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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1장을 중심으로
(글쓴이 : 안티오크 박만수)
성경에서 규례(ordinances)란 “정해진 규칙이나 법”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국가의 공권력이나 법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롬 13:2; 벧전 2:13), 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종교적 의식이란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유월절 규례와(출 12:43; 민 9:14), 신약 교회에게 주어진 밥티스마와 주님의 만찬의 규례를 들 수 있습니다(마 28:19; 고전 11:23-29).
챨스 라이리(Charles Ryrie)는 교회의 규례(Church ordinances)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에게 지키도록 명하신 외적 의식”(outward rites prescribed by Christ to be performed by His church)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공통적인 교회 의식으로서 밥티스마(침례, Baptism)와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의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 두 가지 교회 의식 외에도 세족식(요 13:1-14), 애찬(고전 11:17-22), 안수(행 8:15-18), 거룩한 키스(살전 5:26), 병자에게 기름 바르는 의식(약 5:14-15), 그리고 교회 안에서 여자가 너울 쓰는 것(고전 11:3-16) 등을 교회 의식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로마 카톨릭의 경우는 일곱 가지 성사(seven sacraments)를 교회 규례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서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로마 카톨릭을 위시하여 동방정교, 성공회, 다아비의 형제교회와 메노나이트 등 몇몇 기독교 그룹에서 교회의 규례로서 존중하여 실행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것이 과연 성경이 의미하는 교회의 규례(church ordinance)인지를, 그 근거로 제시되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문제의 제기
우리는 먼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실제적이고 진지한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접근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veil)을 써야 한다는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명령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여자가 “너울 쓰는” 것이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교회 규례(church ordinances)라면, 왜 성경 전체에서 유독 고린도전서 11장 3-16절에서만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도 직접적으로 “너울(veil)을 쓰라”고 명하지 않고 여자의 머리가 덮여져야(covered) 한다는 간접적인 언급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참고로 교회의 규례로 잘 알려져 있는 밥티스마(침례)와 주님의 만찬은 사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여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명령하며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마 26:26-28; 28:19; 막 14:22-25; 눅 22:15-20; 롬 6:4; 고전 11:23-26; 히 6:2; 벧전 3:21).
만일 여자가 너울 쓰는 것이 교회의 규례라면, 이 규례를 실행치 않고 있는 모든 교회들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며, 이것이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인정받는 데 중대한 결격사유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이것이 교회의 규례가 아니었다면, 너울 쓰는 것을 교회의 규례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실행치 않는 모임들을 정죄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실수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분열시킨 중대한 죄를 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반드시 성경에서 정확히 확인하여 규명해야 할 것이며,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순종하는 일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규례인가 아니면 풍습인가(ordinance or custom?)
고린도전서 11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사도로부터 전달받은 규례들(ordinances, 복수)을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3절). 그러므로 여자의 머리는 긴 머리로 덮여져야 하고, 여자가 머리가 덮이지 않은 채로 기도나 대언을 하는 풍습은 하나님의 교회에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못박아 말하였습니다(4-16절). 그리고 나서 주님의 만찬 실행에 있어서 합당치 못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가르쳤습니다(17-34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칭찬한 바 고린도교회가 지키고 있었던 규례들(복수)이 주님의 만찬과 함께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을 쓰는 것도 포함되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정적 단서가 16절인데, 왜냐하면 16절이 여자가 너울 쓰는(혹은 머리를 덮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너울 쓰는 것이 2절에서 말한 규례 중의 하나였다면, 사도 바울은 16절에서도 분명히 ‘규례’(ordinance, 단수)란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즉, “논쟁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이러한(혹은 그러한) ‘규례’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문제는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여타의 현대 역본들이, 2절의 규례(ordinances)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대부분 전통(traditions)으로 잘못 번역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대 역본을 읽는 독자들은 16절의 풍습이 2절의 전통의 일부라고 오해하기 십상이었고, 특히 한글 개역성경은 아예 16절의 풍습(custom)을 ‘규례’(ordinance)라고 번역함으로써, 너울 쓰는 것을 교회의 규례로 오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전 11장 2절과 16절의 단어 비교:
권위역: 2절-규례들(ordinances)/ 16절-풍습(custom)
한글개역: 2절-유전/ 16절-규례
표준새번역: 2절-전통/ 16절-풍습
공동번역: 2절-전통/ 16절-풍습
NASV: traditions/ practice
RSV: traditions/ practice
NIV: teaching/ practice
New KJV: traditions/ custom
(참고로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역은 “2절-관례/ 16절-관습”으로 번역하였음.)
2절의 규례(ordinances)와 16절의 풍습(custom)은 의미상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2절의 ‘규례’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파라도시스’(paradosis)는 “전통, 모세에 의해 전해오는 율법 의식, 교회의 규례” 등을 뜻하며, 16절의 ‘풍습’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수네쎄이아(sunetheia)는 “친밀한 교통, 관습, 풍습” 등을 뜻합니다. 전자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후자는 단순히 보편적 생활습관을 가리킬 뿐입니다. 풍습(custom)을 실행(practice)이라 번역한 것도 옳지 못합니다. 실행이라 하면 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자칫 규례와 풍습을 모두 포함하는 애매모호한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2절에서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주님의 명령으로서의 ‘규례’를 언급한 반면, 16절에서는 인류 보편적인 ‘풍습’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규례가 풍습이 될 수 없듯이, 풍습이 규례가 될 수 없으며, 명확히 구분되는 규례와 풍습을 실행(practice)이란 단어로 모호하게 얼버무려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확한 용례와 어의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성취될 것이며, 우리 각 사람은 정확한 순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배경 이해
고린도(코린트)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가장 번창하는 도시로서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동방을 잇는 동서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번화한 무역도시이자 항구도시로서의 고린도는 도박과 합법적 신전 매음, 각종 스포츠 게임과 모험적인 비지니스 및 향락산업 등의 메카였습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상인들, 선원들, 이주민들, 전문 도박꾼들과 운동선수들, 그리고 예술가와 철학자들뿐 아니라 노예들과 부랑자들이 밤낮 없이 거리를 헤메고 다녔고, 신전 매음을 중심으로 사방에 남창들과 여창들이 들끓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생겨난 고린도 교회였기에, 문제도 많았고 미혹도 많았으며, 늘 타락한 세상 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전형적인 현대 도시 교회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과의 경계선이 모호하고 분명치 못한 고로, 한편으론 성경적인 실행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세상의 온갖 타락한 문화가 밀려 들어와 순수한 신앙과 뒤섞일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들이 잡초처럼 자라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 교회라고 질책하면서, 그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인내를 가지고 다루어 나갔습니다. 세속 지식과 학문의 영향에 대해서, 교회 안의 성적 부도덕과 법정 소송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결혼과 독신주의, 우상숭배에 관련된 문제들, 관습과 도덕, 합당치 못한 만찬 모임의 문제, 영적 은사에 대한 혼돈과 오용, 변질된 복음, 특히 육체적 부활이 없다는 주장 등등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운 문제들을 진리의 빛으로써 하나하나 조명해 나갔습니다.
특히, 고전 11:3-16에서 다룬 내용은 여자들이 머리를 덮지 않은 상태로 기도와 대언을 하는 문제였는데,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된 배경은 바로 이방 신전의 여사제들 이었습니다. 여사제들 중 상당수가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깎거나 비구니처럼 빡빡 민 머리를 하고서 신전을 찾아오는 남자들에게 기도를 해주거나 예언자 노릇을 하였고, 한편으론 신전 매음을 일삼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은 이교적 관행이 고린도 교회 안에도 영향을 미쳤고, 급기야 교회 안에서도 여자들이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이 사도 바울의 귀에 전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로 모일 때마다 사도 바울이 전해준 대로 주님의 만찬의 규례를 실행하였는데, 문제는 만찬 모임에서 자매들이 남자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하는 이교적 모방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 내에 파당과 분열이 야기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을 기록한 목적도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사도로부터 전수받은 규례들(밥티스마와 주님의 만찬)을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는 칭찬할만하지만, 만찬 모임에서의 합당치 못한 실행들과 그로 인한 분열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문장구조
이러한 맥락에서 기록된 고린도전서 11장은 전체가 34구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 것과 같이,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어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보기로 내세워, 고린도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독려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본보기를 따르라고 선언한 것은, 바울 자신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느덧 자기 십자가를 내려 놓고서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을 본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선언한 직후, 사도 바울은 곧바로 2절부터 규례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2절과 3절이 시작되는 접속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2절이 시작되는 접속사와 3절이 시작되는 접속사는 둘다 똑같이 그리스어로 ‘데’(deh)인데, 문맥에 따라서 “also, but, now, moreover”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입니다. 이 두 접속사는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문맥을 어떻게 파악하였고, 어떻게 이해했느냐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권위역에서는 2절이 시작되는 접속사를 “Now”로 번역하였고, 3절이 시작되는 접속사는 “But”으로 번역하였습니다.
2절의 ‘Now’(이제)라는 접속사는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기 시작한다는 표시로서, 사도 바울이 전해준 “규례”(the ordinances)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님께 받은 것이니”란 문구와 함께 주님의 만찬을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되듯이,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규례의 문제가 다름아닌 주님의 만찬에 대한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
3절의 ‘But’(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시작부터 갑작스런 반전을 시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만찬에 대한 규례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게 맨먼저 상기시켜야 할 일이 있음을 강력한 논법으로 시사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사도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고, 영적 분노를 야기시킬 만큼 심각하였기에, 입을 열자마자 터져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논조는 매우 강하였습니다: “너희 고린도 교회는 내가 전해준 규례들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칭찬할만하다. “그러나”(But), 너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만찬 모임에서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강한 논조가 3절의 첫 접속사가 ‘But’라는 역접으로 시작된 이유를 잘 설명해 줍니다.
바울이 입을 열자마자 터져나온 3절의 접속사 “그러나”(But)는 3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만찬 모임에서 이교적 실행을 본받는 자매들의 행위를 용납한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상기시키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문제를 3절에서 16절까지 분명히 지적한 다음, 17절에서부터 다시 만찬 모임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17절의 첫 접속사가, 2절과 마찬가지로 “Now”(이제)로 시작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절에서 언급한 규례의 문제를 곧바로 17절에서 연이어 다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3절-16절은 삽입구였습니다. 즉, 2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주님의 만찬의 규례를 지키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였지만, 17절에서는 만찬 모임에 “분열의 문제”가 있다는 점은 결코 칭찬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된 것입니다. 칭찬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17절 이하 34절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1장의 문장구조는 1절의 선언문과 함께, 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 곧 주님의 만찬의 규례에 대한 언급을 시작하였고, 3절부터 16절까지의 삽입구에서는 무엇보다도 만찬 모임의 큰 걸림돌인 이교적 풍습에 따른 그릇된 실행의 실체를 알게 하였으며, 17절부터 34절까지는 본격적으로 주님의 만찬의 의의와 합당치 못한 만찬의 실행에 대하여 강하게 책망하고 바로잡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문 이해는 앞서 제시한 규례와 풍습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으로 고린도전서 1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울(veil)을 쓴다”는 개념이 전혀 발견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울’ 혹은 ‘베일’이란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 위에 무엇을 쓴다(wear)는 동사도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고전 11:3-16의 삽입구에서 다룬 내용 중에는 단지 ‘긴 머리’(long hair)와 머리가 덮여지는 것(covering)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머리가 덮여지는 것(covering the head)을 머리 위에 너울이나 모자나 수건 같은 것을 쓰는 것으로 오해하여 대부분 무엇을 “쓴다”라는 동사로 번역하였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덮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덮는 ‘자연스런’(natural) 방식이지만, 너울이나 모자나 수건으로 쓰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씌우는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 11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머리를 인위적으로 씌우는 문제가 아니라, 본성(nature) 자체와 관련되어 자연스럽게 덮는 문제임을 14절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성 자체도 너희에게 가르치지 않느냐”(Doth not even nature itself teach you, 고전 11:14).
성경에서 “베일”(veil or vail)이란 단어는 창 24:65부터 히 10:20까지 총 43구절, 46회 사용되었지만, 대부분 간막이, 휘장(주님의 육체)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밖에 성별의 의미와 모세의 얼굴 빛을 가리는 베일(고후 3:13,14)로 사용되었거나, 혹은 사막 지방에서의 일상용도로 사용된 경우 등이 대부분입니다. 레위기 10장 6절의 “머리에 덮은 것을 제거하지 말고 너희 옷도 찢지 말아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다가 죽임당한 자들을 위해 애곡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애곡하기 위해 머리를 풀어재치고 옷을 찢는 행위는 고전 11장 내용과는 무관하며, 더욱이 이러한 애곡 행위가 일반적으로 남자에게 해당되므로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와는 더더욱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에도 베일이 고전 11장의 경우처럼 머리 덮는 용도로 사용된 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 11장의 배경과 본문 자체의 이해를 통해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분명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배경은 이교 신전의 여사제들이 짧은 머리와 민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모방하여 교회 안의 자매들이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하였고, 그러한 풍습은 하나님의 교회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16절). 사도가 문제 삼은 것은 여자가 남자의 머리 역할을 대신하는 그릇된 풍습에 대한 것이었고, 핵심적 관건은 남자와 여자가 머리를 덮는 것(covering)으로써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남녀 구분의 목적을 가지고 머리를 덮는 자연스런 용도로 주신 것이 바로 긴 머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4절은 여자 머리를 한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남자의 수치를 말씀하고, 5절은 남자 머리를 한 채 기도와 대언을 하는 여자의 수치를 말씀합니다. 여자가 긴 머리를 하지 않는 것은 짧게 깍거나 민 머리를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짧게 깍거나 밀어버리면 본성이 수치를 느끼듯이, 긴 머리를 하지 않고 마치 남자 머리처럼 하는 행위도 동일하게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 자매들이 비록 이교 여사제처럼 짧게 깍은 머리나 민머리를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일반적인 남자 머리 정도를 하고서 기도와 대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자와 구분이 될 정도의 긴 머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예 빡빡 밀어버린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15절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15절을 대부분의 한글 역본들이 잘못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역 영어 성경의 “for her hair is given her for a covering”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덮기 위해 그녀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입니다. 개역한글은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라고 오역하였고,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 제임스 역은 “이는 그녀의 머리가 그녀의 쓰는 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라”로 오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for a covering”의 ‘for’를 “대신하여”로 번역한 것이 결정적 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for’는 목적과 용도를 나타내는 ‘for’이기 때문에, “덮기 위해서” 혹은 “덮는 용도로”라고 번역해야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5절은, 하나님께서 머리 덮는 자연스런 용도로 주신 것이 바로 긴 머리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고전 11장의 머리 덮는 수단으로서 ‘긴 머리’ 이외의 다른 해석은 배제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그러한 풍습”이 없다고 말씀한 것은, 여자들이 남자 머리를 하고서 기도하고 대언하는 그러한 이교적 풍습을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머리의 권위와 관련하여 남녀구분의 자연스런 수단으로 주신 것은 긴 머리였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베일(너울)이 이러한 목적으로 대신하여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베일(너울)은 오히려 분리와 순결의 의미로써 주로 사용되었고,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베일을 썼으며, 의복의 일종으로 사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은 베일도 영광의 빛을 일시적으로 차단키 위한 가리개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경우에서처럼,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는 것을 본성 자체가 가르쳐 주는 권능의 표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긴 머리카락(long hair)이지 사람이 만든 베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규례가 아닌 풍습의 문제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듯이, 얼마든지 예외가 허용될 수 있고, 또 각 나라와 민족마다 다양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긴 머리가 어느 정도 길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민족과 문화와 풍습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여자가 나면서부터 대머리인 경우에는 긴 머리를 대신하여 베일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머리를 덮는 것(covering)은 강조하되, 덮는 수단에 대해서는 14,15절 외에는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스런 덮개가 긴 머리이고, 예외적으로 긴 머리 대신 쓰는 것이 허용된다 할지라도, 역으로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반드시 너울을 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위험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범위를 함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여자가 남자 머리를 하고서 지도자 노릇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는 것이며, 긴 머리로 남녀구분을 하는 문제는 본성에 따른 풍습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목사 제도나 여사제 제도를 강력하게 경계하는 것이 성경의 강조점이며, 머리 덮는 수단이나 재료 논쟁은 성경의 의도를 빗나간 것으로서 단지 인류 보편적 풍습의 문제일 뿐입니다. 풍습의 문제는 교회의 규례가 될 수 없고, 교리로 가르쳐서도 안됩니다. 상식과 본성을 거스리는 단정치 못한 행위에 대해서는 꾸짖고, 이교적 영향에 따른 이단적 행위(여사제 제도)를 강력히 경계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입니다. 긴 머리와 관련된 풍습의 문제는 문화적 차이와 정도 차이를 인정하되, 본성과 사회적 정서에 어긋날 정도의 방종 행위는 마땅히 책망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처신 문제에 대해서는 고전 14:34-40; 딤전 2:9-15; 딛 2:3-5 등지에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11장에서는 이런 문제보다는 주로 여사제 제도와 관련된 이단적 행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기독교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여목사 제도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목사 까운을 입고 사람들에게 기도도 해 주고, 공중 설교도 하고 하는 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발생한 이단적 행위와 같은 종류의 이단적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이교적 여사제 제도에 기원하는 것으로서, 비록 성경으로 교묘하게 합리화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긴 머리로 남녀구분을 하는 풍습은 교회의 풍습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풍습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인류에게 주신 남녀 구분의 본성에서 비롯된 지극히 자연스런 구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풍습은 기꺼이 받아들이되, 본성을 거스리는 가증한 풍습은 배격해야 마땅합니다. 풍습이기 때문에 예외와 관용이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정서와 본성을 거스릴 정도의 이상한 행위까지 용납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며, 더욱이 여자가 남자 행세를 하고서 지도자 노릇을 하는 그런 이단적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경계하고 단호히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경우로서, 여사제 제도의 이단적 행위가 침투해 들어와서 급기야 만찬 모임에서까지 논쟁과 분열을 야기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이교에서 비롯된 종교적 베일(너울)의 문제
사도 바울의 의도와는 달리, 고린도전서 11장을 잘못 이해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자가 교회 안에서 너울을 쓰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더욱이 성경대로 실천하기를 고집하는 극보수 기독교 그룹들에서 오히려 이러한 그릇된 가르침을 고수해왔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이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옳바르게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 때에 여자들이 쓰는 너울의 기원은 남자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처녀로서의 성적 순결과 종교적 헌신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수녀들의 베일(veil) 역시 로마의 베스타 여신에 대한 순결과 종교적 헌신의 의미에서 비롯되었으며, 처녀로서 신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제물을 상징하였습니다(알렉산더 히슬롭의 두 개의 바빌론 참조). 수녀의 베일의 종류도 여러 가지였는데, 처음 입교한 수녀의 경우는 하얀 색의 수습수녀 베일(the veil of probation)을 입게 되고, 수녀 중에 25세 된 처녀는 주교로부터 특별 봉헌된 처녀의 베일(the veil of virginal consecration)을 하사받아 입게 되며, 수녀가 40세가 되면 성직수임의 베일(the veil of ordinantion)을 하사받아 여부제(deaconess)가 되고, 60세가 되면 고위 성직자 베일(the veil of prelature)을 입게 됩니다(Catholic encyclopedia, religious veil 참조).
사제와 수녀들의 엄격한 독신생활과, 순결과 헌신을 의미하여 입는 각종 베일들의 기원은 성경이 아니라 바빌론의 바알숭배 종교의 사제복이었습니다. 당시 바알 사제들은 바쿠스(님로드 혹은 니므롯의 다른 이름)가 죽음에 처해졌을 때 있었던 수족 절단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로쉬게자”(Rosh-Gheza)로서 애곡하였는데, 로쉬-게자(Gheza는 털깍기 혹은 면도하기를 뜻함)란 말은 ‘자른’ 혹은 ‘면도로 민 머리’를 뜻하고 있습니다(두 개의 바빌론, 안티오크, 1997, 314-322쪽 참조). 훗날 고린도의 이교신전 사제와 여사제들이 짧은 머리와 면도로 민 머리를 하고서 기도와 예언을 한 것도 바알 사제들에 기원한다 할 수 있으며,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온 여자들의 이상한 풍습도 여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종교적 베일 외에도 일반인들이 흔히 두르는 베일, 모자, 터번, 두건, 망또 등 다양한 문화와 풍습들이 있는데, 그 의미와 기원은 매우 다양하며, 비록 그러한 문화와 풍습 가운데 남녀 구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도 없진 않지만, 긴 머리로 남녀 구분을 하는 인류 보편적인 풍습을 대체할 수는 없으며, 단지 보조수단이나 대체수단이 될 뿐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런 특별한 의미의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종교적 성별이나 헌신, 신분과 지위의 상징, 보호와 환경적 요인 등 다양한 의미에 기원한 다양한 풍습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로마 카톨릭의 각종 사제복과 수녀복은 바알 사제들이 입은 베일(veils)에서 기원하였으며, 회교권 여성들이 입는 베일이나 차도르 등도 이러한 종교적 기원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교적 관행들을 성경에서 정확히 확인하여 걸러내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동방정교, 성공회를 비롯하여 메노나이트, 아미쉬, 형제교회 등등의 여러 기독교 그룹으로 전수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이 비록 성경의 구약 제사장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었던 베일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신약교회는 구약의 관행을 실행해서는 안되며, 또한 일반인의 의상 풍습을 종교적 규례로 가르쳐서도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1장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본 의도에서 빗나간 그릇된 해석이며, 긴 머리의 건전한 풍습을 너울 쓰는 이상한 종교적 행습으로 대체하여 마치 주님께서 명령하신 교회의 규례인 것처럼 가르치고,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교제를 거부하는 등 많은 논쟁과 분열을 야기시킨 것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며, 그릇된 가르침에 책임이 있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반드시 이에 대해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의 결론
사도 바울은 머리가 덮이지 않은채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에 대하여 “그것은 수치스런 일이다”고 질책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사들 때문에 여자는 머리 위에(머리카락 위가 아닌) 권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용도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긴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1절, Nevertheless), 주님 안에서는 여자 없는 남자도, 남자 없는 여자도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의 삽입구(3-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자 한 것은, 로드-게자라는 민머리를 하고서 대언자 노릇하는 이교적 여사제의 풍습을 강력히 경계하고, 그러한 그릇된 풍습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논쟁을 야기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의 자매들의 처신에 대해서는 고전 14:34-40; 딤전 2:9-15; 딛 2:3-5 등의 말씀에서 따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의 말씀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의 자매들에 대한 말씀 중 헤어스타일이나 건전한 풍습에 관계된 말씀이 있다면, 딤전 2: 9,10의 말씀일 것입니다. 자매들의 옷차림은 단정하게 하고, 헤어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치스럽게 장식을 하지 않도록 하며, 외모보다는 내적 아름다움과 선행으로 단장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옷과 헤어스타일을 하나로 통일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세상 패션을 따르지 않는다고 구식 유니폼을 고집하는 기독교 모임도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건전한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본성을 거스르는 가증한 풍습은 경계하지만, 비록 이 세상의 유행과 의류패션과 헤어스타일일지라도 건전하고 소박하며 단정하기만 하면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관한한, 성경은 결코 하나의 풍습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이나 그 어떤 특정한 풍습도 교회가 지켜야 할 것으로 가르쳐진 적이 없습니다.
헤어스타일과 의류 패션을 비롯한 풍습의 문제는 결코 교회의 이슈가 될 수 없고 더더구나 논쟁거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풍습에 관한한, 성경은 단정하고 건전한 정도의 일반적 기준 외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나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모두 하나이지만, 아직 부활의 몸을 입기까지는 여전히 육이 남아있고, 또 첫 창조의 질서도 그 때까지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성령을 좇아 걷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말입니다(롬 8:1). 성경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 특히 아내들이 남자들(남편들)에게 온전히 복종하여 잠잠히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고, 여자가 남자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딤전 2;11,12).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들이 여목사 제도와 여집사 제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은 성경말씀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16:1과 딤전 3:11 말씀을 권위역 킹 제임스 성경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으로 주신 신약교회의 규례들(ordinances) 외에는 불필요한 짐들을 형제 자매들에게 지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규례들은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반면, 불필요한 인간의 명령들을 교리로 삼아 지키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밥티스마를 세례로 바꿔서 지키고, 주님의 만찬은 일년에 한 두 차례 그것도 변질시켜서 형식적으로만 지키는가 하면, 정작 성경에서 명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유다인들도 질 수 없는 온갖 절기들(부활절, 추수감사절, 사순절, 성탄절…. 등등)과 규례들은 수도 없이 발명해내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빼앗아 가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서 밥티스마(침례)와 주님의 만찬의 규례(the ordinances)를 성경에서 정확히 확인하여 성실하게 준수하고, 주님의 만찬에 암초가 되는 그 어떤 논쟁과 분열의 요인도 과감히 내던져 버리며, 진리의 영의 인도를 따라 바른 성경의 기초 위에서 한 몸을 건축하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같은 영님을 따라서 같은 보조로 걸으며,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며, 화평의 띠 안에서 영님의 하나되게 하신 간증을 힘써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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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의 생각도 이 글을 쓰신 박만수님과 같습니다. 너울쓰는 문제가 반드시 성도들에게 필요한 부분이었다면 성경은 훨씬 더 구체적으로 분명히 그것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자매들 머리 위에 무엇을 쓰고 안쓰고는 개인 각자가 성경 말씀의 분별과 신앙얌심에 따라서 행하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참된교회다 그렇지 않다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머리에 흰 천을 쓰고 예배를 드리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많은 자매들을 보았고, 반대로 머리에 쓰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늘 충만하여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자매님들을 저는 많이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에고 어렵습니다.... 교회 구조, 새 가죽부대를 망쳐버린 천가지 만가지 형식과 잘못된 규례들을 만들고 행한 것은 질서라는 명분 아래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취한 남자들의 잘못입니다. 스스로 반성함이 없고 아직도 형식과 제도를 들이대는 것에 슬프고 슬프고 또 슬프네요. 개념의 정리가 되었습니다. 글 고맙습니다.
박만수님은 여러 분별에서 그릇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한예로 예수님의 몸에 죄가 있었다는 해석을 한 글을 보았습니다.
이분이 너울을 반대하는 근거는 역시 그것이 규례가 아니고 풍습이다, 는 논리인데, 성경은 교회의 정립된 관습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수네떼이안), 만일 일반 세상풍속이라면 어찌하여 바울이 창조의 순서와 원리와 천사의 표를 문제삼겠습니까? 세상 풍속중에 창조의 원리와 천사의 표를 인한 풍습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음으로 이분은 역시 세상교회의 대부분이 너울을 배척하는 변명인 긴머리로 대신하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5절에 쓴다는 동사의 목적어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가져옵니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제가 쓴 아래 글에서, 카타칼룹토 동사에는 무엇을 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무슨 목적어를 넣으면, 축구를 공차기 하다와같이 목적어가 중복되며, 이발을 깎다와 같이 되기 때문에 넣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베일이라는 목적어를 넣는다면, 베일을 무엇을 쓰다가 됩니다. 이런 문장은 매우 유치한 수준의 문법위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교회의 실행은 새포도주에 새가죽을 넣는 일을 행하는 모임에 대하여 바울이 명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구약 모임에 대하여 명한 말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글을 쓴 수준의 여러 한계를 보고 있는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든 순종하려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입니다.
1900년 동안 사람들은 잘못된 교리와 해석을 쫓아왔다는 말입니까? 성령께서 고전 11장을 쓰시지 않았단 말인가요?
성령께서 언제부터 학설이나 해석을 변경하셨으며 누구를 통해 직통계시를 내려주셨습니까?
진리를 좇아 그대로 순종하여 실행하면 다수를 좇지 않은 것이므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를 범합니까?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기독교인들을 살육할 때 늘 써먹던 수법이었습니다.
너울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리 합리화 시켜도 너울을 쓰는 것이 맞습니다. 성경에서 너울에 대해서 확실히 써야 한다고 나와 있으니까요...제가 말한 의견은 형제모임의 입장을 떠나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 다 좋습니다. 자신들의 믿음대로 책임있게 살 일입니다.
케슬님이 너울에 대해서 확실히 써야 한다고 하셨는데 고전 11장 바울의 말씀 어디에
확실히 "너울(vail)"이란 단어가 쓰여 있는지요?
말씀에 "너울" 이라며 직접적 표현이 없을땐 베드로서의 경고처럼 억지 풀이는 주의할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형제교파에서 덮고 있는 그 너울 이란건 대체 어떤 디자인 일까 궁금 해집니다.
케슬님이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여인들이 어떤 모양의 너울을 덮고 있는지요?
하토브님은 너울실행을 하지 않는 형제교파 출석을 하신다 알고 있기에 케슬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미사보' 같은 것인지 웨딩때 쓰는 '면사포' 같은것인지..아님
@토기그릇
각 나라 대통령, 수상들의 부인과 딸들이 로마 교황청을 방문할때 덮는 까만 '망사보' 인지..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너울(vail)은 머리만 덮는 크기가 아닌 얼굴과 몸을 감싸는 크기,
성막 휘장의 크기 등등, 사이즈가 크던데 이중 어느 것에 속하는지요.
덧붙여서..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들은 없는지요.
제가 보는 성경엔 '너울'이란 분명한 언급이 없는바에야 수건이든 모자든
머리만 덮이면 될테니 쓰는이가 이런것에까지 얽매임 받아선 안된다 생각 되는데요.
@토기그릇 토기그릇 << 하토브님은 너울실행을 하지 않는 형제교파 출석을 하신다 알고 있기에 케슬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미사보' 같은 것인지 웨딩때 쓰는 '면사포' 같은것인지..아님 >>
언제 제가 이런 말을 했는가요?
저희 모임은 모두 헤드 카버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형제모임들이 있어서 그들은 모임의 교제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종류에 상관 없이 머리를 덮을 수 있는 것이면 됩니다. 모자도 상관 없습니다. 다만 때때로 의문이 듭니다. 성경말씀대로 하자면 너울(커버링)은 머리를 완전히 가릴 목적으로 덮는것인데...즉 너울을 썼는데도 머리가 비쳐질 정도라면 성경의 너울 본래 의미(머리를 완전히 가린다)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자 성도들이 너울을 썼는데도 머리의 색깔이 훤히 비치기에 너울을 쓴 것과 안쓴 것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너울을 쓸려면 제대로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하토브 아, 아닙니다. 하토브님이 그리 말씀 하셨다는게 아니라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언젠가 다니시는 교회가 크리스 마스 절기에 대해 분별없어 답답해 하신 글을 읽었기에 형제교회로선
보기 드물게 '리버럴 한 교회구나' 했고 당연히 너울 실행도 안하는 개방파 로 생각을 갖게 된것입니다.
이점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KESLL 답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KESLL님, 형제교회 말고도 머리에 너울을 쓰는 교회가 있는지요?
성도라면 누구나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선한양심과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형제사랑의 계명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형제들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며 기도에 전력합니다.성도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서서 자신의 몸으로 행한 것들이 불에 의해 심판받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성경은 주님을 믿는 어린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한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만큼 성도들은 자신들의 어떤 주장 하나, 글 하나, 말 하나라도 형제들을 사랑하여 그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굳건히 세우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항상
살피고 조심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머리에 쓰는 문제는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모임은 온 마음을 다해 자신들이 본 진리대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머리 수건에 참여하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 가운데서 선하고 아름다운 의의 열매를 맺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모임의 성도들에거도 좋은 간증과 덕으로 굳게 서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아무리 성경을 살피고 기도해도 머리에 쓰는 문제는 여자들의 긴 머리가 그것을 대신하여 주어졌다고 믿는 성도들이 있다면 그대로 말씀에 순종하여 자매들이 긴 머리를 하고서 그들의 내면도 조용하고 고요한 영으로 단장하여 주님을 믿는 성도들로서 삶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와 선한 의의 열매를 가득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머리 덮은 문제는 이제 충분히 논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모든 성도들은 이제 각자의 신앙양심과 주님의 인도를 따르면서 서로를 용납함과 존중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머리를 쓰는 모임에서 머리에 쓰지 않는 모임을
향해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임으로 간주하여 교제를 끊는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이 마지막 때 이제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 세상과 싸워 세상의 편리속에 삼키워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거룩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작은형제 작은형제님도 지방교회의 실행에 대하여 아시지 않습니까? 워치만니는 분명히 너울을 강조하고 있는데 지방교회는 그대로 실행하고 있습니까?
@하토브 제가 지방교회을 나온지가 2년이 6개월이 넘었습니다. 제가 지방교회를 나올 때에 제가 다니던 교회 기준으로 말씀드리면 약 20~30% 자매님들께서만 자신들의 머리에 머리수건을 덮었습니다. 지방교회는 머리수건에 대한 강요성은 없고 자매님들의 각자의 신앙양심과 믿음에 따라 자유성을 가시고 선택하였습니다.
제가 요즘 읽고 읽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더 정확한 해석 및 실질적인 교회(모임)의 질서를 알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