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칼라 수녀님을 찾아 뵙고>/구연식
동서고금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인간들의 삶인 희로애락을 좌우했던 것은 신(神)의 섭리가 빚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릇된 인간 통치자의 허황한 욕망의 탑을 쌓기 위해 덫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렸던 결과라고 본다. 그 통치행위가 빚어낸 각종 오염물을 수거하고 정화해주는 것은 종교라고 공감한다. 통치자의 잘못으로 생겨난 상처와 병든 인간군(人間群)을 치료하고 재활 시켜 본래 삶으로 인도하시는 성직자들의 보살핌을 볼 때, 못된 통치가와 고마운 성직자들을 대조하면서 다시 한 번 성직자들의 헌신과 희생이야말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임을 되새기게 한다.
201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늘에서는 무슨 메시지를 제시하는 양 하얀 솜털로 대지를 덮어주시고 심판하시는데, 어느 방송 채널에서는 통치자의 잘못을 규탄하는 국민들의 함성이, 또 다른 채널 KBS에서는 다큐멘터리 공감(共感) 『사랑해요, 존경해요 강 칼라 수녀』 편이 방송되고 있어 나는 아이로니컬한 상반된 감정에 사로잡혀 메모를 시작했다. 그리고 강 칼라 수녀님을 찾아뵈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암 마을에는 1952년 설립돼 한센인 신자 40여 명이 신앙생활을 하는 전주교구 동혜원 공소(公所-규모가 아주 작은 성당)가 있다. 6ㆍ25전쟁 당시 한센인 마을로 조성되면서 사회와 격리됐지만, 이들의 신앙 열정은 반세기가 넘도록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동혜원 공소가 있는 마을은 '마을 자체가 교회이며, 교회가 곧 마을'이라고 불리는 교우촌(交友村)이다.
그녀가 호암 마을에 오게 된 것은 이탈리아에서 19살에 수녀를 택한 뒤 『작은 자매 관상 선교회』(한국 진출 외국 여자수도회)를 통해서 6ㆍ25전쟁 후 한국에도 전쟁고아와 한센인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막연히 한국행을 결심하셨다. 그러다 1968년. 25살, 꽃 같은 나이에 지구 반대편 먼 이탈리아에서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을 찾아온 푸른 눈의 아름다운 여인, 언제나 밝은 미소로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 그리고 붙임성 많고 바지런한 행동은 여자 이름으로 모든 역할을 소화해내는 선교사. 그는 호암 마을에서 한센인 치료는 물론, 마을 노인들을 위해 봉사를 펼쳐오고 계신다.
그 당시는 한센병 치료약이 없어 독일 구호단체 등에서 받은 소량의 약으로 겨우 한센인들을 치료할 수 있었으며,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약의 부족보다는 한센인과 닿기만 해도 전염되는 줄 아는 사람들의 편견과 그로 인해 일반 학교에서도 외면당하는 한센인 자녀들을 봤을 때라고 하신다. 한 때는 한센병 치료를 위해 스페인의 폰틸레스(Fontilles) 병원에서 세 달간 공부하시고 오셨다. 한센인에 대한 사랑은 한국 이름 ‘강 칼라’에서도 잘 묻어난다. 처음 호암마을에서 만난 강씨 성을 가진 한센인은 “제 성을 꼭 수녀님이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성은 ‘강’으로, 이름 ‘칼라’는 수녀를 뜻하는 라틴어를 붙여 지금의 한국 이름 ‘강 칼라’를 사용하고 계신다.
수녀님의 젊었을 때 사진은 서구적인 체구에 반듯한 외모를 가지셨다. 6.25 전쟁 후 산촌 그것도 한센마을이었으니 지금 짐작하건대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짐승들의 움막 정도의 낮고 비좁은 허름한 거처로 짐작이 된다. 그렇게 좁고 낮은 한세인 가정을 일일이 고개를 숙이시고 기어서 들어가고 기어 나와서인지 수녀님의 목은 조 이삭처럼 굽어져 계셨고, 그 와중에도 움막촌 결손가정 아이들 80명을 위해 높은 오르막길을 매일 수 없이 왕복하시면서 봉사하셨기에 발은 부르트고 뒤틀려 발가락은 변형되어 큰 체구를 견디지 못하신다. 무릎 관절 또한 성치 못하셔 이제는 인공 관절로 겨우 절룩 걸음을 걸으시고 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는 말처럼 수녀님한테는 기어 다닐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심부름을 하시겠다는 신념으로 불편한 발가락, 삐걱대는 인공무릎, ㄱ자로 굽으신 목을 부추기시면서 공소의 미사에서부터 마을은 고창 읍내와 많이 떨어져서 각종 생활용품 구입과 공과금 납부, 보건소에 신청한 구급약 수령과 해당 환자 집에 방문하여 구급약 배달과 복용방법 알려주기 등 하루해가 언제나 빠듯하시다.
그 당시는 마을 환경이 개선되지 않아 좁은 골목에 위치한 수녀원은 겨울이면 큰길에서부터 연탄을 옮겨야 했던 격세지감도 토로하신다. 흔한 세탁기 하나 없이 손빨래를 이 겨울에도 하시며, 손가락으로 잡기조차 힘든 몽당연필을 지금도 쓰고 계신다. 사랑과 나눔에는 아낌이 없다지만 정작 스스로에겐 극한의 절제를 실천하며 살아가시는 강 칼라 수녀님! 평생을 걸친 희생의 길을 걸어도 더 사랑해드리지 못함을 반성하며 살아있는 노(老) 수녀, 강 칼라. 성자(聖者)의 모습은 옛 신화의 전유물이 아닌 것 같다. 꿀벌은 너무 일에 파묻혀 슬픔을 모르고 개미는 언제나 부지런히 일만 하여 허리가 휘도록 아파도 통증을 모른다더니, 강 칼라 수녀님에게 주님이 너무 혹사 시키시는지 시험하시는지 가슴이 아프다.
아직도 고창 호암마을에서 한센인 10여 명을 돌보고 있는 강 칼라 수녀님은 한센인들이 호전돼 떠날 수 있게 돼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하시며, 한센인 치료뿐 아니라 선교사 역할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강 칼라 수녀님 어쩌면 우리가 찾는 살아있는 성자(聖者)의 얼굴 아닐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 신의 섬김은 거짓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 주위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모르고 헛치레 삶을 살았는가? 학림(學林)은 반성해 본다. (2021.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