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원문보기 글쓴이: peater
2012년 10월 4일 목요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욥은 비록 하느님께서 그를 짓누르시고 자신이 모든 불행을 겪고 있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변호인이시며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제자들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복음).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아슬아슬한 심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보다 앞서 이미 세상 속에 계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어둠의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파견될 세상 또한 역시 그들을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이리 떼와 같습니다. 이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양처럼 순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빈손으로 세상에 내보내십니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빈손의 위력을 잘 압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돌멩이만 가지고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프란치스코 성인도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교회를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갑옷은 우리가 걸친 모든 것을 벗어 버릴 때 입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는 주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옵니다. |
“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평생토록 풀어야할 숙제 하나>
성인(聖人)중의 성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여러 덕행 가운데,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는 ‘만인형제애(萬人兄弟愛)입니다.
그분에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다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내편이건 저쪽 편이건, 내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건,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이건, 모든 것이 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담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나타나면 다들 멀찍이 돌아가곤 했던 나병환자를 온몸으로 포옹했던 성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죽음’, 그 죽음이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올 때,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자매인 죽음이여!”
늑대는 형제요, 비둘기는 자매였습니다. 오늘날도 프란치스코 성당 복도 한쪽에는 한 쌍의 흰 비둘기가 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바깥으로 날아가지 않고 성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철저한 자연주의자, 환경운동가, 생태주의자, 인본주의자, 평화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의 그런 모습 앞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물고기든, 산짐승이든 뭐든 움직이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기를 쓰고 생포하려는 제 모습과 너무나 크게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만인형제애’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바로 그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 별것도 없으면서 쓸 데 없는 우월주의에 빠진 유다인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뇌리 속에 가득 차 있던 ‘만인형제애’를 드러내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은 동족들뿐이었습니다. 하느님 구원의 대상도 이스라엘 백성뿐이었습니다. 지독한 선민의식입니다.
그럼 다른 민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을 모두 통칭해서 ‘이방인’이라 불렀습니다. 사람취급도 안했습니다. 구원되든 안 되든 상관할 바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을 다시금 설정해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참된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 사제와 레위인, 그들은 유다인 가운데서도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인간 이하의 행동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행동 하나 하나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는 참된 봉사가 무엇인지? 참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행동 가운데 눈여겨 볼 것은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입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한 생명이 내 눈앞에서 고통 받고 있다는 그것이었지, 그가 유다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가 북한주민이든 남쪽 사람이든 문제없었습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위험에 처한 한 사람의 생명, 그것만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하나는 사랑의 대상, 사랑의 개념, 사랑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나가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
1182년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의 가벼운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켜 자기 유산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굳게 매달렸다. 가난을 포옹하고 복음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만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파했다. 제자들을 훌륭한 생활 양식으로 교육시켰고, 이 생활 양식을 사도좌가 인준해 주었다. 글라라 관상 수녀회와 재속회를 세우고 이교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했다. 1226년 세상을 떠났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소품집, 분도출판사, pp.107-113)
우리는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지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동정마리아의 태중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과 약점을 지닌 참다운 육체를 취하여 오시리라는 것을 거룩한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셨지마는 지극히 복되신 당신 어머니와 같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시려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가까워지자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거행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하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맞추려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축복받은 아드님, 영광을 받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위해 탄생케 하시고 십자가의 제단 위에 그분의 고귀한 피의 희생 제물을 그분이 직접 바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되고 우리 모두가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육신으로 아드님을 받아 모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복음에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며 축복받은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결한 마음과 정신으로 예배 드립시다.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리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그분에게 예배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겠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밤낮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을 지니도록 합시다. 죄인들의 더러운 때에서 직접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애긍 시사를 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겨 둔 모든 것을 결국 잃고 맙니다. 그 대신 자기가 실천한 사랑의 열매를 가지고 가서, 그 행실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롭거나” 현명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보다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이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끝까지 항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이 임하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의 거처와 집으로 정하실 것이고, 그들은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아들이 될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 형제, 모친이 될 것입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0. 수도회 창설자편 (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상)
가진 옷마저 벗어버린 가난의 삶
최초의 탁발수도회 설립
평화의 사도로 사명 다해
『저는 저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더 이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아버지였던 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저는 빈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1206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청년은 부모로부터 제공되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입고 있던 옷마저 돌려주면서 이같이 가족들과의 이별을 고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가난과 복음 전파의 삶」은 지금껏 너그러움,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심, 신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안에 전해져 오고 있으며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평화의 기도」, 「태양의 노래」 등 주옥 같은 기도문으로도 친숙한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1182?∼1226)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불릴 만큼 복음 정신을 따르는 청빈과 무욕 무소유의 모습을 보인 성인이다.
또한 그러한 가치는 최초의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 설립과 함께 800여년의 역사가 되어 세상 안에 함께 하고 있다.
1181년 혹은 1182년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 태생인 프란치스코는 포목상을 하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시시라는 도시 출신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이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 영화를 추구한 부모의 영향아래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들에 길들어져 있었다. 그는 부유한 부모가 제공하는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면서 자랐고 그 역시 부모보다 오히려 더 그러한 세계를 추구했었다』(Thomas von Celano, Erste Lebensbeschreibung des hl?Franziskus, Nr.1).
생애 전반부에 대한 다소 부정적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 문장에서 엿보듯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유복한 생활을 했고 화려한 옷에 향락적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뻬루지아와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던 프란치스코는 1202년부터 1203년까지 포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고 1205년 다시한번 전투에 참여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일련의 계시를 듣게 된다.
무기와 전쟁도구들로 가득 찬 궁전과 성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이 모든 것이 너와 너를 따르는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종과 주인 중에서 누가 너에게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당연히 주인입니다』고 답한 프란치스코에게 『그럼 너는 왜 종을 따르느냐. 아시시로 돌아가서 기다려라. 그곳에서 너에게 나의 뜻을 알려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꿈속에서의 체험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상당한 전환점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주었다.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에 몰두하였고 어느날 아시시 산 근처 성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 있는 십자가 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글자 그대로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고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포르티운쿨라, 성베드로 성당들을 차례대로 고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과제가 「교회의 내적인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소명을 깨닫게 된다.
가진 옷 마저 벗어버리며 하느님으로부터의 불림을 천명한 그는 1208년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때에는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는 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길을 걷기 원하시는지 깨닫게 됐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청빈한 삶이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으며 또한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무렵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함께 움막 생활을 하던 프란치스코는 다시한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성서를 세 번 펼쳤는데 이때 발견한 구절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해야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라고 외쳤고 한편 함께 했던 동료들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를 복음 안에서 생생히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5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1. 수도회 창설자편 (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하)
프란치스코 성인의 형제애는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곳곳에‘회개와 평화’ 선포
작음의 영성·형제애 추구
자연과 우주로 사랑 확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겨준 영성은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사도적 선교적 영성」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추구」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히 「그의 영성이 무엇보다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인이 살았던 당시의 13세기 교회는 교황권이 절정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었고 지상권 역시 교황권에 예속돼 있었던 만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관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또 교회 모습은 거대한 국가 조직처럼 갖춰져 있었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이던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닌 진리를 증언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삶을 보였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그 시대 교회에 풍미했던 그리스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프란치스코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따라야할 그리스도였다.
프란치스코는 또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따르는 것이었다. 실제 프란치스칸들이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후 받았던 첫 공식 소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칸 관계자들은 성인의 「시에나 유언」(Siena Testament)을 정신적 유산의 핵심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1226년경 성인이 중병에 걸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오는 도중 레 첼레(Le Celle)에서 구술한 것, 즉 『형제들 서로간에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가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가난 겸손의 삶」과 함께 성인이 지닌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없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이 범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근본 이유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 삼아 세운 것이고 그런 만큼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로 부터도 확인되지 않은 삶이라는 관점에서다.
선교적인 면 역시 13세기 교회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 교회화 되었으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사명은 숨죽어 있던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맞서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제자들을 보내 새로운 수도회를 곳곳에 세웠고 그들은 유럽을 신앙심으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음」의 모습은 일반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 성인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이나 특권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고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보다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말한다.
그는 사회적 계급이 분명했고 수도회들 안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던 시대에서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아직도 참된 형제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의 정신은 성별 계층 계급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 대한 형제애로 확장 되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성인은 1224년 9월 14일 라 베르나(La Verna)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오상(五傷)을 받았다. 손과 발에 나타난 상처에는 연골 형태의 못까지 있었다.
오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회개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으로 두루 다니는 투혼을 발휘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임종이 다다르자 회원들은 성인의 원의에 따라 수도회 요람인 뽀르찌운꿀라로 모셨고 1226년 10월 3일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죽음에 앞서 남긴 성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였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형제회를 창설하신데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또한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12일, 이주연 기자]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