 대하니 한편으로는 가벼운 마음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답답하고 씁쓰레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요양소 담당 간호사에게 김 근성 군의 생활 및 근황 등을 물으니, 김 근성 군은 평소 의욕이 별로 없고, 이 요양소에서 제공 하는 각종 오락, 교육 프로그램 등에도 잘 참여하지 않으며, 신문, 책 등도 읽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그래도 가지고 간 우리 동창회보 학연 최근호(4, 5, 6월)를 건네니 기꺼이 주머니에 넣으면서 가져가서 읽어 보겠다 한다. 앞으로는 이 요양소로 회보를 매월 발송하겠으니 보면서 같이 호흡하고 살아보자고 했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런지 의문이다. 오직 유일한 소일꺼리는 담배인 양 건네는 담배는 마다않고 연신 피워댄다. 담배마저 없으면 무슨 낙이 있을까 싶다. 하루 여섯 개비로 제한되는 담배는 흡연시간을 두고 옥외에서 만 가능하다고 한다.
가지고 간 카메라로 현재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이 균대 군은 고교 학창시절 같은 동네 친구인 김 근성 군을 찾고자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하다가, 작년 12월 옛날 김 근성 군이 살던 남부민동 집 이웃 주민으로부터 김 근성 군이 이곳 요양소에 있음을 알고 20여년 만에 슬픈 해후를 하게 되었음을 지난 1월호 동창회보 “학연”에 실은 바가 있다. 그 후 3월에 이 균대 군 혼자 2차 방문을 하였고(학연 4월호), 4월에 부산에 거주하는 또 같은 동네 친구인 지 현철 군이 방문하여, 가족, 친척, 친구도 없이 20여년간을 혼자 외로이 보낸 김 근성 군에게는 아마도 커다란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이제 우리는 김 근성 군이 어떠한 동기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어떤 짖누르는 압박감이 여기로 몰아 넣었는지? 20대 중반의 피 끓는 젊은 청년시절 어떠한 고통과 인내할 수 없는 울분이 정상인으로 살아 갈 수 없게 만들었는지? 과연 김 근성 군은 이 요양소에서 일생을 마감해야 하는지? 이 요양소에 나와 우리들과 같이 부대껴 가며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는 없는지?
월 4만원의 정부보조금이 고작인 생활비로는 담배 사피우면 남는 게 없을 것이고, 배고프면 생각나는 것이 맛있는 간식꺼리일터인데.... “돈 없으면 참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요양소 직원으로부터 도움을 줄 수 있는 입금계좌번호, 요양소 안내 팜플렛을 받아 들고, 헤어져 병동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아쉬움과 답답한 마음을 품은 채 발길을 돌려 어느새 이 균대 군의 단골이 되어 버린 자갈치시장의 ‘아까물회’ 집으로 향했다.
2008년 6월 20일 장맛비가 내리 날 아침
☞ 찾아 가는 길:
첫댓글 님들 잘 다녀오셨네요. 멀리있어 가보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함께하고 싶습니다. 옛날 이균대 동문 집에서 근성 동문 두어번 본적이 있었는데 몰라보게 달라졌네요. 요양소에서 나올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늘 위로를 받고 몸이 나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그저 애닯을 뿐입니다. 나아지기를... 그것도 아니면 좋아지기라도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