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심사평)문명의 피곤 어루만지는 힘 탁월
실체야 쉽게 달라지지 않겠으나, 시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기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다소간 달라지는 양상이다. 따라서 이번에 선자들이 주목한 점은 새로운 문제의식이었다.
당선작 ‘폐(廢)타이어’는 이러한 의식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다. 우리 현실의 핵심을 가로질러가는 속도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 서정의 회복을 꿈꾸는 시적 자아는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찰과 한편으로 그 피곤을 어루만지는 시의 힘, 그 부드러움을 탁월하게 대비시킨다.
시와의 더욱 치열한 싸움을 통해 새로운 세기의 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일에 앞장서 주기를 기대한다. ‘히말라야의 물고기’(김성신), ‘매직아이@’(민미숙) 등의 작품들도 당선을 겨룬 우수한 시들이었다.
시적 언어의 조탁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야만스러워져가는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새삼 이루어가려는 박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황동규·시인 / 김주연·문학평론가)
(당선소감)두려움 껴안고 시의 밭 뒹굴것
늘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의 “축하한다”는 짧은 말씀에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느낌이 있었다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평생 이런 느낌을 껴안고 시의 밭을 뒹굴고 싶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응시하게 하는 그 무엇인 시를 위해 “시는 눈물로 바위를 뚫는 작업이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제 생활의 척추로 삼고 있습니다. 저의 눈물로 불완전한 척추를 굳건히 세우기 위해 시작(詩作)에 오체투지하겠습니다.
영남대학교의 이기철 은사님, 삶의 길을 깨우쳐 주시는 ‘www.ssza.co.kr’의 채종한 선배님, 시의 싹을 틔워 주신 경주대 문예창작과정의 손진은 선생님, ‘포항문협’, ‘푸른시’ 가족과 미숙한 시를 예쁘게 보고 뽑아주신 조선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 포항 세화여고 3학년 6반의 고운 눈빛들, 그리고 밝고 맑은 이름과 마음을 지닌 분들과 함께 당선이라는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하고도 서늘한 새벽입니다.
■김종현
1967년 경북 청도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포항 세화여고 교사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작은손
문 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3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심사평)삶의 슬픔 담담히 묘사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 19인의 작품들 가운데서 5분의 1이 본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나머지 작품들에 견주어 비슷하기보다는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제 나름의 개성을 풍기는 것은 모든 예술작품의 첫 걸음이다. 예컨대, 모대가리금풍뎅이 한 쌍과 가시돌거미 새끼들의 삶과 죽음을 빌려서 ‘애벌레 같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린 어미’를 보여준 ‘잃어버린 길’(박여주), ‘탱탱한 가지 위에서/ 포슬포슬한 감자 위에서/ 아삭아삭한 오이 위에서/ 알싸한 쪽파 위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린 ‘세 시의 나비’(이승주), ‘열 아홉 평 진달래 아파트 가판대’에서 ‘오천원에 세 장’씩 싸구려로 팔리는 ‘30수 면사 런닝셔츠’ 같은 ‘이력서’, 서양문물이 세계화의 이름으로 동양을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아시아 갈대’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태평양을 건너가서 미국의 오대호 연안에 뿌리를 내렸다는 ‘여정기’(김미안) 등이 그러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편의 시,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평가되기에는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아쉬웠다. 부분을 다루는 이들의 솜씨가 전체를 마무리하는 기량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작은 손’(문신)은 오늘의 평범한 현실을 소재로 삼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과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을 오버랩시키면서, 죽은 친구의 영안실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쓸쓸함’, 조객들의 허황된 농담과 공허한 웃음, 피상적인 관습이 되어버린 조문과 속내에 감추어진 삶의 슬픔이 저녁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잔잔한 공감을 일으킨다. 아무런 내면적 교감도 없이 겉 모습만 스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숨겨진 우수를 평이한 일상어로 형상화했다. 억지로 만들어낸 은유적 표현이 적어서 친근하게 읽히고, 산문의 어조에 시적 정취를 담았다. 구체적 부분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함께 투고한 ‘숲으로 가는 곰 인형’에서도 이 작품과 대등한 수준의 저력이 드러난다.
새 시인의 등단을 축하하며, 계속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김광규 시인)
(당선소감)詩만이 내 존재 이유다
미련퉁이처럼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연애도 취직도 하지 않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만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시는 쓰지 못하고 어느 순간 나는 미련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진짜 미련퉁이가. 그 미련퉁이가 다시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연애도 해보고 취직도 해버린 미련퉁이가 염치없이 시를 쓰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시에 무슨 매력이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시를 읽었습니다. 때로는 행간에 발목이 빠져 마음이 시큰거리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시는 제 등을 토닥여주었습니다. ‘스스로 아파하지 마라. 너는 너 아닌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시는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미련퉁이는 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시가 뭔지를 보여주신 이 땅의 모든 시인들과 시집과 그리고 사람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기에 오늘 또 한 권의 시집을 샀습니다.
당선 소식에 가장 먼저 기뻐해 주신 이병천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련퉁이에게 시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늘 안타깝게 지켜봐주신 선생님의 젖은 눈빛이 문득 낮달처럼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눈빛이 언제 어디서라도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시를 처음으로 읽어주신 김승종 교수님, 시 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정도면 괜찮다고 다독여주신 이희중 교수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곁에서 저를 지켜봐준 부모님과 착한 이정민이 아니었으면 제가 시를 쓸 수나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마음사랑병원 가족들에게 이 기쁨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딱 3일만 기뻐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련퉁이는 또 시를 써야겠습니다. 두 분 심사위원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똑부러지는 시를 쓰겠습니다.
■문 신
1973년 전남 여수 출생
1999년 전주대 국문학과 졸업
전북 마음사랑병원 근무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토우
권혁제
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 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汽笛소리
누이의 嬌聲이 흘러 다니는 三 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 오는
갈 길 먼 꿈들은, 驛廣場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 시간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三 里에 내리는 비릿한 土雨
심사평
본심으로 넘겨진 20여 분의 응모작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개성이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다는 거였다. (하긴 그런 작품을 선자로서 만나는 것도 복이다.) 대신 오랜 연마기가 느껴지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은 꽤 있었다.
우리는 다섯분의 작품들을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박성희의 ‘유년의 계단’은 얼핏 담박하면서도 어릴 적 기억과 어른의 일상의 어울림이 만만찮게 복잡하지만 후속작은 추억과 일상으로의 2분법이다. 김경진의 ‘달팽이가 무섭다’는 자연과 자아의 관계가 절묘하지만 후속작에서는 무너진다. ‘전남성로원’을 쓴 김창헌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 가능성들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주인이 아니다.
천서봉의 ‘나무에게 묻다’는 자연과 일상과 종교적 신비의 구경이 산 속의 고요 속에 절묘하게 녹아 들어있으나 심상 사이 모호한 주름이 장식적이며 화려한 수사의 찌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끝내 지울 수 없다. 선자들로서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었음을 굳이 적어둔다.
‘토우’외 3편을 투고한 권혁제는 ‘토우’ 첫 2행의, 버려진 도시의 향토적이기까지 한 정서(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를 ‘누이의 嬌聲’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아픔으로 끌어올리는 광경이 흥건하고 또 흥건하다. 그리고, ‘토우=웃음=비명’의 등식이 만만찮은 복잡성을 시의 육체에 부여한다. ‘밀물’과 ‘우기’에서도 ‘흥건=복잡’은 적당하다. 우리는 이 광경을 뽑아 선에 들지 못한 사람을 적셔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
(김명인, 김정환)
당선소감
서해대교에 걸린 노을을 따라 서해로 잠입해 가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을빛이 흔들리면서 트로이의 목마처럼 버티고 서 있는 교각에 부딪쳐 갈기갈기 찢기어 나갔다.
한 순간 열기가 오른 얼굴에 숱한 詩語들이 뒤섞여 피어났다.내가 진실로 수용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아직도 끝이 없는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심정이다.빛에 적응이 되는 거리에 다다르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동안 통과제의 때문에 가졌던 중압감을 서해로 떨어지는 노을과 바꾸고 싶다.
어려운 시기에 답답한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본모습을 쉽게 열어 볼 수 있도록 열쇠 하나를 쥐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온화한 미소로 이끌어 주신 김수복 선생님, 시창작 실기와 이론을 지도해 주신 박이도 선생님, 이남호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글쓰는 것에서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이제는 정말 글쓰는 것에서 다시 굴레를 뒤집어 쓰는 진짜 시인이 되고 싶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도 한번 더 귀기울여 들으면서….
■권혁제
1965년 경기 평택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심사평)절제된 수사, 상상력 빛 더해
당선작을 골라내지 못했던 지난해의 부담 탓일까? 예심을 거친 스무 명의 작품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선자(選者)들은 공연히 긴장되고 조바심이 났다. 작년에 비추어 올해의 응모 시편은 시적 진지함이나 다양성에서는 확연히 향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 탓인지, 작품의 개성이나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서는 별다른 진전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문 투의 엇비슷한 넋두리도 여전하였으며, 한두 편 돋보이는 응모 시만으로는 그 가능성 또한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이 주목한 시편은 최동일, 이상훈, 주예림, 정구영, 문신, 김성규 제씨의 작품들이었다.
최동일의 시에서는 삶의 풍경과 굴곡을 읽어내려는 투명한 시선이 살펴졌다. 그러나 ‘할머니를 바라보다’ 외에는 시야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훈과 주예림의 경우는 소외된 삶의 애환을 능숙한 솜씨로 공들여 시화했다는 점에서 장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어딘지 모르게 낡았다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정구영의 응모 시들은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시어의 선택도 비교적 선이 굵고 선명하다. 그럼에도 직조된 시상이 다소 작위적이어서 시의 깊이나 높이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똑같은 지적은 문신의 응모 시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응모자는 ‘우리들의 생활’과 같이 범상한 일상성을 따뜻하게 갈무리하는 작품도 함께 묶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결국 신춘의 지면을 장식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김성규의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지적된 단점들이 비교적 적게 살펴졌던 까닭이다. 암울한 세태를 바라보는 시선의 무거움을 수사적 절제로 감당해내려 한 그의 태도도 시적 상상력을 한결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들 간의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아울러 지적해 두어야겠다. 축하와 함께 분발을 당부한다.
(유종호, 김명인)
■당선소감
한 소년이 검은 배를 띄운다. 눈을 감고 바다의 폭을 가늠해 본다. 노을이 지자 닻을 올린다. 며칠 동안 노를 저어가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닻을 올렸을 때와는 바다의 깊이와 폭이 다르다.
여러 번 낙선을 하고 당선통지를 받았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바라본다. 시를 쓴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이중성을 파헤치는 것, 인간의 아름다움과 비참함을 노래하는 것,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의 초라함을 불평하는 것,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려다 실패하는 것.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나를 빼면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밀어온 것 같다. 처음 출발했을 때 바다의 저편이라 믿어온 양쪽 해안이 두 개의 모래언덕에 지나지 않았을까. 모래에 떠밀려 천천히 이동하는 모래산처럼 세상을 조용히, 차분하게 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잠깐 샛별이 뜨고, 별의 싹이 트고, 별의 잎이 피리라.
어두워지는 물결을 떠다니며 소년은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야 될까. 얼마나 왔으며 또 얼마를 더 가야하는가. 처음 출발할 때의 소년은 이미 청년이 되었고 소년이 닻을 올렸던 해안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아름답고 비정한 세계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기 위해 닻을 올린다.
자식을 구원하려다 이제는 반백이 되어버린 부모님께 밥 한 끼라도 차려드려야겠다. 같이 표류하고 있는 문학회 친구들, 부족한 제자를 다독여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 시(詩)가 부족함에도 돛을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함부로 닻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김성규
1977년 충북 옥천 출생
2003년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월의 잠수함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심사평)역동적 시어들 호방한 기운 넘쳐
지난 해와 비교해 볼 때 전체적인 응모작의 수준은 높은 것이 아니었다. 눈을 끄는 빼어난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아쉬운 일이다. 물론 새로운 신인의 등장이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심사를 할 때는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용문을 오를 때에는 벼락이 치고 꼬리 그을린 큰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걸출한 신인의 출현을 보고 싶다.
본심으로 넘어온 15명의 응모작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중에서 한 응모자의 작품이 중복 투고로 인해 결선에서 탈락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앞으로도 응모의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질 것이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은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구름이 입술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호방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 남다른 정진으로 꾸준한 향상의 길을 가기를 바라면서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시인 황동규·최승호)
(당선소감)가슴의 불로 삶의 날것 익혀갈것”
전날 밤 길어진 머리를 파마했다. 머리카락은 하늘이 물려준 세계의 지붕이자 벗을 수 없는 외투다. 내 천장을 다르게 꾸미고 새 옷처럼 신선해진 오르막을 걸어오며, 나를 들여보내는 바람의 아귀가 전과 다른 것을 알았다. 작은 변화에도 지구는 모든 힘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자연이다. 꼿꼿한 겨울이 동그랗게 손 모으고 머리 위에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침 전화를 받았다. 한 목소리가 미간을 통과했다. 온 겨울이 몸에 들어와 휘몰아쳤다. 내 발은 어디로 달아나고 없었다. 그 순간의 숨 한 모금을 나는 다시 마실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흙을 먹어봐야 사는 맛을 안다지만 나는 흙을 먹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짧은 불로 밥을 지을 수는 없다. 은근하고 느긋한 불을 가두고 살 것이다. 불을 통해 날 것을 가두는 일이 시가 아닐까. 사람은 더 큰 집과 더 큰 차를 위해 살아가선 안 된다
나의 어머니 우리 가족! 오래 연락 못한 동지들, 병일! 은영! 딱 한 번 칭찬해주신, 오 캡틴 마이 캡틴 이경교 교수님! 1반 식구들! 늘 열정적인 신달자 교수님. 명지전문 캠퍼스! 무한한 눈길로 만나고 싶은 은정! 나의 메모! 내 문학의 역사이신 심사위원님들! 돌을 씹듯 감사하다.
■김지훈
1978년 울산 출생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유적
예현연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심사평)시적묘사의 묘미 체득한 작품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유난히도 가족의 집단 자살이나 살해, 사체 유기 같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여서 왜 굳이 시란 장르를 택해서 그런 소재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20여 명의 작품을 선택한 다음, 다시 4명으로 좁혀 논의했다. 먼저 김륭의 ‘라면은 나쁘다’ 등 5편은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진행해 나가지만, 그 상황을 시적으로 변모시키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였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나서서 설명하는 부분이나 과장하는 부분이 걸렸다.
백윤경의 ‘멜론은 그물을 치고’ 등 3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대상, 혹은 하나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비의를 천착했다. 시들을 읽고 나면 하나의 멜론이 무덤으로 확장되고, 아스팔트에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의 형상이 시지프스처럼 일어서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이미지의 진행을 따라가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간혹 눈에 띄는 상투적 표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기섭의 ‘가족사진’ 등 6편의 시 세계는 모두 달랐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정황을 묘사함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우리 삶의 진한 슬픔을 시 쓴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 한 편, 한 편을 구축하는 솜씨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편의 밀도 있는 완성작을 선택하기에는 미흡했다.
예현연의 ‘유적’ 등 7편은 시 쓴 사람 자신의 작은 경험 하나로부터 시작된 묘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묘사를 통해 일상의 경험에서 채집된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시적 묘사의 묘미를 체득한 사람의 시였다.
같이 응모된 ‘내 창 밖, 고양이’도 재미있고 신선한 작품으로 논의됐다. 심사위원들은 응모된 7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예현연의 작품을, 그 가운데서 시간의 겹침을 무리 없이 소화한 ‘유적’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했다.
(신경림, 정호승, 김혜순)
(당선소감)드러냄과 숨김의 숨바꼭질
아카시 나무로 둘러싸인 기숙사에 산 적이 있다. 나무 그늘 때문에 볕이 잘 들지 않는 3층 끝 방에 웅크리고 있으면 낮에도 밤 같고 밤에도 밤 같았다. 혼몽한 시간들 속에서 가끔 눈뜨면 나뭇가지들이 바람불 때마다 창을 끽끽 긁으며 불 꺼진 방을 들여다보았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창을 열자 노랗게 물든 잎들이 수천 수만 마리 나비떼처럼 한밤중을 배경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한 순간이 나머지 생을 지탱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그 기억을 떠올려 보는데, 그 때 내가 본 것은 꿈이 아니었을까? 점점 확신이 없어진다. 내가 실제로 본 것과 보았다고 믿는 것 사이의 거리감. 꿈과 기억이 뒤섞이고 꿈과 현실이 뒤섞인다.
세상 속에서 나는 늘 낯설고 오래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미성숙한 내가 어른의 하이힐을 신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낯설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쓰는 동안 계속, 나를 드러내고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과 무수한 글자 속에 나를 감추고 싶다는 욕망 사이를 오갔다. 두 가지 욕망의 줄다리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립고 고마운 가족들,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건너온 문학반 사람들, 따뜻하고도 엄격하신 수요팀의 모든 분들, 시와 삶이 일치해야 됨을 가르쳐주신 만호형, 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손잡아준 국화와 단혜, 재미있고 훌륭한 친구 정미, 햇빛 잔잔한 물결 같은 규윤 형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서툰 글쓰기를 되돌아 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늘 새로움을 일깨워 주시는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예현연
1978년 경남 진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재학중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스통이 사는 동네
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심사평)자신의 목소리 있는 작품 기대
본심에서 당선 가능한 작품으로 세 편의 시를 골라 놓고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두 심사자가 내민 작품들이 뜻밖에 서로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 작품 가운데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선뜻 내놓기에는 뭔가 머뭇거려지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민씨의 ‘생수를 사다’라는 시는 모든 응모자에게 공통된 현상으로 지적될 수 있을텐데 이미지의 과잉이나 어휘의 낭비로 인해 시가 딱 시로서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고 여겨졌다. 이를테면 “어제 먹은 파리 바게트에 들어 있는 이스트가 주는 이분의 일 박자 부푼 템포가 레코드점의 철 지난 마돈나와 맞물리면서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구절처럼 내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들의 자의적인 융합은 한낱 혼돈일 뿐이다. 요즘 시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경향―쓸데없는 말들의 누적,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클리셰, 이어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집적―을 보면서 우리는, 모든 상상력에 작동하는 유질동상(類質同像)은 본디 ‘혼돈된 것’이지만 동시에 매우 ‘명석한 것’이라는 시의 초기 조건을 새삼 강조하고 싶어졌다.
신미나씨의 ‘호출’도 어느 정도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너무 많이 동원된 은유나 생경한 환유가 시적 소통의 회로를 막아버린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이 모든 게 기실은 할말도 딱히 없는데 억지로 시를 쓰고자 하는, 혹은 시 쓴다는 착각을 즐기고 있는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곧 향후 한국시의 불길한 경고음으로 들려왔다.
안성호씨의 ‘가스통이 사는 동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가 동의한 것은 이 작품이 앞서 말한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비교의 차원에서 안성호씨는 시를 형성할 줄 아는 능력과 선명한 환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시가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안성호씨가 자신의 목소리가 있는 시, 그래서 그것을 들으면 아, 안성호구나 금방 알 수 있는 그런 시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동맥경화에 걸린 한국시를 벌떡 일어서게 할, 젊은 시의 쌩쌩한 육성을 듣고 싶다.
(김승희·황지우)
(당선소감)꿈속에서 본 사과나무의 행운
내가 태어난 곳은 아라가야의 옛 도시 경남 함안이다. 이곳은 눈이 가는 곳마다 무덤인, 무덤의 도시이다.
어릴 적 나는 무덤 위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한번 빠져들면 쉬이 깨어날 수 없는 무덤가에서의 잠. 장성하여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그것도 비 오던 날, 어머님이 그 무덤 사이에 무덤 하나를 들고 들어 가셨다. 그 도시의 풍경으로 치장된 것이었다. 거대한 무덤의 도시에 새 어머님과 살고 계신 아버님에게 늦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시를 쓰면서 꿈속에서 좋은 시를 본적이 있다. 어느 누구의 시와도 다른, 좋은 시라는 것을 단박에 알고 부지런히 외웠다. 그러나 꿈속의 시를 기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있다면 꿈을 포장하고 있는 이 무덤과도 같은 잠의 무게를 벗어 던져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맡에 노트를 놓고 펜을 손에 쥐고 잠을 잤다. 그리고 시를 봤을 때, 마치 캄캄한 무덤에 갇혀있다가 사력을 다해 봉분을 뚫고 밖으로 걸어나오듯 침대에 앉아 노트 한 귀퉁이에 옮겨 썼다. 그런데, 호흡기 질환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놓지 않으시던 오규원 선생님이 그 시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시였다면 다시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오규원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투고를 하기 전에 꿈을 꿨다. 오규원 선생님과 황지우 선생님이 길을 가면서 길가에 심겨진 나무에서 사과를 따서 나에게 줬다. 그 사과를 받고 보니 사과가 아니라 속이 뻥 뚫린 등이었다. 붉은 빛이 찬연하게 흘러나오는 등을 두 선생님이 따주시면서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당선 통보를 받고 심사하신 분 중에 황지우 선생님이 계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에 본 사과나무에 아주 오랫동안 거름을 주었던 김혜순 선생님과 이광호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을 꾸도록 힘을 보태주신 교수님, 선배, 후배, 여러분들에게 더없이 고마움을 표합니다. 마지막으로 미흡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안성호
1968년 경남 함안 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세손교육 근무
계간 ‘실천문학’ 2002년 가을호에 단편소설 ‘저 하늘에 떠있는 사내를 보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