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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복음비판 스크랩 종교간의 대화(진리의 해체)- 이광호 목사
강대식 추천 0 조회 43 13.06.13 14: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교간의 대화

- 진리의 해체 -

 

이광호 목사(실로암교회)

 

1. 시작하는 말

날마다 숨쉬는 공기가 극도로 오염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공기를 정화시키는 마스크를 써야할까, 아니면 그 공기에 적응하며 살아야 할까? 날마다 마시는 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할까? 정화해서 마셔야 할까, 아니면 그냥 마시며 적응해야 할까?

요즘 사람들은 -특히 도시인들은- 공기에 대해서는 덜 민감한 것 같으면서도 물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것 같다. 물은 끓여 마시기도 하며 정수해서 마시기도 하면서 오염된 공기에 대해서는 훨씬 관대하다. 공기 오염도가 기준치를 훨씬 넘어섰다고 끊임없이 발표되어도 아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왜 그럴까? 굳이 따지자면 공기는 쉴새없이 마셔야만 하고 물은 가끔씩 마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공기보다는 물에 더 많은 신경들을 쓴다. 그렇지만 실상은 물 보다도 공기의 오염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이나 공기의 오염 보다 해악의 정도가 훨씬 심한 정신세계의 오염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원래 세상의 모든 풍조가 오염된 것들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사조들은 가히 치명적이다. 이런 위험한 사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성도들이지만 그 위험성의 정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런중에 오히려 그 사조들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적응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위험한 사조들의 대두 

<1> 전통적 사상의 붕괴

196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포스트 구조주의'(Post-structualism)니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니,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니 하는 오염된 사조에 시달려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위 학문을 하는 자들은 마치 선구자라도 되는 듯이 그러한 사조들을 소개해 오고 있다. 그런 자들은 잘못된 정신 사조에 대비한다는 대응 논리 보다는 서구의 앞선 사조를 수입하듯 하는 자세들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발표된 그들의 글을 보면 한결같이 외국 철학자들의 이름 투성이이다. 위의 사상들을 주도해 가는 외국 철학자들의 이름을 많이 나열하면 할수록 그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요 추세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문제임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진정한 학자들이라면 잘못된 사조들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소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역사속의 인간들이 창출해낸 '심오한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건전한 분별력'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의 잘못된 사상을 주도해 가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자신의 이웃들이 살아가는 터전에 무책임하게 도입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별해 막을 수 있는 '대체 언어'를 개발해 쓸 수 있어야만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서구의 '퇴폐적 사고'1) 이론을 무책임하게 소개하는 것은 무지한 시민들에게 오염된 물이나 공기를 되풀이하여 권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지한 시민들로 하여금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면 이는 결코 양식있는 학자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철학의 존재의미를 말한다면 인간에게 해로운 사조를 경계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철학은 무책임한 인간의 자기 기만일 따름이다.

 

<2> 잘못된 사상의 폐해

위에서 언급한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필자는 이러한 각 사조들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론들의 배경이나 구체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지 위의 사조들이 가지는 공통적 '잘못'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위의 사조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항상 서로간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원래 이러한 사조들은 문학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현재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 분야, 좀더 넓은 의미로는 문화 전반, 건축학, 사회학, 자연과학, 경제학, 그리고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이나 정신구조 또는 세계관과 관련된 매우 폭넓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2) 이는 이러한 사조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할 만큼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는 말이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옷매무새에도 나타나며, TV나 광고, 영화 같은데서도 그 풍조는 그대로 나타난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인 양 각색되어 마치 대단한 관심거리라도 되는 양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자극하여 넘보다가 급기야는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게 된다. 결국 그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것을 특이하고 개성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더욱 재미있어 하고 그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사조들의 특징은 극도의 회의주의와 극도의 상대주의로 특징지어진다.3) 이는 합리적 이성을 소유한 인간의 주체성이 소멸되었다고 하는 극도의 회의주의가 이러한 사상의 밑바탕에 짙게 깔려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절대규범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며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고 하는 규범은 자연적으로 해체되고 만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 자아는 이제 더 이상 근대적 의미의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아의 해체를 선언한다. 예컨데, "인간의 죽음", "저자의 죽음", "주체의 해체", "자아-동일성의 분산" 등이 그들의 주장이다.4) 

그러니 위의 사조들에서는 인간이 가지는 총체성이나 통일성의 원리를 부인하게 된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이 강한 개성주의이다. 전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체성이 중요하게 인정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별적인 타인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하며 자기 개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인간인 것이다. 이는 결국 상대적 가치만 남을 따름이며 상대성이 곧 가치인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듯하게 들릴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는 주변이나 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이 각 개성만이 가치 있다는 의미를 깊이 깔고 있다.

 

3. 진리의 해체

<1> 오만한 해체

위의 사조들은 한마디로 하여 '해체사상'으로 집약하여 말할 수 있다. '해체'라는 단어가 표방하듯이 모든 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개성을 중시하자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여기에서 필자가 관심을 보이는 부분은 '진리'의 해체 문제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생성된 위의 오염된 사조들은 급기야는 '신'을 해체하고 '진리'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결국은 진리의 절대성을 포기하고 종교다원화를 주창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 목소리인 양 되어 버린 것이다. 종교다원화란 역시 진리의 해체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도 다원론(Pluralism)은 유일한 그리스도를 부인 한다. "예수만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파괴하고 대신 "예수도 그리스도"라는 포용적이며 그럴듯한 새로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적 논리이므로 "예수도 그리스도"라는 말을 수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부처도 그리스도", "정도령도 그리스도" "예수도 그리스도"라고 하는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좋은 말로 하여, 서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자기의 신앙만 옳다고 주장하는 아집에서 벗어나자는 말이다.

하나의 진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악한 도그마일 따름이며 더 이상 20세기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독선적이었던 기독교는 이제 지나간 고전적 시대에서나 통했을 법한 주관적 신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해체를 통해 가치포기를 요구하던 사상이 급기야는 '신'과 '진리'를 해체함으로써, 완전한 가치포기만이 참가치라는 역설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2> 상대적 진리

그들에 의하면 더 이상 절대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란 그 진리를 규정한 가치 기준이 무너지면 자연히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 질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에서는 절대적 믿음과 절대적 진리가 부정된다. 그대신 상대적 진리는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진리란 말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든지 존재하는 한 그 존재 내부에서는 진리아니라고 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개인의 기호를 중시하고 존중하는 형태의 대중화를 추구한다. '나에게는 진리가 아니지만 그에게는 진리', '지금은 진리가 아니지만 그 때는 진라'라는 말을 성립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모든 인간이 합의 또는 동의할 수 있는 진리는 있을 수 없으며 결국은 각 시대, 혹은 각 개인에게 어떤 효력이 발생할 때 그것은 곧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진리라고 하는 자체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절대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뜻에서 말하는 '진리'란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불변을 의미한다. '상호 가치인정'이란 말은 진리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4. 진리해체의 결과로서의 종교간 대화

<1> '대화'의 의미

20세기 말에 이르러 '종교간 대화'라는 주제는 '종교다원주의'와 함께 엄청난 오염을 퍼뜨렸다. 소위 '관용'이라는 채색된 언어와 함께 우리는 '진리'의 의미를 격하시켜 가고 있다.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중요하듯이 '남'의 주장도 중요하게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정말 그럴듯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함정이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보다는 '관용적 인정'을 함으로 '대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 종교간 대화 문제는 더욱 부쩍 고개를 들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바가 이제는 교회내부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화'란 단순한 담론을 의미하지 않는다.5) 동일한 선상에 놓인 '신앙적' 상대방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의 대화를 말한다. 또한 동일한 선상이란 단순히 어깨를 나란히 함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그 의미는 '나의 신앙적 주장만을 참이라고 고집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포기를 요구하는 이방종교의 요구를 기독교가 수용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리하여 저들이 만든 대화의 장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관용'에 무게를 실어 '절대성'을 해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거기서는 하나님도 해체되고 하나님의 말씀도 해체된다. 결국 절대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저 부지런히 살아가는 존재일 따름이다. 거기다가 그 가운데서 오염된 상태의 인간 논리는 한껏 기승을 부린다. 

<2> 한국에서의 종교간의 대화방법

현대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가톨릭과 무속의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힌두교의 대화등 누구나 부담없이 상호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 할 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세상은 그야말로 '열린 대화의 장'이 된 것이다. 무지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발전'이라 하며,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좋은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종교 언론 기관들의 역할이 크게 돋보인다. 특히 각 종교단체들의 라디오 방송사는 그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다. 불교방송,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평화방송, 그리고 기독교 방송은 1990년 이래 '종교음악제'를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다. 얼마전 부터는 원불교 합창단을 초대하기 시작 했는데 그 범위는 다양한 종교들을 향해 점차 넓어질 것이다. 그들은 음악제를 열면서 전반부에는 각 종교 합창단이 각각 고유의 종교음악을 노래하며 후반부에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등 각 합창단이 연합합창단을 편성하여 우리나라의 가곡과 민요, 가요등을 부른다.6)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상호간의 화합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지난해(97년) 12월 14일에는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불교 사찰인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불교의 송월주 총무원장과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등 종교계 인사와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7) 이에 대한 답례 형식으로 금년 2월 24일에는 불교의 지도자급의 승려인 법정(法頂)이 명동성당에서 초청강연회를 가졌다. 가톨릭과 불교는 이를 고무적으로 받아들였다. 법정은, "이런 자리가 마련된 '인연'과 '천주님의 뜻'에 감사한다"고 말문을 열었고 거기에 모인 가톨릭의 지도자들과 일반신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8) 

뿐만아니라 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불교의 승려들이 성탄절 캐럴을 부르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우리민족 서로돕기 불교운동 본부'등 불교 관련 4개 단체가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마련한 탁발캠페인에서 성탄절 캐럴을 불러 화제가 되었다. 불교자원봉사연합회장 성덕 승려등 불교신도 40여명이 지난해 22일 오후 3시 서울역 광장에 모여 '아기예수 탄생을 함께 기뻐합니다'란 문구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루돌프 사슴코' '창밖을 보라'등 캐럴을 부르며 불우이웃돕기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9)

물론 그러한 노래들이 기독교의 전유물이라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제는 '선'(線)이 허물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는 일반 사람들 가운데는 불교를 관대한 종교로 생각하여 호감을 가지는 자들이 많을 것이며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좋은 시각으로 보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되어감으로써 '대화'와 '화합'이라는 무서운 함정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사실, 성탄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이방종교인들이 자신의 종교의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예수탄생을 함께 기뻐합니다" 라고 제작된 플래카드 앞에서 성탄절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화합의 제스츄어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는 진리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이 의도 여부를 떠나 그것은 진리를 희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이를 보며 재미있어 하거나 신기해 하며 대충 넘기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현대의 사조에 상당히 감염되어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3> 선교와 종교간 대화

그래서 위의 사조들에 오염된 학자들은 더 이상 '복음전파', '전도', 혹은 전통적 의미의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대화' 라는 용어로 대치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문제의 현장을 '전도'에 활용하면 좋을 것이란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만일 그런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저들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대화'에 나서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막연히 그렇게 기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교들에는 '선교학'이니 '전도학'이니 하는 과목들이 없다. 그 대신 '종교학'이니 '종교간 대화' 라고하는 과목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혹, 선교학이 강의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치중함으로써, 소위 땅의 신학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한 복음전파 사역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세계종교인 평화회의' 공동의장을 지낸 강원룡 목사는 기독교 선교의 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 종교간의 대화 협력에 인색했던데서 이제 종교세력의 확장의 시대는 지났고 종교가 인류를 위해 할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세계 종교계의 경향이라는 사실이 이번 세계종교인 평화회의에서 두드러졌습니다. 종교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이를 인식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말은 그가 1994년 이탈리아 '레바가든'에서 열린 제6차 세계 종교인 평화회의에서 공동의장에 피선된 후 인터뷰한 내용이다.10) 한국 기독교를 대표라도 하듯 인정받고 있는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말 가운데는 '복음전파'라는 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기독교 선교는 이기적 종교확장 추구 이상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적 추세는 종교간 대화와 연합이다. 그에 추종하는 자들에게 더 이상 절대종교란 있을 수 없다. 종교적 절대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자들일 따름이다. 최근 미국인 성직자들로 구성된 종교 자유시찰단이 중국을 방문했다.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성직자 3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은 지난 2월 9일부터 18일간 중국 6개 도시를 돌며 개신교, 가톨릭, 불교, 회교, 도교, 유대교 대표를 만났다.11) 그들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언제든지 협력하며 상호 존중하는 것이 곧 종교인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4> 한국보수교단의 자세에 대한 우려 

최근 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목적 여하에 따라서는 보수주의 교회에 속한 지도자들이라 하여도 다른 종교인들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문제시 되지 않는다. 특히 통일에 관련된 논의라면 종교간 아무런 장벽도 없다. 천주교의 신부, 불교의 승려, 기독교의 목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 하는 것이다.12) 

나아가서 지난해(1997년) 3월에는 종교연합기구를 표방하고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사업을 구체화 했다.13) 거기에는 불교, 가톨릭, 기독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한국민속종교등 소위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들은 다 포함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기독교가 한국 보수주의의 큰 교단들을 거의 총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고신측이나 합동측등 보수,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단들도 포함된 단체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 모두가 범종교적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정통적 진리를 파수한다고 하는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 마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방 종교들의 대화요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최근에 열린 '국가 조찬 기도회'에는 가톨릭의 신부도 참여시켰다. 지난 3월 25일,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조찬 기도회에서는 가톨릭의 신부가 성경봉독을 하고 합동측 교단대표가 설교를, 그리고 고신측 교단대표 목사가 축도를 하는 것으로 순서가 짜였다.14) 거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참석했고 한국 보수교단의 많은 목사들이 참석했다. 신앙의 지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정치인들은 불교에서 개최하는 기도회에도 참석한다.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는 정치인들을 불러 앉혀놓고 무슨 기도회를 한단 말인가? 혹자는, 권세가진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느냐고 주장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참석시켜 그런 식으로 기도회를 개최하여 그 정치인들의 축사, 답사를 기독교 지도자들이 들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도가 국가의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일년에 몇차례 씩 고위 정치인들을 불러 참석시켜놓고 형식적 기도모임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위정자들을 그냥두고 우리의 해야할 바 기도를 하라는 뜻이다.15) 지금의 각종 '조찬기도회' 라고 하는 모임들은 올바른 기도모임이라기 보다는 세속과 타협하는 정치적 종교모임일 따름이다. 

<4> 잘못된 해석의 예

우리의 과거 한국교회사에는 이미 그러한 예가 없지 않았다. 한 예로 기미년 3.1운동 독립선언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반 정도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을 두고 기독교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배우고 가르쳐 왔다. 사실 이것은 매우 민감한 이야기거리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 때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런 자랑거리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적 인식부족으로 인한 참여였다. 물론 오늘날 처럼 위에 언급한 사상들의 영향에 의한 '대화'는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일종의 '대화'였다. 필자는 여기에서 그에 대한 논의를 길게 할 의향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해석을 보류하는 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해악성 있는 '대화' 논리에서 헤쳐나오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열성당'을 결성하여 로마제국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어느 하나 그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해 특별한 값어치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위의 권세에 굴복하라'고 성도들에게 교훈 한다.16) 바울이 말하는 '권세'란 흔히 생각하는 훌륭한 '권세자'들을 뜻하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있는 교회를 향해 압제국인 로마의 권세에 굴복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성도의 삶의 희망이나 목적이 이 세상의 국가체제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음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못된 최고통치권자와 그의 관료들에게 저항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17) 바울과 디모데가 알고 있던 그 최고통치권자나 관료들은 착하고 선한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바로 그들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그 말씀들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 한다면 우리는 해방이든 통일이든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더구나 그런 일을 위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과 머리를 맞대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랑거리'와 '반성거리'를 잘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오늘의 오염된 현대적 사상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5. 맺음 말 

사실 우리 모두는 그 오염된 현장에서 살고 있다. 서두에 말한 것 처럼 오염된 물을 마시기 전에 그것을 정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뿐만아니라 오염된 공기 가운데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이제 단순한 오염의 정도를 지나 해독가스를 과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방독면이라도 써야할 정도다. 해독가스 가운데 있으면서 방독면은 구차스러우니까 그냥 적응하는 쪽을 택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표현 이상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럴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진리는 절대적이다. 인간이 그것을 해체한다고 해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한 인간들은 제 맘대로 해체작업을 하고 있다. 저들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지도 못한 채 '지식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사상들이 교회를 향해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대화'에 대한 논의와 제시다. 이미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들 마저도 그 '대화의 장'으로 들어서고 있음은 예사 문제가 아니다. 종교간 대화의 논리를 따르는 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다음 단계는 '상호 변혁'임을 기억해야만 한다.18)

교회는 세상을 향해 '대화'가 아니라 '심판'을 선언해야 한다. 저쪽에서 대화의 제스츄어를 해오면 이 쪽에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진리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 진리에 순복하는 자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의 선포'는 곧 '복음전파'와 동일한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2)는 사도바울의 교훈을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때이다. 

<후주>

1) 이진우, <장 프랑수아 료타르 탈현대의 철학>,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구조주의, 서울: 현암사, 1991, pp.220-221.

2) 김욱동,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p.16; 이진우, 같은 글, p.218.

3) 김욱동, 같은 글, p.39.

4) 김영필, 현대성의 전개, 대구: 이문출판사, 1998, p.156. 

5) 가톨릭에서는 "대화"(Dialogue)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다. "첫째, 순전히 인간적 차원에서, 대화는 공동 목표나 사람간의 친교에 이르게 하는 상호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둘째, 대화는 존경과 우애의 태도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이는 교회의 복음 선교를 이루는 모든 활동에 스며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대화정신' 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셋째, 종교적 다원성의 맥락에서, 대화는 자유를 존중하고 진리에 순종하면서 '상호이해와 풍요로운 상태를 지향하는 개인과 타신앙 공동체의 모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종교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각자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탐구와 증언, 양자가 포함된다. 이 셋째의 의미에서, 현재의 가톨릭 문헌은 교회의 복음선교에 절대 필요한 요소중의 하나로 '대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 회보>(Pontificium Consilium Pro Interreligiones Bulletin) 77권(1992, 26, 1/2) ; <대화와 선포>, 정은희 역, 종교신학연구, 제6집,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1993, pp.424-425).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가톨릭은 '대화'의 의미를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6) 동아일보, 1993년 10월 15일, 1995년 10월 28일자. 참조. 

7) 중앙일보, 1997년 12월 13일자. 참조. 

8) 동아일보, 1998년 2월 5일자. 참조.

9) 중앙일보, 1997년 12월 22일자. 참조.

10) 중앙일보, 1994년 11월 18일자. 참조.

11) 월간고신, 1998년 4월호, p.64. 참조..

12) 지난해 말, 통일에 관련된 한 집회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합동신학대학원의 김명혁 교수는 다른 종교의 대표들과 나란히 행사에 참여하여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 (중앙일보, 1997년 11월 6일자. 참조). 

13) 1997년 7월 16일, 서울 롯데 호텔에서 송월주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최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최근덕 성균관장, 조정근 원불교교정원장, 김재중 천도교교령,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등 공동대표들과 가톨릭을 포함한 각 종교의 운영위원들이 모여 정관심사의와 사업계획을 확정했다(조선일보, 1997년, 7월, 11일자 참조). 

14) 한국기독공보, 1998년 3월 21일자, p.15. 참조.(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가톨릭과 불교는 대화의 장을 완전히 열었다. 지난해 말, 가톨릭의 대표 신부가 불교의 사찰을 공식 방문했고, 한국의 대표적인 성당에서는 불교의 승려를 초빙해 법어(法語)를 들었다); 호서대학의 홍기원 교수는 96년 5월 11일-6월 15일 사이 서울.천안 지역에 거주하는 일반인 393명, 대학생 453명등 총 8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5.6%가 여러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이 궁극적으로 같거나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톨릭신자들은 개신교인 보다도 불교인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양 종교의 대화 가능성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이다(중앙일보, 96년 11월 2일자, 참조). 

15) 박윤선 박사는, 디모데전서 2: 2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성도는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안전한 질서가 보전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해설하고 있다(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2:2). 

16) 로마서 13장 1절 이하. 참조.

17) 디모데전서 2장 2,3절. 참조.

18) 미국의 신학자 John B. Cobb, Jr.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이제는 '상호대화'의 차원을 넘어서 '상호변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Beyond Dialogue: Toward a Mutu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ity and Buddism, Philadelphia, Fortess Press. 1982: 길희성, <예수, 보살, 자비의 하나님>, 종교신학연구, 제6집,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1993. p.346. 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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