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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이 급하다”는 의미를 가진 “성급(性急)하다”와 “참을성 없고 몹시 급하다”는 의미를 가진 “조급(躁急)하다”는, 의미로만 볼 때는 성질이 급한 정도 외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급하다”는 “그는 술을 성급히 들이켜다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것 같았다.”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차분하지 않고 빠르고 급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반면 “조급하다”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는 길이 막히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단기간에 큰 성과를 올리려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상황 판단을 그르치기 쉽다.”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조바심에서 비롯되는 급한 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급하다”는 성격을 묘사한다기보다는 어떤 일을 서두르는 것을, “조급하다”는 마음을 졸이는 상태를 묘사할 때 주로 쓰입니다. 그런데 행동은 언제나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조급한 마음은 성급한 판단과 행동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데 “조급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마음입니다. 불안하여 쫓기는 마음입니다. 체력을 소진시키는 마음입니다. 탄식과 분노와 좌절을 부르는 마음입니다.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고 말씀합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17세기 말, 프랑스 당국이 이단으로 규정한 개신교인 위그노(Huguenot)에 속해 있던 메리 듀란트(MARIA DURANT)는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에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국은 그녀에게 신앙을 버릴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당국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같은 위그노 신앙을 가진 다른 30명의 여인들과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그녀의 수감 생활은 무려 3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동안 그녀가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 남긴 단 하나의 단어는 “인내”(Resistez)였습니다. 인내는 불평과 환멸 없이 기다리고 견디는 능력입니다. 조급함과 맞설 수 있는 보물입니다.
조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옛사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는 옛사람, 조급하게 행하여 일을 그르치는 옛사람, 자신이 뿌리고 자신이 거두려는 옛사람, 기다리기 싫어 심지 않았던 옛사람, 기다리지 못해 심은 것을 뽑았던 옛사람, 육신에 사로잡힌 옛사람을 죽이는 시간입니다. 깊고 넓고 높이 파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명품이 되어 가는 참으로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온전히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조급함으로 인해 그르치고 있습니까?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는 “지혜로운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은 인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 하는 자”(눅8:15)를 일컬어 좋은 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믿음과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30배, 60배, 100배의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자랑스러운 명품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조급한 다윗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후궁들을 위한 후속조치를 마친 다윗은, 세바의 난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군 총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4-5절입니다.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 있으라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가더니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다윗이 아마사를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삼하19:13)라고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한 예비조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조치에는 몇 가지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거칠고 반항적인 요압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압살롬의 난에 선봉장 역할을 했던 유다 지파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 아마사를 실질적인 군 총사령관으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세바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게 된다면, 요압을 비롯해서 누구도 그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난에 참여했던 사람들까지 자기 진영으로 끌어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측근들, 특히 그때까지 총사령관이었던 요압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마사를 군 총사령관이 임명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군 최고 통수권자인 왕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아마사는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백전노장인 요압에 비해 실무 능력에서 현저하게 뒤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압살롬의 대군을 이끌고도 소수에 불과했던 요압의 정예 부대에게 패했던 것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유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란군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반역자였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현재는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압살롬에게 등을 돌린 변절자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런 그를 믿지 못하고 의혹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한 유다 백성들은, 아마사의 모병(募兵)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그는 당황했습니다. 이스라엘 열 개 지파가 세바의 반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섣불리 다윗 편에 섰다, 세바가 반역에 성공하는 날에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느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 망설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지체하던 그는 다윗이 정한 시간 내에 군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실력 발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허무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김미화씨는 자신의 비문에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글을 새겨 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개그맨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업이 개그맨이니 많은 사람들을 웃겼을 것이고, 죽었으니 자빠진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극작가로서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던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비문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라는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망설이다 기회 자체를 놓쳐버린 적은 없습니까?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폴 포츠(Paul Potts)의 원래 직업은 휴대폰 판매원입니다. 어느 날, 스타발굴 TV 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 예선에 나간 그는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오페라 투란도트 가운데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바로 그날, 브리튼스 갓 탤런트는 그의 열창 덕분에 55%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동영상 싸이트 유투브(YouTube)에 올려진 그가 열창하는 장면 역시 단 9일 만에 1,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조회하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실 예선 당일, 부러진 앞니를 가진 그는 낡은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소 주눅이 든 표정을 짓기도 했었습니다. 긴장한 것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낄 만큼 혼신을 다해 열창했습니다. 사실 그는 종양 수술을 받고. 교통사고로 쇄골이 부러져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을 지경이 됐을 때에도 가수가 되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직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번의 기회를 잡은 그의 데뷔 앨범의 제목은 “단 한번의 기회 곧 원 찬스(One Chance)”입니다. 그의 인생 역전은 우연도 요행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고전으로 불리는 “오륜서”를 통해, 진검 승부에 임할 때 반드시 가져야할 첫 번째 자세는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진검승부에서 머뭇거리다 상대방의 칼에 먼저 찔리면 그대로 끝입니다.
칼에 찔린 후에 자세를 가다듬고, 공격의 리듬을 타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진검승부입니다. 머뭇거리다 칼을 맞고, 사정없이 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조급함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시기 적절한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57:7)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언제든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섬기며,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분명한 꿈을 가지십시오. 아무리 힘들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상황이 아무리 불분명하게 돌아갈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십시오. 가장 적당한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사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마사를 등용하려는 자신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마음이 조급해진 다윗은, 일단 아비새를 새로운 총사령관에 임명한 후 반란군을 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6-8a절입니다.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요압을 좇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오니”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급히 도망하느라 지친 다윗은 바후림 근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밤사이에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 요단강 근처였습니다. 거기다 당시 다윗을 따르던 무리들은 소수의 시위병들과 육 백 명의 용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무장하지 않은 오합지졸이거나 선량한 백성들뿐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정예 부대를 급파하여 엄습(掩襲)한다면 얼마든지 다윗을 잡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Ahithophel)은 다윗에게 약간의 쉴 틈도 주지 말고, 곧 바로 뒤쫓아가 처치하자는 모략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모략을 옳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그의 모략을 뒤로하고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니이다”(삼하17:11b-14)라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후새의 모략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4-16)라고 약속해 주신대로, 압살롬을 폐하고 다윗의 나라를 견고히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도우심과 후새의 모략을 통해 전열을 재정비한 다윗은, 반역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때의 경험을 통해, 맞서 싸울 상대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부르게 되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세바의 난은 압살롬이 일으킨 난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난은 압살롬 개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세바의 난은 오래 묵은 지파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바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할 경우, 국론 분열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실제로 이후 더욱 심화된 지파 간의 갈등은, 결국 왕권이 약화된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사가 지체하고 있는 동안, 조급해진 그는 아비새에게 근위병과 상비군을 맡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즉시 세바를 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세바가 세력을 키워 대항해 오지 못하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말고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소유든, 백성이든, 토지든, 성읍이든”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어떠한 것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한편,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은 다윗을 지근(至近)거리에서 보좌하던 근위병들입니다. 또 “모든 용사들”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때부터 추종하던 용사들입니다. 이들은 압살롬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결같이 다윗을 보좌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윗을 보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까지 파견한다면 궁궐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다윗은 이들을 포함해, 성중의 모든 병력을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했습니다. 다윗이 이때에도 요압이 아니라, 그의 동생 아비새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요압을 경계하고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과 측근을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측근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상황은 그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최 측근으로서 전임 총사령관이었던 요압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의 수하였던 신임 총사령관인 동생을 따라 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통솔을 받아왔던 최고 정예 군사들과 함께 출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조급한 판단과 결정이 요압에게 다시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반란을 진압하는 대열에 참여한 아마사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시원하게 뚫린 시골길을 달리던 차의 타이어가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차에는 연장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차주(車主)는 가까운 농가에서 빌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농가를 향해 가던 그의 마음에 “만일 저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 어쩌면 저 집에도 연장이 없을 지 몰라. 아냐. 있으면서 안 빌려준다고 할지도 몰라. 요즘 인심은 고약하거든!”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괜히 화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는 농부를 향해 “그래! 네 연장은 더러워서 안 쓴다! 안 써!”라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물론 만들어낸 얘기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에는 상황의 앞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조급하게 분석하고 결론까지 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야 합니다. 신중하지 못한 판단과 조급한 행동 하나 때문에 큰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급해지는 이유는 “선택적 경청” 곧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만 듣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미리 정해놓고, 그 판단을 강화시키는 것만 듣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판단과 행동은 아마사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8b-13절입니다.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매었는데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쌔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곁에 서서 가로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할 때에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굴어졌는지라 그 소년이 모든 백성의 섰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아가니라”
다윗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압살롬을 죽인 요압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군대장관의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는 민족의 화합을 추구한다는 명분 하에 반역자 아마사에게 돌아갔습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 자리는 다시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때 요압이 다시 나타납니다. 다른 부하들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아브넬과 압살롬에 이어 사촌인 아마사까지 자기 손으로 직접 죽였습니다. 출세와 명예에 목숨을 건 질투의 화신으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받들어 섬겨야할 주준 다윗이 직접 임명한 아비새를 제쳐두고,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안하무인처럼 행동했습니다.
물론 아마사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을 반역하고 대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압의 살인은 어느 정도는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살해 동기와 목적은 개인적인 분노와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라고 지적하신 대로,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죄악입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b)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원통함을 스스로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에 맡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사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충성했습니다. 결국 그의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은 다윗의 분노를 사고 말았습니다. 후에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그는, “요압을 반드시 제거하라”는 다윗의 유언을 마음에 새기고 있던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칼은 품속 어딘가에 숨겨 놓았던 단검(短劍)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압은 자신의 칼을 떨어뜨림으로써 아마사를 안심시킨 다음,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맞추는 순간 바로 그 단검을 꺼내 찔러버렸던 것입니다. 만약 떨어뜨렸던 검을 주워들었다면, 아마사가 그렇게 쉽게 그에게 다가가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출세와 명예에 눈이 멀었던 요압은 또 다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배경에는 다윗의 조급함이 있었습니다. 사실 요압이 비록 기회주의자면서 안하무인이고 출세와 명예에 눈이 먼 질투의 화신이었다 할지라도, 다윗에게 목숨 걸고 충성했던 사람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굴곡 많은 다윗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다윗이 있게 해준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붙여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할지라도, 아무리 민족 화합이 중요한 과제였다 할지라도 그를 배제하지는 말았어야했습니다. 차라리 그의 성품과 기질을 십분 이용하는 편이 더 바람직했습니다.
그러나 조급해진 다윗은 서둘렀습니다. 그를 다독거리기는커녕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사촌 형제를 통해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질투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요압 같이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싫고 마음에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알곡과 함께 자라게 하십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13:29)는 말씀대로, 알곡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다보면 반드시 알곡이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알곡이 영양분을 뺏기고 손해를 보는 것이 사실이지만, 알곡을 다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순간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조급하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마십시오. 행동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붙여주신 사람을 미워하거나, 떼어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존심을 건드리지도 마십시오. 정말로 견디기 어렵고 힘들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아니 그런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은혜와 넓은 마음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스물 다섯 살 되던 해에, 애니 피어스 켄케드(Annie Pierce Kinkead)와 결혼한 세계적인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독일로 신혼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심한 풍랑 속에서 독일로 가던 중 아내가 번개를 맞아 영구적인 불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무려 39년 동안이나 두 시간 이상 아내 곁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40년 가까이 아내 곁은 떠나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5:8)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경주 근처 안강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돈이 없었습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1년 동안 산에 가서 나무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포항에 가면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3시간을 걸어 학교 교장을 찾아가 입학하겠다고 때를 썼습니다. 너무 멀다며 포기하라는 말에도 끝까지 우겨서 입학했습니다. 그때부터 3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입학금이 없어 인근 농업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갔습니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어렵게 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잠시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마음에 품은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국민대 사회 체육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다 의학에 관심을 가진 그는 또 다시 의대 청강생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이도 많고, 의대생도 아닌 사람이 청강을 한다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시험 때, 자신에게도 시험지를 달라는 뻔뻔함도 보였습니다. 의대생들보다 더 훌륭한 답안지를 써내 의대 교수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이나 졸업장도 받을 수 없는 수업을 청강했습니다. 그리고 연세대에서 의대 교수를 초빙한다는 광고를 접한 그는 졸업장도 없이 지원했습니다. 내노라하는 해외 유학파들과 명문 의대 출신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신바람 박사로 유명한 “황수관”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인내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조급함은 죄의 근원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이 커지면 빨리, 더 많이, 더 잘 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함께 조급함이 생깁니다. 우리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이 조바심과 조급함으로 인해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리브가와 야곱은 조급함 때문에 남편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급함 때문에 믿음에서 흔들렸습니다. 타협했습니다. 결국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분쟁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조급함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섭니다.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거짓말합니다. 조급하게 판단하고 조급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다 주어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 앞에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쯤 “지금보다 조금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조금은 더 천천히 생각하며, 조금은 더 넉넉하게 말하고, 조금은 더 여유 있게 행동하라.”는 카프카(Franz Kafka)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무엇보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인내하십니까?
조급함으로 인해 어렵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없습니까? 끝까지 인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아름답고 선한 열매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급함을 버리십시오. 언제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옳은지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행동해야할 때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기다려야할 때는 오래 참고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가장 적당한 때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