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석기문화의 전개
공주지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지구의 역사와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구의 역사는 원생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구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누어지며, 제4기는 다시 홍적세와 충적세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는 신생대 제3기말에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장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약 250만년 전부터 시작되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부터이다. 이 때, 도구는 돌을 깨뜨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뗀석기(打製石器)라고 하며,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던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공주지역 구석기문화는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전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구석기시대 전기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제일 먼저 알려진 유적은 함북 종성의 동관진유적이나,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1962년 함북 웅기의 굴포리유적이 조사되었고, 이어 1964년에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공주의 석장리유적이 조사됨으로써 우리나리에서 구석기의 존재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유적들이 조사됨으로써 구석기인들이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생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동굴을 비롯하여, 바위그늘·평지 등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대개 햇빛이 잘 비치고 강이나 물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공주 석장리유적의 경우는 평지유적으로 구석기인들이 선호했던 생활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석기인들은 주로 나무열매나 뿌리 등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는데, 이 때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 또는 동물의 뼈나 뿔을 다듬어서 만든 골각기 등을 사용하였다. 이들 도구의 종류는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 찍개?찌르개 등이 있으며, 요리도구로는 긁개, 밀개, 공구로는 새기개 등이 있다. 특히, 충북 단양의 수양개유적에서는 이러한 석기를 만들던 석기제작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은 주로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였다. 특히,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동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석장리의 집자리유적이 8~10명 정도의 인원이 살았을 추정되고 있는 점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 조직의 구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을 조각한 유물이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주로 주술적인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유적, 유물들을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2)구석기시대의 공주
공주는 한강 이남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유물이 발견된 장기면 석장리를 비롯하여 반포면 마암리의 용굴, 시목동, 소학동, 장기면 금암리 등지에서 다양한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적합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장리유적은 금강과 산록 완사면이 만나는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존재는 1964년 5월 홍수에 의해 강둑이 무너짐으로써 확인되었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64년 11월 22일에 처음 이루어진 이후 1974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과 1992년에 11,12차 조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체계를 세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구석기시대까지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석장리유적은 제1·2지구로 나뉘는데, 1지구에서는 후기 집터층에서 2만 8천년 전과 그 아래층에서 3만 6백년 전의 연대가 밝혀졌다. 2지구에서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으나 여러 층위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의 석기 제작기술은 외날찍개, 양날찍개, 이른 주먹도끼, 발달된 주먹도끼 및 격지긁개,돌날석기, 새기개, 좀돌날등의 단계를 거쳐 발달하였다.
조사 결과, 석장리유적은 전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형성된 문화층으로 밝혀졌다. 맨 아래층의 외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 전 사이에 이루어진 층이고, 2문화층은 제3빙하기인 35~32만년전 사이, 3·4문화층은 21만년 전의 제3빙하기 뒤쪽으로, 5문화층은 18만년전의 빙하기, 6문화층은 제3간빙기인 12만년경 전으로 각각 추정된다. 중기구석기 성격을 지닌 자갈돌 찍개 문화층은 따뜻한 기후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쪽의 찰흙층에서 산화철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왔다. 이 층의 석기들은 아슐리앙 전통의 주먹도끼, 돌려떼기 수법의 몸돌, 격지돌이 있어, 7만~6만년 전 쯤으로 추정된다. 8·9문화층은 제4빙하기에 이루어진 6만~5만년 전으로, 10·11문화층은 3~2만년 전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
특히, 석장리에서 조사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평지의 집자리는 비교적 상세하게 조사가 이루어짐으로써,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하였는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집자리는 담을 쳐서 집을 바깥과 구별하고,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으며, 기둥을 세우고 움막을 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 안에 살던 사람의 수는 8~1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집단적인 협동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고나 사나운 맹수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였을 것이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화덕자리가 조사되었는데, 화덕은 둥그스럼한 자갈돌 7개를 둘러 놓았다. 석장리인들은 불을 이용하여 요리를 하고, 추위도 막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집 앞에서는 잔격지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석기를 만들던 곳이었음을 부여준다.
석장리 주거지에서는 고래를 땅바닥에 새긴 것, 물고기 머리를 둘을 떼고 선으로 새기고 눈을 둥글게 돌려 굼파기 한 것 등 예술작품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도 출토되어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비록, 공주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주거유적이 석장리에서만 조사되었지만, 당시 금강주변에는 석장리와 같은 생활유적들이 곳곳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장리 구석기유적의 발굴은 우리나라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여러 문화층이 단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으며,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조사·발굴·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석장리유적이 지닌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의 문화 형성시기를 구석기시대 전기까지 올릴 수 있었다.
둘째, 동북아시아 구석기문화의 이해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셋째, 남한에서 조사된 최초의 구석기시대 유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층이 구석기 전기-중기-후기 로 이어지는 계기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연구에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넷째, 석기의 제작방법을 통해 석기의 용도와 당시의 생활상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였다.
다섯째, 연대추정에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을 비롯한 꽃가루분석, 지층과 지질구조에 대한 해석 등 다양한 인접과학을 활용함으로써,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동굴유적인 반포면 마암리의 속칭 '용굴'이란 곳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생활흔적이 조사되었다. 이 동굴유적은 금강 남안, 계룡산 북쪽 산줄기 사면에 위치한다. 동굴은 높이 20m 가량의 위치에서 입구를 동쪽으로 하고 있으며, 굴 입구의 크기는 너비9m, 높이1m이었으나. 그 안은 길이 24m, 너비 7~12m, 높이 3m이며, 30~50cm 정도의 퇴적층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석영반암(石英斑岩)의 석재로 만든 찍개, 찌르개, 긁개 및 돌날형 박편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석장리유적의 상층과 연결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동굴유적은 석장리유적과 함께 공주지역에서 생활한 구석기인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외에도 공주시 시목동,소학동,장기면 금암리 등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금강과 인접한 곳이다.
이와 같이 공주지역은 다양한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속시기도 구석기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수렵?채집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활동영역이 농경인들에 비해 매우 넓은데, 주 생활근거지는 대부분 물이 풍부한 강이나 호수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은 구석기인들의 생활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제공하고 있었을 것이며, 금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구석기유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약 1만년 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기후가 따뜻해지고 식생과 동물상 등 환경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이때 나타난 것이 화살촉과 같은 세석기(細石器)이다. 이 시대를 중석기시대라고 부르는데, 그 기간은 짧고 바로 신석기문화가 시작되었다.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는 기온의 상승과 함께 120m라고 하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많은 환경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 결과, 공주지역의 지형을 비롯한 기후 등이 현재와 거의 같은 조건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지역에서는 석장리 2지구 해발 12m 지점의 5지층이 후기구석기 말기 내지는 중석기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고되었을 뿐, 아직까지 유명한 유적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아, 신석기인들이 이 지역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삶을 살았는가는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석기인들은 주로 물가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이 신석기인들에게 좋은 삶의 터전을 제공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공주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조사된 사례는 없다. 그렇지만, 공주부근 금강유역인 공주 석장리나 부여 나복리(羅福里)등에서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빗살무늬토기편이 산발적이나마 수습되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갑천 주변 구릉지대에 위치한 대전 둔산동유적에서 다수의 빗살무늬토기편?보습?갈돌?그물추 등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물가생활을 선호했던 신석기인들이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에서 터전을 잡고 생활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다만, 공주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석기시대 이후 이 지역의 침강으로 인해 이들 흔적이 없어졌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신석기시대의 일반적 특징을 통해 공주지역에서 생활하였던 신석기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경제를 벗어나 농경이나 목축을 기반으로 한 안정된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되고, 토기와 마제석기를 사용하고 직조기술을 개발하는 등 보다 발전된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 모든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이와 같은 문화양상이 전계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빗살무늬토기와 마제석기가 사용되었지만, 농경은 보다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해안가나 큰 강가, 해안에서 가까운 섬 등 주로 물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적에서는 낚시바늘?어망추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이러한 유적의 분포상과 출토유물로 보아 신석기인들은 어로생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후가 계절적인 변화가 크기 때문에, 식량자원을 취득함에 있어서 그 영향을 많이 받는데, 강이나 바다에서는 지속적으로 식량자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아직은 수렵과 채집도 여전히 중요한 식량공급원이었으며, 특히, 수렵에 있어서 먼거리까지 날아가는 화살의 사용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식량확보의 증대를 가져왔다.
신석기유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유적의 기원전 5,000년, 그 하한은 경기도 시도유적의 기원전 1,000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5,000~기원전 1,000년 경까지 약 4,000년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중기?후기의 3기로 구분되고 있다. 전기는 기원전 5,000~기원전 3,500년으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사용되기 이전의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당시의 주거지는 주로 해안 또는 강가의 사질토층을 50~100cm이상 파서 만든 수혈주거에서 생활하였다. 형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면적은 20㎡~30㎡이며, 화덕이 1~2개 설치되어 있다. 유물로는 작살과 낚시바늘, 어망추등이 다수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 어로생활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 수렵?채집활동을 병행하였던 시기였다.
중기는 기원전 2,000년~기원전 1,000년의 약 1,000년간으로 빗살무늬토기가 퇴화되어 변형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서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다.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조 등이 농경도구와 함께 발견되었으며, 궁산리유적에서는 돌가래?뿔가래, 동물의 이빨로 만든 낫등의 농경도구가 출토되어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점차 농경을 중심으로 한 생산경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어로?수렵에 의한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유적에서 사슴?노루?멧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고, 도토리알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야생의 과일을 채집해 먹었음을 보여 준다. 또, 함께 발견되는 갈판은 도토리알이나 짐승의 고기 같은 것을 연하게 갈아 먹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는 일정한 장소에서 여러 개가 함께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석기인들이 일정한 규모의 취락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은 중요한 일은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처리하는 공동체생활을 하였을 것이며, 어로?수렵?농경 등의 생산활동도 공동으로 행하였다. 그렇지만, 혼인은 다른 씨족과 이루어졌으며, 또한 씨족간의 교역도 행하였다. 신앙으로는 우주만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애***즘이나 무격신앙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미술은 대체로 추상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1)청동기 문화의 성립과 공주
신석기시대는 청동기의 유입·사용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이행은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9세기 경으로 내려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기원전 700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견해이며, 그 하한은 대략 기원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청동기 시대는 당시 사용된 동검의 형태를 기준으로 다시 전기와 후기의 2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그 경계는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하는 기원전 300년 경이다.
청동기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큰 요소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농경은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취락의 형성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농경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정주취락(定住聚落)이 출현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주로 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를 눈앞에 둔 구릉상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청동기인들이 목축·사냥 이외에 재배·농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농경생활의 흔적은 곡물의 흔적이나 반월형석도·삼각형석도 등과 같은 농경도구를 통해 확인된다. 재배작물은 조·기장·수수·콩과 같은 곡물류에서 보듯이 주로 밭곡식이었으며, 부분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공주지역과 가까운 부여 초촌면 송국리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탄화미(炭化米)는 당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농경과 함께 동물의 가축화도 현저하게 진행되어 이제까지 수렵에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수렵과 어로는 여전히 행해졌으며, 경남 울주의 반구대암각화는 당시 수렵·어로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거생활은 신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수혈주거지에서 살았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수혈주거의 평면형태는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바뀌고 있으며, 면적도 넓어져 80㎡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20㎡ 정도이며, 수혈의 깊이는 50㎡전후이다.
신석기인들은 일정한 규모의 취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농경생활의 영향으로 한 곳에 오랫동안 정주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 취락이 보다 밀집화되고, 동시에 영역이 넓어지는 현상을 나타내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는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石棺墓)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대규모의 지석묘가 만들어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 상당한 권력의 소유자가 출현하였으며, 또한 세습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권층의 대두와 함께 일정한 영도권 내지는 지배권을 둘러싼 공동체간의 대립·항쟁과정에서 원초적인 형태의 국가가 출현하였는데 이를 성읍국가(城邑國家)라고 칭한다. 그리고 예술활동은 농경의 발달에 따라 더욱 진보하였다. 특히 주술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다양한 종류의 청동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주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인접한 부여 송국리유적의 주변문화로서 확인되고 있다. 부여 송국리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전기와 후기의 전환점이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취락지유적으로 이곳에서 비파형동거(琵琶形銅劍)이 발견되어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 촐토된 토기는 송국리형토기로 불리고 있으며, 주거지는 송국리형주거지라고 하여 하나의 문화권으로 설정되고 있다. 이 문화권역에 속하는 지역으로는 공주를 포함한 충남의 서북부지역에 해당하는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산해미의 휴암리유적, 보령의 관창리유적, 전북 익산의 석천리옹관묘등이 있다.
이제까지 공주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최근들어 조사례가 증가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들 유적은 주로 송국리유적과 인접해 있는 지역에서 다수 조사되고 있다. 그러면,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개별 유적에 대한 검토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공주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부여 송국리와 인접하고 있는 탄천면 일대인데, 이곳은 지형상 넓은 들판과 하천을 끼고 있으며, 주변으로 나즈막한 야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청동기인들의 생활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탄천지역에서 조사되는 유적의 성격은 크게 주거유적과 분묘유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청동기시대인들의 생활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적들이다.
탄천 남산리유적은 송국리유적과 동일한 문화권으로 송국리 지역에서 취락시설 등 생활유적이 주로 조사된 점과는 달리 남산리 일대는 분묘유적인 토광묘와 옹관묘등 매장유구가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탄천 송학리 일대에도 이와 동일한 유구가 분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지역에서 확인된 매장방법으로는 주로 옹관을 사용하여 사체를 처리한 것으로 밝혀졌다. 높이가 50~60cm되는 무문토기 단지를 땅에 거의 수직으로 묻고 돌로 뚜껑을 한 형태이며, 단지의 밑부분에서는 조그만 구멍을 내어 사체로부터 흐르는 물이나 고이는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최근 장선리 지역에서 주거지를 비롯한 많은 청동기시대 유구가 조사되고 있다. 1999년에 조사된 유적의 양상을 보면, 송국리형 주거지 4기, 저장구덩이 19기, 석관묘 6기등이다. 그리고 2000년에 조사된 유적에서는 송국리형 주거지 14기, 원형유구, 석관묘등이 조사되어, 이 일대가 부여 송국리와 함께 청동기시대 주요한 생활터전 가운데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용성천이 흐르고 있는 이인면 산의리에서는 원형주거지 3~4기가 조사되었으며, 무문토기·석촉등의 유물이 함께 수습되었다. 탄천면 분강리유적의 경우 석관묘 8기가 조사되었는데, 송국리석관묘와 구조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도 주변에는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부여의 송국리유적을 비롯하여 남산리, 산의리, 송학리의 옹관묘, 성리고인돌, 이곡리입석, 초봉리고인돌, 구암리고인돌 등이 있어, 공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원형주거지 3기가 확인된 태봉동유적은 낮은 구릉상의 정사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금강 본류와는 약 2km정도 떨어져 있으며, 바로 남으로 금강의 지류인 검상천이 흐르고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는 우성면 일대인데, 이곳은 지형상 낮은 야산과 조그만 두 개의 하천을 끼고 들판이 형성되어 있어, 선사인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우성면 귀산리의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역에서는 송국리형주거지 8기가 조사되었는데, 원형3기, 말각방형5기이며, 석촉·반월형석도편·갈돌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공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송국리형주거지로 해미 휴암리유적이나 부여 송국리유적과의 연관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유적외에도 공주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이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장기면 일대도 청동기시대 유적이 주로 입지하는 지형과 비슷한 지리적 조건을 이루고 있어 청동기인들의 생활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공주지역에서 대규모로 형성된 청동기시대 유적들은 조사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에는 들판과 소하천을 끼고 있는 낮은 야산 등 생활환경이 좋은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소규모 단위로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이외에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으로 청동기시대에 무덤으로 사용된 것이나 농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인돌의 분포는 주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고인돌은 주로 동북아시아에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한반도는 고인돌이 집중되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고인돌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한강을 기준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분류되는데, 북방식은 탁자식이고, 남방식은 기반식(基盤式)과 개석식(蓋石式)으로 다시 구분된다. 공주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대부분 기반식에 해당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인돌 유적으로는 탄천면 남산리의 고인돌 3기, 분강리고인돌 1기, 사곡면 호계리고인돌 1기, 반포면 국곡리고인돌 1기, 이인면 초봉리고인돌 3기, 구암리고인돌 3기등이 있다.
이 외에도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며, 신앙과 관련된 유적으로 선돌(입석[立石])이 있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것들이 모두 선사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는 없으나, 청동기시대의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 이들 유적이 남아있는 지역으로는 장기면 평기리·당암리, 이인면 신흥리·이곡리, 반포면 상신리·국곡리·원봉리, 탄천면 남산리·가척리, 유구읍 입석리, 우성면 보흥리, 계룡면 향지리, 공주시 검상동 등이다. 공주지역 청동기유적의 분포상을 보면, 산지가 많은 북부지역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특히, 금강의 지류인 소하천을 끼고 발달한 평야지대와 가까운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 공주지역에 거주했던 청동기인들이 활발한 생산경제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주민의 일상적인 경제활동 영역에서 부쉬맨의 식량채집 집단과 유럽 농경민들의 토지활용 범위를 토대로 하여 산출한 활동범위는 수렵채집인들은 대체로 반경 10km, 농경인들은 반경 5km라는 연구가 있는데, 금강의 한 지류인 갑천유역 선사유적을 토대로 산출한 활동영역을 보면, 신석기시대가 약 8km(반경 4km), 청동기시대 초기지석묘사회가 약 7km(반경 3.5km), 지석묘사회가 약 5km(반경 2.5km), 지석묘·입석사회가 약 4km(반경 2km)로 산출되었다. 공주지역도 갑천지역과 같은 금강권역으로 생활환경이 비슷하였을 것이므로, 이와 같은 통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2)초기 철기시대와 공주
기원전 4~3세기경이 되면,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철기문화가 유입되고, 그 영향은 다시 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다. 남부지역에는 확인되는 이 시기의 유물로는 한국식 청동칼과 청동거울, 그리고 주조철부 및 철착, 유리제 관옥 등이 있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화덕자리가 벽에 더욱 가까워지거나 화덕대신 구들을 사용한 예가 있어, 주거지 내부에서의 생활공간이 더욱 확대되고 난방방법이 새롭게 개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의 사용은 생활의 양상을 여러모로 변화시켰는데, 특히 철제농경구의 출현으로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농업생산력의 향상은 부의 증가를 초래하였으나,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더욱 확대되어 보다 큰 정치체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를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이전 단계이다. 공주를 포함한 한강이남 지역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가 형성되기 바로 이전의 사회에 해당된다.
공주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를 비롯한 원삼국시대의 유적은 다수 조사되었다. 그러나, 이들 두 시기를 이어주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은 거의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공주지역에서 전개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은 빈약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유적·유물이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발굴조사 등을 통해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공주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은 장기면 봉안리이다. 이 곳에서는 한국식 청동칼과 청동거울, 유리제 관옥 등이 수습되었다. 유적은 대교천을 바라보는 나지막한 구릉(해발 30m)의 정상부 남쪽에 위치한다. 정확한 유구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토광묘 또는 목관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적은 비록 철기유물이 부식되어 없어졌지만, 공주지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예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농경도구 및 각종 공구의 발달로 농경이 크게 발전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농경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공주지역에 철기시대에도 많은 취락들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
1)원삼국사회의 성립
삼국시대(三國時代)로 불리는 고대사회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들 지역에는 각지에 크고 작은 소국(小國)들이 존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부르며,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대략 300년 경까지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 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先史時代)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시대(歷史時代)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로서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중국 문헌에 따르면, 원삼국시대 경기 이남지역에서는 마한(馬韓) 54국, 진한(辰韓) 12국, 변한(弁韓) 12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한 54국은 오늘날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변한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세력은 마한인데, 큰 나라는 1만여 가( ), 작은 나라는 수천 가( )로 이루어졌으며, 합하면 10여만 호(戶)였다. 진한과 변한은 큰 나라가 4~5천 가, 작은 나라가 6~7백 가가 되었으며, 합하면 모두 4~5만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소국들 가운데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의 실용성이 소멸되고, 철기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각종 농·공구류가 철제로 만들어져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또한, 토기제작에 있어서 회전판의 사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 졌으며, 밀폐된 가마의 사용으로 높은 온도에서 굽게 되어 전보다 훨씬 단단한 토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농경 특히, 벼농사의 발전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인구의 증가와 계급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등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졌다.
농업의 발달로 기풍제와 추수감사제가 행하여졌는데(부여의 영고, 고구려 동맹, 동예의 무천), 이러한 종교적 의식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연일 음식과 술,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종교적 제의(祭儀)를 주관한 제사장은 '천군(天君)'으로 불렸으며, 별도의 영역인 소도(蘇塗)를 관할하였는데, 죄인이 이곳에 도망가도 잡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문적인 제사장의 출현과 제정(祭政)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장례를 후하게 지냈는데, 가장(家長)이나 왕위(王位)가 부자상속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도 발전하였다.
원삼국시대의 사회상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법률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고조선의 경우 8조목의 법조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살인과 상해, 절도를 금하는 3조목이 전해지고 있으며, 부여의 경우 간음을 금하고,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는 등의 법이 있었다. 이를 통해, 원삼국시대에는 살인·상해·절도·간음·투기 등을 금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원삼국사회는 철제 농공구의 발달과 농업의 발달 등을 통한 경제력의 성장을 기반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정치구조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는 공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곳곳에 많은 읍락들이 형성되어 갔을 것이다.
2)마한사회와 공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에 공주는 마한(馬韓)의 영역에 속하였다. <후한서>·<삼국지>등의 중국 역사서에 마한 54국의 명칭이 보이고 있으나 마한을 구성한 54국의 위치는 아직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마한지역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영역은 대략 50리 내외의 반경을 가졌으며, 인구는 약 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공주지역에는 불운국(不雲國), 또는 감원비리국(監爰卑離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공주지역은 금강을 비롯하여 다수의 소하천을 끼고 발달한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어, 당시 농경의 발달에 따라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현재, 공주 각 지역에서 당시의 생활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토광묘와 주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공주지역에서도 이들 유구가 다수 조사되어 마한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먼저, 집단 매장시설이 확인된 장기면 하봉리의 경우 목곽묘 1기, 목관묘 15기, 옹관묘 3기, 구상유구 1기, 제사유구 4기, 용도를 알 수 없는 수혈 2기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유물로는 토기류 40여 점, 옥류 18점, 철기류 11점 등이며, 주변에서는 흑요석 1점과 무문토기편, 석기편 일부가 수습되었다. 하봉리 유적이 지닌 특징으로는 첫째, 공주일원에서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그간 공백기로 남아있던 선사시대와 백제시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 둘째, 하봉리유적이 목관묘를 중심으로 하고, 주구(周溝)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존에 조사된 인근의 천안 청당동유적 및 송절동유적 등과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마한의 여러 소국과 관련지어 연구될 수 있다는 점, 셋째, 유구에 딸린 제사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당시의 장제(葬制) 및 묘제(墓制)와 관련하여 사회상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는 점 등이다. 따라서, 하봉리유적이 포함된 장기지역은 원삼국시대 마한제국 가운데 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원삼국시대는 성읍(城邑)을 중심으로 통치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는데, 의당면 수촌리에서 조사된 토성(土城)은 마한의 여러 소국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당시, 지배계층은 성읍 안에서 거주하면서 촌락에 사는 농민들을 지배하였는데, 성읍(城邑)은 나지막한 구릉에 토성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촌리토성은 해발 30m의 낮은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능선은 공주일원에서 가장 넓은 뜰 중에 하나인 수촌뜰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4.5m내외이며, 보루와 접해있는 부분 약 20m정도가 남아있다. 이 토성은 공주시 의당면 일대의 평지를 생활근거지로 한 집단의 치성(治城)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4세기 이전의 토성에 대한 정식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마한시대 소국의 존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여러 소국들의 위치비정이 주로 지리고증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토성에 대한 조사를 통해 실증적으로 위치비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토성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탄천면 이인지역도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빈번하게 출토되어 있어 마한의 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최근에, 탄천면 장선리유적에서는 주거지로 판단되는 토실(土室)유구 38기와 장방혈 수혈유구, 부뚜막시설이 갖추어진 방형주거지 1기, 토기요지 1기, 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조사지역의 지형적 조건을 보면 주변이 해발 150m내외의 높고 낮은 산등선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유적은 서북쪽의 해발 120m내외의 산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흘러내린 구릉의 중상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우교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곳에서 조사된 유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토실(土室) 유구이다. 이들 유구는 표토를 지하로 장방형 내지는 원형으로 판 다음 그 바닥면에서 다시 수직으로 파 내려간 후에 옆으로 수평되게 토실을 만든 형태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토실의 형태는 원형이나 방형, 사다리꼴의 평면형태이며, 천장은 궁륭형(穹 形)이다. 토실의 수는 1~3개 정도이며, 그 형식은 4~5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출토유물로는 적갈색 또는 회갈색 연질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장란형토기·파수부토기·발·대접·시루 등 다양한 토기류와 철정 1점 등이 있다.
이 토실유구는 내부 바닥에 목탄이 섞인 점토를 다지고 있는 점이나 환기시설, 내부의 불탄자리 등으로 보아 주거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들 유구가 주거지일 경우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마한조'에 기록된 "초옥토실(草屋土室)을 만들어 거처했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으며, 출입구는 위에 있고, 가족이 모두 그 안에서 생활하여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다"라는 내용의 마한 주거형태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장선리에서 조사된 토실유구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마한시대 주거의 한 유형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아울러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양상이 서로 일치하는 획기적인 유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 유적은 당시 일반인들의 주거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
또한, 토실유구와 함께 당시의 생활지표면에서 부뚜막시설이 조사되었다. 이들 부뚜막시설은 주거지 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거와 취사를 위한 공간이 서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토실주거지는 주로 잠을 잘 때 이용되었으며, 취사를 비롯한 평상시의 생활은 야외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립적인 구릉지대의 수 십기의 다양한 생활유구가 조사됨으로써 당시 촌락의 규모나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주거지의 규모나 배치상태 등을 통해 가족분화 내지는 혈연관계 등을 유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토실유구 안에서 출토된 철정(鐵鋌)은 다른 지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장선리 토실유적은 이제까지 조사된 예가 없는 새로운 마한의 주거형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원삼국시대 마한의 사회상을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우성면 귀산리의 공주-연기간 국도 36호선 확장공사 과정에서 가마터 2기가 조사되었다. 가마에서 출토된 유물은 공주 하봉리유적의 옹관으로 사용된 옹형토기(甕形土器) 구연부편 및 원삼국시대의 토기편이 소량 수습되었다. 이 유적은 당시 사람들의 교류관계를 비롯해 토기생산체계 등을 밝히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우성면 상서리에서는 주구묘(周溝墓) 1기가 조사되었는데, 승석문이 찍힌 원저단경호가 출토되었다. 이 곳에서는 무문토기편도 다수 수습되고 있어, 선사시대의 취락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원삼국시대 유적은 주로 소하천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지대와 인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중복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농경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청동기시대 이후부터는 대개 소하천을 끼고 발달한 평야지대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공주지역은 금강의 지류인 소하천들이 곳곳에 흐르고 있어, 농경에 적합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지역에 읍락들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읍락들이 연합하여 소국(小國)을 이루었으며, 공주지역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비정되는 불운국(不雲國), 또는 감원비리국(監爰卑離國)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성립된 소국(小國)이었을 것이다. |
1)웅진성 도읍 천도 이전의 공주
공주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제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공주 지역에는 마한의 1개 국(國)이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목지국(目支國)을 월지국(月支局)으로 기재한 <삼국지> 판본에 따라 그 소재지를 공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공주 월성산(月城山)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토성을 축조한 세력과 같은 존재가 공주 일원에 포진한 국 세력의 하나로 보겠다. 이들의 생활상은 공주 탄천면 장선리와 그 주변의 토실(土室)과 장방형 주거지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주 지역에 소재했던 마한연맹 소속의 1개 국명(國名)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감해비리국(監爰卑離國)을 공주로 비정하기도 한다. 불운곡(不雲國)의 소재지로 공주 지여을 지목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공주 지역 세력과 백제와의 관계는 알려진 바 없다. 이와 관련해 백제의 영역 범위에 관한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8월에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를 고(告)하고 강장(疆場)을 획정( 定)하였는데, 북쪽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에 한(限)하고, 서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동쪽은 주양(走壤)으로 끝났다(<삼국사기(三國史記)> 권23, 온조왕 13년 조).
위에서 패하는 예성강, 대해는 서해를, 주양은 강원도 춘천으로 지정되고 있다. 문제는 웅천의 위치이다. 웅천은 지금의 금강으로 판단되므로, 백제는 북계(北界)를 예성강으로, 남계(南界)를 금강으로 하는 영역을 확보한 것이 된다. 이러한 영역범위를 명시하고 있는 <삼국사기> '온조왕대' 기사는 후대 사실의 소급(遡及) 가상(架上)이다. 그러므로 그 시기는 재검토되어야 하며,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다음의 기사를 유의해 본다.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南蠻)의 침미다례( 彌多禮)를 도륙(屠戮)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肖古) 및 왕자 귀수(貴須)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 때, 비리(比利)·벽중·포미(布彌)·지반(支半)·고사(古四)와 같은 읍락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황전별(荒田別) 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함께 의류촌(意流村:지금의 주류수기(州流須祇)를 말한다)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禮)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이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 支山)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랐다.
위와 같은 백제의 마한경략 기사의 관련 지명에 대한 새로운 띄어 읽기가 시도되었다. 그에 따라, 신공기 49년 조에 보이는 백제의 마한경략 대상 지역은 대체로 금강 이남에서 노령산맥 이북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369년 '마한경략' 이전 백제의 남계(南界)는 금강이었다. 금강을 남계로 하는 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조'에서 웅천(금강)을 남계로 하는 영역 기사와 연결이 되고 있다. 369년 이전에 백제는 금강유역까지 영역을 확보했지만, 그 이남에 소재한 공주 세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369년에 단행된 근초고왕의 남정 결과 공주 지역은 백제의 영토로 편제되었다고 하겠다.
이 무렵, 백제가 공주 지역을 통치하게 된 형태는 알려진 바 없다. 백제는 금강 이북 지역을 5개의 구역으로 획정한 5부체제에 의한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금강이남 노령산맥 이북 지역은 거점 지배 형태인 담로를 통한 점(點)의 지배를 단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지역은 그 역사적 비중에 비추어 볼 때, 담로가 설치된 게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곳은 백제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어 통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2)웅진성으로의 천도 배경
백제 역사상 공주 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점하게 된 데는 그 왕도였기 때문이었다. 공주 지역이 백제의 왕도가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지역인 한성에 도읍하던 시기의 마지막 왕은 21대 개로왕이었다. 개로왕은 강력한 전제적인 권력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가장 커다란 저해 요인은 고구려의 남진 압박이었다. 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북위(北魏)와의 각별한 외교관계를 통해 후고(後顧)를 덜면서 적극적으로 남진을 추진하여 나갔다.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은 고구려를 괴롭히던 북연(北燕)이 멸망한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예성강과 개성 근방에서 30여 년을 끌었다. 고구려와의 부단한 국지전은 왕권 강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와 함께 백제 국력의 극심한 소모 현상을 초래하였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재물이 다하고 힘이 다하여 점차 저절로 쇠약하여졌다."라고 표현한 것이나, 한성함락 직전에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라고 한 개로왕의 체념적인 말투에서도 백제의 극심한 재정 궁핍 현상이 확인된다. 그럼에 따라, 백제 자체의 국력으로는 타개하기 힘든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 왕제인 곤지(昆支)를 왜에 파견하여 왜군의 동원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472년에는 과거에 교섭이 없던 북중국의 강자인 북위에까지 자신의 사위와 한인계(漢人系)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의 연안 지역과 일본열도에 구축된 상업무역 채널을 기반으로 한 이같은 백제의 전방위적 외교활동은 고구려와의 대결로 인해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외교활동은 고구려의 남진 압박을 타개하고 재정을 충원하는데 실효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고구려와의 국지전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궁핍을 보충하기 위한 백제 왕권의 노력은 주민에 대한 한층 가혹한 수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성 함락 당시, 개로왕의 "비록 위급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들여 싸우려 하겠는가·"라고 한 체념적인 말투에서 보듯이 민심이 왕권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정도로 주민에 대한 가혹한 수취가 자행되었다. 다시 말해, 전쟁과 역사(役事)에 소요되는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를 위해 개로왕은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지방 지배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내적인 왕권과 귀족권간의 분규를 해소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단행된 고구려 장수왕의 기습적인 한성 공략으로 인해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피살되고 말았다. 475년 초겨울 고구려 장수왕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 루트는 확인된 바 없지만 백제의 왕성인 북성과 남성 가운데 북성을 먼저 공격한 후 남성을 함락시켰다. 여기서, 북성은 풍납동토성, 그리고 남성은 몽촌토성으로 비정되는 만큼 고구려 군대는 한강을 건너 풍납동토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풍납동토성에 대한 공격은 수군에 의한 기습공격을 제외하고는, 한강 북안에 자리잡은 아차산성에 대한 점령없이는 어렵다. 그러므로 고구려 군대는 아차산의 동편인 지금의 구리시쪽에서 아차산성의 측면과 한강쪽에 면하여 성벽이 낮은 전면으로 우회하여 공격을 시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차산 북쪽 능선과 용마산 능선에는 보루가 있는데, 백제 군대가 주둔하는 상황이었다고 보이므로 공격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을 점령한 고구려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백제 군대는 한강변을 따라 길게 축조된 제방 위에 목책과 같은 방어시설을 세워놓고 저항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고구려 군대는 저지선을 뚫고 강변에 붙어 있는 풍납동토성을 에워쌌다. 포위한 지 이렛 만에 북성인 풍납동토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대는 여세를 몰아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옮겨서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대의 기세가 원체 강한 터라 몽촌토성 안의 백제 군대는 성문을 닫아 걸고 감히 나가 대적하지 못했다. 고구려 군대는 네 길로 나누어 양쪽으로 끼고 공격하면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성문이 활활 타기 시작하였다.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성안에서는 인심이 흉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형편이었다. 성을 나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개로왕은 형세가 곤란하여 수십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군대의 맹렬한 추격을 받았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등은 개로왕을 알아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 뱉었다. 이는 개로왕의 얼굴을 알아본 상황에서 표출된 분노의 표출이었다.
개로왕을 생포하였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은 본시 백제인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난 사람들이라고 하기 때문에, 개로왕과는 면식이 있었을 터였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재증걸루가 개로왕의 얼굴에 침을 세 번씩이나 뱉었고, 그의 죄를 따졌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개로왕에 대한 사감(私感)이 깊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들은 개로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에 어떠한 형태로든 연루되었던 인물들로서 고구려 군대의 향도(嚮導)가 되어 백제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개로왕은 아단성(서울시 광진구 아차산성) 밑으로 묶여서 압송된 후 죽었다. 개로왕의 피살은 모처럼 구축한 왕족 중심 지배체제의 전면적인 붕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성이 함락되면서 개로왕 뿐만 아니라, 대후, 왕자 등의 피살 외에 왕권의 친위 세력이었던 유력 근친 왕족인 우현왕 여기(餘紀)와 종로장군 여휘(餘彙)를 위시해서 여예(餘乂)·여작(餘爵)·여류(餘流)·여루(餘累) 등의 존재가 웅진 도읍기에 일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로 보아, 이들 역시 한성이 함락되면서 개로왕과 운명을 같이 했거나 고구려군의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같은 왕권의 친위 세력인 왕족 중심의 지배체제의 붕괴는 웅진 초기 백제 왕권의 급속한 약화를 초래한 주된 요인이 되었다. 지배구조 내에서의 갑작스런 힘의 공동(空洞)상태는 결과적으로 귀족의 발호에 따른 웅진 초기 정정의 거듭된 혼미상을 초래한 것이다. 여하간, 한성함락으로 인해, 백제는 한번 망했던 것이나 진배가 없다. <일본서기>는 "그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창하(倉下)에 모여 있었다. 군량은 이미 다하여 근심하며 울기를 많이 하였다"라고 참담하게 그리고 있다. |
1)정란(政亂)의 문주왕과 삼근왕 시대
475년 초겨울 고구려 군대의 강습으로, 백제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 소재한 수도 한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백제는 한번 망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공주땅인 웅진성(熊津城)에 새로운 국가의 터전을 급히 마련하였다.
지금의 공산성인 웅진성의 북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막혀 있고, 금강이 띠를 두르며 흘러가고 있다.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뻗어 있어 신라로부터 공주 일원을 방어해 주고 있다. 서쪽으로는 서해가 가로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곡창인 호남평야를 끼고 있다. 금강을 이용한 천연적인 방어선과 해운 교통은 피난 수도로서의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보겠다. 문주왕은 물론이고 훗날 이괄의 난 때, 한양을 잃고 내려온 조선 인조가 거처한 곳이 한결같이 공주였다는 것은 서울 지역을 상실한 상황에서 북쪽의 전황을 빨리 포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방비하기에 용이했기에 이곳으로 몽진해 왔던 것 같다.
개로왕의 아우인 문주왕은 신라에 파견되어 1만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이미 파국(破局)을 맞은 후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주왕은 즉위하였지만, 난세(亂世)의 군주로는 적합하지 않은 우유부단한 성품이었다. 물론, 문주왕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군주였지만, 비상시국을 냉혹한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임금은 되지 못하였다.
왕실의 권위는 실추될대로 실추된 상황이었다. 476년 봄, 문주왕은 남중국에 소재한 유송(劉宋)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유송 정권은 458년에 개로왕이 보낸 관작 요청 문서를 받고, 그것을 내려준 바 있다. 그 11명 가운데 보국장군(輔國將軍)을 제수받은 여도(餘都)라는 왕족이 기실 문주왕이었다. 문주왕은 유송에 그 존재가 알려졌던 바, 그러한 외교적 관계에 힘입어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안 항해를 하던 백제 선단은 고구려 수군이 항로를 차단함에 따라 되돌아 오고 말았다. 문주황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백제를 철저하게 파괴시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고 선전하고 다녔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는 그러한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할 수 있는 백제 사신의 그림자는 비칠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4월에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의 사신이 백제 조정에 도착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의 중심축이 지금의 서울 지역에서 공주 땅으로 남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탐라국 사신이 제대로 찾아 올 수 있었다. 이 사실은 양국간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탐라국은 백제 조정의 동정을 정확히 읽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주왕이 탐라국왕도 아닌 그 사신에게 3품의 은솔 관등을 내려주었다. 이는 백제가 처한 당시의 궁색한 처지에서 비롯된 파격적인 벼슬이었다.
그 해 8월 해구(解仇)는 병관좌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 문주왕은 궁실을 중수하여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했다. 아울러, 아우인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하여 왕권의 후원세력을 든든하게 포진시킨 것이다. 그런데, 백제 조정의 실세였던 곤지는 그 해 7월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기 2개월 전인 5월에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곤지의 사망 그것도 피살을 암시하는 문구로 해석된다. 병관좌평 해구는 문주왕을 살해하기에 앞서 실세인 곤지를 먼저 제거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곤지는 문주왕이 피살되기 불과 2개월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주왕은 그 4년 9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3월 9월이 맞다).
곤지가 죽은 후, 해구의 전횡은 더욱 심하였다.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오로지 하고 법을 문란시켜 임금을 없애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제어하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문주왕은 가을에 사냥하러 들판에 갔다가 궁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외부에서 묵었다. 해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적을 시켜 문주왕을 살해했던 것이다.
해구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서 백제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운 해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 가문의 기원은 부여에 두고 있었는데, 백제 국왕의 배우자인 왕비를 배출했던 왕비족이기도 하였다. 그는 병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실추된 부여씨 백제 왕실을 전복하고 국왕이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문주왕을 살해한 후 해구는 "군국정사(軍國政事) 일체가 모두 좌평 해구에게 맡겨졌다"라고 했을 정도로 백제 조정의 실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문주왕의 아들로서는 당시 13세 된 삼근(三斤)이 있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삼근이 즉위하였을지는 지극히 의문이 된다. 문주왕을 살해한 이듬해 봄, 해군는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가지고 대두성(大豆城;예산군 두촌:신양면)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백제 조정의 최강자였던 해구가 1개 성곽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정내의 세력 다툼에서 밀린 결과로 볼 수 밖에는 없다. 그러면 해구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세력은 누구였을까? 백제가 지금의 서울 지역에 도읍하고 있던 시절, 해씨 가문과 더불어 번갈아 왕비족이 되었던 진씨 가문이었다. 해구는 문주왕을 살해한 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왕이 없는 공위 기간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진씨 가문이 해구의 전횡을 용납하지 않고 제동을 걸었다. 진씨 세력은 문주왕의 어린 아들 삼근을 옹립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권위를 지닌 부여씨 백제 왕실의 복원을 원했다. 그 결과, 해구 세력과 진씨 세력간에는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해구에게는 연신과 같은 토착 기반을 가진 연씨 세력의 지원이 있었지만, 진씨 세력에게 밀려 대두성으로 쫓겨나고 만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구 세력은 강성하였다. 좌평 진남(眞男)은 군사 2천명을 이끌고 대두성을 공격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덕솔인 진로(眞老)가 정예 병력 5백 명을 이끌고 공격을 시도하여 해구를 잡아 죽였다. 연신은 대두성을 빠져나와 고구려로 달아났다. 연신의 처자들을 붙잡아 웅진의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모반자에 대한 응징에는 연좌제가 어김없이 집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곡절을 겪은 후에 삼근왕은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유약한 삼근왕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를 옹립해 주었고, 부여씨 백제 왕실을 지켜준 진남과 같은 진씨 귀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삼근왕이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왕을 살해한 해구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가,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삼근왕이 진남에게 명하여 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훗날 왕실의 입장에서 서술한 데 불과하다. 기실은 문주왕 사후 공위시대가 펼쳐졌고,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삼근왕을 옹립한 진씨 세력과 고구려에게 수도와 한강 유역을 빼앗겨 버린 무능한 부여씨 왕실을 대신하여 몸소 즉위하려는 해구 세력간에 펼쳐진 갈등관계 속에서 이해하는게 합리적이다. 이러한 이해강 없었기에 김부식은 다음과 같은 사론(史論)을 덧붙여 탄식하고 있다.
춘추의 논법에는 임금이 살해되었는데, 그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데 대하여 심각하게 책망하여 말하기를, "신하다운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하였는데 그 아들 삼근이 왕위에 올라 그를 죽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국정을 맡겼다가 1개 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연후에야 2차례나 대병을 출동시켜 이겼다. 이른바 첫 가을 서리를 단속하지 않았다가 굳은 얼음에 부닥치게 되었고, 반짝거리는 불똥을 을 끄지 않았다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격이니 그 유래하는 바는 적은데서부터 커지는 것이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살해되었을 때도 3대만에야 간신이 그 역적을 죽였거늘 하물며 바다 모퉁이에 있는 궁벽한 곳이며, 삼근과 같은 어린애에 대하여야 무슨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삼국사기> 권 26, 삼근왕(三斤王) 2년조).
2)동성왕(東城王) 시대
삼근왕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삼근왕의 사망 원인은 알려진 바 없지만, 연령상으로 볼 때 자연사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를 옹립해준 진씨 귀족들의 전횡 속에서 일종의 꼭두각시 역할만 하다가 사망하였음은 분명하다. 백제 조정에서는 후사(後嗣) 문제가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15세로 사망한 삼근왕에게는 자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아들이 있었다하더라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연령이 아닌 유아(幼兒)일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것이다.
결국, 삼근왕의 후손으로는 즉위가 어렵게 되었다. 삼근왕의 아우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서 사마(斯麻: 무령왕)와 모대(牟大: 동성왕)가 물망에 올랐다. 당시, 사마는 18세의 소년으로서 국내에 체류하고 있었다. 사마는 급박하게 돌아간 정변의 순간들을 한 발짝 뒤에서 체험하였기에 죄다 목도하고 있었다. 반면, 모대는 나이가 어렸고 왜에 장시간 체류했던 관계로 국내 정정에는 어두웠다.
실권을 쥐고 있던 좌평 진남과 같은 진씨 귀족들은 두 사람 가운데 모대를 택하기로 하였다. 모대는 사마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종하기에 용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 사정에도 어두운 편이었다. 진씨 귀족들은 모대에게 낙점을 주었기에 왜 조정으로 연락하여 그의 귀국이 준비되었다.
동성왕은 생전의 이름을 모대라고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그를 말다(末多)라고 하였다. 그는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이었다. 동성왕은 곤지가 왜에 건너가서 출생한 아들로 짐작되는데, 삼근왕이 사망한 후 즉위하게 된다. 삼근왕이 사망했을 때, 그는 일본열도에 체류하고 있었다. 동성왕이 체류하고 있던 곳은 그의 아버지인 곤지를 제사지내는 신사인 아스카베 신사가 있는 가와치 아스카 일대였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로 결정이 되어 백제로 떠나려고 할 때, 왜왕이 내전으로 불러 동성왕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 때 동성왕을 가리켜 "나이는 어리나 총명하다(幼年聰明)"는 칭찬이 붙었다. 당시, 그의 연령을 '유년(幼年)'이라고 하였다. 479년에 동성왕을 유년이라고 하였다면, 적어도 15세 이하의 소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에 체류하고 있던 소년의 왕위계승자가 백제로 건너오게 되었다. 이 왕족 소년이 즉위하게 된 배경은 복잡다기한 당시 백제 정정(政情)에 기인하였다. 모대 혹은 말다라는 이름의 동성왕은 지금의 북규슈 지역인 쓰쿠시의 병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다. 동성왕은 482년(동성왕 4)에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 공로를 세웠음이 분명한 진로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진로(眞老)는 수도와 지방의 병마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백제 조정내에서 실질적인 최고 강자였음을 뜻한다. 동성왕의 즉위 초반인 482년(동성왕 4) 이전의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482년에는 말갈로 표기된 동예 세력이 변경을 습격하여 300여 호를 잡아가지고 간다든지, 한 길이 넘게 큰 눈이 내리기도 하였다.
동성왕은 사냥을 좋아했다. 그는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을 뿐 아니라, 활을 잘 쏘아 백번 쏘면 백번 맞추는 신궁(神宮)이었다. 동성왕은 말갈이 습격한 적이 있는 한산성에 나가 사냥을 하면서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록(神鹿)을 잡기도 하였다. 동성왕은 사냥을 통하여 산림과 원야(原野)에 대한 지배권을 하나하나 장악하면서 왕정의 물적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왕이 사냥한 장소는 더 이상 지방 호족의 영유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동성왕의 사냥은 다른 왕들에 비해 빈번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숨을 거두게 된 원인이 사냥이었듯이 유별난 데가 있었다. 동성왕은 지금의 부여 지역인 사비 들판이나 우명곡(牛鳴谷) 또는 우두성(牛頭城)에서도 사냥을 하였다. 사비 들판에서 가장 많은 3차례의 사냥을 하였다. 그랬기에 혹자는 동성왕이 사비성 천도와 관련해서 사비 들판으로 자주 사냥한 것으로 추리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동성왕은 500년(동성왕 22)에는 우두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이곳은 486년(동성왕 8)에 성을 축조한 곳이었다. 만약, 동성왕이 우두성 일원에서 사냥을 한 후 성을 쌓았다면, 축성과 관련한 지세를 탐지할 목적의 사냥으로 해석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이는 동성왕의 사냥 목적이 국가에서 축조한 우두성을 중심한 그 일원에 대한 지배권의 확인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동성왕응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484년(동성왕 6) 2월에 남중국의 남제(南齊)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의 벼슬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질세라 동성왕도 5개월 후인 7월에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냈지만, 서해 상에서 고구려 선박을 만나 되돌아오고 말았다. 백제는 다시금 고구려 수군의 연안 항로 봉쇄에 따라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1년 8개월만인 486년 3월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 그에 앞서, 동성왕은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돈독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위상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남진에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동성왕은 493년(동성왕 15)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였다. 신라의 소지 마립간은 이에 응하였다. 왕족인 이찬 바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동성왕은 신라 왕실을 처가로 하는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대내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면, 동성왕은 무엇 때문에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게 된 것일까? 동성왕이 신라에 혼인을 요청한 시기는 재위 15년으로서, 20대 후반의 연령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령의 동성왕이 혼인하지 않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이 신라 왕녀와의 결혼을 시도한 데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였다.
전통적으로 백제 왕실의 처족인 왕비족은 해씨나 진씨였다. 동성왕이 즉위할 무렵에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진씨 귀족이었다. 그러므로 동성왕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삼았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이 청년기를 벗어날 무렵에 신라 왕녀를 배우자로 구하였음은, 진씨 세력의 수중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동성왕은 또 혼인을 통해 신라왕의 결속을 강화시켜 당면한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덜어진 국력을 기반으로 당면 과제인 왕권강화를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동성왕은 혼인동맹으로써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한층 효과적으로 막아 나갔다. 혼인동맹 이듬해인 494년(동성왕 16)에 고구려와 신라 군대가 살수(薩水: 괴산군 청천면 일대) 벌판에서 싸우다가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견훤산성)으로 퇴각하여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산라 군대가 들어 간 견아성은 금새 고구려 군대에 포위되었다. 백제 동부 전선에서의 전황을 들은 동성왕은 즉각 군대 3천 명을 출병시켰다. 백제 군대는 견아성을 포위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를 축출시켰던 것이다.
495년(동성왕 17)에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에서는 장군 덕지(德智)가 군대를 이끌고 지원해 오므로 고구려 군대가 물러갔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잘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에게는 용의주도한 일면이 엿보인다. 동성왕은 탄현(炭峴)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탄현은 대전시 동구와 옥천군 군서면에 소재한 식장산이라는 산에 소재한 고개로서 천험의 요충지였다. 요컨대, 동성왕은 국제관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던 군주로서, 권력의 속성에도 밝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동성왕대에는 다양한 귀족세력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있다. 진로(眞老:병관좌평), 사약사(沙若思:내법좌평), 백가(위사좌평) 및 연돌(燕突:병관좌평)과 같은 이들이 중앙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특정 귀족의 독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동성왕은 백제 왕실에 도전하였던 해씨 세력의 요직 진출을 철저하게 봉쇄하였을 분 아니라, 자신을 옹립하였던 진씨 귀족세력의 권력 독주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 지역에 도읍하고 있던 시기에는 왕실을 축으로 한 양대(兩大) 귀족 세력이었던 진씨와 해씨 외에는 요직에 기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성왕대에는 사씨를 비롯하여 백씨, 연씨 등 금강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지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성왕이 특정 귀족의 권력 독주를 막기 위해 여러 세력을 기용한 것으로서, 귀족들간의 상호 견제와 대립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한 조치였다.
동성왕은 486년(동성왕 8)에 이르러 국왕의 내적 권력을 공고하게 마련했다. 동성왕은 위사좌평에 백가를 임명하였다. 백가는 지금의 공주 지역의 토호(土豪)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을 백강이라 불렀는데, 그 백강의 '백'과 인연 깊은 씨성으로 추정되는 백씨였다. 동성왕은 공주 땅의 토호 세력을 측근 요직에 배치함으로써 든든한 황실의 배후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왕의 지위에 대한 국제적인 공인을 확보하는 동시에 궁실을 중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동성왕은 그 해 10월, 궁성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군 통수권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원정(遠征) 전야의 어떤 검열을 생각하게 한다.
이와 관련 있는 게 488년(동성왕 10)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위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어 와서 정벌하였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라는 기사가 되겠다. 이 기사는 <자치통감> '영명(永明) 6년조'의 "위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라는 구절을 옮겨 온 것이다. 북중국의 왕조인 북위에서 백제를 침공했으나, 패하였다는 내용이 되겠다. 고정 관념을 뛰어넘는 선뜻 믿기지 않는 기사이다. 유목민 출신인 선비족 계통의 북위가 과연 위험한 항해를 무릅쓰고 백제를 침공할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이래로 수긍하기 어렵다는 게 대세였다. 혹은, 백제의 요서진출과 관련하여 이 문구를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전쟁으로 보이는 기사가 <남제서(南齊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에 위나라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騎兵) 수 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경(地境)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오랑캐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건무(建武) 2년(495년:동성왕 17)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지난 경오년(庚午年:490년)에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왔습니다. 신(臣)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리한 기세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임시로 정로장군(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를 임시로 안국장군(安國將軍) 벽중왕(陽中王)으로, 해례곤을 임시로 무위장군(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로 삼고, 목***는 과거에 군공(軍功)이 있는 데다가 또 대(臺)와 큰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임시로 광위장군(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天恩)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남제서>권 58, '백제국조').
위의 전쟁 기사는 과거부터 논란이 많았다. 백제가 북위와 적대 관계인 남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작한 허구저인 전쟁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외교문서에 그것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전쟁을 꾸며 넣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이 전쟁은 사실로 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할 때, 490년에 백제 수군은 험윤 혹은 흉리로 표기된 북위의 선단을 크게 격파하였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 전쟁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비치치 않지만, 488년에 북위 군대를 격파한 기사가 보이므로, 양자는 동일한 전쟁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목***는 과거에 군공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군공 또한 북위와의 전쟁과 관련있음이 분명하므로 488년의 전쟁을 가리킨다고 보아 무방하다. 바로 건무 2년조 앞의 '이 해'로부터 시작되는 전쟁 기사가 488년의 전쟁을 뜻한다고 보겠다. 요컨대, 백제는 적어도 488년과 490년의 두 차례에 걸친 북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488년은 육상전을, 490년에는 해전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제 장군들이 남제로부터 받은 관작을 보자. 사법명부터 목***에 이르기까지 4명의 백제 장군들은 남제의 장군호를 제수 받게 된다. 이들은 장군호에 이어 어김없이 왕이나 후(侯)로 봉해지는데, 왕과 후 앞에는 지명을 관칭(冠稱)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지명은 중국 역대 지명 사전에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중국 대륙에서 그 위치를 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백제 영역 내에서 찾기 쉬운데, 지명을 관칭한 왕?후는 <남제서> '백제국조'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공(功)에 대하여 보답하고 부지런히 힘쓴 것을 위로하는 일은 실로 그 명성과 공업을 보존시키는 것입니다. 임시로 부여한 영삭장군 신(臣) 저근(姐瑾) 등 4인은 충성과 힘을 다하여 나라의 환란을 쓸어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名將)의 등급에 들만하며, 나라의 간성(干城)이요 사직의 튼튼한 울타리라 할 만 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하면, 환히 드러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외람되이 임시 관직을 주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십시오.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 또한 뛰어났으니, 이제 임시로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이라 하였고, 건위장군(建威將軍)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는 젊었을 때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진작 드러났으므로, 이제 임시로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이라 하였고, 건위장군 여력(餘歷)은 천성이 충성되고 정성스러워 문무가 함께 두드러졌으므로, 이제 임시로 용양장군 매로왕(邁盧王)이라 하였으며,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내고 드날렸으므로, 이제 임시로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라 하였습니다.(<남제서>권 58. 백제국조).
위의 기록들을 모두 놓고 볼 때, 왕과 후에 관칭된 면중·도한·팔중·아착·매로·불사·매라·벽중·불중 등이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명은 중국 지명이라기보다는 대부분 백제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가령, 면중은 전라남도 광주로, 도한은 전라남도 고흥이나 나주 지방으로, 팔중은 전라남도 나주 일원으로, 아착은 전라남도 여수로, 매로는 전라북도 옥구나 전라남도 보성 혹은 장흥 일원으로, 불사는 전라북도 전주로, 벽중은 전라북도 김제로 각각 비정되어진다. 이러한 비정이 정곡을 찔렀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단 중국 대륙에서는 찾기 힘든 지명일 뿐 아니라, 백제적인 색체가 강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일례로 아착왕의 '아착'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착현(阿錯懸)은 본래 원촌현(猿村懸)이다"고 하였는데, '원촌'은 지금의 여수 일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지명은 대략 전라북도 일부와 전라남도일원에 몰려 있다는 지명 분포의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지명을 관칭한 왕과 후들은 북위와의 전공이나 국왕을 잘 보좌한 공로로 중국의 장군호를 받는 동시에, 백제가 새로 개척한 영산강유역의 각 지역에 봉해지고 있다고 보겠다. 백제는 근초고왕대의 마한경략을 통해 지금의 노령산맥 이북선까지만 영역화하였다.
아울러, 이 기록을 통해서 저근은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여고는 팔중후에서 아착왕으로 전봉(轉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495년에는 목***가 면중후에 봉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성왕대의 귀족들은 전공 등에 따라 임지를 바꾸어 계속 이동하면서 지방을 통치했음을 알려준다. 이는 지방을 통치하는 주체가 토착 호족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귀족이었음과 더불어, 전봉은 이들의 토착화를 차단하기 위한 조처로 판단된다. 나아가, 동성왕 휘하에 왕과 후, 그리고 태수들이 포진하고 있었음은, 동성왕 또한 왕 중 왕인 대왕의 위치에 군림하였음을 뜻한다고 보겠다.
왕?후를 칭한 귀족들은 구체적으로 저근·여고·여력·여고·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가 되겠다. 이 중 북위와의 전쟁에서 군공을 세운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를 제외한 그 앞의 4명은 저근만 제외하고는 부여씨 왕족이다. 저근은 문주왕을 도와 목례만치와 함께 웅진청도에 공을 세운 조미걸취(祖彌桀取)의 조미씨와의 관련을 연상시킨다. 부여씨를 여씨로만 표기한 것처럼, 복성(複姓)인 조미씨를 단성(單性)인 저씨로만 표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조미씨를 유력 성씨인 진모씨(眞
답변참고 >> 공주시청 홈페이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