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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아버지의 시선
1일
9월의 첫날 아침부터 비가 내려 산에도 못가고 뒹굴거리는 토요일이다. 아들이 학교에서 일찍 오더니 스스로 토요일과 일요일은 자유시간이라며 교복도 벗지 않은 채 컴퓨터에 집중하고 1시간이 지나 딸도 집에 왔는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도 안 하고 곧장 침대로 가서 잠을 잔다. 밤 8시가 지나자 거실에 나오더니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옷과 양말까지 가지런히 정리하여 소파에 놓는다. 내 눈을 의심하고 갑자기 자다가 무슨 일인가 의아도 했지만 엄마보다 더 열심히 깨끗하게 잘 한다고 딸을 격려하고 칭찬했다.
2일 일요일 어제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아들은 축구하러 갔다가 오후에 왔다.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취미로 하는 그룹으로 소속감을 위해서인지 모양이 나는 유니폼까지 만들어 입고 있다. 오후에 수업하러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 아들이 거실에 있는 인터폰 화면으로 나를 감시하듯 바라본다. 거실에서 수화기를 들면 바깥 쪽에 빨간 불이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 밖에서 확인이 되는 것을 아들은 이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다시 들어가서 지적했더니 수화기를 든 채 엄마한테 전화하는 중이라며 얼렁뚱땅 둘러댄다. 아들의 이러한 행동은 일종의 부모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대체로 10대의 자식들은 자신의 행동영역에 있어 간섭이나 지적을 피하여 숨기려는 경향에서 나온다.
3일 개인생활과 학교생활을 일일이 간섭하니 아들은 피곤할테지만 부모인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입장이다. 성장하는 자녀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교육도 사랑도 아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의 관심있는 교육이 인격과 성적향상으로 직결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맹자나 율곡같은 과거 훌륭한 성인 학자들도 가정의 엄격한 규제와 관심이 그들을 만든 바탕이 될 수 있었다.
4일 완연한 가을이다. 학교에 가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든든하고 좋은데 아들은 내가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귀찮은지 인상을 찌푸리고 코만 벌름거린다. 저녁에 비빔밥을 만들어 두고 잠깐 다른 일을 보고 식탁에 오니 아들이 허겁지겁 혼자 다 먹어 버렸다. 할 수 없이 라면을 다시 끓여 먹었지만 그래도 아들이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자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5일 노량진 학원에 들어서니 교무실에 부장으로 근무하는 직원의 부인이 별세했다고 칠판에 적혀 있다. 나와 고향과 나이가 같아 평소에 대화도 많이 하지만 서울역 대일학원에서 노량진 한샘 학원으로 처음 간 나에게 조언과 응원을 많이 해 준 고마운 친구다. 얼마 전에 그의 초청으로 대방동 집을 방문하여 식사를 하면서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과 인사도 나누었는데 허망하기만 했다. 오전 수업 마치고 강남 성모병원 영안실에 선생님들과 문상을 가니 눈물로 그가 나를 맞이한다. 고속터미널 뒤에 위치한 성모병원 영안실은 큰형의 장례식을 포함하여 조문으로 자주 오는 곳이지만 언제나 슬프고 숙연한 분위기이다. 오후에 말대꾸하는 아들때문에 화가 치밀어 큰 소리를 내고 방에 누워 있으니 명지대 근처에 있는 과학학원 태워 달라고 한다. 거리도 있고 저녁수업 나가는 길이라 이동하여 내려주고 한강북로를 거쳐 노량진으로 넘어갔다.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답답한 내마음과 대조적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했다.
6일 목요일 노량진 성당으로 직접 가서 발인미사를 참관하고 김부장 영구차에 동승하여 자유로를 따라 벽제에 위치한 화장장에 갔다. 내가 서울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선,후배와 동료들의 죽음을 대부분 이 곳에서 마무리 하고 이별을 한다. 형님도, 친구도 모두 여기에서 마지막 연기로 변해 승천했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살면서 힘들고 나태할 때 여기 화장장이나 또는 망자들이 누워 있는 용미리 공원을 적극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생의 덧없음을 확인하고 오늘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가치있는가를 느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 이승에서의 나의 최종 정착지도 여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피어오르는 연기조차 허무의 덩어리로 보인다.
7일 저녁에 아내가 빵빠레를 사 오라고 하기에 아이스크림까지 3개를 사 가지고 들어갔다. 나는 보수적인 면이 많고 다정함이 부족하여 과자나 꽃을 손에 들고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린 시절 부엌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가부장적인 환경이 이런 나를 만들었지만 그 대신 금전적인 부분은 미련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30대 초반에 월1,2천만원 수입이 1일과 15일에 2회에 걸쳐 50%씩 나왔는데 10원 동전까지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 주었다. 당시에 큰 액수였는데 500만원 수표 2장이나 4장이 전부였으니 액수의 규모는 느껴 볼 수도 없었고 실감도 나지도 않았다. 다만 저자인 내 몫으로 출판사 교재비가 매월 100만원 이상 부수입으로 들어와 그것으로 시골도 가고 용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할머니와 어머님만 시골에 계셨기 때문에 어느 때는 토요일마다 월4회 직접 차를 몰고 김제까지 다닌 적도 많았다. 오늘 아내의 부탁으로 모처럼 사온 빵빠레를 정작 아들이 다 먹어 버렸다. 당연 아들은 엄마의 마음이나 입장을 알 리가 없을 터, 아내는 말도 못하고 화가 난 표정으로 아들을 금방이라도 후려 팰 듯이 노려 보고만 있다.
8일 오후에 중앙일보 카메라 기자가 집에 왔다. 위아자 캠페인에 신청했는데 우리가 1차로 신청했고 신문사와 거리도 가까워 홍보 사진으로 선택된 것이다. 가족 모두의 사진이 일간지에 실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 기대를 하고 기자가 시키는 대로 '사세요'를 외쳤다. 나와 아들과 딸은 여러 번 동작을 해도 어색한데 아내는 배우나 된 것처럼 목소리까지 높이며 신나게 연기를 한다. 촬영을 마친 기자가 연기를 잘 한다고 칭찬하니 우쭐대며 원래 연극이나 영화배우를 했으면 잘 했을 것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 놓아 듣는 나로서는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20컷 정도 촬영했고 거기서 골라 다음 주에 일간지에 싣는다. 저녁쯤에 아들한테 “마이 파더”영화를 보자고 문자가 왔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고 날마다 시간에 쫓기는 나여서 함께 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영어 제목인 마이 파더이니 아들과 아버지의 스토리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저녁에 아들이 자기 소유의 초코릿을 먹었다고 소리를 높이며 울분을 토한다. 거실이나 책상위에 있으면 엄마나 동생이 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필요하면 다시 사다가 먹으면 될 일이라고 하면서 생각이 없는 놈이라고 꾸짖었다. 4일에는 비빔밥을 혼자 다 먹고 어제는 엄마가 먹는다는 아이스크림을 혼자 먹은 놈이 오늘은 울그락 불그락 가관이다
9일 일요일 식사하고 아들은 어디를 가는지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도 없이 나간다. 어제 초코릿 때문에 화가 안 풀려서 그렇지만 오늘도 버릇 없는 안하무인의 행동이 한심스럽기만 하고 허수아비 아버지같은 내 모습이 초라하기만 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서로간 인격을 존중하는 평등사회가 되었다지만 무서움과 그래서 원망의 대상이었던 우리들의 엄격한 아버지 차라리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10일 월요일 아침 7시30분 서둘러 통학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아들을 보니 아직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나라 교육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중에서 등교 시간이 빠르다는 것은 가장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주인공을 외치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문구까지 인용하여 부지런함을 최고의 지침으로 여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과학의 발달로 컴퓨터나 텔레비전 등 영상이 주도하는 시대로 접어들어 학생들이 공부를 제외하고도 대부분 늦게 잠을 자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도 새벽부터 학교에 등교시켜 잠이 모자라는 학생들은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결국 오전 수업이 파행으로 가고 있는 현실이다. 시대가 변하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적극적이고 획기적인 정책이 시급한데 교육인들은 납작 엎드려 철밥통만 지키고 정부도 일제의 흔적인 오전 수업 4교시의 틀에 50년, 60년씩 갇혀만 있다. 전국에 있는 중,고등학교 수업은 9시에 등교하고 10시에
1교시를 시작하여 오후 1시까지 3교시를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3교시를 해야 효율적인 학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10년 전부터 강단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노량진으로 가서 수능을 앞두고 있는 재수생들 지도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종각에 있는 영풍문고에 갔다. 국어자습서와 시집, 소설과 수필집 등을 읽고 '40대에 하고 싶은 일하기’책을 구입하였다.
11일 아침 중앙일보 신문에 우리 가족 사진이 크기는 작지만 컬러로 실려 나왔다. 나와 아들 딸은 뒤쪽에 작게 엑스트라처럼 나왔고 촬영때부터 앞으로 나서며 의욕적이었던 아내는 상대적으로 얼굴이 크게 주인공같이 나왔다. 전국 중앙 일간지에 우리들 가족이 나왔으니 아들과 딸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겠다. 저녁에 마라톤 7킬로 달리고 와서 TV를 보다가 아내가 아들이 공부하는데 시끄럽다고 지적을 하여 그냥 방으로 들어가니 정작 아들은 침까지 흘리며 쿨쿨 잠을 자고 있다.
12일 수요일 아침에 아들이 '밥 먹어'라고 하기에 예의 없는 말투라고 지적했다. 진지 드시라는 극존칭은 아니어도 '식사해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괜찮아도 다른 사람이 주위에서 보고 듣는다면 예절이나 교양이 없는 천박한 가정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오후에 14년간 나와 함께한 서울 4버 9834 브로엄 차를 폐차했다. 아들이 태어난 기쁨으로 주저없이 구입한 것인데 오래 되어 고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수순을 밟았다. 생명은 없는 것이지만 정이 든 친구를 보내는 것 같았고 학교에서 돌아 온 아들에게 자가용 폐차 소식을 말하니 잘 타고 다녔다면서 아쉬움을 말한다.
밤에 여동생이 전화를 해서 시골에 계시는 어머님께서 다리가 불편하여 아예 거동을 못하신다며 어찌하면 좋을지 크게 걱정을 한다. 엊그제 고향에서 뵈었을 때 서울로 함께 가자고 하시더만 내심 움직이지 못하는 두려움이 먼저 오지 않았을까.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신다니 75세를 넘기는 지금 불길한 생각이 밀려 온다.
13일 목요일 아침 가족이 식탁에 앉았다. 아침식사는 꼭 같이 해야 한다고 나는 여러 차례 강조를 해온 터이다. 물론 아들이 늦게 일어나 학교 시간에 쫓기어 정신 없는 시간이 될 때가 많지만 가족간 정신과 마음이 소통되는 귀중한 시간이다. 어제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을 작은 형님이 시골에 가서 모시고 상경하여 여동생 집으로 우선 모셨다고 전화가 왔다. 오늘 독립문 공원에서 7시에 딸의 연주회가 있다기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어머니부터 뵈어야 해서 노량진 수업을 마치고 강변북로를 따라 중계동으로 들어갔다. 굽어진 허리에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어머니께서 치료를 잘 하고 다시 고향으로 가실 수는 있을까를 생각하며 늦은 시간 내부순환 도로를 타고 집으로 왔다.
14일 아들이 등교하면서 양말과 교복 넥타이를 들고 나간다. 양말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고 옷과 넥타이는 차안에서 마무리 한다. 5분만 일찍 준비하면 될 것을 언제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하루의 시작이다. 어제 독립문에서 음악회를 한 딸은 아침부터 열이 나고 머리까지 아프다니 더구나 오늘 오후에는 과학 발표대회에도 나가야 할텐데 난감하기만 하다. 오전에 학부모 모임으로 아내까지 아들 학교에 가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베란다에서 연기가 방으로 거세게 밀려와 깜짝 놀랐다. 뛰어나가 불을 끄고 보니 닭볶음탕이 숯덩이로 변해 있다. 아까운 마음에 타지 않은 부분을 골라서 혼자 점심으로 먹었더니 내 입 주변도 똑같이 숯덩이다. 오후에 딸을 태우고 아현중학교 탐구발표장에 갔다. 초등학교 각 학년마다 2명씩 뽑아 서울시 대회를 하는 것으로 딸의 출품내용은 ‘재생 종이 세분화 활용방안’으로 아이템은 좋은 편이라 기대를 했다. 저녁에 어머님께서 1차 상봉동 정형외과에 입원을 하셨다는 연락이 온다.
15일 날이 잔뜩 흐려 우산까지 준비하여 북한산에 올랐다. 비가 오기 직전이라 등산객도 보이지 않고 산 안개만 가득하다. 향로봉 능선을 거쳐 비봉을 지나자 사모바위 근처에서 구성진 악기소리가 들려온다. 평소 들어보지 못한 소리라서 발길을 돌려 다가서 보니 초로에 접어 든 등산객이 15센티 정도의 오카리나를 불어 대고 있다. 안개가 자욱한 이슬비 내리는 산 정상 거기에 사모바위의 실루엣까지 전설 속의 장면같아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선명했다. 오카리나를 실질적으로는 처음으로 보고 들은 나지만 노랫가락 여운이 오래 남아 한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16일 일요일 아침 중앙일보 주최 위아자 장터에 참가하기 위해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오르간, 보드, 인형, 장난감 등을 승용차에 실었다. 도서관에 간다는 아들을 먼저 중간에 내려주고 나와 아내 딸은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북문 광장에 11시 20분경 도착했다. 아파트 수거함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인데 허접한 이런 것들도 팔리기나 할까 자문해 보는 사이 이미 장은 개장되어 있고 여기저기 흥정하는 모습이 시골 장터를 연상케 한다. 벼룩시장처럼 물품을 재사용하여 경제적인 효과를 거두고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까지 돕는 서울시의 일석이조 정책의 일환이다. 해마다 마련하는 자리지만 오늘도 서울시장까지 참가하여 행사에 동참한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우리도 물건을 팔려고 자리를 잡고 나는 행사장을 잠깐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가져온
물건이 거의 팔려 나갔다. 어떤 이는 우리의 작은 오르간을 횡재를 만났듯이 구입하더니 어깨에 메고 일어서며 좋아하고 손에 지폐를 쥔 딸은 수익금을 계산하고 자신이 수완이 좋은 장사꾼인 양 즐거워한다. 무엇이든 나에게는 쓸 일이 없고 하찮은 물건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요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아자 장터 한쪽에서는 경매 시장이 열리고 있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딸이 인기가수 ‘바다‘의 미니 자전거를 호기심으로 사 달라기에 모양도 예쁘고 기념이 될 것같아 경매금액 13만원에 이어 15만원을 제시하여 내가 낙찰을 받았다. 인기가수 싸인까지 붙어 있어 좋아하고 집에 와서는 자기 방에 두고 보자기로 싸서 애지중지 한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는 인기 가수의 소장품이니 신기할테지만 실제 자전거를 타고 보니 바퀴가 적고 핸들이 좁아 불편함이 많다
17일 월요일 아침 아들은 인사도 없이 학교에 가고 딸은 어제 내가 써준 편지를 읽는다. 가수 바다의 자전거를 경매받은 내용과 추억이 되길 바라는 내용, 아빠인 내가 사랑한다는 내용인데 딸한테 편지쓰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4학년 딸이 얼마나 알아듣고 기억할 지 모르겠다. 노량진 학원에서 다가오는 추석 선물로 참치와 멸치와 명란젓을 선물로 주었다. 청산학원, 대일학원을 거치는 동안 명절날은 거의 고정적으로 멸치와 참치캔 선물이 많았는데 오늘은 명란 젓갈이 들어 있어 집으로 와서 아들과 맛있게 식사를 했다. 아들은 젓갈 중에서 비싼 명란 젓갈을 제일 좋아하는 놈이라 쉽고 빠르게 먹어 치운다. 식탁의 성찬은 전혀 무관심으로 딸은 방에서 자전거만 붙들고 어제부터 신주단지 모시듯 연신 바라보고 있다.
18일 새벽에 동렬이 처남이 세 번째 딸을 순산했다고 전화가 온다. 위로 두 명이 딸이니 이번에는 아들을 원했을 것이다. 주변인보다 동렬이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지만 건강하고 예쁜 조카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는 아들이 옷차림도 불량하고 행동도 나태하여 옷도 단정히 입으라고 지시했더니 불만을 표출하고 아침부터 나도 화가 치밀었다. 단추도 안 잠그고 약간 건들 건들하는 폼이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가 전혀 아니다. 몇 시간 후 학교에서 아들한테 전화가 오더니 탐구발표 과제를 컴퓨터에 저장한 채 그냥 왔다며 보내달라고 한다. 아침부터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게으르더니 이런 결과가 생겼다. 결국 나도 아내도 컴퓨터 실력이 부족하여 처리를 못하고 점심쯤 학교에서 온 딸이 보내 주었다.
19일 병원에 입원하여 계시는 어머니를 뵈니 지난 세월 잘 모시지 못하여 죄책감이 생기고 지금부터라도 살아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밤에 어머니 곁에서 간병인 역할을 하며 하룻 밤을 보내는데 모든 것이 익숙하지도 않고 병원에서 밤을 보내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로비에만 들락날락하며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20일 오후 4시경 집에 오니 아들과 딸이 와 있고 아들은 배가 고픈지 밥과 고기를 쉬지 않고 먹는다. 커 나갈 때이니 먹는 양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만 탈나지 않도록 천천히 먹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머니의 일로 몸과 정신이 혼란스러워 홍제천으로 나가 마라톤 연습을 하고 땀에 젖어 들어 왔다. 달리는 순간 만큼은 잡념이 사라지고 마치고 나면 다시 눈빛이 살아 나와 더 없이 마음이 가벼워진다.
21일 아침 식사를 해야 하는데 집에 쌀이 없다고 한다.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는데 과거 같았으면 가난으로 종종 있을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나도 아내도 열심히 일에 매진하기
때문인데 오늘의 상황은 치열한 삶이 보인 결과이다. 특히 아내는 논술 강의도 많지만 아들과 딸 교육과 집안 일까지 정신없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22일 토요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 아들을 태우고 어머니 병원에 갔다. 뵐 때마다 경목이를 물어보고 궁금해 하시기에 오늘 동행하는 것이지만 손자로서 찾아 뵙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아들이 병원에 들어서자 어머님께서 반가움이 역력하시고 아들도 할머니를 안아주며 인사를 올린다. 어머니는 평소 말씀이 없으시고 냉냉하신 성격이라 칭찬을 한다든지 손이라도 잡아주는 다정한 표현을 자식인 우리에게도 거의 안 하셨다. 그런데 유독 경목이는 볼 때마다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한 눈에 보아도 어머니의 사랑이 한 번에 몰려 가는 것 같이 내 눈에 비친다.
23일 오늘은 아내가 어머님한테 가 있는 이유로 일요일 아침 식사로 계란후라이 4개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었다. 아들에게 연휴가 끝나면 기말고사이니 계획을 세워서 시험 준비 잘하라 당부하고 나는 추석특강 수업으로 노량진으로 나갔다. 점심쯤 아들에게 전화하니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기에 아침에 한 그대로 집중하여 시험준비 잘 하고 차 조심하며 다니라고 당부했다. 오후에 서울역 옆에 있는 염천교 도매점에 가서 구두 한 켤례를 샀다. 그 동안에는 떠나간 큰형 구두를 계속 신고 다녔는데 더 이상 낡아 오늘 4년만에 구입하여 신는 것이다.
24일 민족 대명절 추석 연휴 시작이라 여기저기 고향으로 가는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다. 과거에 명절을 손 꼽아 기다리다 10시간 그 이상을 달려 고향에 갔었다. 차가 막혀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나갔다가 또 고속도로 진입하고 난리법석의 시간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좋았다. 교통편도 없어서 기차에서 입석으로 끼어 가다가 가족 중 누군가 승용차를 사면 형제와 조카들 모두 차 한 대로 먼 거리를 개선장군의 부대처럼 이동했었다. 연휴라지만 아들은 시험이 코앞인데 늦게까지 자고 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시험에 대비하면 좋을텐데 TV를 보다가 음식을 먹다가 또 자다가 연휴라고 여유를 부리며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는데 아들한테는 아직 남의 나라 이야기다.
25일 추석날 아침에 병원에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신내동으로 가서 차례를 지냈다. 가족이라고 앉아 있는데 과거의 시간과는 분위기가 완전 달라 즐거움은 커녕 마지못해 차례를 지낸다. 가족 모두 어머님의 움직임이나 눈빛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밥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노량진 추석특강 가려고 먼저 집을 나와 텅 비어 있는 한강 북로를 따라 달리니 마음이 시원하다. 오후에 집에 와서 딸을 태우고 용미리에 있는 큰형 납골함에 갔다. 6시경 땅거미가 밀려오는 시간임에도 오고 가는 성묘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사이로 나도 들어가 형님 유골함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놓고 명복을 빌며 내려 왔다.
26일 딸을 깨워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나는 북한산을 올랐다. 안산을 오르는 것처럼 오늘 40번째 맨발로 걷는 산행이다. 맨발로 국립공원 북한산을 누비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누가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큰형을 보낸 슬픔과 어머님의 병환 그리고 40대 후반의 답답함을 이기기 위해 고행의 과정으로 끊임없이 산길을 걷는 것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들과 씨름을 몇 번 했는데 끄덕도 하지 않고 결국 내가 여러 번 쓰러졌다. 우리 아들이 많이 자랐고 힘도 장사같다고 칭찬하며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 아내는 남의 일인 양 전혀 호응도 없고 관심도 없이 밥만 열심히 먹는다.
27일 오늘도 맨발로 안산을 올랐다. 피부과에 티눈 때문에 다녀온 딸에게 전화하여 산 정상에 선 나를 보라하니 거실 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산과 집의 거리가 가깝기는 하지만 전화기를 제외하면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치 이승과 저승의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28일 추석 3일 후에 찾아 온 나의 48번째 생일이다. 아들은 아빠 생일 축하한다고 하고 딸은 파이팅이라고 글자가 새겨 있는 하얀 컵을 선물로 사 왔지만 송도병원에서는 어머니의 직장암
판정을 알려와 무거운 멍에가 되어 괴로움과 착찹함으로 나를 더욱 짖누른다. 평소 변비를 자주 이야기 하셨는데 더 적극적이고 관심있게 보살피지 못한 자식의 죄책감으로 저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9일 토요일 오늘부터 아들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다. 요즘 어머니에 대한 충격으로 아들에게 많은 시간과 관심을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나에게는 아들도 어머니도 일직선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사람들인데 앞이나 뒤나 저울의 추처럼 평형을 유지하는 영원한 삶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여 마지막까지 시험 잘 보라고 격려하니 스스로 알아서 잘 하겠다고 한다.
30일 한 달의 마지막 날 아들은 공부를 하는지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거실 밖으로는 하늘이 높고 신록이 우거져 여름의 모습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병원에서는 오늘 변을 본 어머니라면서 가족들이 기뻐한다. 살아가는 동안 여기저기 행복의 요건이 수도 없이 많은데 변을 보는 이 평범한 일에 우리가 쾌재를 불러야만 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답답한 9월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