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인천지역 인재양성과 풍속교화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다가 조선말기 서원(書院) 철폐 정책에 따라 사라졌던 인천 ‘학산(鶴山)서원’에 대한 터 표지석이 오는 9월초 제막된다.
인천시 남구 학산문화원(원장·유제환)은 오는 9월 3일 인천시와 남구청의 후원으로 문학산 터널 입구 근처에 위치했던 ‘학산서원’ 터 표지 제막식을 갖는다고 4일 밝혔다.
학산서원은 문학산 북록(북쪽기슭)에 위치해 있었으며, 인천부사로 재임했던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8년(숙종34년)에 창건한 서원이다. 서원의 완공과 함께 국왕이 ‘학산(鶴山)’이란 액호를 내렸고 같은 해 사액제를 시행해 인천 지역의 인재양성과 풍속교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798년(정조10)에는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李喜朝)가 역시 인천현감을 지낸 공덕을 추모해 인천유림의 건의에 따라 학산서원에 함께 배향됐다.
학산서원은 조선 후기 서원 건립의 일반적 목적인 선현배향과 더불어 지방교육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천의 학문적 기반을 넓혀나간 중요한 문화기관이었다. 이단상, 이희조 부자를 비롯한 인천 인근의 한문적 경향인 근기학파(近畿學派)의 맥을 잇는 노론계 서원이었다. 이러한 학산서원이 선사시대 이래 인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학산에 자리하면서 인천의 학문적 근거지로 자리잡았던 것.
그러나 조선 후기 인천 지역의 학문과 교육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학산서원은 1871년(고종8)에 단행된 서원 정리에 따라 훼철된 이후 서구 열강제국의 조선침략과 일제의 조선강점 속에서 다시 재건되지 못하고 그 터만 남게 됐다.
이후 본격적인 학술조사에서 ‘鶴山書院’이라 새긴 와편(기와조각)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 재실과 강당 그리고 사당의 건물초석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의 확장과 함께 다시 유실되고 최근 문학산 터널 공사로 인해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기도 했다.
2002년 마침내 인천시 남구청의 문학산 일대 역사유적에 대한 용역이 시행되고 이에 대한 인하대박물관이 학술조사를 통해 다시 그 위치가 확인됐다. /송금호기자> khso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