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중 노래방에서 애창되고 있는 곡목 가운데
‘비내리는 덕수궁…’으로 시작되는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비운(悲運)의 덕수궁이 겪어온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 거리가 먼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왕조를 격하시키기 위한 시도에서 서울의
여러 고궁 중에서도 유독 덕수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래서 덕수궁은 남쪽의 정문도 없어진 채 이리 저리 뜯겨 만신창이가 됐고
원래 덕수궁 넓이의 약 30%밖에 남지 않았다.
1895년 10월 일본 낭인들의 칼에 의해 아내인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 당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오던 고종은 그 이듬해 2월11일 새벽 궁녀용 교자를 타고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했다.
현재 덕수궁 서쪽 옛 문화방송국 옆에 있는 교회당 같은 흰 건물이 그 유명한
옛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인데 고종은 여기에서 1년여 동안 머물렀다.
지금 덕수궁 뒤편에는 덕수궁과 옛 러시아 공사관 간 서로 통하는 좁고 긴 비밀
지하통로가 남아 있다.
이 지하통로는 왕궁에 변고가 생기면 재빨리 피신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한 나라의 임금이 자기 나라 수도 궁궐 안에서도 불안해 만든 통탄의 길이다.
1897년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웃한 덕수궁으로
환어했다.
당시 덕수궁 주위에는 유사시에 의지할 수 있는 외국 공사관이 여럿 있었고
궁역이 넓지 않아 호위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 후 고종은 자신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고종은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계속 덕수궁의 함녕전에서 거처했는데
여기에는 우물정자 구조로 된 방이 아홉 개 있다.
오랫동안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고종은 신변에 대한 불안을 느낀 나머지 밤마다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녔다.
평소 커피와 동치미 국물로 만든 냉면을 좋아했는데 1919년 1월22일
밤 1시45분쯤 함녕전의 남쪽 작은 방에서 냉면과 함께 들어온 독(毒)이 든
커피를 마시고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한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돌담길을 따라 계속
가면 신문로에 닿는다.
이 돌담길은 1922년에 일제가 덕수궁의 허리를 무단으로 잘라 궁의 서쪽 선원전
터를 통과하는 도로를 뚫어서 만든 황당한 길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역사를 모르는 우리의 젊은 연인들이 하필 이 길을
으뜸가는 낭만의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는 한심한(?) 일도 있었다.
근처 정동극장 뒤편에는 흰색 2층 양옥집인 중명전이 있다.
1905년 11월 덕수궁의 별채였던 이곳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덕수궁은 망국의 외교문서가 오간 통한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현재 덕수궁 터의 옛 경기여고 자리에 주한 미 대사관 청사와 대사관 직원
숙소의 신축문제가 추진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반미단체들은 때는 왔다 하고 극렬 반대하고 있지만 앞으로
이 문제는 우리의 문화재도 보호하면서 한·미동맹관계라는 국익도 도모하는,
지혜로운 차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비극의 덕수궁과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강력한 동맹국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재 비운의 덕수궁은 말이 없고 오직 지난날의 애환과 영욕의
발자취만을 우리 앞에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새해 우리는 구한말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현장인 덕수궁과 돌담길을 찾아가
보고 오늘 왜 우리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조국을 기필코 달성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절실하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