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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소수의 답변 불가능한 오류가 있어도 성경은 무오하다.
(2) 성경의 무오는 어떤 의미인가?
유명한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이란 성경 원문은 사실과 반대되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이미 알아본 대로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이보다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는 책에서 권연경 교수님이 말한 것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만일 성경의 객관적 사실들 자체가 나의 '무오' 교리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내가 가진 무오 교리가 애초부터 내가 가진 실제의 성경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자체를 택해야 할까 아니면 특정한 무오설 교리를 옹호해야 할까? 이런 성경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말한다면, 애초부터 우리의 고백은 그 목표를 잘못 잡고 있던 셈이다. ...
우리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그 신념이 성경의 구체적 면모와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고백은 성경보다 더 '거룩한' 허구적 성경에 대한 추상적 고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실 성경의 무오성은 성경에 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다음 구절들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잠언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마지막 구절의 '순전'도 '완전'을 뜻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구절들이 성경 원본에 어떤 사소한 오류도 없다는 의미일까요? 저자들의 의도가 진짜 그것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무엘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기서 '하나님의 도'는 무엇일까요? '도'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숫자일 수는 없습니다. 지명이나 인명 혹은 역사의 한 부분일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길입니다. 즉 마땅히 행할 길을 보여주는 계명들입니다. 계명들이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잠언 즉 교훈들입니다. 잠언이지 단순히 세부적인 어떤 정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교훈이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9:7-10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이 구절에 나오는 '율법'도 십계명을 비롯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계명들이지 세부적인 완벽한 정보가 아닙니다. 뒤에 나오는 '증거', '교훈', '계명'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도'로써 여호와를 경외하게 만드는 말씀들입니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의로우니"라는 말 안에도 이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하다거나 의롭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적법한 것에 대한 것이지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율법의 계명들이 완전하다는 것이지 정보의 세부적인 정확성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 이 구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에도 근본주의나 복음주의에서 주장하는 그런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근거 구절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수나 인명이나 지명 또는 사건이나 기적의 아부 미세한 부분까지 무오하게 전달하고자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을까요?
디모데후서 3:15-17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해 피터 데이비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신적 영감을 주장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런데 그 의도는 무엇인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딤후3:15-16)."
그러므로 이 5가지가 성경을 기록한 진짜 목적입니다.
먼저,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20장 31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5장 4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것이 성경 기록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무오성 역시 이 다섯 가지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한신대 모 교수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성경무오설이란 성경의 원본에서 사실(fact)과 어긋나는 어떤 것도 없다는 성경에 관한 교리이다. 성경무오설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은 연대기, 역사, 사회학, 심리학, 정치, 물리, 수학, 예술 등의 어떤 것에서도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좀 더 온건하게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과 그분의 이상, 목적, 그리고 인류를 향한 복음을 성취할 때에만 성경이 옳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저는 이 다섯 가지의 기초가 되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부터 출애굽기에 나오는 기적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사건과 기적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세부적인 정보들을 계시를 통해 바로잡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기록과 관련 있는 다음 구절들에도 얼핏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6:12-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이처럼 예수님이 성경저자들에게 약속한 정확성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외 진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나, 지명이나 인명 어떤 사건이나 기적의 미세한 부분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성경저자들의 사소한 오류를 바로잡아주는 계시를 주진 않으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아무리 원본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해도 남아 있는 원본이 없다'는 사실에 빗대어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리슨 아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전승된 성경 본문의 기초가 되는 무오한 원필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우리는 무오한 원본보다는 조금 못한 사본에 만족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계시를 위하여 무오성이 치명적으로까지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으므로 그 기록된 계시의 원래의 형태를 우리를 위하여 보존해 두시지는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원본 성경은 사라지고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사본들뿐입니다. 그런데 사본에는 여러 가지 오류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정도의 오류들에 별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같은 이유로 하나님이 사본뿐 아니라 원본에서도 일부 사소한 오류들을 계시를 통해 바로잡지 않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우리가 적절하게 빗대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원문에 문법에 맞지 않는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웨인 그루뎀의 지적입니다.
"(원어의 경우) 성경에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법 기준에 의하면)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그럼에도 무오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확실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말의 진실성에 있는 것이다."
그럼 묻겠습니다. 글을 이해하는 데 문법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부수적인 수나 인명이나 지명이 더 중요합니까? 당연히 문법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틀린 문법을 초자연적으로 바로잡아주시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런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수나 인명이나 지명에 관한 사소한 오류를 초자연적으로 바로잡고자 하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8절과 같은 오류가 성경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왜 성경에 이런 오류가 있느냐?" 라고 각을 세우면서 따지고 물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역으로 이렇게 반문하겠습니다.
"그런 부수적인 정보를 정확히 모른다고 문제 될 것이 있는가?"
복음이나 진리에 대한 표현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저는 과거에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곤혹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이 아닌데 피조물처럼 묘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 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피조된 존재임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리우스는 4세기 초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의미로 이 구절을 썼다면 그의 편지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민이 되었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문구를 통해 피조물 가운데 그분을 포함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맥이 예수님을 피조물 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15)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16)를 서로 비교해보십시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피조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불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라는 어구는 맏아들이라는 문자적인 뜻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장자를 특히 귀하게 여겼던 고대 관습에 바탕을 둔 비유적인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불렀고(프로토토코스 무 '나의 먼저 낳은 아들'=나의 장자, 출4:22). 시편 89편 27절에서 다윗에 대해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89편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로 가득하고 바울이 방금 전까지 그리스도를 메시아, 왕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2-14절). 그러므로 '프로토토코스'라는 단어가 여기서 " ... 에 대하여 최고인"(supereme over)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WBC 주석에서 피터 오브라이언도 이 해석에 동의합니다.
"'먼저 나신 자'란 단어는 LXX(70인역)에서 대부분 계보와 역사 서술 가운데 시간상의 앞섬과 계급상의 주권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 '먼저 나신 자'란 자주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 계급상의 우위성과 주권 개념이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IVP 성경난제주석』에서 맨프레드 브라우치도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맏아들과 관련된 말을 은유로 사용한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이방 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여신을 통해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안에서 으뜸인 이로 제시한다."
또한, 15절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는 표현이 18절에 다시 나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런데 먼저 나신 이유가 만물의 으뜸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나셨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안에서 으뜸이라는 의미임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에서도 '먼저 나신 이' 즉 '맏아들'이라는 의미가 그분이 얼마나 뛰어난 분인지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경배해야 할 정도로 높으신 분인지를 의미했습니다.
히브리서 1:4-6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그러므로 '먼저 나셨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안에서 으뜸이라는 의미임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먼저 나셨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존재하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으뜸이라는 의미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류가 아닙니다.
제가 이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복음이나 그 외 진리를 설명하는 것에 오류가 있으면 큰일인데, 그런 오류는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는 다만 수, 인명, 지명, 어떤 사건의 미세한 부분에 대한 오류가 존재할(혹은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오류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것을 완벽하게 정확히 기록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복음과 진리 외에 우리에게 뭐가 더 필요합니까? 정확한 숫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정확한 인명이나 지명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일부 잘못 알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그런다고 하나님의 뜻이 왜곡됩니까? 그런다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할 수 없거나, 사역을 잘 할 수 없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절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저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경의 사소한 불일치나 미세한 오류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복음과 진리의 완전무오함에 놀라곤 합니다. 아니 경이로워서 경외감을 느낍니다! 제가 오랜 독서생활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즉 성 프랜시스, 성 비오 신부, 존 웨슬리, 찰스 피니, 윌리암 시무어, 썬다 싱, 스미스 위글스워스, 존 레이크 ... 그리고 케네스 해긴에 이르기까지 또한 찰스 하지, 존 스토트, 더글라스 무, 김세윤 교수 등 탁월한 신학자들까지도 성경해석에 있어서 전혀 흠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의 글을 성경으로 분별합니다. 그런데 성경저자들에게는 전혀 오류가 없습니다. 그들은 복음과 모든 진리에 있어 오류가 없는 완벽한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기준과 시금석을 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어떤 기적보다 이것이 더 놀랍습니다. 어떤 기적보다 이것이 더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것은 가장 초자연적인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오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