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지금까지 나온 사극 가운데 가장 발칙한 제목을 달고 기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의 촬영장을 찾았을 때, 처음 마주친 것은 작은 ‘마찰’이었다.
“영화가 하회마을과 맞지 않으면 곤란해요. 내일까지 어떤 영화인지 적어서 제출해주세요.” 옛 풍경이 필요할 때마다 들이닥쳤을 무수한 카메라와의 승강이에 이골이 났을 안동 하회마을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다그침이었다. 여기 화재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무 한 그루 값이 최소 500만원인데 뭔가 보탬이 되면 좋겠다, 저기 대나무들은 누가 잘랐지…. 집주인의 허락을 받았다고, 대나무와 화단의 꽃들은 서울에서 가지고 온 거라고 제작부에서 고분고분 설명한다. 사극 제작현장이어서 그런가 시대를 거슬러간 듯한 장면부터 보게 되다니. 낯선 시간대가 뒤섞여 공존하는 듯한 이 풍경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이색 사극에 접근하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럴싸한 서두인지도 모른다.
-<정사>보다 도발적으로
전도연은 이날 촬영에서 실제 나비를 수없이 날려보내야 했다. 길조와 흉조를 동시에 보여주는 호랑나비를 잡았다가 놓아주는 장면이었는데, 번번이 나비가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해 NG가 계속됐다. “전 컴퓨터그래픽으로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면 아무래도 사실감이 떨어진다며 일단 실제 나비로 하자고 그랬어요.” NG가 이어지면서 주변의 스탭들이 큼지막한 잠자리채를 들고 ‘단역’ 나비를 채집해 전도연에게 전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화’가 회복된 뒤 비로소 촬영지를 롱숏으로 둘러보았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끼고 돌아가는 낙동강, 그 건너편에 부용대라 불리는,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의 왼쪽 끄트머리에 옥연정사(玉淵精舍)가 멋진 자태로 앉아 있다. 하회마을 안내 팸플릿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우고자 했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땅은 거유(巨儒)가 구름 같은 문도(門徒)를 양성하기에는 비좁아 보이고 책으로 빠져들기에는 경치가 너무 유혹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곳은 9년간 수절하며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정숙한 숙부인(전도연)이 ‘국가대표급 바람둥이’ 조원(배용준)의 조직적이고도 압박적인 구애를 피해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장소다. 수를 놓고, 나비와 노닐며…. 이곳으로 조원이 찾아온다. 카메라는 숙부인의 정절이 최대위기를 맞는 순간을 담는 중이다.
“레디…, 액션!”을 외치는 사람은 조감독이었다. 이재용 감독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나직이 “컷”만 지시할 뿐이다. 가끔 슬그머니 연기자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만 빼놓으면 도통 말이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궁금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는 한 스탭의 말 그대로다. 그래선지 카메라, 조명, 분장 등의 스탭 움직임도 조용하고 차분하다. 현장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연출력의 요체인 양 논해지던 시절은 적어도 이 사극의 현장에선 시대착오적이다.
“<정사> 촬영 때는 더 심해서 실어증에 가까울 정도였어요.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초조해서 그랬죠. 이거 지금 잘 가는 건가 모르겠어서. 촬영이 70% 정도 진행됐을 때, <접속>의 장윤현 감독이 놀러왔어요. ‘이제 감 다 잡았죠? 난 30%쯤 진도 나가니까 뭐가 뭔지 정리가 되던데’라는 말에 속으로 어찌나 놀랐던지.”
그러나 뭐가 뭔지 모르게 찍었다는 장편 데뷔작 <정사>는 정밀한 호흡조절과 잘 짜인 미장센이 미덕으로 꼽혔던 영화다. 비록 단편영화계의 전설인 <호모비디오쿠스> 시절과는 판이한 스타일과 소재를 선보였지만.
<정사> <순애보> 그리고 <스캔들…>로 이어지는 장편영화들은 이재용 감독의 취향과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 모종의 일관성이 있다. <정사>에는 그때까지의 불륜영화와 선을 긋는 한 장면이 툭 튀어나온다. 기혼인 서현(이미숙)은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집을 빠져나가 동생의 약혼자 우인(이정재)과 숨가쁜 정사를 벌인다. <스캔들…>의 첫 장면도 그렇다. 조씨부인(이미숙)의 사당에서 엄숙한 제사가 치러지는 동안 별채에선 조원이 기생과 질펀하게 놀아난다. 콘티북을 슬쩍 엿봤더니, <정사> 때보다 훨씬 도발적으로 느껴질 만큼 교차편집시키고 있다. 또 조씨부인과 조원은 하필 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정절녀 숙부인과 조씨부인의 남편이 들일 소실 소옥을 놓고 게임을 벌인다. 조원이 두 여인네를 농락하는 데 성공하면 조씨부인의 몸을 그 상으로 받는다. 그들 사이가 예전부터 야릇한 관계이긴 했다.
그렇다고 <스캔들…>이 대단히 전복적인 작품은 아닐 것이다. 외국의 클래식한 영화들처럼 이야기로나 미술적으로나 현대물보다 더 세련되고 멋있는 시대극을 해보고 싶다는 게 출발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또 뭘까 하고 궁금해지는 건 이재용 감독의 장기가 치밀하게 계산한 위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업영화의 장르 안에 머물면서도 이제까지의 관습에 살짝 어깃장 놓는 걸 즐긴다. <순애보>가 특히 그랬다. 일견 밋밋하고 자잘한 일상 묘사 위주의 멜로영화인 것처럼 ‘평가절하’당했으나 뜯어볼수록 ‘변태적’이다. 변태적이라서 뭐 어쨌다는 게 아니라 그게 너무 일상성 안에 스며 있어 흥행코드로 작용하기 힘들 만큼 배치해놓는 솜씨가 놀랍다. 짝사랑하는 여인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놓고 동사무소에서 자위하는 우인(이정재)이나 자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노사이트에서 옷을 벗는 아야(그것도 피천득 수필의 애틋한 주인공 아사코란 이름으로) 등 곳곳에서 증거를 발굴할 수 있다.
“전형적인 상업영화와 고독한 작가주의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이재용 감독은 무관심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행보를 걷고 있다. 그런데 이 역시 그의 연출이라면? <스캔들…>은 <정사> 끝낼 무렵 떠올린 작품이었으나 그때만해도 <쉬리>가 나오기 전이어서 큰 예산이 들어갈 영화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속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부터 하고 <스캔들…>은 세 번째로 해야지 하고 맘먹었다고 하니 이제껏 모든 걸 그의 계산대로 진행해온 셈이다. 의아스럽게도 오랜 시간 뜸들인 작품을 창작도 아니고 200년도 더 묵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에서 끌어왔다. 게다가 스티븐 프리어즈(<위험한 관계>, 1988)나 밀로스 포먼(<발몽>, 1989) 등 쟁쟁한 감독들이 같은 원작을 두고 달려들었던 작품이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2]
-동서고금 막론한 욕망의 모습
“다시 현대물을 한다면 펄펄 날 것 같아요.” 이재용 감독은 사극 연출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움직임의 제약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꼼꼼함과 섬세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연배우들에게는 대사의 톤까지, 단역에게는 화면에 들고나는 위치와 타이밍을 정확히 짚어준다.
“사람 사는 거나 인간의 욕망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내 식으로 펼쳐볼까 하는 게 관건이지. 양반집 깊숙한 곳에서 춘화를 돌려보고 또 조씨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춘화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ㅇ양 비디오 사건과 다를 게 없고, 당시에 집 한채 값이라는 가채에 사대부 아녀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이탈리아 가구를 갖고 싶어하는 지금의 욕망과 다를 게 있겠어요?”
감독뿐만이 아니다. 전도연과 배용준은 이구동성으로 <발몽>이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감독 로저 컴블, 1998)보다 <위험한 관계>가 확실히 인상적이라며 영화 <스캔들…>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세실(우마 서먼)의 엄마가 투르벨 부인(미셸 파이퍼)에게 자꾸 경고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자 발몽 자작(존 말코비치)은 그 대가로 세실의 처녀성을 가져간다. 메르티유 백작부인(글렌 클로즈)은 처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세실에게 남편과 맘을 준 연인과 몸을 준 남자를 동시에 갖는 게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라고 조언하며 발몽을 거드는데 그건 일말의 진심이기도 하다. 죄책감이 사라진 세실에게 발몽이 ‘난 한때 네 엄마의 정부이기도 했어’라고 말해주어도 세실은 깔깔거리며 재밌어한다.
<위험한 관계>의 이야기 줄기를 거의 따온 <스캔들…>이니만큼 세실의 조선시대 버전 소옥과 소옥어미도 모두 조원에게 ‘정복’당한다. 물론 조씨부인의 지원사격이 컸다. 조씨부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메르티유 백작부인이 정리해주는 ‘인생관’을 참고하면 좋겠다. “처음 사교계에 들어와서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듣고 관찰하면서 사람들이 숨기려는 걸 듣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전문가가 됐지. 도덕가에게서는 외모를, 철학가에게서는 생각하는 법을, 소설가에게서는 불필요한 게 뭔가를 배웠어. 그걸 합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어.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 남자들을 지배하고 여자들에게 복수하는 거지.”
발몽과 메르티유처럼 조원과 조씨부인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사랑 그 자체보다는 권력처럼 위계짓는 사랑 게임을 즐기며 운명적인 사랑에 심취한 인간들을 조롱한다. 이재용 감독도 사랑에 얼마간 냉소적이다. <정사>에서 “결혼에 희망을 갖지 마라. 열정만 갖고 사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던 남편의 말에 동감하던 이 감독은 ‘솔 메이트’(영혼의 짝) 따위의 대사를 편집에서 지워버렸다. <순애보>에 다시 등장한 우인은 아야와 알래스카에서 커플이 되지만 그는 사실상 거세된 남자다. <스캔들…>에선 발정난 조원이 뒤늦게 ‘회개’를 하겠지만 운명적 멜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SF영화 만드는 상상력으로
낯선 곳에서 이야기를 끌어온 영화답게 <스캔들…>은 공간과 디테일에 대한 상상력이 ‘SF적’이다. 이것은 <스캔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아온 기존 사극과 달라지리라고 예상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치질을 어떻게 했을까까지 고증하려 했으나 남아 있는 게 워낙 없어서 애를 먹었지만 먼저 상상을 해보면 대체로 맞아들어갔다고 한다. 민속촌에 가면 중부 지방과 남부 지방의 집 모양을 개괄해놓았지만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 표준적으로 살았을까 싶었다. 마침 문을 열면 트인 마당이 아니라 벽부터 다가서는 이언적의 ‘은밀한’ 집을 보고 무릎을 쳤다. 내당에 연못을 만들어놓기도 했겠지 싶어 세트를 만드려 하니 ‘그런 집’은 없었다는 반발에 부딪쳤다가 뒤에 ‘그런 집’이 있었다는 걸 찾아냈고, 예절법을 연구하다 식사 때 서양의 냅킨 같은 걸 썼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서구식으로 방을 꾸미듯 그때는 방을 중국식으로 치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으로 밀어붙인 것도 있다. 상상력이 이런 식으로 자꾸 작동하니 ‘이건 SF영화다’라는 레토릭도 틀린 것만은 아닌 셈이다.
“당시에 군자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 제너럴리스트를 추구했어요. 스스로 약을 지어 먹을 줄 알고, 운수도 볼 줄 알고, 자기 집은 자기 식대로 짓고 살았다는 거죠. 이걸 알고 나니까 사대부의 일상에 집중하는 데 많이 자유로워지더군요.”
공간에 대한 야심을 가진 사극이라면 미술비의 비중이 높을 것은 불문가지. 순제작비 45억원 중 미술, 의상 등에 들이는 돈이 20억원에 가깝다. 화려한 실내 미장센을 연출하기에 고충이 크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좌식 문화에 카메라를 다양하게 들이대기가 생각보다 갑갑하더라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틀어지는 한복이나 머리, 수염 등도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는다. 조원의 잘 다듬어진 수염은 ‘리얼리티’를 위해 한올씩 일일이 붙였다.
그래도 68회차 촬영 중에 43회차를 넘기면서 중요 대목은 거의 다 찍었기 때문인지 야외촬영에선 느긋하게 즐기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요즘 영화계의 한 경향이라 할 여성 스탭들의 파워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분장, 의상은 물론이고 프로듀서, 제작부장, 조명 퍼스트, 붐 마이크 등이 모두 여성이다.
“<순애보>처럼 이것저것 살짝살짝 숨겨놓는 재미는커녕 이야기 전달에만도 힘이 많이 들어 한눈 팔 새 없을 지경”이라는 엄살은 이 영화가 매우 촘촘한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에로틱함과 멜로, 유머까지 그 어느 때보다 ‘톤’이 다양한 이재용 감독의 신작이 얼마나 ‘비싼’ 결과를 낳을지 아직 알 수 없다. 우아하고 세련된 사극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스탭들이 묵는 안동 시내의 모텔은 여느 도시처럼 술집들로 포위돼 있었다. 밤늦게까지 붙잡아놓았던 감독이 돌아간 뒤 텔레비전을 켜자 한 채널에서 비디오용 에로영화가 줄창 쏟아진다. 이래저래 현실은 ‘싸구려’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치밀어오른다. “성(性)스러우면서도 성(聖)스러움이 깃든” 영화는 그래서 자꾸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