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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로 율곡에서 시작하다
그랬슴에도 새벽의 어둠을 뚫고 백의종군로 걷기에 나섰다.
걸으면서 생각했고 생각하면서 걷는 동안, 그리고 큰 사고를 면한 후에도 생각한 결론이다.
생각이 많으면 정답이 멀어진다지만 생각을 거듭해 도출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이해득실의 와중에 있지 않으면, 초연하면 모두가 정답이다.
초계도 율곡도 다른 제삼의 장소도.
출발지는 백의종군의 의미에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제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어떨까요" (余告以吾往沿
海之地 聞見而定云/정유년7월18일의 난중일기)가 백의종군의 전부(이유 목적 의미)다.
10리도 못되는 상거의 두 곳인데 출발지가 왜 문제되는가.
초계와 율곡, 양측이 이순신의 출발지가 모여곡인 것은 인정하는데 당시의 모여곡이 현재는
초계향교라는 주장과 현 율곡면 낙민리 매실마을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6월 4일부터 7월 17일까지 44일간의 난중일기에는 이 기간에 체류한 곳이 문보와 이어해의
집으로 되어 있다.
도배도 하고 증축도 하고(군관이 머물 곳) '나의 임시로 사는 집','안방' 등 단순히 잠자는 집
(house) 이상의 정감(home)을 느끼게 하는 표현도 있다.
당시의 이어해의 집과 현재 남아있는 이어해의 집이 같은 위치의 집이라면 율곡면은 자기네
주장을 입증하는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지진에도 버틸만한 집이 아니라면 반천년을 이겨낼 수 없는데 상대편이 인정
하겠는가.
완충 지대는 없을까.
후손과 역사성 운운하지만 표면적인 이유일 뿐인데 이익의 공유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중간지대라면?
어둠 속을 달린 버스가 율곡면사무소 앞에 당도했을 때는 먼동이 튼 후였다.
업무개시 전 시간을 이용해서 어제 석양에 이강중이 가리킨 들과 길들을 살펴보았다.
난중일기(6월4일)에는 이순신은 합천에서 시오리(6km)쯤 되는 곳, 합천으로 가는 길과 초계
로 가는 쌍갈래 길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10리(4km)쯤 되며 권율 도원수의 진이 바라다보이
는 위치의 문보의 집에서 잤다.(일기에는 行到五里前。則有歧路。一路直入郡。一路由草溪。
故不越江而行纔十里。則元帥陣望見矣。接宿于文㻉寓家 接宿于文㻉寓家)
문보는 누구기에 합천땅에 도착해 삼가현 관사에서 이틀 자고 다음날에 스스럼 없이 들어가
잤는지?
5일과 6일은 일기만으로는 맥이 끊기고 이해할 수 없는 이틀인데 따로 이야기하겠다.
섣부른 훈수에 뺨이 세 대라는데 공연스런 걱정 접고 율곡면사무소에 들렀다.
면장 또는 부면장이 퇴직하면 향토사학자로 변신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 직책이 지역 사정을 잘 알게 되는 자리임을 의미한다.
이강중이 만나보기를 권한 부면장(이기철)과 대면했다.
두 이씨가 오월동주(吳越同舟) 아닌 동심동주(同心同舟)의 관계인 듯.
어제, 날이 어두워가는데도 만나라고 전화한 까닭을 금방 알 수 있게 했으니까.
한계가 분명한 향토사학자를 만나서 또는 면청의 누구를 통해서 금은을 캐려 한다는 것이야
말로 부질없는 도로(徒勞)라는 것만 확인한 셈이다.
나는 초계의 현장은 어제 직접 확인하였고 매실마을(모여곡)도 어제 오후에 향토사학자들로
부터 듣고 보았으므로 율곡면청을 출발지로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어 이 아침에 다시 왔다.
내가 율곡측의 주장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하는 것이 초계에서 출발한 것도, 모여곡
에서 시작하는 것도 되며. 자연스럽게 모두를 아우르는 것일 테니까.
이기철은 내 의중을 간파했늕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하긴, 자기네 면에서 시작하는데 부정적이겠는가.
그의 환송을 받으며 시작한 길, 합천읍과 율곡 사이 10km여는 어제밤과 이 아침나절에 거듭
걷는 것이다.
지금은 도로의 개설과 확장을 거듭하고 위험한 구간은 교량도로(긴 개벼리교)로 처리하여
국도(24번/동부로)가 되어 있고 황강 강변에는 율곡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순신이 "고개를 끼고 오면서 천길 기암 절벽에 강물은 굽이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태로워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하겠다"(介峴行來。奇巖
千丈。江水委曲且深。路險棧危。若扼此險。則萬夫難過矣)고 본 곳(어제 이강중은 권율 도
원수가 무관 900명을 양성하던 곳으로 알려졌다고 설명)이지만 그가 환생해도 천연 요새로
보지는 않을 지역도 2번이나 걸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걸으며 느낀대로 워낙 험하여 접근할 염을 가질 수 없는 때가 있었던 길.
산 허리를 돌아가는 옛길이 지금은 폐기되었으나 그 길의 개설이 난공사였겠거니와 그 길을
왕래할 때도 간담이 서늘했겠다.
지금 올려다만 보아도 아쩔한 느낌인 저 길에 '개비리고개' 전설이 있단다.
시대적 배경은 합천과 초계가 군 또는 현으로 대등하게 마주하던 때.
이 곳에 개비리고개로 불리는 개들의 사랑로가 있었다.
합천 개와 초계 개들이 사랑놀이를 하기 위해 왕래하는 길이.
개들마저도 감히 시도하지 못하던 때, 담 큰 합천개 한 놈이 위험한 절벽을 타고 고개를 넘는
사생결단의 모험으로 초계의 개와 사랑을 나눴다.
이후로 이 한쌍을 본받아 왕래하며 사랑을 나누는 개들이 속출함으로서 길이 트였다 하여
개비리(개벼리)가 되었고 그 고개를 개비리고개라 한다나.
율곡면의 이기철 부면장(위)
개벼리교 교량도로(위/아래)
황강과 영진교 뒤 율곡면과 초계면이 아스라하다다(위)
개벼리고개(개비리고개 전설의/아래)
합천읍과 율곡면, 대양면 갈림길 교차로(위)
아등재에 대한 언급이 왜 없을까.
율곡면의 끝, 합천읍과 대양면 등 세갈래 길인 임북교차로에서 어제는 밤길이라 다소 긴장했
지만 초계면사무소의 하상범이 만들어준 지도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이 대양면으로 바뀌었다.
선사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합천이 대량으로 불린 점으로 보아서 현
대양면이 합천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단다.
이조시대의 대목면과 양산면이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때(1914년) 합병하고 양면의 첫
자를 취합하여 대양면으로 명명한 것이라니까.
정양피암터널을 지나 황강레포츠공원을 우측에 끼고 합천대교밑을 통과한 24번국도가 합천
장례식장 앞 교차로에서 33번국도(합천대로)로 나가고 백의종군로는 직진, 정양교를 건넌다.
제2남정교 입구인 정양삼거리로 진출하여 이순신 백의종군로 표석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서
정양늪생태공원(정양저수지)과 나란히 쌍백과 삼가를 향한다.
'대야로'로 불리는 이 길은 지방도로로 강등된 옛 24번국도.
정양리 아천마을 입구의 백의종군로 표석을 지나 갑자기 졸림 현상이 왔다.
간혹 있는 이런 때는 등을 기댈 수 있는 곳이면 아무데서나 두 다리 뻗고 앉아서 잠시 오수를
취하면 되는데 최고의 명당이 기다리고 있다니.
대야로 변에'Volvo' 로고기둥이 서있고 간이 지붕과 벤치들이 있는, 식목한 나무들이 자라면
훌륭한 소공원이 될 쉼터다.
그 자동차회사(스웨덴)가 어떤 목적으로 조성했겠지만 내게는 더없이 고마운 오아시스였다.
신발 벗고 양말도 벗고 기둥에 기대고 두 다리 쭉 뻗고 좌수(坐睡)를 즐겼다.
대목교로 아천을 건넌 대야로는 잠시 33번국도와 나란히 가고 지하통로로 국도를 횡단한다.
국도변에 볼보 합천시험개발센터' 안내 간판이 서있는 것으로 보아 좀 전에 내게 공헌한 쉼터
도 볼보 센터의 한 부분으로 봐도 될 것 같다.
덕정교를 통해 부곡천을 건너면 대양면 다운타운이다.
오후 2시 10분인데 이정표에 따르면 여기는(대양면소재지) 합천 6km, 삼가 14km 지점이다.
율곡면 부면장의 안내가 맞으려면 이미 삼가면에 도착해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14km라니?
그 분은 평생 율곡면을 떠나보지 않은 율곡의 붙박이로 살고 있는가.
남쪽으로 이웃하고 있는 대양면도 가보지 않았는가.
대양이 4km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은 면계를 두고 한 말로 받아들인다 해도 대양에서 4km에
불과하다는 삼가가 14km라면 가보지 않았거나 거리감각이 백치라 할 수 밖에.
일몰 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안되는데도 노변의 목재상 앞에 서있는 '양조장 대양막걸리'
간판에 혹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늙은이.
양조장을 찾는 줄 뻔히 알면서도 딴전을 피던 영감이 1병에 1.000원이란다.
지나다가 들리는 길손에게는 아무나 우물물 마시고 가듯이 한잔 마시도록 안주로 멸치 또는
소금을 준비해 놓은 우리나라 양조장 인심과 달리.
까미노에서도 와인 주조장 앞에는 비노(vino/포도주)한잔 마시며 기운을 재충전하고 가라는
초대판이 서있는데.
잔술은 팔지 않는다 해서 한병 달랬더니 코딱지만한 공간으로 안내하고 1병을 내놓았다.
1잔으로 갈증만 풀고 나왔는데 영감이 뒤따라 나와 하는 말이 1잔 값은 받지 않겠단다.
무엇이 쌀쌀맞던 이 영감의 맘씨를 돌려놓았을까.
덕정삼거리의 면사무소 앞에 당도했다.
동서남북으로 대암산성, 갈마산성, 금반산성, 대야성이 둘러있고 서남에는 승비산성이, 북
에는 황강이 가세한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는 비옥한 땅.
선사때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지만 인구는 1.700명에 불과한 면이다.
백의종군로 표석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걷기를 이어갔다.
면사무소방문 무위를 말한 아침으로부터 5시간여만에 다시 방문하는 것도 그렇지만 삼가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시간 낭비할 짓 해야 하는가.
33번국도의 우측을 유지하던 대야로가 대목교를 지난 후 국도의 좌측으로 위치를 바꿔 면청
소재지를 지나고 덕산교(아천)를 건넌 후에는 지하 통로를 통해서 원위치(우측)로 돌아간다.
국도(33번)의 우측으로 복귀한 대야로는 분기하는 양산교, 신거교(신거마을)를 지나고 다른
양산교로 아천을 건넌 후 도리와 함지리의 분기점에서 국도로 올라선다.
백의종군로를 품은 대야로(구24번)와 합천대로(33번)가 하나되어 아등재를 넘는다.
고개가 완만하고 길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처럼 완만하고 짧은데도 걸어서 넘는 사람 보기가 지금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지만 절개
부분으로 보아 예전에는 꽤 높았을 고개다.
산 허리를 돌아서 갈 지형도 아니기 때문에 대양과 쌍백, 양 면민들은 힘겹게 걸어서 넘었을
텐데 이순신이 두 번이나 넘었을 이 고개에 대해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괴이쩍은 일이다.
자잘한 일도 꼼꼼히 기록했는데.
고백하건대, 이즈음의 나는 고개가 싫다.
그 까닭은 예전의 내가 아니며 작년이 아득한 옛날처럼 퇴화가 가속적임을 의미한다.
지금 나는 중대한 결단의 시점에 있다.
몸과 마음을 다잡을 것인지 아내의 사정에 타협할지를.
전자는 나를 다시 살리는 길이며 후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이다.
이번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를 따라 걷는 것은 바로 그 결단을 위한 길이다.
재를 넘음으로서 쌍백면에 진입했다.
고개마루에서 국도를 벗어나 먹곡육교의 우측 끝으로 해서 장전마을로 내려섰다.
33번국도에 들 락거리는 옛국도가 대부분이며 번호도 받지 못한 면단위 지방도(쌍백중앙로)
지만 소규모 자연마을들을 위해 버스가 다니는 길이다.
옛 국도였음을 보여주는 물증은 흉물로 변해있는 폐 주유소.
넓지 않은 노폭이지만 인(人)과 물(物)을 태우고 실은 대소차량들을 상대로 호황을 누렸으나
신국도로 달아나는 차량들을 끌어올 힘이 있는가.
주유소 외에도 각종 차량을 상대로 하는 식당, 편의점 등 영업장의 운명은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도로 담당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도면 위에 죽죽 긋는 선이지만 그 선에 살고 죽는 하찮은 운명이라니...
버스정류장 먹곡과 장전, 국도의 지하통로를 거쳐 원전을 지날 때 어두워졌다.
한번 더 국도의 지하통로를 따라 국도와 위치를 바꾼 후 삼가면과의 경계를 지척에 둔 평구
2리, 쌍백면소재지에서 마감했다.
볼보 쉼터와 아등재 전후에서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면 4km쯤 남은 삼가면청 소재지까지 해
안에 너끈히 갔을 텐데.
쌍백 또는 이웃인 삼가에 숙소 유무와 관계 없이 합천읍행 버스에 올랐다.
어떤 숙박소가 합천의 찜질방에 견줄 수 있겠는가.
아는 것이 힘이 되는 또 한가지가 뒷받침이 되고 있다.
농어촌 어디라도 공휴일이 아니라면 새벽같이 달리는 버스가 있다는 것.
모든 면 소재지에 초등학교가 있고 웬만한 면에는 중학교도 있는데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에
맞춰 예외 없이 버스가 다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마감한 지점에 이른 아침에 다시 설 수 있는데 왜 딴전을 피겠는가. <계 속>
전면의 긴 다리는 강양교.
어제 밤에 건널 때 이름을 찾아보았으나 아무 데도 없어서 괴이쩍었는데 이름을 정하지 못한채
개통했다가 지난 6월에 강양교로 확정했단다.
합천읍 교동교차로와 율곡면 임복공단의 농공교차로를 연결하는 다리.
가칭 공단교로 부르다가 합천의 옛 지명인 강양을 다리 이름으로 했다는 것.
합천대교(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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