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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
제108회 산행일지 : 지리산의 참 숨결을 느껴 보셨나요?
(지리산 종주)
일시 : 2011년 8월 25(목)-27(토)
날씨 : 흐림, 비
계획과 준비
국어사전에 종주(縱走)는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로 적고 있고 네이버 사전에서는 ‘산 능선에 있는 산길을 등강(登降)하면서 점차로 정상에 오르는 방법’으로 적고 있으며 영어로는 'walk along the ridges'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주란 말을 ‘1번 국도 종주’ 등 산이 아닌 다른 곳에도 많이 쓴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한라산처럼 홀로 있기보다는 이웃 산들과 연하여 있어 종주라면 대개 상당한 거리의 산행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종주의 꽃이라면 무엇보다 백두대간 종주이며 이는 산꾼들의 꿈이자 명예스런 훈장이다.
백두대간 책을 사서 틈틈이 꿈을 키우는 나도, 등고선의 모든 멤버들도 항상 마음에 숙제나 숙명처럼 품고 있지만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백두대간을 제외하더라도 우리나라엔 종주 산행 코스가 참으로 다양하게 많다.
그러나 그중 가장 으뜸의 종주 코스라면 물론 지리산이다.
TV 프로 ‘남자의 자격’에서도 지리산 산행이 있었지만 지리산 종주는 해봐야 대한민국 남자의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처럼 지리산 종주는 모든이에게 큰 감동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을 선물로 돌려준다.
누구나 지리산엔 자주 올 수 있지만 또 종주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시절이나 그 이후에도, 그리고 작년인 2010년 가을에도 종주를 한 적이 있지만 등고선의 모든 멤버와 함께하는 이번의 종주를 통하여 지리산을 큰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지난 여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한 내 자신에게 큰 선물을 안기고 싶어 지리산을 품고 회원들에게 알렸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환호를 올려 108회 정기산행으로 계획에 없던 지리산 종주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리산 종주는 일반적으로 중산리에서부터 천왕봉에 오른 후 능선을 따라 성삼재 혹은 구례화엄사에 이르는 약 40km의 거리를 의미하며 이 구간은 백두대간의 시작과 끝이기도 하다.
대개는 차량으로 성삼재에 이른 후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이동한 후 중산리 혹은 백무동 방향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종주라 하기도 한다.
아무튼 지리산을 종주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다.
종주엔 무박, 1박, 2박, 3박 등 여러 방법이 있으나 새벽에 시작하여 저녁에 끝나는 무박 종주는 그저 체력 테스트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지리산의 참모습을 보고 느끼려면 적어도 2박 정도는 계획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는 아무 곳에서나 텐트를 치고 숙박하였으나 이제는 지정된 산장에서만 숙박하여야 하므로 미리 산행 코스와 일정을 정한 후 대피소를 예약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예약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숙박 희망일로부터 정확히 보름 전 아침 10시부터 인터넷 국립공원 홈페이지(http://www.knps.or.kr)의 ‘대피소예약’ 아이콘에서 예약하는데 대개 예약이 시작되면 10초 이내에 끝나 버리므로 미리 가입하여 숙박 희망 대피소의 예약코너에 새로고침 버턴을 누르면서 대기하다가 희망 인원을 재빨리 클릭하여야 한다.
일단 희망인원이 클릭되면 예약이 된 것이므로 12시간 이내에 천천히 숙박자와 연락처 등 서식을 채운 후 송금하면 예약이 완료된다.
특히 다음 날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는 장터목 대피소가 가장 치열하며 다음으로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벽소령 대피소이지만 세석 대피소도 예약이 만만치 않다.
등고선 멤버들도 각자 컴퓨터 앞에서 예약을 시도하여 8월 10일 벽소령 대피소는 몇이서 성공했으나 11일 10시의 장터목 대피소는 나만 성공하여 다행스럽게 숙박 준비를 마쳤다.
산행 닷새 전, 40 리터의 보다 큰 배낭과 집사람이 거금을 들여 선물하는 4단 탄소스틱을 준비하였고, 이틀 전인 23일에는 매송, 교매와 만나 저녁식사 후 즐거운 마음으로 장을 보았으며 전날 밤 오래도록 꼼꼼하게 짐을 싸 둠으로써 지리산에 안길 준비를 마쳤다.
국립공원 1호 지리산(智異山),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없이 크고 넓어 안길수록 푸근한 어머니의 품 같은 그런 산이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이러한 안식의 지리산이 우리에게 있음은 기필코 축복이다.
이름처럼 지리산은 지혜와 삶의 신령한 힘을 공급해 주는 산이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주릉에는 1,500 미터 이상 14봉, 1,000 미터 이상은 100여개의 봉우리를 거느리며 좌우로 수많은 계곡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흐르는 강의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을 이루며 또 하나는 시인 김용택, 참게와 재첩의 고향인 섬진강이다.
산과 물, 야생화와 약초, 야생동물들의 산일뿐만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아픔, 전설과 문학과 문화, 사람 사는 향기의 근원, 한국인 기상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 지리산이다.
제1일차 성삼재 - 벽소령
산행 당일, 흐린 날씨 속에 아침 7시, 모여 10분에 출발이다.
오늘은 청죽의 부인도 함께 동행하여 5명이다. 휴게소에서 쉬지도 않고 인월 IC를 나와 인근의 자동차 정비업소의 첫손님으로 청죽의 산타페 타이어의 펑크를 떼우고 곧바로 성삼재로 향한다.
성삼재에서의 하루 주차비가 만원이기에 3일간 삼만원을 절약하려고 교매가 우리 일행과 짐들을 부려놓고 성삼재에서 달궁 방향으로 약 500여 미터의 공터에 주차한 후 다시 오는 동안 각자의 배낭에 짐을 나누어 넣고 준비를 마쳤다.
평소 당일 산행을 다니다가 오랜만에 2박산행의 짐을 넣었더니 배낭의 키가 커지고 무게 또한 평소와는 사뭇 다른 묵직함이 있다.
10시, 간간이 햇살이 내리는 넓고 완만한 길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르기 시작하여 한 시간 만에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여 기념촬영,
다시 노고단 고개에 이르니 드디어 지리산의 주릉이 펼쳐지고 반야봉은 봉우리만 구름위에 솟아 있다.
해발 1507 미터의 노고단(老姑壇)은 늙은 시어머니를 향한 제단이며 노고운해는 지리10경 중 2경으로 유명하다.
10여분 거리의 지척인 노고단을 눈으로만 바라보고는 오늘의 갈 길을 생각하며 간식으로 준비한 찰옥수수를 하나씩 물고는 서둘러 지리의 주능선 품으로 든다.
여기서부터 천왕봉까지는 25.5km, 오늘의 숙박지인 벽소령가지는 14.1km 이므로 성삼재에서 노고단 고개까지의 약 3km의 길을 합하면 오늘의 이동거리는 약 17km로서 가장 힘든 하루를 예상하고 있다.
주능선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이정표는 평이한 길로 한 시간 거리의 임걸령 바로 못미쳐 피아골 삼거리이다.
얼핏 한국전쟁의 상흔이 깃든 이름처럼 들리지만 실은 곡물의 일종인 피를 많이 재배하여 피밭골이 피아골로 되었다 한다.
그렇더라도 이 골이 붉은 빛의 연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만큼 가을의 단풍은 지리4경에 들 정도로 아름다운 핏빛인 곳이다.
피아골은 직전마을에서 시작하여 골을 따라 연곡사, 피아골대피소를 거쳐 임걸령으로 오른다.
임걸령에서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는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면 노루목이다.
지리산의 중심이며 진정한 산꾼들이 천왕봉 보다 더욱 좋아한다는 반야봉(1732m)을 보려면 여기서 왼쪽으로 한 시간여 올라야 한다.
지리3경을 자랑하는 반야봉의 낙조는 아직도 본적조차 없고 반야봉을 본지도 벌써 30년은 되는 것 같은데 매번 종주를 할 때마다 시간에 쫓겨 지나치는 아쉬움이 있다.
마침 두 젊은이가 올라오며 반야봉 경유를 두고 갈등하기에 1km 길인 반야봉을 꼭 다녀오라고 권유하며 벽소령에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고는 정작 우리는 오늘도 아쉬운 마음을 남긴 채 전북, 전남, 경남의 경계가 모인 곳, 삼도봉을 향한다.
잠시의 휴식 후 길게 이어지는 내리막길 계단에서 3박4일 일정으로 성남에서 혼자 왔다는 아가씨를 만나다.
내리막이 끝난 곳이 화개재인데 여기서 왼쪽은 뱀사골을 거쳐 반선에 이르는 길이다.
뱀사골은 대구에서부터 가깝고 교통편이 좋아 가장 자주 자주 들르는 북부 지리산의 계곡으로 입구에 배암사란 절이 있어 뱀사골이라 불려진 곳이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르는 길은 은근한 오르막으로 힘이 많이 든다.
토끼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는 명선봉에 이르는 오르막에 또 다리 힘을 주어야 하며 명선봉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땀흘리고 힘주어 올라온 높이가 이렇게 아까울 수가 없을 정도로 정말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짐이 많아서인지 예상보다 속도가 늦다. 벌써 4시 30분을 넘어서고 있다.
대피소에서는 ‘벽소령에서 묶을 사람은 빨리 출발하라’고 한다.
매송을 먼저 출발시켜 벽소령 산장의 자리를 받아두라고 하곤 뒤에 온 교매와 청죽 부부와 함께 다시 벽소령으로 출발.
연하천에서 벽소령의 길은 너덜지대가 많아 생각보다 힘이 드는 구간이다.
앞선 남자의 짐이 뒤로 쳐져 무거워 보이길래 배낭 끈을 바짝 당겨서 짐을 어깨 쪽으로 붙여 주었더니 “짐을 맨 것 같지도 않다”며 고마워했다.
나는 6시 30분, 교매와 청죽 부부는 어두워지려는 7시가 되어야 첫 숙박지, 벽소령에 도착하였다.
가는 비가 내린 날씨, 평소보다 무거운 짐, 험하고 먼 길 등으로 인해 다들 피로도가 심했다. 나도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났다.
작년 추석연휴인 9월, 매송과의 1박 종주 시에는 하루에 세석까지 갔었는데 그 때보다 오늘이 더 힘들다.
벽소령 대피소에는 식수도 좀 먼 곳에 있고 밤이 되니 손이 시릴 정도로 물이 차갑다. 벤치에 자리를 펴고 급하게 저녁을 준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는 양치질만 하고 그대로 대피소의 정한 자리에 들었더니 예약손님으로 꽉 차 비좁다.
다행이도 3호실 2층이 비어있어 직원의 권유로 자리를 아주 넓은 곳으로 옮겼으나 자리만 넓을 뿐 코고는 소리와 물파스 냄새 등 환경은 매한가지이다.
뒤척이다 잠들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새벽녘 밖을 잠시 나왔더니 차가운 별이 쏟아지고 그 너머로 여명이 스며든다.
2일차 벽소령 - 천왕봉 - 장터목
이른 6시에 기상, 짐을 챙겨보니 헤드랜턴과 바람막이 옷이 없어졌다.
아무래도 어제 밤 잠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분실한듯하여 이곳저곳 살펴보고 직원에게 분실물 문의도 해보았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대피소 앞 쪽에서 자리를 잡고 미역국 아침을 준비하는데 어제 반야봉에 올라보라고 권유한 두 청년이 있기에 ‘언제 도착하였나’고 물었더니 ‘방금 도착하는 길’이라고 한다.
체력이 달리고 반야봉 정상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연하천에서 숙박하고 아침 일찍 벽소령에서 나를 만나보려고 세벽 4시에 출발했단다.
내가 많이 원망스러웠나보지만 책임의 상당 부분은 물론 그들에게 있었으니 반야봉 오르는 중간 쯤 삼도봉에서 오르는 길과의 삼거리 부근에 배낭을 숨겨두고 반야봉에 올랐다가 하산할 때 그 자리를 지나쳐 다시 올라갔고 게다가 숨겨둔 배낭을 어렵게 찾는 등 반야봉에서 3시간을 허비하였다니 말이다.
다행히 벽소령 대피소의 예약을 취소하고 연하천에서 숙박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침 날씨는 좋다.
오늘 아침부터는 동행이 생겼다.
우리와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는 선크림을 발라주는 등 닭살을 떨던 연인은 수원에서 온 부부였다.
이들은 어제 새벽에 구례역에 도착, 버스로 여섯 시 경 성삼재에 이른 후 거의 12시간이 걸려 저녁 여섯 시 경 벽소령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1박 2일 일정으로 왔는데 임걸령까지는 사진도 찍어가며 즐거웠었는데 그 이후로는 힘도 들고 연하천에서 벽소령 구간의 너덜길에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한다.
사실 어제 밤 산장 건너편에서 랜턴과 휴대폰의 불빛으로 우리의 잠을 방해하였고 그의 신부는 신랑을 찾아와 팬티 바람으로 그 부근에서 잠든 매송을 놀라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또 다른 동행은 어제 신혼부부와 같은 기차와 버스, 같은 코스를 걸어온 서울에 거주하는 일간지 기자인 25세의 아가씨로 우리 앞쪽에서 혼자서 즉석밥을 먹고 있던 이였다.
8시 30분, 이렇게 늘어난 일행 8명이 장터목을 향한다.
점심식사 예정지인 세석대피소까지는 6.3km이다.
벽소령은 해발 1350m, 지리산의 남쪽 하동군 화개면과 북쪽 함양군 마천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칡령이라고도 하며 이곳의 달 풍경은 지리6경으로 겹겹이 쌓인 산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 하여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 한다.
지리산의 시인 강영환은 2007년 ‘벽소령’ 제목의 시집을 낸 바 있다.
지리산자연휴양림에서 포장된 임도를 따라 오르다 포장길 끝 부분에 주차한 뒤 약 한 시간 남짓이면 이곳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참으로 편안하고 지리의 남쪽 전경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구름들이 정상부에 걸리고 골골에 내려앉는다.
교매는 詩心이 이는지 나로부터 메모지를 얻어가더니 저쪽 봉우리에 앉았다.
봉우리들에서 간간이 지리의 주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망이 나빠진다.
초등학생 혹은 중고등학생들과 함께한 가족 산행꾼들이 부럽기도 하고 보기도 좋다.
초반의 편안하던 길은 오르막을 만나 덕평봉을 지나고 내려서는 길에서 곧 선비샘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과 서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말을 건네며, 반가워하는 곳이 바로 산이다.
다시 칠선봉, 영신봉의 지긋한 오르막이 있고 영신봉에서 내려서는 길에 펼쳐지는 세석평전의 전경은 장관이다.
생각보다 많이 늦어진 시간인 12시 15분, 수원의 신혼부부와 내가 먼저 세석에 들어 자리를 잡는다.
교매와 청죽 부부, 그리고 미스 서울과 매송이 차례로 도착하니 12시 30분. 라면을 8개 끓여 함께 식사를 하고 13시 30분, 이제 장터목을 향한다.
잔돌이란 뜻의 세석(細石)은 그 이름만큼이나 예쁜 지리산의 꽃이다.
1500 미터 이상 되는 고지의 너른 천상화원인 세석평전은 지리7경인 봄철의 철쭉은 물론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다양한 생물자원들을 품고 있다.
특히 세석에 발달한 습지들은 국내에서 드문 고산습지로서 그 가치가 높다.
지금도 세석 부근에는 동자꽃, 며느리 밥풀꽃, 산국, 산구절초, 모싯대, 쑥부쟁이, 향유, 물봉선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군락으로 아니면 돌 틈 등 각자의 위치에서 곱게 피어 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
또한 세석은 남으로는 거림, 대성리로 향하며 낙남정맥의 긴 능선을 따라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이나 쌍계사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고 북으로는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에 이르는 산길의 요충지이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3.4km로서 두 시간이면 여유 있는 거리이다.
북쪽의 백무동과 남쪽 거림방향으로 빠지는 세석 갈림길의 해발 고도는 1557 미터이다.
촛대봉을 향하여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다 뒤돌아보면 평전에 놓인 대피소와 골짜기에 들어찬 구름이 아름답고 등산로 우측 우드데크를 깔아둔 세석 습지도 참 예쁘다.
촛대봉에 올라서면 노고단 방향이나 천왕봉 방향뿐만 아니라 남쪽과 북쪽 모든 방향의 경치가 참 좋은데 오늘은 구름에 쌓여 아쉽다.
부부는 어제와는 달리 나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진행속도가 좋다.
장터목 대피소에 15시 15분, 도착하자 청죽 부부가 뒤 따라 들어온다.
지금의 날씨로는 내일이면 비도 올 것 같아 아침 천왕봉 일출을 보기가 어렵고 오늘 오후 시간도 여유가 있어 천왕봉을 함께 다녀올까 마음먹지만 교매 그리고 미스서울을 데리고 오는 매송의 도착이 늦어진다.
내일 저녁 수원에 약속이 있다는 부부가 짐을 맡겨둔 채 천왕봉으로 먼저 올라간 후 네 시경 일행이 함께 도착한다.
체력이 다소 떨어진 서울 아가씨는 천왕봉을 포기했고 마침 교매도 쉬려고 하기에 청죽 부부, 매송 그리고 나는 배낭을 남은 자에게 맡기고 1.7 km 거리의 천왕봉을 향한다.
고사목 군락, 제석봉(1808m), 통천문을 지나 구름에 쌓인 천왕봉엔 약 50분만에 도착하였다.
먼저 온 신혼부부가 조용한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천왕봉은 한반도의 남쪽에서 가장 높은 그야말로 남한의 최고봉이다.
이곳의 일출은 지리7경으로 지리산에 오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고 싶어 하는 장엄한 광경이지만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그 장관보기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생김에 있어 무게감이 엿보이는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면 대부분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오늘은 우리의 독차지이다.
정상석 앞면(지리산 천왕봉 1915m)과 뒷면(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 모두를 배경으로 원없이 사진을 찍고는 조망이 없음을 아쉬워하며 내려선다.
천왕봉을 내려서는 길은 대원사 방향, 가장 잛은 코스라는 중산리 방향, 그리고 중봉과 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등이 있지만 으뜸은 단연 칠선계곡이다.
칠선계곡은 천왕봉에서부터 마천면 추성리까지 약 14km에 이르는 장대한 계곡으로 지리8경에 해당하는 아름다움이며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죽음의 계곡, 설악산 천불동 계곡 그리고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 등으로 불리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신비의 계곡을 보존하고자 1999년부터 10년간 자연휴식년제를 실시하였으며 2008년 5월부터 전구간이 개방되었으나 아직 일 년에 5,6,9,10월 넉 달간 그것도 예약 및 가이드제에 의한 월, 목요일의 올라가기와 화, 금요일의 내려가기만 허용되고 있으니 이곳을 보려면 특별히 일정을 조정하고 예약을 하여야 한다.
가슴 아프지만 나로서도 아직 이곳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하산길에 칠선계곡 방향을 지나치며 자물쇠가 채워진 목책을 넘어서 하산하여 볼까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산과의 약속을 임의로 파기할 수는 없다.
장터목 대피소까지의 산행이 애초의 목표였으나 천왕봉을 다녀오는 탓에 오늘의 산행거리는 13.1 km로 불어나 있었다.
6시가 못되어 다시 장터목에 내려서니 교매가 밥과 함께 참치김치찌게를 준비해두고 있다.
방송에 따라 예약자인 내가 올라가 숙소배정을 받고(제석봉 22-25), 뒤이어 예약없이 온 신혼부부도 무사히 잠자리를 얻었다.
지리산대피소의 잠자리는 물론 예약이 필수지만 복도나 거실 등 다소 여유가 있어 꼭 지리산을 보아야만 하는 사람은 예약없이도 대피소에 저녁 전에 도착하여 기다리면 잠자리를 얻을 수 있다.
지난 해 매송과 종주 시 세석에서 저녁을 먹으며 추위에 큰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비예약자의 경우 여성을 우선하고 남성의 경우 60대, 50대 등 연장자 순으로 자리를 배정해주는데 물론 돈은 똑같이 내어야 한다.
지난 해 밥을 먹다가 50대 남성 올라오라는 방송이 무슨 합격자 발표인 양 기뻤던 기억이 있다.
저녁을 8명이 함께 먹고 나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지리산을 종주하려면 최소한 종주기간 동안은 머리를 감거나 씻는 것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하며 불편한 화장실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물수건 두어 장으로 얼굴과 손, 발을 닦아내고는 일찍 잠자리를 잡았으나 역시 누우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비좁다.
새벽 천왕봉을 예정하는 사람들은 소등시간이 9시인데도 8시 전부터 잠을 청하는 이들이 있다.
나란히 앉은 우리가 얘기를 나누는데 이층에서 계단으로 한 남자가 마치 장애인처럼 어기적거리며 내려오는데 그는 바로 나의 권유로 반야봉을 올랐던 그 총각이 아닌가.
인사를 건넸더니 무릎이 아프다며 상을 찌푸린다.
매송은 오늘 만난 어떤이에게
“무슨 짐이 그리 많으냐”
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길
“내 인생의 짐보다 많기는 하겠어요”
라고 하며 자기는
“앞서가지 않고 남들의 뒤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
던 말들에 감동 먹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왔더니 신혼부부가 복도에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며 기대어 앉아 있다.
마침 옷 갈아입으려 들어갔던 담요보관실이 비었기에 관리 직원에게 “이들이 신혼부부인데 담요보관실에 함께 재우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뒤에서 다른 분이 우리나라 출산율 운운하면서 나를 거들었어나 직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9시 소등, 어둠 속에서 코고는 소리가 더욱 커지지만 귀마개 덕분에 다시 멀어진다.
3일차 천왕봉 - 백무동, 그리고 그 후
8월 27일, 오늘의 일출 예정시간은 5시 55분이지만 아직도 깜깜한 새벽 4시, 천왕봉을 준비하느라 약 2/3 정도가 짐을 꾸린다고 소란을 떨더니 4시 30분이되자 다시 조용해지고 한결 널찍해졌다.
밖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천왕봉엔 숙명처럼 다녀와야 하는 이가 이리도 많다.
우리 일행은 6시에 기상하여 취사장에 자리를 잡고 된장우거지국으로 아침준비에 들어간다.
다른 방에서 자는 신랑은 내가, 미스 서울은 청죽 부인이 깨웠다.
6시 30분 부근이 되자 천왕봉에 올랐던 이들이 취사장으로 밀려든다.
어렵게 확보한 공간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그 자리를 물려준다.
8시, 비옷을 챙겨 입고 함께 모여 단체 기념 촬영 후 5.8 km 거리의 백무동을 향하여 교매가 앞장서고 나와 수원 부부, 청죽 부부, 그리고 매송과 미스 서울이 차례로 줄을 선다.
배낭은 거의 비었고 내리막이지만 비옷 덕분에 땀이 많이 난다.
비록 비는 내리지만 예정했던대로 지리산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이 옆을 스친다.
소지봉을 지나고 참샘에 이르자 남녀 중학생 열댓 명이 왁짜하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30대의 남자 손에 이성부의 시집 ‘지리산’이 들려있기에 국어선생님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수원의 신랑을 보며 애들은 박현빈을 닮았단다.
오늘 천왕봉에 올랐다가 다시 이길로 하산할 예정인 이들은 남원 한빛중학교 학생들이었다.
선생님도, 그리고 힘든 지리산 정상까지 따라나선 아이들도 대견스러웠다.
백무동 야영장에 이르기 전 좌측의 물가로 들어 머리도 적시고 세수도 하고 발과 흙 묻은 신발을 씻는다.
야영장 평상에서 남은 6개의 라면을 끓이는데 매송과 미스 서울이 내려서기에 박수로 환영한다.
비도 멈추었다. 교매와 매송이 티격거리며 샀던 과자는 결국 많이 남았다.
수원 신랑(홍수진)과 미스서울(박소영)에게 정식으로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나누었다.
버스정류장, 청죽은 택시를 타고(다행이도 동행이 있어 백무동에서 성삼재까지 49,000원 하는 값을 둘이서 각각 30,000원씩 지불) 차를 가지러 가고 서울로 향할 세 사람은 마침 동서울 행 우등고속 13시 30분차가 있어 악수로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는 떠났다.
매송이 감동 먹었다던 그와 버스 정류장에서 얘기 꽃을 다시 피우는 동안 청죽의 차가 왔다.
오는 길엔 함양을 향하던 중 지리산 전망대에서 전체를 조망하고자 했으나 아직도 주릉을 감싼 구름이 야속하다.
전망대엔 최익현의 ‘천왕봉’과 강희맹의 ‘내고향’의 싯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지리산이 완전히 등 뒤로 사라지고 수일을 지났지만 눈만 감으면 지리산의 그림들이 펼쳐지고 지리산의 크고 작은 소리들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다음 월요일, 저녁 무렵 수원 신랑으로부터 사진을 보냈다는 문자가 왔다.
다음 날 아침 단체 사진을 서울의 박양에게 메일로 보냈더니 이틀 후 늦어 죄송하다며 그리고 고마웠다는 답장이 왔다.
산은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나를 만나는 곳이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