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중에는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마음을 보는 수행을 오랫동안 하다보니 오직 마음으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서 밝힌 것처럼 오래 집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보는 수행이 좋은 것이고 수준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제 심념처(心念處)만을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심념처만 해서 수행이 효과가 있으면 더 할 수 없이 좋겠지만 마음만 붙잡고 있으니 어딘가 부실한 면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알아차리는 방법인데 집중력이 좋을 때는 괜찮지만 집중력이 없을 때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는 호흡이 있는 배로 간다던가 몸의 느낌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만 보고 있으면 이내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약해지고 맙니다.
수행을 할 때는 아무리 좋은 수행방법이라도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한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면 안 됩니다. 위빠싸나는 다양한 수행대상과, 수행방법이 있다는 것이 최대의 강점이므로 수행방법도 때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혼자서 만들어 가는 작품에 속합니다. 여기서 가장 선행되는 것이 노력입니다. 알아차림도 노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 순간도 계속될 수 없습니다. 노력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생겨도 그냥 마음만을 붙잡고 있다보니 수행이 지지부진해졌습니다. 이때는 마음보는 수행이 최고이므로 다른 것은 별 볼일 없다는 배타적인 이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수행방법을 바꾸어 스스로 단계를 만들어서 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해봤습니다.
이때 또다시 제게 깨우침을 주신 분이 쉐우민의 우 꼬딸라 사야도이십니다. 이렇게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자 어렵게 면담을 신청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호흡을 주시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드렸습니다.
"마음을 주 대상으로 하는 심념처 수행 위주로 하니 어떤 경우에는 몸의 느낌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에서 느낌이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소홀히 하고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러자 사야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이 중요한 것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노 스승의 깊게 들어간 눈에는 자애로움이 그득하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열반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스승을 뵈온 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거의가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사야도의 이 말씀에 사념처 신, 수, 심, 법의 고른 활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보는 수행도 중요한 것이지만 마음보는 수행과 함께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중요성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시는 쉐우민사야도께서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가 중요한 것이야."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처의 필요성이 절실했습니다. 그렇다! 마음을 본다고 몸을 보는 것을 소홀히 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위주로 보시는 큰 스승님께서 몸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셔서 4념처의 균형 잡힌 수행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자신 있게 저 나름대로 염처별로 나누어서 세분화된 수행방법을 실천해 보았습니다. 물론 경전 안에서, 스승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이렇게 4념처를 매 염처별로 나누어서 해보니 안될 것도 없었습니다. 이미 기본적으로 하는 신념처 외에 수념처, 심념처 만으로 수행을 해보기도 했었습니다. 한시간 동안 느낌을 보기도 하고, 한시간 동안 마음만 보기도 했습니다. 느낌을 보는 것은 가슴의 창에서 마음의 작용인 느낌을 보니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염처별로 수행을 하는 방법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갔습니다. 염처별로 독립해서 수행방법을 계발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은 심념처입니다. 마음보는 수행을 모르고서는 염처를 구별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염처별 수행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쉐우민 사야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 마음보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 외에 가슴에서 느낌을 보는 방법을 알려 주신 것에다가 고엔까 수행방법에서 느낌을 보는 방법까지 접목을 하니 하나의 훌륭한 수념처(vedananupassana)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해보니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말하는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하는 수행방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하도록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하게 된 배경도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다보니 그런 것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수행법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위빠싸나 수행이라도 스승에 따라서 약간의 방법이 다를 수 있음은 이미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 중에 호흡하나만 가지고 말하자면 어느 스승은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오직 배의 호흡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경우에는 호흡에 모든 우선권을 두지 않습니다. 호흡은 항상 볼 수 있는 것이고 호흡이 아닌 느낌, 통증 등등 다른 대상이 나타나서 마음이 그곳으로 갔으면 그것을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없어졌을 때 다시 호흡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이 순수 위빠싸나의 자연스러운 수행방법에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좌선을 하면서 나타나는 대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계속했습니다. 이때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주시하기만 했습니다. 그랬는데 얼굴에 가려움과 미세한 느낌이 한 시간 내내 계속되어 그것만을 알아차리다 보니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뭔지 부족하고 수행을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터뷰 때 사야도께 말씀드렸습니다.
"얼굴에 가려움과 여러 가지 느낌이 많아서 한 시간 내내 느낌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호흡을 한번도 못 보아서 수행을 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무엇이나 알아차렸으면 됐지 꼭 호흡만 알아차려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한 번은 이렇게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
"가슴에서 일정하게 호흡이 나타나서 얼마간 계속 호흡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좌선이 끝나고 나서 보니 호흡인줄 알고 붙잡고 있었던 것이 호흡이 아니고 맥박이었습니다. 대상을 잘 모르고 했구나 하고 아쉬웠습니다."
사야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맥박이나 호흡이나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수행자는 어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맥박도 하나의 대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호흡을 위주로 하는 신념처 수행뿐이 아니고 수념처 하나만으로도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 방법을 익혀나갔습니다. 수념처는 심념처와 함께 쉐우민 사야도께서 주장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야도께서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린 뒤에 가슴으로 가서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느낌을 주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호흡으로 가면 신, 수, 심, 법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을 모두 다 하는 셈입니다.
이때 저는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을 계발하느라고 약 2개월 동안 줄기차게 가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사야도께서 귀찮았겠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사야도께서나 동료 수행자들은 제가 수념처 수행방법을 완성하느라고 그런 줄 몰랐을 것입니다.
이때 마음의 작용 중에서 느낌에 대한 질문을 하여 제가 의문을 풀기도 했지만 다른 쟁점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 마음이 일으킨 느낌을 저는 가슴에서 보는 것으로 말하고 작은 사야도는 왜 가슴에서 봐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작은 사야도는 가슴보다 머리를 강조하시고 저는 가슴을 강조하여 약간 견해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대놓고 옳고 그름을 말하기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실재로 가슴에서는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心所]이 있는데 이것이 느낌입니다. 저는 쉐우민 사야도의 방식대로 가슴에서 느낌을 보는데 작은 사야도는 머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귀국을 하고 어느 날 불현듯 작은 사야도의 방식에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사야도는 마음이 일어나면 먼저 머리에 강한 현상이 나타나고 저는 마음이 일어나면 가슴부터 콩닥거렸기 때문에 가슴의 느낌을 대상으로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평소에 작은 사야도께서 두통이 잦아서 관자놀이에 무엇을 자주 붙이는 것이 생각나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 뒤부터 마음의 작용인 느낌은 가슴이나 머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봐 수행은 자기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방편이고 테그닉입니다. 방편이란 수행자들이 수행을 이롭게 하게 하기 위한 유익한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근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석서에서 말하는 수행은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수행방법을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수행방법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의 성향에 따라 방법을 선택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입니다.
1. 사념처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 성향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감성이 발달한 갈애형 중에서 무딘 사람은 신념처 수행을 할 것
2) 감성이 발달한 갈애형 중에서 영민한 사람은 수념처를 할 것
3) 이성이 발달한 이론형 중에서 무딘 사람은 심념처 수행을 할 것
4) 이성이 발달한 이론형 중에서 영민한 사람은 법념처 수행을 할 것.
2. 사마타 수행을 하던 수행자가 청정한 도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딘 사람은 신념처 수행을 할 것.
2) 영민한 사람은 수념처 수행을 할 것.
3.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청정한 도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딘 사람은 심념처를 할 것
2) 영민한 사람은 법념처를 할 것
3. 대상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서 분류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름다움을 집착하는 수행자는 신념처 수행을 통하여 몸의 부정함을 알도록 할 것
2) 즐거운 느낌을 집착하는 수행자는 수념처 수행을 통하여 느낌은 괴로운 것임을 알 것
3)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수행자는 심념처를 통하여 영원한 것이 아닌 무상을 알 것.
4) 자아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수행자는 법념처 수행을 통하여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할 것
이렇게 염처별로 나누어서 수행을 할 때 어느 것 하나 만을 가지고 수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신념처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몸 하나 만을 보거나 호흡 하나만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호흡도 보고, 느낌도 보고, 망상하는 마음도 보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신념처를 할 때는 주로 호흡을 위주로 한다거나, 수념처를 할 때는 주로 가슴의 느낌을 대상으로 한다거나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염처별 수행에 따라서 주 대상을 더 많이 삼는 식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위주로 보는 수행을 할 때 산란하거나 집중이 안될 때는 계속해서 마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행을 하든지 새롭게 단계를 만들어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나 아니면 수행 중에 어느 때나 수행이 안될 때는 3단계로 나누어 시도해 보았습니다.
제 1단계는 단순하게 몸의 모양과 움직임만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가령 배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단순하게 움직임만을 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호흡의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얼마동안 호흡의 일어남 하나만 알아차리다 다시 꺼짐 하나를 알아차립니다. 쉽고 간단한 것을 선택하여 마음이 싫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보니 산란한 마음이 차츰 안정이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경행을 할 때도 여러 가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발에 닿는 것 하나만 알아차립니다. 닿음 하나만 알아차리고 나서 오른발의 움직임, 왼발의 움직임으로 옮겨갑니다. 1단계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고 안정이 되면 2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 갑니다. 이것은 특별한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집중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넘어 가면 됩니다.
제 2단계에서는 호흡을 볼 때 일어남 꺼짐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차츰 보는 힘이 생겼을 때 일어남, 꺼짐, 쉼을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호흡을 3분절로 나누어서 쉼까지를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실재하는 현상인 공기의 수축, 팽창하는 압력 등등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호흡의 자연스러운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경행을 할 때는 들어서, 놓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가벼움과 무거움, 단단함과 부드러움 등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제 3단계에서는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기를 합니다. 호흡이나 몸의 통증이나, 걸음 걸이를 모두 마음의 창에서 주시를 합니다. 이 단계에서 아는 마음을 아는 수행을 하면 지속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집중력이 배양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익숙하지 않은 수행자는 3단계를 할 수가 없으므로 2단계 수행을 하시면 됩니다. 단계가 낮다고 해서 나쁜 것은 결코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다가 대상이 약해지면 어느 때나 다시 1단계로 내려와 쉽게 대상에 접근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알아차리는 힘과 집중력이 생기면 다시 2단계로 가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방법은 수행 중에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은 항상 같은 조건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어느 때, 어떤 돌발적이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초심의 수행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실천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몇 번을 하다 보면 1시간이 쉽게 지나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단 1회만에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강화되어 안정적인 수행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하는 방법과, 장애가 생기면 수행을 3단계로 나누어서 하는 방법을 사용해보니 훨씬 유익한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꼭 염처별로 나누어서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 이렇게 특정 염처별로 나누어서 하지 않을 때는 신념처 수행인 호흡을 기본으로 알아차리면서 느낌과 마음을 적절히 알아차리며 4념처를 종합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지 않고 종합해서 할 수도 있고, 또는 염처별로 나누어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염처별로 나누어서 할 때는 염처별 수행방법을 배워 본 뒤에 자신에게 알맞은 하나의 염처를 선택하여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고 할 때는 수념처를 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성향에 맞을 때는 심념처를 하시면 효과적인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해보고 나면 각 염처 마다 다양한 방법을 배운 뒤이므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하는 종합적인 위빠싸나 수행을 할 때에도 전보다 깊고 다양한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염처별 수행을 배워두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익할 것입니다. 수행방법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수행은 4념처를 종합적으로 하는 통상의 방법이 있고, 또 다른 방법은 4념처를 염처별로 나누어서 집중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수행을 할 때는 3단계로 나누어서 처음 1단계는 몸의 단순한 움직임과 모양을 위주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서 집중력이 생기면 2단계로 몸에서 실재하는 것 다양한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이렇게 알아차리다가 자연스럽게 3단계로 넘어 가서 마음을 보는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수행상태에 따라 아는 마음을 아는 것으로 수행을 진행합니다.
이런 방법은 수행을 시작할 때나, 또는 수행 중에 집중이 안될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활용을 하면 유익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얀마 수행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미얀마라고 해서 모든 것이 그냥 성취되지 않습니다. 미얀마에 가지 않는 것 보다 가서 수행을 하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그러나 미얀마에 간다고 다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느냐, 어떤 수행방법과 스승을 선택하느냐, 통역은 있느냐 하는 것 외에도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미얀마에 오는 많은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수행방법의 문제, 통역의 문제, 기후와 각자의 개성의 문제, 도반의 문제 등등으로 쉽게 공부할 수가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자기는 수행을 잘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구나 스승의 수행지도에 대한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또 다른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여행 삼아 오는 경우, 한국에서 수행을 한 것을 인정받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미얀마에 와서 한국 수행법과 비교만 하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별일도 많겠지만 이런 문제들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않으려면 꼭 미얀마에 가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제대로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귀국을 해서 그나마 하던 수행도 계속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미얀마에 가야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한국에서처럼 자세하게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저 간단한 인터뷰만 있는데 그것도 한국어 통역이 없으면 안 됩니다.
어떤 때 쉐우민에서 몇 개월 수행하고 떠나면서 사실은 마음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신념처를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처음부터 마음을 보는 수행은 다소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이런 저런 정황을 보고 이런 염처별, 단계별 수행방법을 구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 자신은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 차츰 더 좋은 방법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마하시와 쉐우민의 수행방법을 말함에 있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여 허물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을 강조하여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첫댓글 선생님의 무량한 자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