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방 한 칸>은 해결되었는가?
1.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날, 조금 일찍 역으로 나와 열차를 기다렸다. 역사 대기실 독서대에는 오래된 한국 작가들의 중단편을 모은 전집의 낱권들이 꽂혀있었다. 시간이 남아 한 권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1983년 발표된 박영한의 중편 <지상의 방 한 칸>이었다. 작가의 자서전적 작품이다. 내용은 힘들게 저술활동을 하는 작가가 조용히 글을 쓸 수 있는 방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원하는 집을 찾지 못하는 힘든 삶을 솔직하면서도 공감있게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어렵게 집을 구하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마찰 때문에 싸움이 잦거나 우연히 조용한 집을 얻었을 때에도 등기 문제나 서류상의 하자 때문에 낭패를 겪는다. 이곳저곳 헤메도 한 칸의 방을 얻는 일은 글을 쓰는 것 이상의 고통이자 어려움으로 작가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남양주와 양평이라는 점에서 소설 속 내용에 묘한 공감을 느꼈다. 현재 내가 잠시 이주해 살고 있는 곳도 양평이기 때문이다.
2.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주택난은 심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셋방살이를 전전해야 했다. 그것은 모두가 경험했던 일이었기에 고통의 무게에 대해서도 똑같은 공감을 갖고 있었다. 그 이후 1980년대 후반 신도시 개발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에는 곳곳에 거대한 아파트 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전국 어느 곳을 가도 아파트는 한국 주택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그렇게 많은 아파트들이 이제 우리들의 ‘지상의 방 한 칸’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집을 갖지 못하고 불안정한 주거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특히 최근 주택사기을 당해 보증금을 날리고 자살까지 이르는 심각한 주택문제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2017년 ‘촛불혁명’을 통해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몰락도 결국 ‘주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원죄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3. 대한민국에서 ‘아파트’와 주택은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는 상징적 존재이다. 인간의 완성은 인격의 성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 특히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집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절약하고 투자하며 삶의 전체를 투입하고 있다. 그렇게 얻은 집은 생명과 같이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대상으로 변모한다. 집을 얻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과장된 인식을 더해 집 특히 아파트 가격에 올인하였고 조금이라고 아파트 가격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욕망들이 결집되어 아파트 가격은 무한대로 상승하였고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집은 많아지고 현재에도 비워있는 땅에 아파트들이 대량으로 건설되고 있지만 수많은 무주택자들이 넘쳐나는 것은 현재의 경제적 가치를 지키려는 욕망들의 결과이며 그것을 부추키는 정치적 술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4. 우리는 이러한 욕망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인식한다. ‘먹고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탐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자연스런 행위라고 안위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욕망은 현대 사회의 ‘노동의 가치’ 존중이라는 인식과도 맥을 같이 한다. 로크의 ‘노동’ 중시부터 시작된 ‘노동’의 중요성은 자본주의의 아담 스미스나 사회주의의 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가치로 인정받았다. 노동이 가치를 만들고 결국 노동의 가치는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성을 다른 어떤 것보다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시킨 것이다.
5. 하지만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중시에 의문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한나 아렌트였다. 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 중 ‘먹고사는 것’에 집중한 노동이 현대 사회의 병폐를 가져왔고 수많은 불평등과 위험한 욕망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당연시하게 하여 사회적 약자에 무관심하고 사회 전체의 발전에 대한 필요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태도를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먹고사는 것을 얻기 위한 ‘노동’, 창조적인 것을 만드는 ‘작업’, 자신의 정체성을 개발하는 ‘행위’로 구분하고 노동에 올인하여 인간의 삶을 축소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작업과 행위를 개발하는 좀 더 넓은 시야와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우리의 현재적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6. 아렌트의 견해는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 매우 적절한 시각을 전해준다. 우리는 아파트 가격의 하락을 가져오는 움직임에, 어떤 사회적 이슈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집단적으로 결집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먹고사는 것’ 때문이라는 당연한 욕망이라고 항변하며 정당화하는 것이다. 최근 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경기도 지역의 서울 편입 문제도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서울에 편입됨으로써 그들의 주택 가격을 향상시키고 싶은 욕망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울과 다른 지역이라는 이유로 조금은 저렴했던 주택가격을 올리려는 탐욕은 결국 새로운 사람들의 주택 구입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사다리 걷어차기’이며 과거의 고통을 망각한 기득권의 추악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7. 박영한의 <지상의 방 한 칸>의 문제는 누군가에는 해결되었고 더 나아가 욕망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에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러한 불균형을 작동시키는 것에은 ‘먹고사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이 한몫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오직 ‘먹고사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으로 삶의 동력을 삼았을 때 인간의 전체적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것’은 무엇보다 일차적인 해결과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점이 과장되었을 때 우리는 다음 단계의 삶으로 진전할 수 없다. 인간의 개인적 성숙이나 사회적인 균형을 위해서도 ‘먹고사는 것’에 대한 일정한 적도가 필요하다. ‘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욕구가 달성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창조와 정체성을 위한 ‘작업’과 ‘행위’로 넘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먹고사는 것’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무소유’이며, ‘사회적 정의’이며, ‘인간성의 최대 실현’으로 가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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