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년 전 오늘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유언을 남기고 분신합니다. 그의 손에는 하도 많이 읽어서 누더기가 된 <근로기준법> 책자가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10시 명동 성모병원에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납니다. “배가 고파요!”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열사의 평전을 남깁니다. 오늘은 대구가 낳은 근대의 걸출한 인물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를 생각해 봅니다.
1) 대구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대략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소설가 현진건 (<빈처>,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시인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서양화가 이인성, 작곡가 박태준, 가수 김광석이 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로는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가 유명하고요. 영화감독 이창동, 봉준호, 김지훈, 개그맨 김제동, 영화배우 손예진과 김선아도 대구 출신입니다. 또한 대구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순절한 곳이며, <광야>의 이육사 시인이 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2) 전태일 열사 하면 누구나 잘 아는 인물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이력을 소개해 주십시오!
전태일은 1948년 8월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하여 1954년 서울로 이주하게 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1960년 대구로 내려와 봉제노동을 하면서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다가 1964년 다시 상경합니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점차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됩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고, 1969년 6월 청계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조직 <바보회>를 결성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합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지만 누차 묵살당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합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 이후 노동운동이 크게 확산되기에 이릅니다.
3) 한 마디로 가난과 노동, 근로기준법 확립을 위한 노동운동으로 점철된 인생이었군요?!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내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1일 14시간 작업시간을 10시간 - 12시간으로 단축하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일급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략한 청원서는 끝내 전달되지 못했고, 전태일은 마지막 수단을 감행한 것입니다. (당시 차 한 잔에 50원이었다고 하니, 시다의 임금이 얼마나 낮은지 이해 가능할 것입니다!)
4)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과 살인적인 저임금은 상당기간 온존되지 않았습니까?!
1960-70년대는 산업화 시대였습니다.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 전역에서 대대적인 변혁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무작정 상경, 저임금, 이중곡가제, 새마을운동, 경제개발5개년계획, 3선 개헌, 10월 유신, 계엄령, 긴급조치 등등 그 시대를 표현하는 말들이 생생합니다.
1984년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도 ‘타이밍’ 먹고 미싱에 오르는 시다의 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노동조건 개선은 참으로 요원했습니다. 1987년 평화대행진 이후 7-9월까지 있은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5) 인권 변호사로 명성이 높은 조영래 변호사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영래는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전학합니다. 경기고 재학시절에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해 정학당합니다. 1965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반대 같은 학생운동을 주도합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가지만,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1973년 4월 만기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간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합니다.
1980년 수배를 끝내고 사법연수원에 복귀한 후 198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합니다.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하고, 19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권인숙 씨를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 경장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등 인권 변호사로 활약합니다. 1986년 대한변협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을 하였고, 인권변호사들의 상설조직인 <정법회> 창립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가 폐암으로 돌연 1990년 별세합니다.
6) 조영래 변호사가 남긴 <전태일 평전>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출간되지 못했습니다. 1978년 일본에서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됩니다.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한국에서 출간되었다가, 1991년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으로 세상의 빛과 만나게 됩니다.
한국인들이 윤동주와 이육사 시인의 이름으로 일제강점기를 그나마 의미 있게 기억하는 것처럼, 1970-80년대 노동운동과 인권을 말할 때 우리는 전태일과 조영래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했던 전태일 열사와 그를 기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조영래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대구의 역사적인 두 인물을 통해서 저 어둡고 음습했던 시대의 기억을 되살려 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기획하고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되살리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