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고향 ------ 무한한 지평선에
게으르게,
가로 눕고 싶다;
인도(印度), 인디아!
무능(無能)이 죄가 되지 않고
삶을 한번쯤 되돌릴 수 있는 그곳
----- 황지우, 〈노스탤지어〉 전문
시인은 그의 정신사적 고향으로 인도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도 '아직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비록 객지에서 헤매고 있지만, 돌아가는 중이다. 인도로 가는 길, 그 중에 책을 읽으며 가는 길이 있다. '고향에 돌아간' 사람은 책으로 갈 필요가 없으리라.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은 두고 가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아직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인 사람에게는 책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가는 귀향이어야 한다. 불교를 제외하고 나면, 나의 귀향길은 《바가바드기타》(이하, 《기타》라고 약칭함.)와 함께 할 것이다.
《기타》는 인도의 2대 서사시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에 소속된 일부이다. 그러나, 따로이 별립(別立)하여 유통되고 있다. 전체 1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義)의 벌판, 쿠루 벌판에 / 나의 아들들과 판두의 아들들이 / 싸우려고 모여서"(1:1) 있다. 여기의 '나'는 드르타라슈트라이며, 판두의 형이다. 그러니까 이들 두 사람의 아들들(사촌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전장, 비극의 현장에서 이 《기타》는 시작된다. 판두의 아들 다섯 중에서 셋째 아르쥬나는 "저들이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 나는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소"(1: 35)라며, 전쟁을 거부한다. 이러한 아르쥬나의 고민은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에 따르려는 것으로, 인간적이고 불교적인 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아르쥬나는 크샤트리야 계급이므로, 싸우는 것은 그 계급의 의무(svadharma)이기 때문이다. 그때, 아르쥬나의 마부가 아르쥬나를 설득한다. 참전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대화로 시작된 《기타》는 보다 근원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 시종하고 만다. 그런데, 아르쥬나의 마부는 힌두교의 신 비쉬누(Vi u)의 화신 크리쉬나(K a)였다.
사실, 《기타》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동족간의 전쟁에 동참해야 하느냐? 계급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 옳으냐?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논리가 옳으냐?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나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일정한 비평을 가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기타》를 가지고 귀향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타》에는 비판적 독서를 요구하는 그같은 부분보다 더 많이, 더 절대적으로 '고향을 잃은'(하이데거) 우리들의 귀향을 도와주는 금언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한다면, 《기타》는 매우 소중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기타》에 담긴 사상사의 흐름은 그 원천에 《베다》를 두고 있다. 《베다》 종교의 모습은 원시종교 일반의 형태인 제사의 종교이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서 《기타》는 비판을 제기한다. 진정한 제사는 어떠해야 하는가? "재물의 제사보다도 지혜의 제사가 더 우월하다"(4:33)고 선언한다. 지혜의 제사!
인도철학에서 지혜는, 자기 스스로를 아는 일에서 출발한다. 아는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베다》 시대 사람들의 눈은 밖을 향하고 있었다. 신들을 바라보아야 했기에. 그러나, 우파니샤드에 이르면 눈을 안으로 향하게 된다. 인간 스스로를 철학적 사색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철인(哲人)들은 이같은 내면의 응시를 통하여 "내가 곧 브라흐만(aham Brahm asmi)"이라고 독립을 선언한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두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초기불교로 흘러가서 "내가 곧 부처"라고 하는 지혜의 종교를 낳고, 다른 하나는 초기불교의 흐름까지 아우르면서 《기타》에 흐른다. 이러한 길 ----- 자각의 길 ----- 을 지혜의 요가(J na-Yoga)라고 한다. 철저히 우파니샤드를 잇고 있는 《기타》의 첫번째 입각지이다. 다음의 송(頌)이 그같은 입장을 대변한다.
내면에서 행복과 내면에서 기쁨을 얻고
오직 내면에서 빛을 발견하는 사람
그러한 요가행자는 브라흐만이 되어
브라흐만-열반에 이른다.(5:24)
《기타》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민중성에 있다. 민중성서로서의 《기타》가 갖는 특유의 입장은 두 가지 요가를 더 추가함으로써 확립된다. 첫째, 민중들의 삶의 현실에 참여하는 길이 곧 구원이라는 인식이다. 지혜를 위해서 명상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행위의 요가(karma-yoga)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대가 할 일은 오직 행위 자체일 뿐 / 결코 그 결과가 아니다 / 행위의 결과를 동기로 삼지 말고"(2:47) 집착없는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타》는 사회현실과 만난다.
이 안내 글에서는 세가지 요가 중에서 신애의 요가(bhakti-yoga)에 대한 소개를 하지 못했다. 지면 사정상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