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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면 답사 자료집
일시: 2017. 6. 10
대곡사(大谷寺)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왕사인 지공선사와 나웅선사가 창건하여 산내에는 본원을 비롯하여 구암을 지어 불교를 숭상하게 하여 호국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고려시대의 대찰이다. 경내에는 대곡사 대웅전(보물 제1831호), 대곡사 범종각(지방 유형 문화재 161호)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비봉산은 해발 579.3m의 산으로 고려 이전에는 태행산, 조선시대에는 자미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대곡사에서 적조암을 거쳐 3km에 이르는 등산로가 조성되어 시간 반을 걸어 정상에 오르면 100 리나 되는 긴 계곡이 펼쳐져 있고 남으로는 저 멀리 안계평야가 북으로부터 흘러오는 낙동강을 마주하는 있는 지역은 산세가 특히 절묘하게 펼쳐져 있어 등산하기 좋으며, 산 중턱아래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 왕사인 지공선사와 나웅선사가 창건한 대곡사 경내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60호인 대웅전과 지방유형문화재 제161호인 범종각이 유존하며, 매년 인근 지역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가 개최되는 곳이다.
대곡사는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산 894번지 비봉산 동쪽 자락에 있는 역사가 오래된 옛 절이다. 사찰이 들어앉은 다인면은 의성군과 연접하고 있는 상주, 예천, 안동 등 4개 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석탄일에는 인근 4개 시․군 신도들이 찾아들어 성황을 이룬다 한다.
이 사찰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 王師인 指空선사와, 懶翁선사가 원나라에서 수도를 할 때 "영남 예천 땅 紫徵山 남쪽 기슭에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포교하면 대성 한다"는 계시를 받고 귀국하여 이 사실을 국왕께 고하였다. 국왕은 이 두 국사의 도력이 높은 것을 알고 나라의 軍兵들에게 명하여 두 선사로 하여금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게 하고, 사찰 이름을 大國寺라 불렀다 한다.
이때부터 이곳에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를 하였으며, 산내에는 현재 남아있는 적조암을 비롯하여 아홉 개의 암자를 지었다 한다. 그 후 조선 선조 31년에 임진란 와중 본원과 암자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니, 垣祐대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소실된 사찰을 중창하여 禪客들을 맞이하였다 한다. 이후 1687년(숙종 13년) 태전대사(太顚禪師)가 중건하였다.
적조암 이외에도 적조암에서 가마바위로 이르는 길과 비봉산 정상아래 샘터 주변 등을 살펴보면 예전 암자가 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산내에 9군데 암자가 있던 대곡사에는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화전'놀이가 열려서 의성뿐만 아니라, 인근 예천, 안동, 상주, 선산 등지에서 많은 선남선녀들이 모여 봄날을 즐겼다 한다.
大東地志에 "縣內, 縣西, 縣南, 縣東 네 면은 다인 옛 縣의 땅이다. 동쪽은 안동의 豐南面, 義城의 羽谷面, 比安의 定西面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상주의 中東面, 龍宮의 內下ㆍ南下 兩面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同縣의 中上ㆍ中下 양면과 접해 있다."하고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접경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댓골을 거쳐 한양 가는 길목, 江의 흐름과 관련이 있는 점 등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인가?
사찰의 위치는 여늬 산중의 사찰처럼 산 깊숙하게 자리 잡는 방어적 위치가 아니다. 또한 영남학에 소개된 자료에 의하자면 비보적 사찰 또한 아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인가 ? 대신 조선 숙종 13년에 太顚 선사가 지방민들에게 불교를 숭상하게하여, 그 호국불교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하였다. 그 때까지 산과 사찰의 이름은 예천군 太行山 大國寺였다.
태전선사가 중건하며 - 太行峰에 올라 사방 지형을 살펴보니 백리나 되는 긴 계곡이 있으므로 - 大谷寺라 개칭하고 산 이름 또한 比鳳山 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太行山이 중국에 있는 유명한 명산이고, 大國寺라 대국이라는 호칭 또한 중국과의 관계등을 고려함이었으리라. 권동로 저,'韓國寺刹全書』대곡사조에서 좌경상북도예천 비봉산 동국여지승람이사 梵宇巧 大嶺志 기록을 轉載한 것을 보면 山名亦稱太行 昔者一唐人來此 指曰 中國太行山 何年飛來此地耶 故名之 山有百里之長谷故寺以大谷改名云이라 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온갖 풍상과 전란을 겪으면서 유지되어 왔으나, 그 옛날 영화롭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지금은 1605년에 세운 大雄殿과, 1623년에 세운 香寂殿, 1650년에 세운 梵鐘樓, 1656년에 세운 冥府殿이 있다. 아홉 개의 암자 중에 1647년에 세운 寂照庵 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 사찰이 이리 유지될 수 있었던 연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856년 鄭仁祖 和尙이 사찰의 주지로 부임하여 53 불전, 16 나한전, 산신각, 요사채, 적조암 일부를 지방민에게 매각하였다. 이로 인하여 화상은 부처님의 노여움을 입었기 때문인지 나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 후 崔寅贊 스님이 부임하여 27년간 봉직할 때에 정인조 화상이 팔고 간 53불전의 불상을 다인면 木材谷 굴속에서 한 여신도가 발견하고 불자가 된 마음에 가슴이 아파 촛불을 켜고 3일간을 정성껏 불공을 드렸더니 결혼 20년 동안 잉태하지 못했던 몸에서 옥동자를 분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에 의함인지 예부터 비봉산은 명산, 대곡사는 명찰임을 작자미상의 삭朔命歌와 인근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에 보관하는 글에 지공대사가 수행하던 도량이므로, 入葬을 금하여야 한다는 감결과 절 근처에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기문 등의 글로 미루어, 주변에 사람들의 당시 생각과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대곡사에 들어서면 塔身이 없는 多層石塔 청석탑을 중심으로 전방에 누각형식의 梵鐘閣이 있고, 좌측에 寮舍體, 우측에 冥府殿이 마주보고 있으며, 뒤쪽에 大雄殿이 있는 口 자 形의 伽藍配置를 이루고 있다.
명부전에 東國李相國文集 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 예천현을 살펴보면 多仁縣의 남쪽에 비봉산이 있다. 비봉산에 大谷寺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李奎報가 지은 "17일에 대곡사에 들어가다" 라는 詩가 대곡사 범종각에 걸려있다.
石路高低平不平 / 돌길이 높고 낮아 울퉁 불통하니
閑騎果下彈鞭行 / 한가한 손이 과하마(果下馬)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輕風靜掃煙光去 /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 가고,
落月時兼曉色明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빛을 겸하여 밝다.
短麓前頭看寺榜 /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서 절(寺)의 현판을 보고,
橫舟側畔問灘名 /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灘) 이름을 묻는다.
孤村何處吹寒笛 /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쓸쓸히 피리를 부는가,
抱疾他鄕易惱情 /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
* 과하마 : 키가 작은 조랑말 따위로서 타고서 과실나무 밑으로 지날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었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 범종각, 다층석탑, 명부전 등 4점의 문화재가 있다. 이외에, 대곡사 범종각 입구에는 특이하게 보이는 연화문이 양각된 石鐘形의 부도와 석장승, 하대석,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대웅전 앞의 뜰에는 하대석과 간주석 및 상대석의 일부만 남은 거북형상 등의 작은 동물이 양각되어 있는 석등이 있다. 대웅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연꽃문이 양각되어 있는 석재, 부도 등을 모아 중첩하여 쌓아놓은 석조물 2점이 있다.
대웅전 기와보수, 명부전 해체 및 복원, 범종루와 향적전을 보수하였다. 사찰 주변에 녹지를 조성하고, 주변 정화 작업을 하는 동시에 휴식 시설까지 보완하여 영화롭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대곡사 범종각
범종각은 종을 봉안했던 곳인데, 지금은 종이 없다. 범종각은 사찰 입구 전면에 위치해 있으며 의성 대곡사 대웅전보다 한 단 아래에 있다.대곡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중창하였으며, 1687년(숙종 13) 중건하였다. 범종각은 1978년에 다시 보수가 이루어졌다.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건물은 2층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층은 通間으로 처리하여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마루의 주위에는 平欄干을 세운 軒檻을 설치하였다. 종각은 막돌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누하주를 세우고 멍에를 끼워 상부의 우물마루를 받았다. 공포는 外二出目, 內三出目으로 꾸몄으며 외부 제공은 앙서형으로 되었으나 그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였고, 내부 제공은 한 몸으로 연결하여 초각하였는데 이는 대웅전의 조각수법과 비슷하다.鷄子脚 난간을 두른 누각에는 法鼓·雲版·木魚를 설치하였는데, 범종은 용문사로 가져갔다고 전한다. 가구는 종량 위에 波蓮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여를 받게 한 5량가의 견실한 구조이며, 방형 대들보 위에 원형의 덧보를 포개고 충량 없이 중도리로 왕지(모서리 기둥 밖으로 내민 도리)를 짜 우물천장을 구성되어 있으며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외부에 돌출된 쇠서(牛舌)의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여 조선 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또한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하나씩 놓은 반면,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대웅전(보물 제1831호)의 조각 수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대웅전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대곡사 명부전(大谷寺 冥府殿)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선사와 나웅선사에 의해 창건 되었으나 임진왜란시 화재로 소실되어 조선 선조 38년(1602)에 탄우대사가 중창하였고 숙종 13년(1687)에 중건하였다. 대곡사 명부전은 건립 당시부터 명부전으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창호구성 수법 치목방법 등 건축 수법에서 17~8세기의 형식들을 유치하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9호(2003. 4. 14)
적조암 구포루 義城大谷寺寂照庵九苞樓)
의성 대곡사 적조암 구포루는 대곡사의 산내 암자인 적조암의 주요 건축물로 누마루와 대방, 불당이 하나로 결합된 인법당 건축물이다. 2014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626호로 지정되었다.
다인면 봉정리 비봉산에 위치한 대곡사에서 산 정상부로 조금 떨어진 적조암에 있다. 소재지는 다인면 대곡사길 80(봉정리 894)이다.
대곡사는 1368년(공민왕 17)에 창건된 사찰이며, 산내 암자인 적조암은 창건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대곡루는 상량문을 통해 1847년(헌종 13) 새로 건축한 것으로 확인된다.
의성 대곡사 적조암 구포루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평면은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뒤쪽에 대규모 온돌방인 대방을 설치하고, 앞쪽에 누마루를 돌출하여 설치하였다. ‘대곡루’라는 명칭은 이 누마루에 걸려 있는 현판에서 따온 것이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설치하고 팔작지붕을 이었다.
의성 대곡사 적조암 구포루는 적조암의 중심 건축물로 요사와 법당 기능이 결합된 인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 후기 암자 건축의 특성인 누마루와 대형 온돌방, 법당이 결합된 사례로 암자 건축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대곡사 적조암 구포루는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이나 그 유래는 17세기까지 소급되고 18세기에도 중창한 적이 있다. 대곡사 고승 진영이 보관된 적이 있어 진영각 역할을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의미에서 중요한 고승의 활동과 사건은 기록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량문에 따르면 봉황이 머문다는 뜻에서 유래하고 이 건물이 있는 적조암은 비봉산의 주맥에 연결된 것이라 한 만큼, 경과적으로 의미가 있고 현존 대곡사 암자로는 유일하다. 대곡사는 전성기에 9암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적조암만 남아 있다. 적조암 구포루는 인법당으로 1847년 창건하였는데 누마루를 가진 매우 독특한 양식의 건물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이 건물은 대곡사의 입장에서나 건축적인 가치를 볼 때 일견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었고, 법당이 방으로 개조되고 방 뒤편에 벽장을 신설하는 등 일부 부분에서 변형이 있다.
구포루는 정면4칸, 측면4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평면은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뒤쪽은 온돌방을 설치하고 전면으로는 정면2칸, 측면2칸 규모의 마루를 돌출시켰는데, 마루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상부의 마루는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고,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각을 세운 헌함을 둘렀으며, 처마의 주위에는 활주를 세우고, 가구는 오량가의 이익공으로 창방과 장혀사이 초각한 사자모양의 화반을 설치하였으며 내부에 다락방을 설치하는 등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따라서 원형이 훼손된 부분만을 고려하면 문화재적 의미가 약하지만, 건축적 희소성을 고려해 볼 때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ㆍ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되어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
의성 대곡사 삼화상 · 조사 진영(義城大谷寺三和尙祖師眞影)
「의성 대곡사 삼화상 · 조사 진영」은 指空·懶翁·無學의 「三和尙 眞影」과 「淸虛堂 休靜 眞影)」, 「泗溟堂 惟政 眞影」, 「抱虛堂 曇秀 眞影」 등 4폭의 초상화로 조선 시대에 제작되었다. 2010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27호로 지정되었다.
「삼화상 진영」은 한 폭에 칸을 나누어 그렸다. 指空을 중심으로 좌우에 無學과 懶翁을 배치한 형태이다. 이들 삼화상을 한 폭에 그린 도상으로는 현존 진영 중 가장 이른 예로서 의미가 있다. 「삼화상 진영」과 「청허당 진영」, 「사명당 진영」은 1782년에 같은 화원에 의해 제작되었고 특징적인 도상의 화풍이 비슷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의성 대곡사 지장보살도
「의성 대곡사 지장보살도」는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그린 조선 시대 불화이다. 2010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26호로 지정되었다.
「의성 대곡사 지장보살도」는 가운데에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육광보살과 시왕, 제석·범천, 동자, 사천왕 등 여러 권속을 배치한 형식이다. 화면의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하단이 일부 손상되어 있다.
육광보살, 사천왕 등의 도상이 추가되어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후기 지장보살도에 사천왕이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로서 의미가 크다.
의성대곡사다층석탑(義城大谷寺多層石塔)
대곡사의 대웅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으로, 탑 몸을 점판암으로 만든 靑石塔이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173㎝로서,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다. 땅에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은 몸돌은 없고 지붕돌 옥개석만 쌓여 있는 상태다. 각층의 지붕돌은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는데 6․7층은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들어 그 사이 한 층의 지붕돌이 없어진 것 같아 원래는 13층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대곡사 다층석탑은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제518호)보다는 조금 늦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적어도 그 시기가 11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층의 몸돌이 남아 있지 않고 지붕돌도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12층까지의 지붕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고려 초기의 청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봉남서당(鳳南書堂)
鳳南書堂은 다인면 덕지리 덕지 3길 41-28(덕지리 19) 에 있었던 조선 시대 사설 교육 기관으로 金振曄이 건립하였다. 김진엽의 본관은 金寧, 호는 鳳南이다. 德陽 書院에 배향된 金文起(1399~1456)의 5세손이다.
鳳南書堂은 마을 경로당에서 덕지 3길을 따라 직진하면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 길을 따라 약 150m 이동하다 보면 오른편에 계단식 농지와 산과 수원사이로 좁은 길이 보이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봉남서당이 있다.
봉남 서당은 계단식 농지 가운데에 있는데, 서당의 동북쪽으로는 산과수원이 있고, 서쪽에도 飛鳳山의 산자락 하나가 내려와 감싸고 있다.
봉남 서당은 자료의 소략으로 초창기 역사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다만 1888년 金溶夏(1873~1941)가 쓴 「봉남서당 중건기」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경상북도 상주에 살던 김진엽은 비봉산 남쪽으로 이주하여 봉남당을 세웠다고 한다. 당의 이름은 비봉산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88년(고종 25) 김용하의 조부 金昌奎와 그의 아우 金道奎가 중건을 결심하고 예천 군수의 허락을 얻어 현재 다인면 달제리에 있던 仙鶴寺의 건물을 뜯어다가 봉남당 옛 터에 중건하였다. 이때 覽德齋와 朝陽軒 등을 증축하였다.
중건 기문은 김진엽의 9세손인 김용하가 부친 金聲海의 명을 받아 지었고, 鳳南書堂 현판은 조선 말 명필로 알려진 高永贊이 썼다
기문을 쓴 김용화는 봉남당에서 학문을 강마하기도 하고 ‘봉하대시모임(鳳下臺詩契)’을 만들어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봉남 서당은 정면 4칸 측면 2.5칸 규모의 팔작지붕(우측의 마루만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中堂挾室形이다. 좌측방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설치하였고, 우측방의 전면에는 개방하여 마루 1칸을 돌출시켜 ‘ㄱ’자 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기와를 얹은 토석담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데, 서당의 뒤편에 둔덕이 있어 계단식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봉남 서당은 비지정 문화재로, 서당을 활용 한 콘텐츠는 아직까지 운영되지 않고 있다. 주변에 위치한 김용하 고택 등과 연계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의 개발이 요구된다.
구암정(龜巖亭)
구암정은 다인면 달제 3길 150-4(달제리 92) 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로 辛日和(1760~1823)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신일화의 본관은 寧越, 자는 和叔, 호는 龜巖으로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검암 마을에 있는 玉洞祠에 향사된 辛達廷의 후손이다. 천품이 영매하고 기상이 뛰어났으며 행동은 항상 조용하였다고 한다.
다인 초등학교에서 자미로를 따라 약 4㎞ 이동한 뒤 우측 문암길을 따라 약 1.5㎞를 가다 보면 외쪽으로 ‘달제 3리’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직진하면 달제 3리 경로당이 위치하고 있다. 경로당 정면으로 나 있는 산길 약 70m 올라가면 구암정이 자리 잡고 있다.
구암정은 자료가 소략한 탓에 그 내력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의성 유적지』(1996), '의성 군지』(1998), '문화 유적 분포 지도』(2005) 등의 내용을 통해 간단한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일화는 1801년(순조 1) 龜巖峰 곁에 작은 집(구암정)을 짓고 슬하의 여섯 형제와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을 처사로 살았다고 한다.
구암정은 마을 남쪽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팔작기와 건물이다. 평면은 어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1칸씩을 연접시킨 中央 夾室形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바위와 높이 6~7m에 달하는 폭포, 늙은 괴목, 우물, 落落長松 등 경관을 이루고 있다. 구암정의 아름다운 경관은 평소 신일화가 즐겨 부른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정포계유창록태(亭抱溪流漲綠苔) (정자 앞 개울에 청태가 끼었으니)
익호부핍속진애(翼乎不逼俗塵埃) (날씬하다 이곳은 속세를 떠났구나)
투한석탁현암뢰(偸閑夕濯懸巖瀨) (한가한 저녁 여울에 몸을 씻고)
피서소등유월대(避暑宵登有月坮) (더운 밤 때로는 달든 언덕에 오른다.)
석폭동오구배주(石瀑東嗚龜背走) (폭포 소리 동녘에 거북이 달리고)
풍렴서불봉상개(風廉西拂鳳翔開) (주렴 걷힌 서풍에 비봉산이 나래친다.)
만산송계창창립(滿山松桂蒼蒼立) (만산에 소나무는 푸르고 또 푸르니)
기허관동임거래(祇許冠童任去來) (아, 아이들아 마음껏 뛰어놀지어다.)
구암정은 비지정 문화재로, 신일화의 시 한수와 이종호(李鐘鎬)의 기문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 유교 이념과 경관 의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나 정자에 대한 기초 조사 및 주변 정비 작업 등은 미흡한 상태이다.
문응주 처 함양 여씨文應周妻咸陽呂氏
문응주 처 함양 여씨(?~?)는 병조 판서를 지낸 呂自新의 증손녀이자, 절도사를 지낸 呂允哲의 손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작스레 닥친 왜구에게 남편과 시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었다. 의지할 데 없는 아녀자들만 남게 되자 왜구들은 집안의 여인들을 욕보이려 덤벼들었다. 이에 시어머니인 남양 홍씨는 남편과 자식의 원수인 왜구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여씨 또한 시어머니와 뜻을 같이 하여 낙동강 물줄기가 굽이치는 용담소(蟠龍潭)에 뛰어들었다.
함양 여씨는 나라에서 포상과 함께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 행적은 '三綱行錄』에 기록되었다.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용곡 1리에 정려비가 있다.
문경제 처 남양 홍씨(文經濟妻南陽洪氏)
문경제 처 남양홍씨는 조선 후기 의성 의 열녀로 본관은 남양(南陽). 文景公 洪吉文의 8세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작스레 닥친 왜구에게 남편과 아들이 모두 피살되었다. 왜구의 마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힘없는 아녀자들을 겁탈하려 하였다. 살기 위해 욕됨을 감수할지, 아니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해야 할지 양단의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홍씨는 남편의 죽인 원수에게 욕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며느리와 손녀의 손을 이끌고 낙동강 물줄기가 굽이치는 용담소(반룡담(蟠龍潭))로 달려갔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으로 정절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고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남양 홍씨는 나라에서 포상과 함께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 행적은 '三綱行錄』에 기록되었다. 정려비는 다인면 용곡 1리에 있다.
신일화(辛日和)
신일화는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학자로 본관은 寧越. 초명은 一和. 자는 和叔. 호는 龜巖. 아버지는 辛命聃, 어머니는 권영의 딸 醴泉 權氏와 李德升의 딸 慶州 李氏, 할아버지는 辛東道, 증조할아버지는 辛必甘, 부인은 張達龍의 딸 順天 張氏로 알려져 있다.
辛日和(1760~1823)는 1760년(영조 36)에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예천군 다인현(현 다인면 달제리)에 거주하였다. 천품이 영매하고 기상이 뛰어나 향리에서 군자로 칭했다고 한다. 1801년(순조 1) 향리에 龜巖亭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며 향촌 교화에 힘썼다고 한다. 1823년(순조 23)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다인면 茅亭 (현 달제리 소재)에 있다.
玄孫 辛闥洙가 陰記를 작성하였다.
최명후(崔明厚)
최명후는 조선 전기 의성으로 이주해 온 경주 최씨 입향조로 본관은 慶州) 자는 明彦. 觀稼亭 崔淸의 후손이다.
최명후(?~?)는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연간에 남쪽의 예천 茅亭里(달제리)로 이주·개척하여 우거하였다. 후에 정자를 짓고, ‘慕雲’이라 하였다.
이연계(李連桂)
이연계는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으로 원래 본관은 全州이나 고려가 멸망한 후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으로 낙향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李連桂를 시조로 하여 大興 李氏로 분관하였기 때문에 본관은 大興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6촌 형이며, 태종에 의해 大興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大興 李氏 의성 입향조이다.
이연계(?~1407)는 고려 말 藝文館 提學과 명나라 관직으로 吏部 尙書를 지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인척 중 이복형인 李元桂와 마찬가지로 재종간인 이연계도 고려에 대한 절의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조선 개국을 반대하였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으로 낙향한 이연계는 趙浚에 의해 예천군으로 귀양을 갔다. 높은 절의를 가상히 여긴 태종은 1403년(태종 3) 귀양살이를 풀어주면서 대흥군으로 봉하였지만 봉군을 마다하고 다인현(多仁縣)(현 다인면)에서 머물러 살다 1407년(태종 7) 죽었다.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 다기산(多岐山)에 있다.
정경우(鄭景祐)
정경우는 조선 전기 비안현의 영일 정씨 입향조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迎日. 자는 大有, 호는 帿嚴. 할아버지는 鄭安孫이고, 아버지는 己卯士禍 때의 名賢이요 學諭를 지낸 鄭輝이다. 세 형제 중 장남으로, 둘째 鄭昌祐는 생원이고, 셋째 鄭延祐는 部將을 지냈다.
鄭景祐(?~?)은 경상도 예천군 다인현(현 다인면)에서 성장하였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1540년(중종 35)에는 식년시에 각각 급제하였고, 사헌부 감찰, 예조 정랑, 병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만년에 비안현(현 안계면 일대)에 정착하여, 비안현의 영일 정씨 입향조가 되었다.
묘는 안계면 봉양리 봉성산 主龍에 있다.
봉양리에 鳳山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비안현에 입향한 정경우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김제균(金濟均)효자각
김재균은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로 본관이 安東. 자는 禹如. 호는 鳳窩. 아버지는 金炳德이고 어머니는 金海 金氏이다.
金濟均(1796~1849)은 15살 때 아버지 金炳德이 세상을 떠났다. 슬퍼하는 마음이 지나쳐 몸이 상할 정도였다. 장삿날에는 아버지를 묻고 나서 그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온갖 방법으로 달랬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그의 작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불효요, 무서운 산골에서 산짐승에게 버리는 것은 어버이의 뜻을 저버리는 가장 큰 불효가 아니냐.”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로부터 몇 해 후 홀로 남은 어머니 金海 金氏가 병이 들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해 간병을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양친을 모두 잃었다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시묘를 하며 날마다 곡을 하였다.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깊은 산중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그를 위로하고자 찾아갔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묘막 앞에 가로누워 있어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간 마을 사람들은 지난밤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어두운 밤이라서 바위를 잘못 본 것이 아니겠냐며 오히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았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의 성품과 행실에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김제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유림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하고는 1940년 4월 포상과 함께 효자각을 세웠다.
서릉리 비석 떼
다인면 서릉리 남산정 공원 내에 있는 비석 떼의 전경이다. 군수 이현영과 이원세의 공덕비, 보인계 기념비 등이 있다.
다인면 양서리 수령비 떼 전경
다인면 양서리 514(서동 마을)에 있는 수령비 떼의 전경이다. 수령이 해당 고을에서 이루어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것으로 총 5기가 있다.
다인면 집성촌
다인면은 조선 시대 다인현 지역이다. 西陵里·山內里·佳院里·松湖里·陶岩里·平林里·德池里·陽西里·龍谷里·鳳井里·達堤里·三汾里·外井里·龍武里·申樂里 등 16개 법정리와 38개 행정리, 170여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에는 평해 황씨, 안동 김씨, 진성 이씨, 경주 김씨, 밀양 박씨, 영일 정씨, 동래 정씨, 김녕 김씨, 남원 양씨, 경주 최씨, 김해 김씨, 경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평해 황씨는 산내리와 신락 1리에 세거하고 있다. 두 마을의 평해 황씨들은 검교공파의 13세 황계향의 자손들이다. 신락 1리로의 입향 경위는 미상이나 산내리는 1609년에 황의중이 처음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동 김씨는 송호 1리, 송호 2리, 용곡 3리에 세거하고 있다. 안동 김씨들은 1525년 송호 2리 사호 마을에 먼저 입향하여 세거 집성촌을 이루었고, 그 후 송호 1리에 분가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송호 1리는 내송화와 외송화라는 2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두 마을 모두 안동 김씨 집성촌인데, 1600년대 후반에 이웃한 송호 2리 사호 마을에 살던 김대열이 내송화에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고, 외송화는 내송화에 살던 김온순이 분가하여 마을을 개척한 후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용곡 3동 우실 마을은 1600년대 후반에 김세청이 입향한 이래 세거지가 되었다.
진성 이씨는 송호 3리에 세거하고 있다. 1600년대에 평해 황씨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입향하여 세거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진성 이씨들이고 평해 황씨는 거의 없다.
경주 김씨는 도암 1리와 봉정 1리, 봉정 2리에 세거하고 있다. 도암 1리 경주 김씨들은 조선 중종 때 신라 경순왕 26대손인 김현신이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한 이래 집성촌을 이루었다. 봉정 2리 경주 김씨들은 김삼성이 임진왜란을 피해 봉정 2리 동정 마을에 입향한 이래 세거 집성촌이 되었다. 그 후 김씨 가구가 늘어나자 봉정 1리로 이거하여 지금의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영일 정씨는 덕지 1리에 세거하고 있다. 본래 능성 구씨들이 개척한 마을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영일 정씨들이 입향하여 세거 집성촌을 이루었다.
동래 정씨는 덕지 2리에 세거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정구성이 지금의 상주 중동에서 이 마을로 입향한 이래 세거지가 되었다.
김녕 김씨는 덕지 3리에 세거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생육신 김문기(金文起)의 5대손인 김진엽이 상주에서 이곳으로 입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남원 양씨는 덕미 1리에 세거하고 있다. 박순호가 개척한 마을에 임진왜란 직후 남원 양씨들이 입향하여 오랜 세거지가 되었다. 인근한 신평면의 청운 2리에도 남원 양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단밀면의 낙정 마을도 남원 양씨들의 씨족 마을이었던 것으로 볼 때 과거 이 일대에 남원 양씨의 분포가 상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최씨는 양서 1리와 달제 2리에 세거하고 있다. 양서 1리는 약 300년 전 최무봉이 예천군 호명면 우음동에서 입향한 이래 최씨들의 세거 집성촌이 되었다. 4개의 자연 촌락으로 구성된 달제 2리의 최씨들은 자연 촌락인 달동 마을과 기련 마을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최성진이 지금의 달동 마을에 입향한 이래 후손들이 세거하다가 재차 기련 마을로 이거하여 집성촌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밀양 박씨는 도암 1리와 양서 2리 진두 마을에 세거하고 있다. 밀양 박씨들이 도암 마을로 입향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양서리 진두 마을 박씨들은 1800년대에 박태수가 입향한 이래 세거 집성촌을 이루었다.
김해 김씨는 용곡 1리와 용곡 2리에 세거하고 있다. 김해 김씨들은 용곡 2리 반룡 마을에 먼저 입향하였고, 그후 김씨 후손들이 용곡 1리 동동 마을에 이거하여 또 다른 집성촌을 이루었다. 반룡 마을에 입향한 김해 김씨 입향조는 조선 광해군 때 좌승지를 지낸 김진수이고, 반룡 마을에 살다가 동동 마을에 입향한 김씨들의 입향조는 김진수의 6세손인 김계조이다.
경주 이씨는 신락 1리와 신락 2리에 세거하고 있다. 신락 1리는 경주 이씨들이 평해 황씨들과 함께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이웃한 신락 2리에도 경주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두 마을 모두 입향 경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인면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산내리와 신락 1리, 송호 1리, 송호 2리, 송호 3리, 용곡 3리, 도암 1리, 봉정 1리, 봉정 2리, 덕지 1리, 덕지 2리, 덕지 3리, 덕미 1리, 양서 1리, 양서 2리, 달제 2리, 용곡 1리, 용곡 2리, 신락 1리, 신락 2리 등이다.
산내리와 신락 1리는 평해 황씨의 집성촌이다. 의성 군지에 따르면 1998년 현재 황씨들이 각각 40여 가구가량 살고 있다. 또 산내리에는 평해 황씨들 재실인 산영재가 있다.
송호 1리, 송호 2리, 용곡 3리는 안동 김씨의 집성촌이다. 안동 김씨들은 1998년 현재 송호 1리에 50가구, 송호 2리에 40가구, 용곡 3리에 20가구가량 살고 있다. 송호 2리에는 효자 김제균을 기리는 효자각과 김용한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낙옹정이 있고, 용곡 3동 우실 마을에는 안동 김씨 문중의 제청인 영모제가 있다. 송호 3리는 진성 이씨의 집성촌으로 1998년 현재 이씨들이 50여 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도암 1리는 경주 김씨와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다. 1998년 현재 106가구가 사는 큰 마을로 김씨가 45가구, 박씨가 40가구가량 살고 있다.
봉정 1리와 봉정 2리는 경주 김씨의 집성촌으로,
봉정 1리에는 1998년 현재 20여 가구의 김씨들이 살고 있으며,
봉정 2리에는 50여 가구의 김씨들이 살고 있다.
덕지 1리는 영일 정씨의 집성촌이다. 1998년 현재 59가구 중 50여 가구의 정씨들이 사는 마을로, 입향조가 건립하였다는 봉남 서당이 있어 깊은 역사를 말해 준다.
덕미 1리는 남원 양씨의 집성촌이다. 1998년 현재 89가구 중 절반이 양씨들이다. 마을에는 남원 양씨 17대조인 양퇴조가 후손들을 위해 지은 정자인 退休亭이 있다.
양서 1리와 달제 2리는 경주 최씨의 집성촌이다.
양서 1리는 1998년 현재 67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로, 50여 가구 최씨들이 살고 있으며, 달제 2리는 작은 산촌 마을로 20가구의 최씨들이 살고 있다.
양서 2리 진두 마을은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다. 1998년 현재 총 42가구 중 박씨들이 40여 가구에 달한다.
신락 1리와 신락 2리는 경주 이씨의 집성촌이다. 이 두 마을은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며, 신락 1리는 1998년 현재 총 83가구 중 이씨가 50여 가구이고 신락 2리는 123가구 중 이씨가 80여 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다인면 사무소, 의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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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료 잘 봤습니다.다인면 답사가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덕미리 산150번지에 있는 군수 윤지경 마애비도 들리면 좋겠습니다~^^
첫째단락 나웅선사 오타 나옹으로 하심이
몇 번이나 갔던 곳이기도 하지만 공부가 새롭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