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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도 처음부터 묘청 일파의 비술이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이자겸 일파에게 모진 시련을 당하여 개경 땅이 싫어진 참이었고, 개경 귀족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묘청 일파의 말대로 옛것을 혁신하여 새것을 세우는 이른바 ‘혁구정신(革舊鼎新)’의 정치를 인종도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인종은 1134년 1월에 묘청을 삼중대통지루각원사에 임명하고 붉은 가사 옷을 주더니 뒤이어 2월에는 다시 서경의 신궁으로 행차하였다.
인종의 서경행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초봄이라 그런지 인종이 뱃놀이하는 대동강가에 별안간 폭풍이 몰아치자, 인종은 낙심하여 보름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인종이 개경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천재지변은 그치지 않았다. 음력 3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하늘에선 별똥도 떨어졌다. 4월(현재로는 5월)에는 때아닌 서리가 내렸으며 또 큰 비와 우레 때문에 인명과 농작물의 피해가 막심했고, 그해 여름에는 극심한 가뭄마저 들어 인종은 급기야 기우제까지 지냈다.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들은 본격적으로 인종의 서경 행을 저지하고 나서고 인종도 마침내 서경 거둥을 포기하고 말았다.
1135년(인종 13년) 정월, 묘청은 서경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칼끝은 왕이 아닌 개경의 귀족들을 향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자신의 군사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나 스스로 왕이 될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묘청의 거사는 앞서 이자겸이나 척준경의 반역과는 달리 새롭고 자주적인 독립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현존하는 문헌으로는 묘청 일파가 과연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반란을 준비했는가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묘청의 측근이었던 안중영이 불사에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놓았을 때 갑자기 도화선이 터졌으며, 백수한과 정지상∙김안∙최봉심 등 묘청 일파 다수는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말하자면 묘청의 반란은 급작스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며 정지상 등은 뒤늦게 묘청의 반란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얘기이다. 물론 확인할 길은 없지만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반란 규모를 볼 때 과연 이들이 사전에 함께 반란을 모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여전히 남는다.
묘청의 거사가 그처럼 쉽게 터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비령을 포함한 서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 데는 그만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경은 이미 태조 때부터 서북계의 요충지로서 정치와 경제∙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앙과 비슷한 분사의 조직이 구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요소에 자기 일파를 대치시키기만 하면 세력을 확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