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생명의 기운이 온 땅에 퍼지는 4월입니다. 자연의 흐름은 이같이 화평과 충일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서글픔을 넘어 참담함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예산 보성초등학교 기간제 교사 차 접대 및 교장 자살 사건'으로 불거져 나온 비극적 사건이 아직까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 이 사건은 교육 당국의 진상 조사에 따른 시정 조치로 초기에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사안일과 권위주의에 찌들은 교육당국은 형식적인 조사에 그쳤고, 이후 사태는 그야말로 일파만파로 번져 유족은 물론 사회 전체가 아무런 대안 없이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당 학교 학생과, 자살이라는 비극적 최후로 생을 마감한 교장 선생님, 그리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기간제 교사와 두 분의 전교조 선생님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대한 진위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곧 이 사건이 처음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생각을 같이 해 보기 위해 '멈추고 되돌아보기'를 제안합니다.
이번 일의 발단을 살펴보기 위해 마치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사건 진행을 되돌아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학부모회 학생 등교 거부 → 서교장 자살 → 전교조 측 사과 요구 → 기간제 교사 사표 반려 → 기간제 교사 인터넷에 글 올림 →기간제 교사 사표냄 → 수업시간에 교장 장학지도 명목으로 교실에 들어가 윽박지름 → 차 대접 요구 불응 → 차 대접 → 기간제 교사 임용.
여기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기간제 교사는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을 데가 없으니까) 전교조 교사들에게 털어놓았을 것이고, 전교조 교사들은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기간제 교사의 고충을 들어주고 아픔을 함께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학교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간다면 전교조 충남지부의 사과 요구가 있었고 서교장 선생님의 자살이 있었습니다. 헌데 이 일이 이후 어떻게 둔갑하였습니까? 전교조 교사는 '살인마'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 없이 아예 처음부터 보수 언론에 의해 그렇게 매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차 대접 요구' 가 없었는 데도 이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일이 이렇게 되어가도록 한 원인이 있었고, 그 후 교장 선생님 자살 이후 이 사건은 전혀 엉뚱하게 흘러갔습니다. 일부 언론과 보수세력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보수세력은 이 사건을 자기들이 기사회생 할 수 있는 사안으로 받아들였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더 이상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그동안 군사독재정권에 기대어 부와 명예를 누려온 이들 세력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확연히 드러나자,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호재로 삼아 발벗고 나선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전국의 교장들이 외쳤던 '학교 책임경영제'라는 말의 속뜻도 학교 현장의 민주화에 대한 반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서글픈 것은 기득권 세력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에 덩달아 휩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흑백논리나 편견은 진실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추기는 세력들에게 악용당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려 하지 않고 언론에서 유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믿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통한 타협점이나 절충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터지면 죽기 살기 식으로 싸우고,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의견 대립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번 일도 이 같은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의 진행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은 대립각은 날로 날카로워지는데 서로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공유할 길이 전혀 없다는 거였습니다.
사건 관계자 여러분!
이제 멈춥시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 주장을 펼 만큼 펴지 않았습니까? 일반인들도 이제 일의 전모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습니다. 지난 4월 13일 KBS 2 TV 「100인 토론」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 서로 주장하기를 멈추고, 각자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성찰합시다. 멈춤으로써 흥분이 가라앉고 흥분이 가라앉은 자리에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라도 전보다 성숙한 자세를 보일 때, 우리 모두가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며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주문합니다.
▶ 유족들에게
먼저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너무 황망한 일에 채 마음을 추스르지 못 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일의 잘잘못을 떠나 교육계에 오랫동안 몸담아 오신 교장 선생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한가지 우리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앞으로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이 나라의 교육과 돌아가신 서 교장 선생님을 위하는 길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을 견디고 계실 유족들의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 교육당국 여러분께
이번 일을 대하는 충남 교육당국의 태도는 한 마디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서로가 책임을 모면하느라 발뺌하기 일쑤였고, 더욱이 도교육청은 경찰 조사가 끝나면 해당 교사들을 징계하겠다는 말 이외 어떤 입장 표명도 없었습니다. 이게 교육당국으로 할 말입니까? 학부모회와 전교조 교사가 서로 노력하여 학교가 정상화되고 나면, 이 사건은 유족들의 고소에 따른 경찰의 진상 조사와 그에 따른 도교육청의 징계 문제가 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입장을 밝혀둡니다. 최경실 정혜실 두 교사에 대한 징계가 있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두 분 역시 이 사건의 극심한 피해자이며 지금까지 입은 신체적 정신적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징계 운운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울러 사태를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 보성초등학교 홍승만 교감에 대한 문책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 보성초등학교 학부모회 여러분께
우리는 학생들의 어린 날의 상처가 오래도록 남아 이후 학교나 교사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제 정말 지금까지의 입장에서 벗어나 학교를 정상화시킬 수 없는지요? 전교조 교사가 학교에 있는 한 아이들을 등교시킬 수 없다고 하시는데, 정말 전교조 교사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번 사건이 나기 전을 한번 떠올려 주십시오. 그때도 그랬나요? 사건 이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학부모님들의 어떤 결정도 존중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를 정상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다른 문제들은 그 후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아직 마음의 앙금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 훌훌 털어 버리고 해당 전교조 선생님들과 조건 없이 화해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 교원 단체 여러분께
평소 한국교총은 교사의 신분 보장과 권익 실현에 최선을 다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한 교총의 태도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전교조 교사 죽이기에 나섰고, 진상 규명 없이 전교조를 살인집단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지난날 교총의 역사를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번 일을 통해 교총이 결코 평교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교총은 이제부터라도 섣부른 예단과 발언을 삼가야 합니다.
아울러 전교조는 이제 명실상부한 교육 대안 세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에 대한 책임이 전보다 훨씬 무거워진 게 사실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응방식과 상대방에 대한 설득 과정이 다소 미숙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 충남지부가 직접 개입함으로써 이후 문제를 해결하고 조정해 가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두가 협심하여 선(善)을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화하고 화합을 모색하는 가운데에도 얼마든지 자기 주장은 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 사건을 대하는 많은 교사와 국민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일지 헤아려 하나 하나 현명하게 일을 풀어나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