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에세이│
봄날의 풍경화
김한성
거리는 커다란 풍경화다. 두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액자 모양을 만들면 더욱 또렷한 한 장의 그림이 된다. 그림 속에는 아름다움도 안타까움도 모두 담겨 있다.
일요일 오후. 나는 버스를 타려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짙어 가고 있다. 어느새 내 마음도 풍경화 속으로 들어가 한 장의 그림이 된다.
길 건너 쪽에 어두운 색깔로 풍경화가 그려지고 있다. 두 다리를 잃은 여인이 배를 땅에 붙이고 작은 수레를 밀면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검은 고무로 몸을 칭칭 감고 천천히 기어가고 있다. 밀고 가는 작은 수레에는 바구니가 놓여 있고, 녹음기가 묶여 있다.
불편한 몸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녹음기를 틀어 놓거나 직접 구성진 노래를 부르면서 성금을 모으다가 석양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거리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때였다. 갑자기 바람이 살짝 불자 바구니 속의 지폐가 날아가고 만다. 길 건너 쪽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몇 장 안 되는 돈은 인도 쪽으로도 차도 쪽으로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날아가고 있다. 여인은 어쩔 줄 모르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다. 그토록 애쓴 하루 벌이가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버스 안으로 빨려 들듯이 사라진다.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내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풍경화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급하게 지폐를 줍고 있다. 지나가는 차에게 수신호를 보내 가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인도 위의 몇 장까지 주워서 바구니에 담고, 돌멩이로 꾹 눌러 주는 친절도 잊지 않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풍경화는 전혀 다른 밑그림이 그려지고 너무나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졌다. 풍경화 속의 주인공이 버스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발길을 돌이킨다. 주머니를 뒤지더니 지폐 몇 장을 꺼내어 바구니에 놓고 버스 쪽으로 향한다. 여인은 감사의 마음을 목례로 답하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면서 안도의 숨을 쉬고, 봄 햇살처럼 따스한 감동을 느낀다.
신호는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버스로 향하는 주인공은 승객이 아니라 운전기사였기 때문이다. 비어 있던 운전석에 앉자 버스는 아무런 일고 없었다는 듯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작은 수레와 여인도 골목길로 접어들어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사라져 가는 버스와 수레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풍경화 한 장을 마음의 캔버스에 곱게 그려 간직한 일요일 오후였다. (‘에세이문학’ 2007봄호, 통권97호)
화제에 의미 부여하기
신재기
(앞부분 생략)
한편 ‘보여주기’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김한성의 <봄날의 풍경화>도 주목해 볼 만한 작품이다. 두 다리가 없는 여자 장애인이 거리에서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가면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 바구니에 담겨 있던 지폐들이 날아가 차도에 흩어진다. 그런데 누군가가 도로 가운데로 뛰어들어 차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며 지폐를 주워 장애인의 바구니에 넣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돌로 눌러 놓고 버스 쪽으로 향한다. 이윽고 발길을 돌려 자기의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그 바구니에 놓고 간다. 놀랍게도 그는 버스기사였다.
이런 내용의 화제만 덩그렇게 제시되고 있다. 작가는 철저하게 관찰자로 남는다. ‘풍경화’라는 제목이 잘 말해주듯이, 화자는 자신의 시야 속에 들어오는 풍경을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카메라 앵글 속에 잡힌 몇 커트의 장면이 전부다. ‘땅바닥을 기며 구걸하는 장애인 → 바람에 날아가는 지폐들 → 도로에 뛰어들어 수신호를 하면서 지폐를 주워주는 사람 → 자기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바구니에 놓고는 버스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그 사람’이 그것이다. 흘러간 사간은 그리 길지 않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에 들어온 풍경이니 순간의 포착이다. 이 순간의 상황이나 장면들은 의미하지 않고 존재할 따름이다. 작자의 설명과 해석으로 채색되지 않은 만큼 대상은 순수하다. 순수함의 몫은 독자에게 돌아간다. 독자의 상상력이 틈입할 수 있는 여백이 충분하다. 그래서 넉넉하여 조급하지 않고, 짧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의미를 생성한다.
화제의 제시만으로도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말해준다. 의미 부여가 빈약하여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화제만 남아 있는 작품과는 차별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대상을 순수하게 제시하려는 의도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창작 방법상 뚜렷한 전략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림 속에는 아름다움도 안타까움도 모두 담겨 있다”라는 서두의 진술은 그렇다 치더라도‘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의 반복은 흠인 것 같다. 화자가 관찰자로만 철저하게 남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뒷부분 생략) (‘에세이문학’ 2007여름호, 통권 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