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북성조(禾北城操)
1702년(숙종 28) 10월 29일, 화북진에 소속된 성정군의 군사훈련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단의 기록은 당시 화북진의 조방장은 이희지이며 성정군의 규모는 172명, 군대의 점검과 아울러 군기의 수효도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성의 좌측에는 화북진에 소속된 별도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화북진의 자세한 지형과 화북성의 위치, 성 내의 건물배치 뿐만 아니라, 민가의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화북진은 타원형의 성으로 동·서로 문이 있다. 성문은 1간의 루가 있는 우진각 초가다. 성문에는 옹성이 있고, 성벽 위에 여장이 축조돼 있다. 성 안의 동문과 서문 사이 중앙에는 남쪽에 큰 마당을 두고 객사가 있다. 객사의 좌우에는 군기고로 보이는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들은 따로 쌓은 담장 속에 있으며 객사 쪽으로 출입구를 두었다.
화북진성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화북마을 모습이 상세하다. 화북진성 바로 남쪽에 ‘별도포리(別刀浦里)’라는 마을 이름이 선명하다. 민가의 분포는 동쪽의 별도연대와 서쪽의 별도포구가 끝나는 지점까지 비교적 골고루 퍼져있지만, 연대 서쪽과 화북진성의 동문 지점 그리고 별도포의 안쪽 가장자리를 에워싸는 부근에 특히 많이 나타나 있다.
별도포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제주도의 관문적 성격을 띠는 포구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시대적으로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별도포(別刀浦)는 ‘벨돗개’의 한자 차용 표기로, 지금의 화북1동 포구를 이른다.
조선시대의 지도는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에서 제작된 경우가 많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재지도와는 달리 남과 북의 방향이 거꾸로 제작되어 있다
화북포구와 해신사
제주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해신사는 바다의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마을의 해신당인 동시에 정월에는 해상교통의 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드리는 곳이다.
해신사가 있는 화북포구는 조선시대 제주 제1의 관문이었다. 더불어 지방관과 유배인들이 빈번히 드나들었고, 그럴 때마다 해신사에 들러 용왕신에게 제를 지냈다. 추사 김정희도 이곳에서 두 번이나 용왕신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 후 1841년(헌종 7)에 이원조 목사가 낡아진 건물을 고쳤고, 1849년 장인식 목사가 돌에 ‘해신지위(海神之位)’라는 신위(神位)를 새겨 보존토록 했다. 이 해신사에 얽힌 전설이 <탐라실기>에 기록돼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별도포인 금둔지는 들어오는 항로에 수심이 얕고 모래가 많아 선박의 출입이 불편했다. 어느 날 목사가 탄 배가 제주를 향해 오던 중 풍랑을 만났는데 배에 큰 구멍이 뚫려 선원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바다 속에서 큰 뱀이 나와 터진 구멍을 막아주어 배는 간신히 별도포에 닿았다. 그 뱀을 따라가 보니 고으니모루 서쪽 석간굴로 들어갔다. 신기하게 여긴 목사가 즉시 사당을 만들고 매년 정월 6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로부터 제주목사가 도임해 들어올 때는 별도금둔지로 들어와 배를 대고 해신당에서 해신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항해했음을 고해 바쳤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도 그렇지만 ‘탐라지’에 의하면 해신사는 원래 화북진서(禾北鎭西)라 해서 서마을 큰짓물 서남동산에 있었다고 한다.
1702년에 그려진 화북성조도(禾北城操圖)에는 해신사가 있었다는 동산 위에 집이 그려져 있는데, 그 집을 철거하고 해신사를 지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신사가 그 자리에서 언제 무슨 이유로 돈지성창으로 옮겨졌는지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현재의 사당은 부지가 좁고 건물이 낡아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지은 것이다.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이면 해신제를 지내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한다.
별도연대(煙臺)
연대(煙臺)는 통신시설이 발달하기 전, 적의 침입 등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도내 각처에 빠르게 연락했던 통신망의 하나다.
해변 가까운 높은 지대에 설치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적의 침입과 위급함을 알렸는데, 평상시는 1개, 이양선이 나타나면 2개, 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침범하면 4개, 접전하게 되면 5개로 통신했다.
그리고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연대를 지키던 사람이 직접 달려가 상황을 전했다. 연대 주변 100보 내에서는 봉수로 오인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
별장(別將)과 연군(煙軍)이 조를 편성해 3교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대를 지켰는데, 근무를 소홀히 한 경우는 중벌로 다스렸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모두 38개소의 연대가 있는데, 제주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삼사석(三射石)
삼성혈에서 솟아난 고, 양, 부 3신인이 벽랑국의 세 공주를 배필로 맞아 나이 차례로 혼인하고 차례로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마련했다는 게 탐라 개국신화의 큰 줄거리다. 삼사석(三射石)은 바로 세 신인의 화살이 꽂혔던 세 개의 돌멩이라고 전해진다.
삼사석이 놓인 자리 주위의 옛 지명이 ‘활쏜디왓’인 걸 보면 신화 속의 이야기인 것만은 아닌 듯싶다.
1735년(영조 8) 김정 목사가 ‘모흥혈고 시사석류 신인이적 교영천추(毛興穴古 矢射石留 神人異蹟 交映千秋 : 옛날 모흥혈에서 활을 쏘아 맞은 돌이 남아 있으니 세 신인들의 기이한 자취는 천추에 빛날 것이다)’라 새긴 삼사석비를 세웠다.
지금 세워진 비는 1930년에 김정목사의 글귀를 그대로 새겨 새로 세운 것이다. 김정목사가 세운 비는 마모가 심해 새로 세운 비 앞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1813년(순조 13)에 제주사람 양종창이 화살 맞은 돌을 수습해 석실을 만들어 보관했다. 석실 좌우 기둥 판석에 “삼신 유적이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남은 것을 거두어 이제 수집하여 석실에 합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삼사석은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4호로 지정됐다.
삼사석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은 화북이고 동쪽은 삼양이다. 삼양동은 서쪽으로는 화북동, 동쪽으로는 조천읍과 경계를 마주 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