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친구 L. 그녀는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내 절친이다.
내 신간을 나오면 맨 먼저 L에게 보여주고 늘 조촐한 출간 파티를 하곤 했다.
물론 L의 책이 출간되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둘 다 챙겨야 식구가 있는 관계(가난하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로
늘 간단한 음식을 먹고, 자잘한 이야기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이번에 내가 책이 나왔다고 하니까 L이 대뜸 말했다.
"또 나왔어? 너 자꾸 책 낼 거야? 책 제목이 뭔데?"
L이 그렇게 말해도 나는 하나도 서운하지가 않다.
그녀의 말투며 목소리가 유머처럼 들리게 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1987 국숫집 사람들."
"어라? 이젠 6 10 민주 항쟁까지 건드렸어? 너 그때 뭐했는데 그런 동화를 썼어?"
꽤 도적적이 말투다.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슬슬 긴장으로 무장하고 대답했다.
"나 그때 학보사 기자였어. 문화부장이었... 여튼 나 나름 열심히 의식 있는 기사 쓰는 학생이었고,
최루탄 가스깨나 마셔 본.... 투사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국수나 먹으러 가자."
"국수 먹으러 어딜 가? 출간 기념으로 내가 말아줄게."
마치 크게 선심 쓰듯 말하는데,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냐. 그냥 식당에 가서 사먹자. 내가 살게."
나는 L의 솜씨를 잘 알고 있다. 김칫국물 넣고 대충 주물주물해 줄 게 뻔했다.
어쩌면 국수를 잘못 삶아 국수가 들러붙어서 덩어리 질 수도 있다. 참기름이나 있나 몰라, 내가 L에게서
국수를 얻어먹느니 그냥 내 돈으로 쏘는 게 낫지 싶었다.
"나 웬만해서는 음식 안 해주는데 넌 특별대우해 주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데에야 뺄 재간이 없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요리법은 대충 대충 간단했다.
국수를 삶아서는 수돗물에 씻기에 싹싹 비벼야 면발이 탱글한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런 건 몰랐다는 듯이 두 손으로 국수를 어물어물 비비는 거다.
김장 김치통을 기울여 국물을 국수에 뿌리고,
상추와 쑥갓을 물에서 건졌다. 왜 물에 담갔냐고 했더니 그래야 시든 것이 생생하게 일어난다는 거다.
오래된 상추를 활용하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빨갛게 무친 국수가 완성되었다.
왠지 심심해보이기에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계란이 빠졌다.
"계란은 없냐? 삶아서 반쪽만이라도 올려주면 이쁠텐데."
"이쁜 것 좋아하네. 사정이 있어서 요즘 계란 안 먹어. 콜레스테롤 말이야.
단백질은 다른 걸로 보충하지 뭐."
"다른 거 뭐?"
"고기."
"고기 사먹을 돈은 있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빨갛고 심심해 보이는 하나도 예쁘지 않은 국수를 먹어야 할 판.
나는 젓가락을 들기 전에 또 한 가지 요구했다.
"깨소금이라도 없어? 위에 뿌려주면 좋을 텐데."
"아, 그건 있다."
통깨를 툭툭 뿌려주는 L.
"깨를 빻아서 먹어야 고소하고 소화 흡수가 되는 거 아닌가?"
"너 제대로 해먹고 산 사람처럼 깐깐하게 구는구나? 가난한 농부의 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농부의 딸은 맞는데, 너 위화감 느낄까봐 가난한이라는 말을 붙여줄 거야."
"됐고. 기념촬영이나 해."
L이 '1987국숫집 사람들'을 국수 그릇 옆에 놓아주고 어서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빨리 사진을 찍어야 이 맛있는 국수를 먹을 수 있지 않냐는 표정으로.
찰칵.
L이 언덕처럼 높이 쌓아올린 국수에 젓가락을 푹 찔러 넣으며 말했다.
"내 덕분에 사진 한 장 건졌지? 빨리 먹고 포스팅해라."
"얘는. 말을 꼭 그렇게 하냐?"
국수를 먹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국수는 생각보다 맛있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