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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집(月沙集) 제53권 / 시장 상(諡狀上) /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율곡(栗谷) 선생 시장
1536(중종 31) ~ 1584(선조 17)
선생의 휘(諱)는 이(珥), 자는 숙헌(叔憲)이고 학자들이 율곡 선생이라 일컬었다, 본관은 풍덕군(豐德郡) 덕수현(德水縣)이고.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그 유래가 오래다.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 휘 돈수(敦守)가 그 비조이다. 10대조(代祖) 소(劭)는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자금어대(紫金魚帒)를 하사받았으며 지삼사사(知三司事)가 되었다.
9대조 윤온(允蒕)은 민부전서(民部典書) 증(贈) 첨의정승(僉議政丞)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이고, 8대조 천선(千善)은 수사공주국(守司空柱國) 낙안백(樂安伯) 양간공(良簡公)이고, 7대조 인범(仁範)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다.
6대조 양(揚)이 비로소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공조 참의가 되었다. 5대조 명신(明晨)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평공(康平公)이고, 4대조 추(抽)는 지온양군사(知溫陽郡事) 증 좌찬성이고, 증조 의석(宜碩)은 경주 판관(慶州判官) 증 대사헌이고, 조부 휘 천(蕆)은 증 의정부 우찬성이다.
부친 휘 원수(元秀)는 사헌부 감찰 증 좌찬성으로 성품이 진실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고인(古人)의 풍모가 있었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바로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진사(進士) 명화(命和)의 따님으로 영수(英秀)하고 정정(貞靜)하며 고금(古今)에 박통(博通)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글을 잘 지었다.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 31) 12월 26일에 강릉(江陵) 임영(臨瀛) 북평촌(北坪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을 낳으려는 날 저녁, 신씨 부인(申氏夫人)의 꿈에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뛰쳐나와 침실로 날아 들어왔다. 선생의 소자(小字)를 현룡(見龍)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자품이 비상하여 말을 배울 무렵에 벌써 문자를 알았다. 겨우 3세 때 외왕모(外王母)가 석류(石榴)를 손에 쥐고 묻기를 “이것이 무엇과 닮았느냐?” 하니, 선생이 즉시 대답하기를 “붉은 가죽 주머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이 들어 있습니다.〔紅皮囊入碎紅珠〕” 하였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5세에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온 집안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분주했는데 선생은 외왕부(外王父)의 사당에서 몰래 기도하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너다 발이 미끄러져 거의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웃었으나 선생은 홀로 기둥을 껴안고 주목하며 근심스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가 그 사람이 무사히 물을 건너자 안심하였다. 그 효성과 인애(仁愛)의 마음은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6세에 강릉 외가에서 부모를 따라 경성으로 들어왔다. 7세에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는데 그 대략의 내용에 “군자는 내면에 덕을 쌓으므로 그 마음이 늘 평탄하고 소인은 내면에 유약함을 쌓으므로 그 마음이 늘 근심한다. 내가 복창(復昌)의 사람됨을 보건대 속으로는 근심스런 마음을 품고서 겉으로는 평탄한 척하려고 하니, 이 사람이 뜻을 얻어 현달(顯達)한다면 후일의 후환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때에 복창이 아직 현달하지 못했고 마침 이웃에 살고 있다.” 하였다.
9세에 장공예(張公藝)의 구세동거(九世同居)를 책에서 보고 개연(慨然)히 흠모하여 말하기를 “구세동거는 형편상 어렵겠지만 형제만은 서로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 하고는 손수 형제가 부모를 봉양하며 한집에서 함께 사는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또 전고(前古)의 충현(忠賢)의 사적을 모으고 각각의 사적마다 그 충현의 성명을 적어 두고서 보았다.
12세에 부친 찬성공(贊成公)의 병환이 위독하자 선생은 팔뚝을 찔러 피를 내어 부친의 입에 넣었고 사당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목숨을 대신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니, 부친의 병환이 나았다. 13세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입격했고 문장이 일취월장하여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학문에 전념하고 문장과 같은 소기(小技)를 좋아하지 않았다.
16세에 모친 신씨 부인이 별세하자 3년 동안 여묘(廬墓)하며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고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그리고 몸소 제사를 모셔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일도 동복(僮僕)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전후의 부모상(父母喪)에 모두 그렇게 하였다.
선생은 일찍 모친을 잃은 것을 슬퍼하여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울었다. 하루는 우연히 불가(佛家)의 책을 보다가 그 사생(死生)에 관한 설에 깊이 감동하고, 또 그 공부가 간편하고 청정(淸淨)한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를 버리고 출가(出家)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동행한 벗에게 서찰을 주어 작별하고 그대로 산사에 머물렀다. 당시 선생은 계율과 선정(禪定)이 견고하여 침식을 잊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오래지 않아 불가의 설의 근리난진(近理亂眞)한 곳을 간파하고는 마침내 그 공부를 모두 버리고 오도(吾道)에 전심하였다.
그리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오로지 성현(聖賢)을 준칙으로 삼았다. 일찍이 학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에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이 도(道)에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망녕되이 생각하여 몇 해 동안 사색하였으나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돌이켜 오도(吾道)에서 이치를 찾아보고서야 그 설이 그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23세에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선생을 배알하였고, 그 이후로 서찰을 왕래하며 의리(義理)를 논변하였는데 퇴계 선생이 선생의 설을 많이 따랐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선생의 〈화도산시(和陶山詩)〉를 보고 칭찬해 마지않으니, 퇴계 선생이 “시가 그 사람만 못하다.” 하였고 선생에게 보낸 서찰에서 “세간의 영재(英才)가 어찌 한량이 있으랴만 고학(古學)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군(君)과 같이 젊은 나이에 높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정로(正路)를 가기 시작하였으니, 훗날의 성취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하였다.
신유년(1561)에 부친 찬성공의 상(喪)을 당하였다. 갑자년(1564)에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서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이에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서 모두 장원급제한 것을 아울러서 사람들이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 일컬었으며, 곧바로 호조 좌랑에 배수되었다. 명묘(明廟)가 ‘석갈등용문(釋褐登龍門)’이란 제목을 내니, 선생이 30운(韻)의 율시를 지어 바쳤다. 이에 명묘가 가상히 여겨 은상(恩賞)을 특별히 후하게 하사하였다.
을축년(1565)에 예조 좌랑으로부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배수되었다. 선생은 신진(新進)으로서 갑작스레 언책(言責)을 맡을 수 없다는 이유로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내리지 않았다. 이에 동료들과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쓸 것〔立志勉學〕’, ‘정인을 가까이하여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할 것〔親正人固邦本〕’을 청하였다.
병인년(1566)에 이조 좌랑에 선임되자 선생은 개연히 공도(公道)를 회복할 것을 자임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 1)에 천추사 서장관(千秋使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고, 그해 겨울에 홍문관 부교리에 배수되었으니, 바로 선묘가 처음 즉위한 때였다.
선생은 소장을 올려 사직하기를 “신은 어린 나이부터 구도(求道)의 길에 들어섰으나 학문의 방도를 몰라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보며 분명한 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좋지 못한 시운(時運)을 만나 일찍 자모(慈母)를 잃었습니다. 이에 망녕되이 슬픔을 달래려 불가(佛家)의 서책을 탐독하고 그 학설에 침잠하여 미혹된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선문(禪門)에 들어가 공부한 것이 거의 1년이 되었는데 천행(天幸)으로 어느 날 잘못을 깨닫고 보니, 허탄한 불가의 학설의 파탄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이에 신의 장부(臟腑)를 꺼내어 씻어도 과거의 더러운 때를 다 씻을 수 없기에 스스로 세상에 버림받은 몸이 되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곧 세무(世務)를 사절하고 경서(經書)를 읽으면서 여생을 보내려 하였는데 신의 아버지가 신에게 조금 문장 솜씨가 있는 것을 아까워하여 굳이 과거를 보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이라 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도 스스로 생각건대 집안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연로한 터라 봉양할 길이 없기에 수치를 안고 허물을 가린 채 과거에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급제하기도 전에 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명환(名宦)에의 뜻이 마음속에서 당장 끊어지고 그저 작은 녹봉을 얻어서 기한(飢寒)이나 면하고자 했을 뿐이었으니, 어찌 뜻밖의 좋은 관직을 받고 과분한 성은을 입을 것을 기대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상이 비답에서 “예로부터 호걸의 선비조차도 불가의 설에 빠지곤 했으니, 지난날 선학(禪學)에 탐닉했다는 작은 잘못을 이유로 논사(論思)의 중임을 가벼이 체개(遞改)할 수 없다. 게다가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하고 다시 선생을 이조 좌랑에 배수하였다.
선생은 외왕모(外王母)의 병환이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강릉으로 귀성(歸省)하였다. 이에 언관(言官)이 법도에 맞지 않다 하여 선생을 탄핵하였으나 상이 선생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기사년(1569)에 교리(校理)에 배수되자 선생은 스스로 “학문의 진전이 없어 정치에 종사할 수 없습니다.
외조모는 양육해 준 은혜가 있으니 관직을 사직하고서 돌아가 봉양하고 학문의 진전이 있을 때를 기다려 조정에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비답에서 “왕래하며 성근(省覲)할 수 있는데 굳이 관직을 해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이조에 하교하기를 “비록 법례(法例)는 아니지만 특별히 성근하게 하라.” 하였다. 선생이 성은에 감읍(感泣)하여 직책에 나아갔다.
당시 명묘가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진하(陳賀)를 받으려 했는데 선생이 “상께서는 예제(禮制)를 겨우 마친 터에 곧바로 하례를 받고, 백관(百官)은 곡읍(哭泣)을 하던 끝에 이내 진하한다면 이는 노래와 곡(哭)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하(賀)’를 ‘위(慰)’로 바꿀 것을 청하였다.
일찍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인군(人君)이 선치(善治)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학문에 공력을 들여야 합니다. 학문이란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고 고서(古書)를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격물(格物)ㆍ치지(致知)와 성의(誠意)ㆍ정심(正心)에 힘써 실제로 공효(功效)가 있어야 비로소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지 몇 해인데 아직도 치효(治效)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적이 생각건대 격물ㆍ치지와 성의ㆍ정심의 공부가 아직 부족한 탓인 듯합니다. 만약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단지 형식에 치중한다면 비록 공맹(孔孟)이 늘 곁에 있으면서 매일같이 도리를 얘기한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상신(相臣)이 “승지가 청대(請對)하는 것은 근래의 규례가 아니니, 체통을 무너뜨릴까 걱정이다.” 하자 선생이 “단지 그 말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가에 달렸을 뿐입니다. 만약 말한 것이 옳다면 체통에 무슨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승지도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니, 청대하여 언사(言事)하는 것이 그 직분입니다.
오늘날 선정(善政)이 제대로 거행되지 못해 온갖 제도가 해이하니, 만약 분발해 진작하여 일대(一代)의 규모를 쇄신하지 않고 한갓 상규(常規)와 구례(舊例)에만 구애된다면 어찌 적폐(積弊)를 제거하여 큰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대신(大臣)이 임금을 정도(正道)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직 근래의 규례만 준수하니,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경연에 와서 문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자 선생이 아뢰기를 “입시(入侍)하는 신하는 미리 진달할 바를 강구하느라 밤낮으로 생각했더라도 막상 상의 앞에 가면 천위(天威)에 눌려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하고 열에 여덟아홉은 잊어버립니다. 상이 허심탄회하게 응수하더라도 오히려 신하가 제 생각을 다 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침묵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막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공헌대왕(恭憲大王)께서 200년 종사(宗社)를 전하께 맡기셨으니, 전하께서는 근심을 받으신 것이지 즐거움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어찌 덕행(德行)이 없으면서 사업(事業)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삼대(三代)의 선치(善治)는 갑작스레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덕행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사(政事)는 하루도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덕행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정사를 불문에 부치고 문란하건 말건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입니까? 덕행과 사업은 아울러 닦고 함께 추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일찍이 동호서당(東湖書堂)의 월제(月製)를 지으면서 선생이 문답을 가설하여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치안(治安)의 도를 진달하고 그 글을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 명명하였다.
상이 “동호문답에서 한(漢)나라 문제(文帝)를 자기(自棄)한 임금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문제는 자질이 훌륭한 임금으로 한(漢)나라의 융성기를 만났으니, 고도(古道)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그 정치에 패도를 섞고 말았으니, 큰 뜻은 없고 낮은 의론만 좋아하였기 때문에 자기한 임금이라 한 것입니다. 입지(立志)가 높지 않은 임금은 대체로 모두 자기한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중궁(中宮)을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선생이 시폐(時弊)를 진달하는 소장에서 왕비를 간택하는 도리를 아울러 진달하기를 “옛날의 제왕은 혼인한 배필이 모두 인현(仁賢)의 후손이었으며, 배필을 구하는 도리는 ‘요조숙녀(窈窕淑女)를 자나 깨나 찾도다. 찾아도 얻지 못하여 자나 깨나 생각하도다.’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처럼 대궐 뜰에 규수를 모아 놓고 우열을 가렸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용자(容姿)와 복식(服飾), 또는 점괘의 길흉으로 등급을 매기지 말고 먼저 그 부모가 어진 사람인지를 살펴 그 가법(家法)을 관찰하고 다음으로 위의(威儀)가 법도에 맞는지를 살펴 그 여덕(女德)을 관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대신에게 묻고 중의(衆意)에 맞은 뒤에 결정하면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상이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일을 언급하니, 영의정 이공 준경(李公浚慶)이 “을사년의 화(禍)에 착한 선비들도 혹 연좌되어 죽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대신의 말이 모호해서야 되겠습니까. 사직(社稷)을 보위했다고 한 것은 모두 위훈(僞勳)이요 당시에 죄인이 된 이들은 모두 착한 선비입니다.
인묘(仁廟)께서 승하하시자 중묘(中廟)의 적자(嫡子)로는 단지 명묘(明廟) 한 분밖에 없었으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어찌 다른 곳으로 쏠리겠습니까. 그런데도 간흉(奸凶)들이 감히 하늘의 공(功)을 탐내어 사림을 도륙하여 위훈으로 공신이 되었으니, 귀신과 사람이 분울(憤鬱)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 성상께서 새로 즉위하신 당초에 응당 위훈을 삭제하고 명분을 바로잡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공이 “선조(先朝) 때 있었던 일이니, 갑작스레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그렇지 않습니다. 명묘께서 유충(幼沖)할 때 즉위하시어 비록 간흉에게 기만을 당하고 말았지만 지금은 하늘에 계신 혼령도 간흉의 정상을 환히 알고 계실 터이니, 비록 선조의 일이라 하나 어찌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경오년(1570)에 또 교리(校理)에 배수되었다. 당시 백공 인걸(白公仁傑)이 상소하여 을사년(1545)과 기유년(1549, 명종4)의 억울한 죄인을 신원(伸冤)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정부와 삼사(三司)가 함께 의논하였으나 그래도 위훈(僞勳)을 삭제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선생이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은 정치의 근본인데 명분이 바르지 못하기로는 위훈보다 심한 것이 없다.” 하고 옥당에서 위훈을 삭제할 것을 힘써 주장하였다. 당시 명현대신(名賢大臣)도 혹 어려운 일로 여겼으나 선생은 홀로 항의(抗議)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릇 옥당이 올린 41통의 차자 중 5, 6통의 차자 외에는 모두 선생이 지은 것이었다. 정축년(1577)에 이르러 선생이 지난날 주장한 의론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성상의 뜻을 돌릴 수 있게 되니, 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으나 누차 사양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선생이 박공(朴公)에게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청류(淸流)들을 두루 모아 물의를 진정시키고 성의를 힘써 쌓아서 성심(聖心)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공이 만약 고사(固辭)하여 속배(俗輩)가 권병을 잡는다면 이는 국가를 그르치는 것입니다.” 하니, 박순이 그제야 출사하였다. 김공 계휘(金公繼輝)가 선생에게 “지금의 조신(朝臣) 중 대사(大事)를 맡을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니, 선생이 “박화숙『(朴和叔): 화숙(和叔)은 박순(朴淳)의 자이다.』이 표리(表裏)가 결백하고 성심으로 나라를 근심합니다. 다만 정신과 기백이 약하게 태어난 것이 아쉽습니다.
백로『(白老): 백인걸(白仁傑)을 가리킨다.』는 심사(心事)는 비범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뜻이 간절하지만 기상이 거칠고 학문이 엉성하여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퇴계 선생 같은 분은 학문이 정밀하고 덕망이 높아 큰일을 할 수 있으나 끝내 큰일을 담당할 뜻이 없습니다.
기명언『(奇明言): 명언(明彦)은 기대승(奇大升)의 자이다.』은 기개가 일세(一世)를 덮으니, 호걸의 선비입니다. 다만 자부심이 너무 지나쳐서 온화하고 겸손하게 남의 선(善)을 받아들이는 뜻이 없습니다. 굳이 고른다면 화숙(和叔)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사암이 과연 크게 등용된 것이다.
겨울에 사직하고 해주(海州)로 돌아갔다.신미년(1571)에 파주(坡州)로 돌아와 이조 정랑에 배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얼마 뒤 교리(校理)로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검상(檢詳), 사인(舍人), 부응교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해주로 돌아가 학도들과 고산구곡(高山九曲)을 유람하며 그 천석(泉石)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중 제5곡(曲)에 복거(卜居)하였다.
6월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고을을 다스릴 때 교화에 역점을 두어 손수 향약법(鄕約法)을 지어 백성을 가르쳤다. 오래지 않아 병으로 체직하였다. 임신년(1572)에 또 부응교에 배수되자 사은(謝恩)한 뒤에 다시 사직하고 임진강(臨津江) 가의 누각으로 돌아갔다.
원접사(遠接使)가 선생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사양하였으며, 사간, 부응교에 배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학문의 진전이 없으므로 정치에 종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누차 현요직(顯要職)을 사양하였으며, 진설(陳說)한 모든 내용은 반드시 요순(堯舜)과 삼대(三代)의 선치(善治)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상이 “이이는 본래 오활(迂闊)한 자이다.”라고 하교하였다.
전한(典翰), 직제학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교장(交章)을 올려 선생을 유임할 것을 청하였으나 결국 유임시키지 못했다. 선생은 감군은(感君恩) 4장(章)을 짓고는 배를 타고 파주로 돌아갔다. 계유년(1573) 가을, 또 직제학에 배수되었는데 세 차례나 소명(召命)을 내려 마지않자 마침내 입조(入朝)하였다.
상이 선생을 소견(召見)하고 사퇴를 쉽게 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병은 깊고 재주는 엉성하기에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큰일을 할 수 없고 한갓 녹봉만 축낼 뿐이라 차라리 사퇴하여 죄과(罪過)를 면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대의 재주는 내가 아는 바이다. 이제부터 다시는 사퇴하려 하지 말라.” 하니, 선생이 “필부가 책을 읽어도 오히려 뜻이 제세(濟世)에 있는 법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큰일을 할 만한 자품을 타고나셨고 큰일을 할 만한 형세를 잡고 계시거늘 어찌 개연(慨然)히 분발하는 뜻이 없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성심으로 선치(善治)를 원하신다면 그 한 생각이 바로 〈관저(關雎)〉ㆍ〈인지(麟趾)〉의 뜻입니다. 게다가 인군(人君)은 숭고한 자리에 계시니, 반드시 신하들의 견해를 두루 듣고 허심탄회하게 좋은 것을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신하들이 모두 임금의 스승이 되고 모든 선(善)이 임금의 몸에 모여 덕업(德業)이 이로써 높고 넓어질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 자신에 만족한다면 선언(善言)이 무슨 수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겸허하고 퇴양(退讓)하시는 뜻이 언사(言辭)에 넘칩니다. 그러나 공론을 따르지 않으시고서 자신을 옳다고 하며 남을 그르다고 하시는 때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남은 나보다 못하다.’라고 여기시는 병통이 있습니다.
삼공(三公)이 비록 건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성상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 그저 침묵하며 시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성상의 뜻이 선치를 이루는 데 있으면 대신도 반드시 소견을 다 말하고 정신(廷臣)들도 저마다 소회를 진달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동부승지로 승진했는데 연중(筵中)에서 매양 큰 뜻을 분발할 것을 상에게 권면하는 한편 진달하기를 “예로부터 사람은 소견이 같지 않습니다. 오활한 선비는 ‘요순(堯舜)의 선치를 조석 사이에 이룰 수 있다.’라고 하고, 속된 선비는 ‘고도(古道)는 결코 오늘날에 실행할 수 없다.’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입니다.
정치는 반드시 요순의 시대를 표준으로 삼아야 하고 사공(事功)은 반드시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신이 매양 요순과 삼대의 정치를 상의 앞에 진달한 것은 대뜸 그러한 효험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오늘 한 가지 일을 시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시행하여 점입가경(漸入佳境)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조광조(趙光祖)가 치군택민(致君澤民)의 큰 뜻을 품고서 연소한 사류(士類)들이 일을 너무 급박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사림의 화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을 맡은 사람들은 늘 기묘년의 일을 경계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묘년에 일을 너무 급박하게 추진하다 실패한 것이 어찌 오늘날 아무 일도 추진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임금은 모름지기 터럭만 한 사의(私意)도 없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감발(感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언관(言官)이 논사(論事)할 때 궁금(宮禁)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면 전하께서 반드시 굳게 거부하시니, 신하들은 전하께서 사의를 가지고서 침묵으로써 체통을 지키는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또 누차 출신(出身)하지 않은 사람을 대헌(臺憲)의 자리에 넣을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의론을 대신에게 하달하여 시행하였다.
신하들이 퇴계 선생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행장이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이황(李滉)은 일생 동안 의리의 학문에 침잠하였고 그 언론과 풍지(風旨)는 비록 옛날의 명현(名賢)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니, 행장이 있고 없는 것 때문에 무슨 증감(增減)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賢人)에 대해 그 행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포숭(褒崇)을 아끼시는데 하물며 당시의 선비들에 대해 어찌 선(善)을 좋아하는 정성을 가지시겠습니까. 이황의 시호는 비록 한두 해 늦게 내려진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 선을 좋아하는 정성이 없다고 사방의 선비들이 의심한다면 그 해(害)는 어찌 작겠습니까.” 하였다.
이 당시에 선생은 임금의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마지못해 종사(從仕)하고 있었다. 우계(牛溪) 선생 성혼(成渾)이 말하기를 “유자(儒者)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하니, 상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속히 인책(引責)하고 물러나야 한다.
상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 먼저 사공(事功)에 힘쓰면 이는 왕척직심(枉尺直尋)이라 유자가 할 일이 아니다.” 하니, 선생이 “이 말이 진실로 옳다. 그렇지만 상의 마음을 당장에 돌릴 수 없으면 의당 천천히 오래 정성을 쌓아 상이 감오(感悟)할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만약 천박한 정성으로 순월(旬月)의 짧은 기간 안에 효험을 얻고자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문득 인책하고 물러나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인신(人臣)의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갑술년(1574)에 선생이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기탄없이 진달하니, 상이 비답에서 “소장의 내용을 보니, 요순군민(堯舜君民)의 뜻을 알겠다. 참으로 훌륭한 의론이니, 고인(古人)일지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선치를 이루지 못할 것을 어찌 근심하리오. 그대의 충성을 깊이 가상하게 여기노니, 어찌 감히 명심하지 않겠는가. 다만 경장(更張)할 일이 많으므로 갑자기 다 변혁할 수는 없다. 대신과 의처(議處)토록 하겠다.” 하는 한편 선생의 소장을 등서(謄書)하여 올릴 것을 명하였다.
선생은 비록 상의 권우(眷遇)를 입었으나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혹자는 선생이 조정을 떠나지 않는 것을 의심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물러나자니 성상의 마음을 혹 돌릴 수도 있을 듯하고 조정에 머물자니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였다.
하루는 상이 선생에게 “한 문제(漢文帝)는 어찌하여 가의(賈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니, 선생이 “한 문제는 비록 어진 임금이었지만 지취(志趣)가 높지 못한 탓에 가의의 말이 큰 것을 보고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무릇 사람은 큰 뜻이 있은 뒤에야 큰일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비유하자면 주인은 작은 집을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 하면 주인이 어찌 목수의 말을 들으려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상에게 아뢰기를 “지금 백성의 곤궁함이 날로 심해져 가고 있으니, 경장(更張)하지 않으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조종(祖宗)의 법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공안(貢案)으로 말하자면 연산군(燕山君)이 경정(更定)한 것이지 조종의 법은 아닙니다. 신은 경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폐(民弊)를 고치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기강이 진작되지 않는 것을 상이 탄식하자 선생이 “기강이 국가에 있는 것은 마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일신(一身)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호연지기는 의(義)가 모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 일이 우연히 의에 맞다고 하여 갑자기 호연지기를 밖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아침에 한 가지 의를 실천하고 저녁에 한 가지 의를 실천하여 의가 몸에 축적되어 위를 우러러보아도 부끄럽지 않고 아래를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뒤에야 호연지기가 충만하고 유행(流行)하는 것입니다.
기강도 마찬가지이니, 하루아침에 발분(發憤)한다 하여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공평정대(公平正大)한 마음을 정사(政事)에 베풀어 곧은 사람은 반드시 기용하고 굽은 사람은 반드시 축출하며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과가 있으면 반드시 형벌을 주면 기강이 절로 서게 됩니다.” 하였다.
당시 반중(泮中)의 유생들이 나이로 서열을 정하니, 유속(流俗)의 사람들이 비난하기를 “장원(壯元)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도 예속(禮俗)이다. 어찌 나이가 많다고 하여 장원한 사람 위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선생이 “장원을 존경하는 것은 동방(同榜)의 모임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균관은 인륜을 밝히는 곳이니, 장유(長幼)의 서열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 세자(世子)가 입학(入學)해도 오히려 나이 순서로 앉히는 법인데 장원의 존숭(尊崇)함이 세자와 비교해 어떠한가?” 하였다. 일찍이 병으로 승지를 사직하니, 상이 비답에서 “그대는 의당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나의 부덕(不德)을 보필해야 할 것이니, 사퇴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 대사간에 배수되어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하루는 상이 의영고(義盈庫)에 명하여 황랍(黃蠟) 500근을 내수(內需)로 바치게 하였는데 궁중 밖에서는 어디에 쓸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혹자는 “불사(佛事)에 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용도가 바르다면 속히 성의(聖意)를 보여 뭇사람의 의혹을 풀어 주시고, 용도가 바르지 않다면 황랍을 내수로 바치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상이 “내수의 물건은 신하들이 감히 용도를 물을 바가 아니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궁중에는 허다히 황랍을 쓸 곳이 별로 없으니, 이는 필시 정당하지 않은 목적에 쓰일 터라 사람들에게 그 용도를 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사마광(司馬光)은 자신이 평생 한 일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일찍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신등이 바야흐로 정심(正心)ㆍ성의(誠意)를 전하께 바라고 있는데 이 한 가지 일에서 전하의 뜻을 환히 보여 주지 못하신다면 남이 보지 않아 사심(私心)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곳에서는 어찌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전하의 뜻을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환히 보여 군하(羣下)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옛날 양 무제(梁武帝)가 입이 아프도록 꿀을 달라고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오늘 그러한 경우를 다시 보게 될 줄 몰랐구나.” 하였다.
이에 선생이 동료들과 함께 사직하며 아뢰기를 “해사(該司)의 물건은 전하의 소유이니, 그 용도가 바르다면 군하는 전하의 뜻을 받들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도가 바르지 않다면 비록 해사라 할지라도 의당 복역(覆逆)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언관(言官)이 어찌 감히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외간에 전파된 말로는 혹 이 황랍으로 장차 불상을 조성할 것이라 하니, 신등이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단지 안으로 마음을 돌이켜 보시어 그러한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면려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실을 숨기고 준엄하게 거절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날 순(舜) 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간(諫)한 이가 10명이었으며, 무왕(武王)이 포어(鮑魚 소금에 절인 어물)를 좋아하였으나 태공(太公)은 올리지 않으며 말하기를 ‘예(禮)에 포어는 조(俎)에 올리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이 어찌 임금에 대한 사랑과 공경이 부족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충신은 덕(德)으로써 임금을 사랑하고 예(禮)로써 임금을 공경하는 법이고, 임금의 뜻을 무조건 받들어 따르기만 하는 것은 도리어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리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가령 이교(異敎)를 숭봉(崇奉)한다 하더라도 옛날에 조성한 불상도 많은데 무엇 하러 새로 불상을 조성하겠는가. 누구에게 그러한 말을 들었는가? 내가 나국(拿鞫)하겠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소문으로 전파된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굳이 사람들을 일일이 나국하고자 하신다면 이는 위(衛)나라 무당이 비방을 감시했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신등의 망언한 죄를 다스리면 될 것입니다.
굳이 위엄을 세워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사방의 이목을 놀라게 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에서 “말을 들은 사람을 감히 숨기다니, 이것이 임금에게 소회를 숨기지 않는 도리인가. 응당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한 죄를 받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소문으로 전파된 말은 그 말의 뿌리를 힐난하여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알지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핍박하여 물으시니, 이는 뇌정(雷霆)의 위엄으로 신하들의 기운을 꺾어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간(臺諫)이 무릇 들은 바가 있으면 그것이 비록 전파된 소문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임금을 섬김에 소회를 숨기지 않는 도리입니다. 만약 굳이 소문으로 전파된 말을 끝까지 따져서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한 죄를 간신(諫臣)에게 씌우려 하신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이렇게 누차 아뢰었는데 말이 갈수록 더욱 직절(直切)하고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윽고 상이 자못 뉘우치고 황랍을 도로 의영고로 내려 줄 것을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누차 임금의 엄한 꾸짖음을 받았으므로 조정에 있는 것이 편안치 않다 하여, 입시(入侍)하여 병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를 청하니, 상이 “병이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할 수 없다. 은거(隱居)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고시(古詩)에 ‘귀 씻고 인간사를 듣지 않고서 푸른 솔을 벗하고 사슴과 어울려 논다.〔洗耳人間事不聞 靑松爲友鹿爲羣〕’ 하였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의 은사(隱士)는 임금과 군신(君臣)의 교분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을 잊고 좋은 산수 속에서 자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신은 성은을 받은 것이 매우 무거우니, 비록 초야에 있더라도 마음은 전하를 잊지 못할 터이니 퇴거(退居)한들 무슨 즐거울 게 있겠습니까. 단지 녹봉만 축낼 수 없기에 부득불 사퇴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고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면(遞免)되었다. 그리고 이내 승지에 배수되었으나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선생이 도성을 떠날 무렵 최공 영경(崔公永慶)이 “군(君)의 자처(自處)는 응당 이와 같아야 하겠지만 시사(時事)는 어찌할 것이오?” 하니, 선생이 “자처가 미진하고서 시사를 구제하는 사람은 없소.” 하였다. 노공 수신(盧公守愼)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모(李某)가 경석(經席)에서 상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했으니 일이 생길까 두렵다.
내가 만류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니,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내가 조정에서 물러가면 말하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소재(蘇齋) - 재상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 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였다. 황해도 관찰사에 배수되자 외직이라 하여 배명(拜命)하였다.
그리고 상소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진달하는 한편,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높이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군정(軍政)을 정비하는 데에 힘썼다. 이듬해에 질병으로 체직(遞職)되어 파주로 돌아오자 곧바로 부제학에 배수되었기에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喪)이 있어 선생은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경성에 들어왔다. 지평 민순(閔純)이 졸곡(卒哭) 후에 임금이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고사에 따라 흰옷을 입고 흰 관을 쓰고 정사를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정신(廷臣)들의 의론을 모으니, 모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조종(祖宗) 때 찬정(撰定)한 것으로 시행된 지 오래이니, 지금 바꿀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고례(古禮)를 인용하여 아뢰기를 “반드시 선왕(先王)의 예(禮)에 다 맞게 하고자 한다면 상하가 모두 《의례(儀禮)》의 제도와 같이 최질(衰絰)을 입고, 따로 포모(布帽), 포삼(布衫), 포대(布帶)를 만들어 정사를 보실 때 입는 복장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이와 어긋났으니 차라리 송나라 효종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고례에 가까울 것입니다. 현관(玄冠)ㆍ오대(烏帶)와 같은 제도는 송나라 고종(高宗) 때 나점(羅點)이 건의한 바로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그 잘못이 상세히 변론(辨論)되어 있으니, 어찌 주자의 의론을 따르지 않고 나점의 의론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국조오례의》를 찬정할 때 예(禮)를 모르는 유신(儒臣)이 선왕(先王)을 정례(正禮)로 인도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오늘에 그러한 잘못을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신(相臣) 박순ㆍ노수신과 대사간 김계휘가 이 주장에 동조하여 마침내 흰옷을 입고 흰 관을 쓰고 정사를 보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상이 조회(朝會)에서 특별히 선생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말하기를 “부제학이 향리로 돌아갔다가 이어 감사(監司)가 되었기에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 하고, 이어 해서(海西)의 질고에 대해 묻고는 오래도록 온유(溫諭)하였다. 선생이 묻기를 “듣건대 전하께서 시신(侍臣)에게 ‘내가 학문을 하고 싶으나 일이 많아 겨를이 없다.’라고 했다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 하였다.
선생이 “신이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하였습니다. 기뻐한 것은 전하께서 학문할 뜻을 가지신 것을 기뻐한 것이고, 근심한 것은 전하께서 학문의 이치를 살펴 알지 못하시는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학문이란 단정하게 앉아서 종일토록 책을 읽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일상생활 중의 처사(處事)가 일일이 다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합니다.
처사가 이치에 맞는지 여부를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책을 읽어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단지 책을 읽는 것만 학문으로 여기고 일상생활 중의 처사를 이치에 맞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른바 학문이란 것이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자질이 아름답고 사욕이 적으시니, 학문에 있어서는 하지 않으실지언정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또 “어저께 본관(本館)의 차자(箚子)에 대해 내리신 비답에서 ‘그다지 고론(高論)이 없다.’ 하셨는데 만약 단지 전하의 겸사일 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만약 실제로 신등의 말을 고론으로 여기신다면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한 문제(漢文帝)는 삼대(三代)의 정치에 관한 말을 고론으로 여겼기 때문에 공렬(功烈)이 저토록 낮았으니, 이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상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사서(四書)의 소주(小註)에 온당치 못한 곳이 많으니, 다소 산개(刪改)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고 싶다.
경이 이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이는 신의 학력으로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학문이 있는 선비는 출신(出身) 여부를 막론하고 함께 의논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지난날 대신이 나에게 성혼(成渾)을 불러 보게 했는데 나도 만나 보고 싶다.
다만 아직 출신하지 않은 사람은 경연(經筵)에 참석한 예(例)가 없으니, 비록 현자(賢者)를 부른다 하더라도 한 번 보아서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전하께서 참으로 큰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비록 구례(舊例)에 없더라도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문이 있는 선비는 한직(閑職)을 주고 윤일(輪日)로 경연에 입시하게 하면 성덕(聖德)을 이루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사헌부 관리가 참람(僭濫)된 복장을 한 궁노(宮奴)를 붙잡았는데, 그 궁노가 관리를 때리고 도망쳐 왕자의 집에 숨어들어 갔다.
이튿날 사헌부가 다른 관리를 보내어 그 궁노를 잡아서 감옥에 넣었다. 상이 이 사실을 듣고 사헌부의 관리가 왕자의 집에 난입(闌入)한 것으로 여겨, 그 사헌부의 관리를 금부(禁府)에 수감할 것을 명하여 하교하기를 “사헌부는 왕자의 집에서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사헌부가 이 일로 인피(引避)하여 관리가 왕자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선생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 일은 상하가 서로 잘못한 것입니다. 사헌부 관리가 한 행동은 대관(臺官)이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니, 어찌 그 사람이 왕자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곧바로 왕자의 집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도 전하께서 눈으로 보신 바가 아니고 단지 부시(婦寺)의 말을 들은 것일 뿐입니다. 부시의 말은 모두 믿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왕자의 그 하인은 평소 방자하기로 소문난 자이니, 응당 엄히 검속(檢束)해야 할 것입니다.
후씨(侯氏)는 일개 부인(婦人)인데도 오히려 자식을 가르치는 방도를 알아서 일찍이 ‘남에게 굽히지 못할까 걱정해야지 남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아들이 남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아뢰기를 “근자에 사헌부의 관리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법을 지키느라 성지(聖旨)를 거스른 신하를 전하께서 몹시 싫어하신 것이니, 신은 민망합니다.
예로부터 아첨하고 빌붙는 자는 후일에 반드시 임금을 저버리고, 정도를 지켜 아부하지 않는 자는 후일에 반드시 충성을 다하는 법입니다.
주창(周昌)의 일만 보더라도 주창이 몹시 강경하게 정쟁(廷諍)한 것은 조왕(趙王)을 사랑하지 않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후일에 주창이 조왕의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해 조왕을 보호하여, 여후(呂后)가 조왕을 죽이려 하자 주창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정도를 지키는 절개가 있었기 때문에 후일에 조왕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러한 뜻은 전하께서 아실 뿐 아니라 비빈(妃嬪)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침묵하였다. 선생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예의(銳意) 주력하여 학문과 정사에 요긴한 경전(經傳) 및 사가(史家)의 글들을 모아서 분류하여 수기(修己)ㆍ치인(治人)의 순서로 책을 편집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차자를 올려 이 책을 바치고 훗날 입시하니, 상이 “그 책은 치도(治道)에 매우 도움이 된다. 다만 나와 같이 불민(不敏)한 임금이 실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어나 대답하기를 “옛날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이는 요순(堯舜)의 일이니,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정 백자(程伯子 정호(程顥))가 서글픈 기색으로 말하기를 ‘폐하의 이 말씀은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말씀도 이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의겸(沈義謙)이 사인(舍人)이 되어 영상(領相)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윤원형의 사위의 서실(書室)에 사인(士人)의 침구(寢具)가 있는 것을 보고 사람에게 물어서 그가 김효원(金孝元)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효원은 당시 아직 등제(登第)하지 못하였으나 문명(文名)이 있었는데 심의겸이 내심 그를 비루하게 여겨 남에게 말하기를 “어찌 사인으로서 권문(權門)에 유숙하는 자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에 김효원이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재명(才名)이 날로 알려졌다. 이에 전관(銓官)이 김효원을 천거하여 전랑(銓郞)을 삼고자 하니, 심의겸이 번번이 예전의 일을 이유로 저지하였다. 그 후에 김효원이 마침내 전랑이 되어 누차 심의겸의 단점을 들추어서 공공연히 배척하니, 선배들이, 심의겸은 사림을 부호(扶護)한 공로가 있다고 여겨 “김효원이 보복하려고 이러한 말을 한다.”라고 말하자 김효원의 무리들도 외척이라 하여 심의겸을 배척하였다.
이로부터 사림의 선후배가 서로 불화하여 마침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자취가 있게 되었다. 선생은, 심의겸과 김효원이 서로 맞버티어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상신(相臣) 노공 수신(盧公守愼)에게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모두 사류(士類)인데 결국에 서로 불화하여 근거 없는 말로 서로 비난하니, 대신이 진백(陳白)하여 이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내면 조정이 진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노수신이 옳다고 여겨 연중(筵中)에서 진백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 일이 반드시 깊은 혐극(嫌隙)을 만들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의 친구들이 저마다 들은 말을 전파하여 마침내 분란을 일으키고 말았으니, 대신의 이 말은 조정을 진정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만약 소인이 붕당이라 지목하여 두 사람 모두를 치죄할 계책을 꾸민다면 사림의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특명을 내려 김효원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심의겸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내보냈다. 김효원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독계(獨啓)하기를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내자는 의론은 신이 실로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사림의 공론이지만 김효원은 질병이 심중(深重)하니 이 근력으로 북새(北塞)의 직임을 맡는다면 어찌 일을 주획(籌劃)하여 변방을 굳건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대신의 뜻은 단지 조정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 김효원에게 죄가 있어 방축(放逐)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컨대 내직에 옮겨 제수하여 안으로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온전히 이루고 밖으로는 변방의 방어를 굳건히 지키소서.” 하니, 상은 선생이 김효원에 편당(偏黨)한다고 여겨 엄한 비답을 내리고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선생이 연중(筵中)에서 더욱 간절히 진백하니 그제야 김효원을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고쳐 제수하였다.
선생은 인재를 보합(保合)하고자 하여 오직 현능(賢能)한 사람을 뽑았다. 이에 혹자가 선생에게 이르기를 “천하에 양시양비(兩是兩非)는 없는 법인데 공은 오늘의 일에 시비를 분간하지 않고 양전(兩全)의 방책에만 힘쓰니 사람들의 불만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니, 선생이 “심의겸과 김효원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알력이 생긴 나머지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데 이른 것일 뿐이니, 참으로 양비(兩非)입니다. 비록 양비이나 두 사람 모두 사류(士類)이니, 다만 양쪽이 원한을 풀고 화해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굳이 한쪽을 옳다 하고 한쪽을 그르다 하고자 한다면 서로의 알력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하였다. 요우(僚友)가 이 말을 따르지 않자 선생은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심의겸과 김효원 양쪽의 사람들이 모두 전별하러 오니, 선생이 “내가 지금 정론(定論)을 말하고자 하니, 제공(諸公)들은 들어 보시오. 권간(權奸)이 탁란(濁亂)할 때 그 기세를 꺾고 조정을 정화하여 사론(士論)을 신장시킨 것은 어찌 방숙『(方叔): 심의겸의 자이다.』 등 제공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백(仁伯) - 김효원의 자이다. - 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배척하여 선배들은 울분을 품고 사림이 서로 반목하게 하였으니, 이는 인백의 죄입니다. 이미 현실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공론이 그를 억제하여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이치에 맞는 처사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를 너무 심하게 미워하여 서로 조화(調和)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배의 죄입니다. 이렇게 논단(論斷)하면 실정에 맞을 것입니다.” 하니, 모두 선생의 말을 공론으로 여겼다.3월에 관직을 해임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그리고 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병조 참의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축년(1577)에 해주(海州)로 돌아갔다. 선생은 늘 종형(宗兄)이 조몰(早歿)하여 조상의 신주가 과부가 된 형수의 집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고산(高山)의 옛날에 복거(卜居)하던 곳에 집을 지어 사당을 세우고는 백형수(伯兄嫂) 곽씨(郭氏)에게 청하여 종가(宗家)의 신주를 모시고 형제 조카들을 다 모아서 한집에 함께 살게 함으로써 평생의 뜻을 이루었다.
이에 원근의 학도들이 소문을 듣고 날로 모여들어 더 이상 사람을 수용할 곳이 없게 되었다. 선비들이 힘을 모으고 재목을 모아 거실 동쪽에 정사(精舍)를 지어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은병정사(隱屛精舍)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염락(濂洛)의 군현(羣賢)들 중 집대성자(集大成者)로는 주자(朱子)만 한 분이 없고 우리 동방에서 주문(朱門)의 성법(成法)을 삼가 지킨 분으로는 정암(靜庵)ㆍ퇴계(退溪) 두 선생만 한 분이 없다 하여 정사의 북쪽에 주자의 사당을 세우고 두 선생을 배향하였다.
매양 봄가을이면 선생이 제생(諸生)들을 거느리고 제향(祭享)을 올리고 학규(學規) 및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어서 제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사창(社倉)을 만들어 곡식을 비축하여 두었다가 형편이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떠서 향약을 만들어 향속(鄕俗)을 면려하였다.
당시 상이 대원군의 사당에 친제(親祭)하니, 옥당이 차자를 올려 불가하다 하였다. 이에 상이 매우 노하였다. 선생이 이 사실을 듣고 “주상이 대원군의 사당에 친히 제사한 것은 예(禮)에 어긋남이 없고 정리(情理)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옥당이 무슨 소견으로 그만둘 것을 청한단 말인가.
예(禮)에는 공조례(公朝禮)가 있고 가인례(家人禮)가 있고 학궁례(學宮禮)가 있다. 공조례는 임금을 존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제부(諸父)라 할지라도 임금에게 신하의 예(禮)를 공손히 갖추는 법이고 다만 친부(親父)는 신하로 삼을 수 없다.
가인례는 존속(尊屬)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부형(父兄)의 아래에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한(漢)나라 혜제(惠帝)가 궁중에서는 제왕(齊王)의 아랫자리에 앉았던 것이 이 경우이다. 학궁례는 스승을 존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원로에게 절하는 의식이 있었다.
예컨대 한나라 명제(明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이 이 경우이다. 더구나 대원군은 성상의 몸을 탄생하신 분이니, 가령 생존해 계신다면 성상이 궁중에서 만날 때 반드시 절을 할 것이다. 지금 그 사당에 들어가 질자(姪子)가 숙부에게 제사하는 예(禮)를 갖추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속유(俗儒)는 한갓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것이 예인 줄만 알고 사친(私親)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니, 참으로 개탄할 만하다.” 하였다.
무인년(1578)에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의 상(喪)이 있어 선생이 대사간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경성에 들어와 사은한 다음 다시 파주로 돌아갔다. 이때 “배가 가매 종남산이 멀어지는 것 차마 못 보겠으니, 이르노라 사공이여 돛을 달지 말라.〔舟行不忍終南遠 爲報篙師莫擧帆〕”라는 시구를 지었다.
5월에 또 대사간에 배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소장에서 “신의 말이 받아들여진다면 신의 몸은 비록 초야에 물러나 있더라도 조정에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에서 “소회가 있거든 봉사(奉事)를 올려 진달하라.” 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극도로 진달하니, 모두 1만여 자가 되는 장문이고 내용이 모두 개절(凱切)하였다. 성우계(成牛溪)가 그 소장을 읽고 말하기를 “참으로 직언하고 극간(極諫)한 경세(經世)의 방책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소장이 올라가자 대사간을 체면(遞免)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에 정원과 옥당이 이는 선비를 대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이조 참의에 배수되었고 기묘년(1579)에는 또 대사간에 배수되었으나 모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사림이 서로 편을 나누어 반목하는 것을 근심하였다.
정철(鄭澈)과 이발(李潑)은 모두 인망은 있으나 소견이 편벽하다 하여 그들에게 서찰을 보내 책망하기를 “군(君)들의 논의가 서로 화합하면 국사(國事)가 잘 될 것이다.” 하였으나, 이발이 시의(時議)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크게 배척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심의겸은 비록 외척이지만 기실 선인(善人)입니다.
지금 심의겸을 함정으로 삼아 사류(士類)들을 연루(連累)해 넣습니다. 정철은 충청(忠淸) 강직하여 일심으로 국가를 근심하는 사람이며, 김계휘는 청백(淸白) 유아(儒雅)하고 치체(治體)를 익히 잘 아는 사람이며, 한수(韓脩)는 염정(恬靜) 노성(老成)하고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을 모두 사당(邪黨)이란 명목을 씌워 조정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 사람이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도 이미 애석할 만한 일인데 더구나 취모멱자(吹毛覓疵)가 이에 그치지 않음에 있어서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소장을 보지 않았다.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세척할 것을 청하려 했는데 늙고 병든 몸이라 뜻을 잘 전달하도록 문장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에게 소장의 문장을 윤색(潤色)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선생은 그 우국(憂國)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송응형(宋應泂)이 자취를 감추고 대술(代述)하였다는 이유로 선생을 탄핵하니, 백인걸이 상소하기를 “송(宋)나라 정이(程頤)는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논복왕전례소(論濮王典禮疏)〉를 지었고 부필(富弼)을 대신하여 〈논영소릉소(論永昭陵疏)〉를 지었으니, 이러한 일은 선유(先儒)도 이미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이(李珥)의 글을 쓰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이가 신을 유혹하여 상소하게 했다고 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못난 사람이지만 어찌 감히 신의 본의가 아닌 일을 남의 지시에 따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경진년(1580) 겨울에 또 대사간에 배수되었다. 이때 상이 막 병환이 나은 터라 선생을 보고 싶어 하여 매우 격절(激切)한 유지(諭旨)를 내렸다. 선생이 감격하여 명을 받고 경성에 들어가니, 상이 선생을 인견하여 위로하며 묻기를 “오래도록 보지 못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고사(古史)를 두루 보니, 큰일을 해내는 임금은 대대로 출현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처음 즉위하셨을 때부터 신민(臣民)들이 태평 성세를 이루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럭저럭 세월만 보낼 뿐 별로 진작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대병(大病)이 나으신 뒤에 선단(善端)이 개발(開發)하여 내리시는 호령이 인심을 열복(悅服)시키니, 신민들의 기대가 처음 즉위하셨을 때와 다름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치세를 이루겠다는 뜻을 굳게 잡고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들인 다음 그들에게 일을 위임하여 성공을 책려하시면 거의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한갓 그릇된 규례만 지키면 치도(治道)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야대(夜對)에서 아뢰기를 “고인(古人)이 야대를 주강(晝講)보다 낫다고 한 것은 만물이 잠든 밤, 임금과 신하가 고요 속에 서로 대화하면 사려가 전일(專一)하여 계옥(啓沃)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상께서 학문의 의심스런 곳 및 시정(時政)의 득실을 신등에게 하문(下問)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학문은 반드시 소득이 있어야 의심할 수 있는 법이므로 질문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선생이 “옛날에 맹자(孟子)가 제 선왕(齊宣王)에게 묻기를 ‘사경(四境) 안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제 선왕이 좌우를 돌아보다가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주자(朱子)가 ‘제 선왕은 큰일을 할 수 없다.’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지금 사경의 안이 다스려지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인신(人臣)이 녹(祿)을 먹었으면 마땅히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한다.”라고 하교한 적이 있었다. 선생이 “인신은 의당 분의(分義)를 중시해야 합니다. 만약 은록(恩祿)만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은록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의를 중시하는 사람은 인군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는 따지지 않고 모두 절의(節義)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은록만 중시한다면 그 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 하였다. 선생이 또 “상께서 성혼(成渾)에게 성은을 내리신 것은 근고(近古)에 드문 일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성혼이 어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들어서 알지만 그 재주가 어떠한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선생이 “재주도 한 가지가 아니니, 국가 경륜의 책임을 홀로 맡을 수 있는 이도 있고, 선(善)을 좋아하여 뭇 인재들을 기용할 수 있는 이도 있습니다. 성혼의 재주는 국가를 경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되겠지만 그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이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신사년(1581)에 큰 가뭄이 들어 국가의 비축된 식량이 이미 고갈되었다. 선생이 깊이 근심하여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만약 폐법(弊法)을 변통하여 현재의 간난을 구제하지 않고 단지 이 지방의 곡식을 저 지방으로 옮겨서 백성을 살리려 한다면 옮길 수 있는 곡식도 없을 것입니다.” 하고, 연중에서 물러나 동료들과 차자를 올려 폐법을 변통하고 공안(貢案)을 개정하며 감사(監司)의 임기를 오래 연장하여 주현(州縣)을 모두 살필 수 있게 할 것을 청하는 한편, 자기를 수양함으로써 정치의 근본을 맑게 하고 사욕을 제거함으로써 조정을 화합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국계(國系)에 관한 무함을 아직도 시원하게 씻지 못한 상황이었다. 선생이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국군(國君)이 200년 동안이나 무함을 받고 있는데도 신원하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사신을 제대로 뽑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청사(奏請使)는 의당 지성으로 중국 조정을 감동시키되 성공하지 못하면 중국 연산(燕山)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전대(專對)할 사신을 가려 뽑으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혹자는 선생을 사신으로 보내자고 하였는데 대신이 “이이(李珥)는 하루도 조정을 떠나서는 안 된다.” 하여 그만두었다. 선생이 어명을 받들어 주문(奏文)을 지어 바치니, 상이 읽어 보고 “좋다. 이보다 더 잘 지을 수는 없다. 대사(大事)를 장차 이룰 수 있겠다.” 하였다.
6월에 특명으로 대사헌에 승진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론이 더욱 분열하여 기필코 심의겸을 공격하여 제거하려 하였다.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연석(筵席)에서 그러한 주장을 펴니, 선생이 “심의겸은 산직(散職)에 있은 지 이미 오래이고, 단지 선후(先后)의 지친(至親)이기 때문에 그 녹봉을 잃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국가의 은의(恩義)에 무슨 불가할 것이 있다고 기필코 그를 논죄(論罪)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군의(羣議)가 더욱 과격해져 선생이 제지할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너무 과격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파급(波及)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정인홍이 뒤에 아뢸 때 “사류를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援附士類〕”라는 등의 말을 덧붙였다. 상이 “사류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묻자, 정인홍이 정철(鄭澈) 등의 사람들을 열거하여 대답하기를 “이들이 서로 결탁하여 형세를 엿보았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정인홍에게 말하기를 “계함(季涵) - 정철의 자이다. - 은 강개(剛介)한 선비이니, 만약 심의겸과 결탁하여 형세를 엿보았다고 한다면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하니, 정인홍이 즉시 선생의 말을 따르고 독계(獨啓)하여 피혐(避嫌)하였다. 이에 삼사(三司)의 의론이 분분하여 정언(正言) 윤승훈(尹承勳)이 정철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선생을 공격하였다.
선생이 집의 남언경(南彦經), 지평 유몽정(柳夢井)과 더불어 아뢰기를 “정철은 성격이 강퍅하여 남을 포용하지 못하다 보니 사론(士論)이 과격한 것에 분노한 기색을 자주 말과 안색에 나타내었으며, 시배(時輩)들도 정철의 심사(心事)를 깊이 살펴보지 않고 실상에 지나친 말로 공격하였습니다.
선비들이 정철을 의심하는 것이 심할수록 정철의 불평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에 말을 만들어 내어 일을 일으키는 자들이 양쪽 모두를 무함하여 양쪽 사이에 점점 반목의 골이 깊어져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정철도 물론 옳지 않지만 정철을 두고 심의겸을 편당(偏黨)했다고 하는 것도 공론(公論)이 될 수 없습니다.
저 윤승훈이 무슨 식견이 있겠습니까. 사류의 풍지(風旨)를 받들어서 그것에 추부(趨附)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선생의 인피(引避)를 계기로 삼아 선생을 체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준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누차 사직을 청하자 그제야 체직을 허락하고 특명을 내려 윤승훈을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내보냈다. 선생이 입시(入侍)하였다가 자신의 허물을 인책(引責)하여 진달하기를 “윤승훈의 말은 시론(時論)에 영합하려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직한 성품의 신이 성급하게 그를 공척(攻斥)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그를 꺾으셨으니, 이 일로 말미암아 직언(直言)하는 선비들이 말을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박공 순(朴公淳)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숙헌(叔獻)과 같은 이는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될 만하다. 연소한 이들은 식견이 암매(暗昧)하여 긴요하지 않은 일로 이토록 서로 쟁변(爭辨)하고 국사(國事)는 도외시하니, 사슴을 뒤쫓느라 태산(泰山)을 보지 못하는 격이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대사간에 배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호조에 결원(缺員)이 생기자 상이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하였다. 대신이 맨 먼저 선생을 천거하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시키고 호조 판서에 배수하였다. 당시 천재(天災)가 심하여 널리 대책을 자문하였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치란(治亂)의 형세가 이미 결정되면 재이(災異)가 없는 법이니, 재이는 치란이 나뉘려는 즈음에 반드시 일어납니다.
아조(我朝)가 입국(立國)한 지 거의 200년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치란이 나뉠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때에 분발하여 진작(振作)한다면 억만년의 무궁한 복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장차 국가의 명맥이 궤파(潰破)하고 쇠진하여 손을 쓸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인군(人君)은 반드시 당시의 폐단을 잘 알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한 시대의 선치(善治)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는 의원은 반드시 병근(病根)이 어디 있는지를 안 뒤에야 그 증상에 맞는 약을 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폐단을 혁파하는 일은 신의 망녕된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으로 하여금 상의(商議)하여 부서를 만들고 경제사(經濟司)라 명명한 다음 대신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며 시무(時務)에 통달한 사람을 가려 뽑아 안건을 건의하고 시행하여 폐정(弊政)을 혁파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실치(實治)를 이룰 수 있고 천심(天心)을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화를 밝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현(先賢)을 존숭하여 후학의 본보기가 있게 해야 하는데 성상께서는 매양 이를 어려운 일로만 여기십니다. 아조(我朝)의 선현들을 모두 사전(祀典)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예컨대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였고 이황(李滉)은 이굴(理窟)에 침잠하였으니, 이들을 먼저 종사(從祀)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사림의 여망을 진작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옳다고 하였으나 실제로 시행하지 않은 것은 경장(更張)을 꺼려서였다.
얼마 뒤 대제학에 배수되었고, 임오년(1582)에는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는데 모두 누차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로지 구폐(舊弊)를 고치고 사로(仕路)를 맑히는 데 힘썼다. 가을에 체직하고 우참찬에 배수되었으며, 얼마 뒤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우찬성에 배수되었다.
상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선악기도(善惡幾圖) 및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규범(學校規範)을 지어 바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선생은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려 시폐(時弊)를 극도로 진달하니, 비답에서 “충간(忠懇)을 잘 알았다. 자신을 책려하고 큰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작고 미미한 과인의 몸에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세상사와 마음이 서로 어긋나고 말았으니, 나도 홀로 탄식한다.” 하였다.
겨울에 황조(皇朝)에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급사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을 보내 황태자 탄강(誕降)의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선생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압록강 가에서 이들을 영접하던 날, 이 두 중국 사신이 한참 동안 선생을 주목하다가 역관(譯官)에게 묻기를 “자못 산림(山林)의 기상이 있으니, 임하(林下)의 선비를 임시로 불러내어 우리를 대접하는 것은 아닌가?” 하였다.
역관이 대답하기를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서 시종(侍從)의 반열에 오래 있다가 중년에 질병으로 사직하고 물러나 임하(林下)에 은거하였습니다. 지금은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지 이미 오래이니, 실로 임하의 선비가 아닙니다.” 하였다. 중국 사신이 또 묻기를 “그렇다면 바로 〈천도책(天道策)〉을 지은 분인가?” 하기에 - 선생이 과거를 볼 때 〈천도책〉을 지어 장원을 차지하니, 이 글이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고 중국에까지 전해져 들어갔다.
그리하여 두 사신도 이미 이 글을 보고 선생을 흠앙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이렇게 물은 것이다. - “그렇다.”라고 대답하니, 두 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중에 수창(酬唱)할 때 선생이 붓을 잡고 즉시 시를 지었는데도 문사(文辭)와 의사(意思)가 모두 아름다우며 절로 법도에 맞으니, 두 중국 사신이 탄복하며 말하기를 “대수(大手)로다, 대수로다.” 하고는 매우 지극하게 예경(禮敬)하고 반드시 율곡 선생이라 불렀다.
그리고 문묘(文廟)에 가서는 선생에게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의 뜻을 강해(講解)해 줄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즉시 그 설(說)을 지어 바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이 설이 극히 좋으니, 중국에 전포(傳布)해야겠다.” 하였다. 두 사신이 중국으로 돌아가다 압록강 가에 이르렀다.
중국의 정사(正使)가 미리 칠언(七言)의 장편과 장률(長律)을 지어 두었다가 출행(出行)할 무렵에 갑자기 꺼내어 화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창졸간에 시를 짓게 하여 선생의 재주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이 즉석에서 그 시에 보운(步韻)하고 그것을 손수 써서 바치니, 두 사신이 서로 돌려 보면서 재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작별할 때에는 선생의 손을 잡고 연연(戀戀)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조사(詔使)가 빈상(儐相)을 애경(愛敬)한 것은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다.” 하였다. 선생은 중국 사신을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조 판서에 배수되어 사양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계미년(1583)에 정고(呈告)하여 면직(免職)을 청하는 한편 문형(文衡)과 주병(主兵)은 모두 중임이므로 병무(兵務)를 해임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비답에서 “경은 늘 폐정(弊政)을 경장(更張)할 것을 전후로 지성스럽게 진달했으니, 이것이 경의 평소의 뜻이었다. 지금 경이 진실로 좋은 계책을 내어서 유폐(流弊)를 모조리 혁파하고 양병(養兵)의 규모를 세운다면 국가의 다행일 것이다. 경은 노력하라.” 하였다.
당시 북도(北道)에는 변방의 호인(胡人)들이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던 터라 선생은 마침내 병조 판서의 직무를 맡았다. 병조의 사무가 매우 번다한 데다 마침 변방이 경보(警報)가 다급한 때라 문서가 구름처럼 많이 쌓였는데 선생은 좌우로 응수하며 물 흐르듯 처결하면서도 조리가 정연하고 대소의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올려, 현능(賢能)한 사람을 임용할 것,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갖출 것, 번병(藩屛)을 견고히 지킬 것, 전마(戰馬)를 구비할 것, 교화를 밝힐 것 등을 진달하였으며, 또 봉사(封事)를 올려 “조정을 화합하고 폐정(弊政)을 혁파하는 것이 근본이며, 군병과 식량을 조달하고 방어를 견고히 하는 것은 지말(枝末)입니다.
지금 당론(黨論)이 날로 과격하여 사화(士禍)가 장차 일어날 태세이니, 조정 사대부를 융화하고 탕척(蕩滌)하며 진정하고 조화하는 한편 잘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한 상벌(賞罰)을 한결같이 공도(公道)에 따름으로써 국시(國是)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조정이 이미 화합한 뒤에야 인재를 얻어서 폐정을 혁파하는 문제를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청하기를 “서얼(庶孼) 및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모집하여 무재(武才)가 있는 자는 북변(北邊)에 수자리를 살게 하고 무예가 없는 자는 변방에 곡식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군비 강화에 도움이 되게 하되 그 서얼은 허통(許通)하고 천례(賤隷)는 양민으로 만드소서. 이는 모두 세조조(世祖朝)에 이미 시행한 규례로, 북비(北鄙)에 경보가 몹시 다급하고 국가의 군병과 식량이 모두 부족한 지금에는 이러한 권도(權道)의 방책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그리고 전일에 건의한 공안(貢案)과 군적(軍籍)을 개정할 것을 다시 청하였다.
상이 비답에서 “내가 우연히 경이 올린 전일의 소장을 보고 있는데 지금 경의 소장이 또 마침 왔구나. 전후로 올린 소장에서 용렬한 임금을 잊지 않는 경의 고충(孤忠)을 알겠다.” 하였다. 선생의 뜻은 오직 연산조(燕山朝)의 폐정 중 아직 다 혁파하지 못한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한편, 근래의 잘못된 규례가 예전의 제도를 혼란시키는 것들을 혁파하고 오로지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쇠폐(衰廢)한 제도를 고쳐 구법(舊法)을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선생이 경장(更張)하고자 한 것은 기실 복고(復古)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에 하루 세 번 올리는 제사 및 산릉(山陵)에 삭망(朔望)으로 올리는 제사를 비례(非禮)라 하여, 산릉에는 사절(四節)에만 제사하고 문소전과 연은전에는 하루에 한 번 제사함으로써 사사(祀事)를 신중히 하고 민력(民力)의 부담을 줄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는 선생이 전후로 누차 진달하여 마지않은 것이었으나 상의 뜻은 일시(一時)에 가볍게 고치는 것을 곤란하다고 여겼다. 상이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서는 혹 듣기 싫어할 때도 있었으나 공정하고 충성스러워 편당(偏黨)하지 않으며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선생의 모습을 보고 선생에 대한 권애(眷愛)와 신임이 매우 두터우니 시배(時輩)들은 날이 갈수록 선생을 꺼리고 미워하여 선생을 해칠 방도를 꾀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재학(才學)과 덕망은 흠잡을 데가 없었으므로 상이 폐정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헤아려 알고는 마침내 경장(更張)한다는 것으로 지목하여 선생이 건의할 때마다 번번이 방해했다. 그리하여 근거 없는 의론으로 공격하여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취모멱자(吹毛覓疵)하였으나 선생은 정색(正色)을 하고 입조(立朝)하여 남의 비방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름에 북방의 호인(胡人)이 재차 거병(擧兵)하여 종성(鍾城)을 오래 포위하니 변보(邊報)가 날로 다급하고 국내가 소요하였다. 이에 선생은 밤낮으로 근심하며 심력(心力)을 다 쏟아 낮에는 저녁까지 공무를 보고 밤에는 옷의 띠를 풀지 않은 채 등잔불을 밝히고 아침까지 앉아 있었다.
공사(公事)가 오면 즉시 받아 처리하고 지체하지 않았으며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여 완급(緩急)에 따라 적절한 차서(次序)를 두니, 사람들이 신복(信服)하여 조용하면서도 일이 완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상의 마음이 더욱 흡족하여 선생을 신임하였고 선생을 시기하는 자들은 해칠 방도를 더욱 도모하였다.
당시 사수(射手)는 뽑았으나 관가에 전마(戰馬)가 없어 갑자기 전마를 갖추기가 어려웠다. 선생은 을묘년(1555)에 전사(戰士)들이 민가의 말을 약탈한 일을 경계로 삼아 이 문제가 난(亂)을 일으키는 계제가 될까 깊이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뽑은 전사들 중에서 늙고 약하여 말을 바쳐 변방으로 가는 전사에게 공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응모할 사람이 있을지 여부를 미리 알 수 없는 터라 시기를 앞당겨 명을 내려 모집하였다. 이에 말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전사들의 출정이 급박하여 시기를 늦출 수 없었다. 선생이 한편으로는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는 말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상이 즉시 그렇게 할 것을 윤허하였다. 이에 출정하는 사람들은 말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방역(防役)을 면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공사(公私)에 두루 편리하였다.
하루는 변보(邊報)가 들어와 상이 불시(不時)에 선생을 불렀다. 선생은 평소 현훈증(眩暈症)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도한 업무로 피로가 쌓인 나머지 더욱 증세가 악화되었다. 그래서 병든 몸으로 명에 나아갔으나 병이 너무 심해 인사(人事)를 살필 수 없기에 내병조(內兵曹)에 들어가 누웠다.
이에 삼사(三司)가 권병(權柄)을 전천(專擅)하고 교만하여 상에게 태만하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니, 이른바 권력을 전천하고 상에게 태만하다는 것은 바로 위의 두 가지 일을 가리킨다. 이보다 앞서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이 모두 선생에게 공척(攻斥)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원한을 품고 합세하니, 이들을 돕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원한을 쌓아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터뜨려 누차 선생을 탄핵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으니 그제야 정지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인구(引咎)하고 죄를 청하니, 상이 비답에서 “경은 식견이 명민하고 재주가 높으며 충성으로 나라를 생각한다.
지금 변방이 다사다난한 때에 바야흐로 경의 모유(謨猷)에 의지하여 북방을 진무(鎭撫)하고 군민(軍民)을 안정시키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모두 여섯 차례 상소하였는데 성상이 자상하고 간절한 내용의 비답을 내려 직무를 맡아 줄 것을 재촉하는 한편 하교하기를 “아득하고 적막한 천고(千古)의 세월에 훌륭한 군신(君臣)이 만나서 공업(功業)을 이루어 낸 것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겨우 있었다.
경은 접때 내린 하교를 듣지 못했는가? 내가 조정에서 물러나라고 명한 뒤에 물러나라고 한 그 정녕(丁寧)한 말은 귀신도 헤아려 알 터인데 경이 어찌 차마 오늘 사퇴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부득이 예궐(詣闕)하여 자핵(自劾)하기를 “대간(臺諫)이 정계(停啓)한 것은 오래도록 윤허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을 전연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 한 것은 필시 신이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를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만약 성상께서 넉넉히 포용해 주시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뻔뻔스럽게 정치에 종사한다면 종전에 누차 올린 신의 소장은 단지 성총(聖寵)을 공고히 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으로 너무도 의리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스스로의 처신이 옳지 않으면서 어떻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죄명(罪名)을 들어 좌우에 자문하여 만약 용서할 만하다고 한다면 신이 비록 마음에 미안하지만 감히 애써 조반(朝班)을 수행(隨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실제로 범법했다고 한다면 찬축되고 주벌(誅罰)을 받는다 하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에서 “경의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는 비록 이와 같이 해야겠지만 내가 이 일을 좌우에게 자문한다면 이는 터럭만큼이라도 경을 의심하는 뜻을 가진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사간 송응개, 헌납 유영경(柳永慶), 집의 홍여순(洪汝淳) 및 전한(典翰) 허봉 등이 다시 대간을 업신여기고 공론을 무시했다고 탄핵하고 심지어 “아랫사람을 막고 상의 이목을 가리니, 그 뜻이 장차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말까지 하였다.
상이 수교(手敎)를 대신에게 내리기를 “근래 이이(李珥)의 언어상의 문제를 가지고 대간이 격분하여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에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우연히 낸 말이 아니다. 이이가 예전부터 신진을 억제하고 그들이 시세(時勢)를 좇고 편당을 짓는 것을 싫어하여 누차 그 문제점을 진론(陳論)하다가 시론(時論)의 미움을 받은 지가 오래이다.
그 때문에 시배(時輩)들이 기회를 틈타고 틈을 엿보아 기필코 이이를 탄핵하여 제거하고야 말려는 것이다. 무릇 공경대부(公卿大夫) 중에 소명을 받고도 오지 않는 이가 많았지만 ‘상에게 태만했다.’라는 말로 논죄한 경우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어찌하여 대간의 말이 유독 이이에게만 직절(直截)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을 바치게 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던 것도 허다한 사무를 보느라 미처 보고할 겨를이 없었던 것에 불과하니, 이 어찌 권병(權柄)을 전천(專擅)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대저 권병을 전천하고 상에게 태만한 것은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이다.
인군(人君)이 소민(小民)에게도 오히려 실정을 벗어난 죄명을 경솔하게 씌울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재상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미 ‘권병을 전천하고 상에게 태만했다.’ 했으면 어찌하여 그 죄를 바로 밝혀서 왕법(王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감히 파직을 청하기를 마치 을사년(1545)에 간신배들이 반역이라는 죄목을 씌우고는 파직으로 처벌한 것처럼 한단 말인가.” 하였다.
대신이 회계(回啓)한 뒤에 하교하기를 “이이는 출사(出仕)할 리가 없고 병무(兵務)는 매우 급하니, 우선 체직하여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 지금 북방에 병란이 일어나 국가가 위망(危亡)한 때에 조정이 혼란하여 현사(賢邪)를 분변할 수 없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나는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
아, 이이는 향리로 잘 돌아가 백운(白雲) 사이에 높이 누웠으니, 누가 그를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조야(朝野)가 분격하고 행인들도 개탄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징소(徵召)를 받고 경성에 왔다가 상소하여 선생의 사정을 해명하니, 상이 비답에서 “그대의 상소를 보매 충분(忠憤)이 격렬하니, 간사한 무리들이 이 내용을 들으면 놀라 간담이 깨어지겠구나. 군자의 한마디 말이 국가의 경중(輕重)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사실이구나.” 하였다.
그리고 삼공(三公)을 불러 하교하기를 “이이를 배척한 것은 누가 한 짓인가? 간사한 무리와 붕당(朋黨)을 지은 자는 누구인가? 변별하여 아뢰라.” 하니, 영상(領相) 박순(朴淳)이 청대(請對)하여, 선생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일한 실상과 허봉, 송응개 등이 때를 틈타서 무함한 정상을 낱낱이 진달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다시 선생 및 박순과 성혼을 함께 탄핵하여 추악한 말로 마구 헐뜯었다. 그러자 태학생(太學生) 유공신(柳拱辰) 등 470명, 전라도 유생 서태수(徐台壽) 등 240명, 황해도 유생 유대춘(柳帶春) 등 180명이 선생을 위해 차례로 항소(抗疏)하고 궐문(闕門)에 모여 신변(伸辨)하였다.
상이 비답에서 “그대들의 소장을 보니 충성스런 직언이 격발하였다. 의기가 이와 같으니, 다시 무엇을 근심하리오. 지금의 사풍(士風)이 멀리 한(漢)ㆍ송(宋)을 능가하는구나.” 하였다. 왕자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삼현(三賢 이이, 성혼, 박순을 가리킴)은 곧 사림의 영수인데 삼사의 무함을 입었습니다.” 하니,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이 아뢰어 하락이 편당(偏黨)한다고 하였다.
상이 비답에서 “그대들은 남의 말을 막아 임금의 총명을 가리려 하는가? 이와 같이 하여 끝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대저 공론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대간이라 하여 옳은 것도 아니고 반드시 추요(芻蕘)라 하여 그른 것도 아니다.
지금 대간의 말이 나오자 인심이 불복하고 의사(義士)가 분격하여 장차 사람들이 사방에 항의하고 나설 터이니, 그대들이 힘을 다해 사태를 미봉(彌縫)하려 해도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또 아뢰어 유생을 두고 패란(悖亂)하다고 하였고, 양사는 아뢰어 박근원 등을 두고 직언하였다고 하였다.
상이 비답에서 “송(宋)나라 때 육적(六賊)이 국정을 맡고 이강(李綱)이 도성을 떠나자 태학생 진동(陳東) 등이 상소하여 극론(極論)하였으니, 천추의 후대에도 그 풍절(風節)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소매를 떨치고 분연히 일어난다. 지금 조정의 의론이 옳지 못한 것을 보고 유생들이 창의(倡義)하여 소장을 올렸으니, 그 충의(忠義)의 간담이 늠름하여 범접하지 못할 기상이 있다. 참으로 평소에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횡류(橫流) 중의 지주(砥柱)라 할 만하다.
태학(太學)은 공론이 있는 곳이다. 조정의 시비는 일시적으로 어지러울 수도 있지만 태학의 공론은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설사 과격한 유생의 말이 혹 중도에 지나친 점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이와 같이 대우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정직한 기상이 청송(靑松)을 능가하여 고절(高節)이 우뚝함에랴.
저 하찮은 몇몇 신하들이 근밀(近密)한 지위에 앉아서 마음대로 붕당을 만들어 사람들의 언로(言路)를 막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서 감히 유생을 지목하여 패란하다 하니, 이는 황잠선(黃潛善)의 소행을 뒤따르려는 것이다. 참으로 기탄없이 간특한 짓을 자행하는 소인이로다.
내가 즉시 유배하고 찬축하는 법을 거행하지 않아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캄캄한 밤중에 마구 날뛰게 하였으니, 이미 형벌의 시행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양사가 도리어 이러한 자들을 신구(伸救)한단 말인가.” 하고는 어필(御筆)로 친히 교서(敎書)를 써서 박근원, 송응개, 허봉 등을 찬축할 것을 명하였다.
그 교서에 “간사한 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법(司法)이 형벌을 잘못 시행하여 국시(國是)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유배의 형전(刑典)을 거행하여 길이 후세의 본보기로 삼노라. 박근원 등은 간사한 성품으로 작은 기국(器局)을 믿고서 부박(浮薄)한 무리와 결탁하고 붕당을 만들어 자기 쪽의 사람들을 조정에 끌어들여 요로를 점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자는 후사(喉司)의 자리를 더럽히고 어떤 자는 대시(臺侍)의 벼슬을 차지하여 마구 성세(聲勢)를 떨치고 사설(邪說)을 떠들어서 정권을 농락하고 조정을 협박하며 대신을 모함하고 충현(忠賢)을 배척하였다. 이러한 붕당을 이룬 자취가 이미 밝혀졌는데도 오히려 자기들의 주장을 공론이라 일컫고, 보복한 작태가 다 드러났는데도 자신들의 행위를 방정하다 말하니, 소행과 말이 모두 거짓이다.
충량(忠良)한 신하가 억울한 죄명을 받았으니 그 악(惡)은 조정을 탁란(濁亂)시킨 점에서 극도에 이르렀으며, 군소배(羣小輩)들이 득의하여 날뛰고 있으니 그 죄는 국가를 그르쳤다는 점에서 용서받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고 조야(朝野)가 다 함께 분노하고 있다. 그래도 극형(極刑)에서는 벗어나 가급적 가벼운 형벌을 받게 하노라.……” 하였으며, 이어 하교하기를 “이이를 두고 붕당을 이룬다고 하니, 이러한 말로 나의 뜻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아, 진실로 군자라면 그의 당(黨)이 있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그의 당이 적을까 근심해야 할 것이라 하였으니, 나도 주희(朱熹)의 이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 지금 이후로는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오직 이이와 성혼을 헐뜯고 배척하면 반드시 그 죄를 물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하교하기를 “삼사의 논의는 심의겸으로 국중(國中)에 함정을 만들어 놓고 무릇 한 시대의 명신(名臣)과 현사(賢士)들 중 자기네와 주장이 다른 이들을 기필코 그 속에 밀어 넣고서 공공연히 심의겸의 당으로 만들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한 번 이러한 죄명을 씌워 놓으면 사람들이 구원할 수 없고 임금도 의심할 터이니, 우리의 목적을 얻을 수 있고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보면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듯 그 속셈이 훤히 드러난다는 것을 유독 모르고 있으니, 비록 10년 동안 그러한 주장을 편다 해도 어찌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며 어찌 나의 뜻을 흔들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파주에서 해주로 내려간 지 오래지 않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소명(召命)을 받고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비답에서 “아, 하늘이 우리 국가를 잘 다스려진 세상으로 만들고 싶지 않는 것인가. 생각건대 하늘이 경으로 하여금 동심인성(動心忍性)하여 부족한 부분을 더욱 보완하게 하여 장차 후일에 주즙(舟楫)과 임우(霖雨)의 중책을 맡기려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하늘이 경에 대해서는 잘 다듬어서 좋은 옥으로 만들어 준다 할 만하니, 경에게 무슨 손실이 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선생이 또 상소하여 간절히 사직하니, 상이 비답에서 “경은 조정의 중신이니, 임하(林下)의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따라서 경의 일신의 진퇴도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데 나에게 와서 사직의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도망쳐 숨는 사람과 같다. 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기갈에 물을 찾는 것보다 간절하니, 설혹 사직하더라도 반드시 내 앞에 와서 직접 말하는 것이 예(禮)에 맞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부득이 소명을 받고 도성에 들어가니, 상이 즉시 인견(引見)하였다. 선생이 스스로 인구(引咎)하여 진사(陳謝)한 다음 찬축한 세 사람을 방환(放還)할 것을 힘써 청하는 한편 이어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우계 성혼에게 “세 사람은 언관(言官)으로서 죄를 받아 원찬(遠竄)되기에 이르렀으니, 반복해 진계(陳啓)하여 성상의 뜻을 돌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 우계 성혼과 함께 입시하여 전후로 간절히 진계하였으나 성상의 노여움이 끝내 풀리지 않았다.
선생은 자신이 외로운 형세로 남다른 은권(恩眷)을 받고 있다 하여 전적으로 조정을 조화하는 데 힘쓰고 피차를 따지지 않으며 오직 양변(兩邊)의 사류들을 수습하는 것으로 선무(先務)를 삼았다. 그러나 시배(時輩)들이 모두 대각(臺閣)에 포진되어 의심을 품은 채 고망(顧望)하고 주저하며 눈치만 볼 뿐 함께 일할 뜻이라곤 없자, 선생은 탄식하기를 “시배들 중 마음이 공정한 사람은 오랫동안 내가 하는 일을 보면 필시 나의 적심(赤心)을 알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홀연 대사동(大寺洞) 우사(寓舍)에서 병으로 역책(易簀)하고 말았다. 이날 밤, 가인(家人)의 꿈에 흑룡(黑龍)이 선생의 침방(寢房)에서 나와 지붕을 뚫고 나가 하늘로 날아갔고, 그 이튿날 아침에 선생이 운명하였으니, 갑신년(1584, 선조 17) 1월 16일이었다. 선생이 조정에 돌아와 정무를 본 지 겨우 60여 일이었고, 향년은 49세였다.
운명하기 이틀 전에 서익(徐益)이 순무 어사(巡撫御使)로 명을 받고 북변(北邊)을 안찰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그를 불러 방략(方略)을 지시해 주려 했다. 선생의 건강을 염려하여 자제들이 다투어 말리자 선생은 “이는 국가의 대사이니, 내 어찌 신병(身病)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이 중요한 기무(機務)를 놓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린 것이니, 내 어찌 반드시 이 일 때문에 죽기야 하겠느냐.” 하고는 부축받아 병든 몸을 일으켜 입으로 방략을 부르고 아우 이우(李瑀)를 시켜 받아쓰게 하니, 모두 여섯 조목이었다. 이것이 선생의 절필(絶筆)이다. 글을 다 쓰자 기력이 가물가물 쇠진하더니, 마침내 병이 위독해졌다.
임종에 정신이 없을 때에도 잠꼬대처럼 하는 말들이 모두 국가의 일이었고 집안일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고 남의 집에서 옷을 빌려 염습하였다. 그리고 도성에는 집이 없어 처자식이 의탁할 곳 없이 이리저리 전전하며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선생의 붕우와 선비들이 곡식과 베를 거두어 도성 안에 집 한 채를 사 주었으며, 또 서자(庶子) 두 사람을 위해 곡식을 국가에 납부하여 사로(仕路)를 허통(許通)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선생이 와병 중일 때 상이 날마다 태의(太醫)를 보내고 계속하여 약을 보내었으며, 부음이 들리자 너무도 심하게 애통(哀慟)하여 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그리고 소선(素膳)을 올릴 것을 명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 조제(弔祭)하는 한편 연로(沿路)의 주군(州郡)에 명하여 운구(運柩)를 잘 호송하게 하였다. 이에 선생과 종유하던 선비들과 풍문을 듣고 선생의 의기를 흠모하는 사람들 및 궁향(窮鄕)의 시골 백성들까지도 모두 모여서 거애(擧哀)하고 슬피 통곡하며 서로 조문하기를 “생민(生民)이 복이 없다.” 하였다.
태학생 수백 명과 금군(禁軍), 저자의 백성, 유품(流品)의 서관(庶官), 각사(各司)의 이서(吏胥)들도 모두 와서 지극한 슬픔으로 조곡하고 갔다. 발인하던 날에는 교외에서 바라보며 횃불을 잡고 전송하는 사람들이 무려 수십 리에 이어졌으며, 거리마다 사람들이 슬피 오열하고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해 3월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선영에 안장하였다.
부인(夫人) 노씨(盧氏)는 곡산(谷山)의 망족(望族)인 종부시 정(宗簿寺正) 경린(慶麟)의 따님으로 인순(仁順)하고 자애로워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으며, 종사(宗姒 종부(宗婦)인 동서)를 받들어 모심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조석의 상식(上食)을 반드시 손수 지었으며,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도 삭망(朔望)의 곡전(哭奠)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종족을 대하고 첩들을 보살피는 것은 한결같이 선생이 살아 계실 때의 범절을 그대로 본받았다.
임진년의 변란 때 부인이 자질(子姪)들에게 말하기를 “큰 도적이 세상에 가득하니, 필시 살길이 없을 것이다. 피난하다 타향에서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여기 파산(坡山)에서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피난하고 훗날 묘소 곁에서 나의 유골이나 잘 수습해라.” 하였다.
자질들이 누차 말리니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지아비를 잃은 지 8년이니, 나의 목숨도 모질지 않느냐. 더구나 대란(大亂)을 만났으니, 구차히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였다. 부인은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주(神主)를 모시고 파산으로 돌아갔다. 적이 이르자 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다가 선생의 묘소 곁에서 피살되었다. 이에 파주 고을에서 이 사실을 상주(上奏)하니, 상이 정려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측실(側室)에 아들 둘을 두었으니 경림(景臨), 경정(景鼎)이고, 딸은 하나이다. 경림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제(穧)는 진사(進士)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경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딸은 진사 김집(金集)의 첩이 되었다.
선생은 천자(天資)가 지극히 높고 출중하게 영준하였다. 그 인품은 청명(淸明)하고 온수(溫粹)하며 충후(忠厚)하고 화락(和樂)하여, 관대하면서도 절제가 있고 화합하면서도 시류(時流)에 빠져들지 않으며 고도(古道)를 사모하면서도 고착되지 않고 시속(時俗)에 적응하면서도 그 속에 섞여들지는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면 가슴을 열어 숨김없이 적심(赤心)을 환히 드러내 보였으며, 처사(處事)는 평탄하여 위세와 격의(隔意)를 두지 않았다. 종일토록 낙이(樂易)하였고 화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 용모에는 광휘가 환히 어리고 덕의 광채가 밝게 비쳐 나왔기에 바라보면 상운(祥雲)ㆍ서일(瑞日)과 같아서 성덕(盛德)의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소싯적에는 비록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일람하다 선학(禪學)에 빠져들었지만 기질이 명투(明透)하였기에 그 잘못을 깨닫고 이내 정학(正學)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용력(用力)이 더욱 깊어지고 학문이 더욱 전일하였으며 심력을 다해 사색하고 정밀한 조예로 실천하였다.
학문의 이치에 있어서는 대원(大原)을 통견(洞見)하여 사승(師承) 없이도 견해가 오묘한 도에 암합(暗合)하였다. 그 공부의 차제를 보면 오로지 염락(濂洛)의 종파(宗派)에 근본하였는데 주자(朱子)에게서 얻은 것이 특히 많았다. 그러므로 그 문로(門路)의 바름은 비록 전성(前聖)에 질정(質正)해도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육경(六經)의 오의(奧義)와 백가(百家)의 이설(異說)에 이르러서도 모두 깊이 연구하여 가슴속에서 판단하여 그 허실을 환히 알고 있었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입지(立志)를 우선하고 궁행(躬行)에 힘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부에 순서를 두어 잘 인도하고 귀찮아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재품(才品)에 따라 성심으로 개도(開導)하였다. 학문을 강론할 때에는 분석이 정미(精微)하여 깊은 이치를 남김없이 드러내었으며, 그 입언(立言) 저술은 전인(前人)이 발명하지 못한 이치를 발명한 것이 많다.
일찍이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심성정론(心性情論)을 보고 글을 지어 그 잘못을 변박(辨駁)하였다. 그리고 퇴계(退溪) 선생과 이기(理氣)에 관해 토론하였고 우계(牛溪) 선생과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해 토론하며 왕복한 장서(長書)가 수십 편에 이르렀는데, 그 학설이 모두 자득(自得)한 경지에서 나와 고인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않았고 근거가 명백하여 곡창방통(曲暢旁通)하며 횡설수설이 모두 이치에 맞았다.
평생에 《소학(小學)》을 존신(尊信)하였는데 그 구주(舊註)들에 오류가 많고 상략(詳略)이 서로 다른 것을 문제점으로 생각하여 여러 설들을 절충하고 정요(精要)한 것을 선택하고 번복된 것을 산삭(刪削)한 다음 미진한 부분은 자기의 견해로 보완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든 책을 《소학집주(小學集註)》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사서오경(四書五經)도 구결(口訣)로 뜻을 해석하여 경정(更定)한 곳이 많으며 소주(小註)의 설들도 취사(取捨)한 바가 많다. 한편 초학자들이 학문의 향방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ㆍ《학규(學規)》 등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성학집요(聖學輯要)》에 이르러서는 격치성정(格致誠正)의 공부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방법이 모두 구비되었고 정학(正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설에 특히 상세하였다.
대개 선생은 이치에 밝고 의리에 정밀하며 함양한 공부가 깊었다. 이것이 내면에 충실하여 덕행(德行)이 되고 외면에 발현하여 사업이 된 것으로 모두 명체적용(明體適用)의 학문이었으니, 실로 침잠하여 자기의 학문만 할 뿐 세무(世務)를 익히지 않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집안에서는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부가 된 맏형수를 집에서 모시고 그 자녀를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 길렀으며, 형제와 조카들을 모두 한집에 모아 함께 살면서 나란히 베개를 베고 잤다. 세시(歲時)에는 술상을 차려 놓고는 아우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고 집안의 어른, 아이 모두 노래하며 즐겼다.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참배했으며, 삭망(朔望)에는 사당에 참배한 뒤 정침(正寢)에 앉아서 남녀 자질(子姪)들의 절을 받았다. 그리고 동거상계사(同居相戒辭)를 지어 읽힘으로써 집안의 남녀를 경각시키니, 집안의 사람들도 뜰 아래에 나누어 서서 행례(行禮)하였으며, 또 방언으로 동거상계사를 풀이하여 자상하게 가르쳤다. 이렇게 하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봉제사(奉祭祀)는 오로지 《가례(家禮)》를 따르고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서모(庶母)의 성품이 사납고 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서모를 친모(親母)처럼 섬겨 출입할 때 반드시 찾아뵙고 인사드렸으며, 새벽이면 반드시 술을 데워 가지고 침소에 가서 기거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녹봉도 마음대로 쓰지 않았으며, 혹 서모의 안색이 좋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로 공경을 다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야 말았다. 이에 서모도 뒤에는 감화되어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중형(仲兄)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그 분부를 받드는 것이 마치 엄부(嚴父)를 섬기는 듯했으며,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이러한 모습은 언제나 변치 않았다. 문인(門人)들이 혹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하면 선생은 “붕우의 사이에는 지나친 공손이 비례(非禮)이나 부형(父兄)의 앞에서는 행동이 지나치게 공손한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자신을 돌보는 것에 검소하고 생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이 가난하여 자주 양식이 떨어져 향리에 살 때는 혹 보리밥을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서모와 형수에게 드릴 음식을 먼저 짓게 했는데 밥이 멥쌀이 아니고 반찬이 여러 가지가 아니면 감히 올리지 않았다.
규문(閨門)의 안에는 내외의 분별이 분명하여 처첩과 동복(僮僕)들도 감히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의 급한 사정을 보살피는 것이 마치 수화(水火)에서 구해 내는 듯했고, 사람을 접할 때는 간격을 두지 않아 친소(親疎)와 귀천에 관계없이 오로지 성심으로 대했으며, 사람들과 함께 담소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평생에 남과 몰래 얘기한 적이 없어 흉금이 후련히 트이고 표리(表裏)가 한결같았다. 남의 선(善)을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너그럽게 대했기 때문에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진정을 토로할 수 있었다. 평소에 산수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의 옛 별업(別業)에서 화석정(花石亭)의 옛터를 수리하였으며, 그 후에는 석담정사(石潭精舍)를 개축하여 일실(一室)에 도서(圖書)를 가득 비치해 놓고 고명(高明)한 이치를 사색하며 충담(沖澹)한 취미로 함양하고 정일(精一)의 공부를 쌓았다.
이로부터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행실은 더욱 닦여서 도가 날로 높아지고 명성이 날로 알려지니, 종유(從遊)하는 선비들이 날로 많아졌다. 학문을 강마(講磨)하는 여가에 때로 관동(冠童)과 더불어 수석(水石)의 사이를 거닐고 시를 읊어 즐기며 시원스레 속진(俗塵)을 벗어난 생각이 있고 일체 세미(世味)에는 담박하였다.
입조(立朝)할 때에는 관직에서는 반드시 옛날의 선현(先賢)과 선철(先哲)을 본받을 것을 스스로 기약하고 임금을 반드시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성군(聖君)으로 인도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리하여 오직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고 상례(常例)를 따르고 구규(舊規)를 지키려고만 하지 않았다.
부귀와 빈천, 훼예(毁譽)와 영욕에는 한 번도 마음을 움직인 적이 없었으며, 오직 선인(善人) 군자의 형통과 비색(否塞)으로 자신의 경사와 근심을 삼고 국사(國事)의 치란(治亂)으로 자신의 즐거움과 근심을 삼았다. 늘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다.” 하고 경연에서의 권강(勸講)과 소장에서의 진설(陳說)에서 지성스럽고 간절하게 아뢴 내용이 모두 인의(仁義)에 근본하였다.
매양 상의 앞에서 치도(治道)를 개진하고 사의(事宜)를 설명할 때 의리(義利)ㆍ공사(公私)의 구별과 천인(天人)ㆍ왕패(王覇)의 구분 및 치민(治民)ㆍ비변(備邊)의 계책을 숨김없이 나열하고 고금의 사례를 들어 인증하니, 상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칭찬한 바가 많았다.
그리하여 혹 날이 저물어서야 주대(奏對)를 마친 적도 있었다. 김공 응남(金公應南)이 연중(筵中)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다시 삼대(三代)의 도유(都兪)의 성대한 광경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다.” 하였다. 선생은 늘 사론(士論)이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 어긋난 것을 조정의 고질적인 병폐로 여겨 동서분당(東西分黨)을 타파하여 모두 힘을 모아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사람들의 마음이 선생 자신의 마음과 같지 않아 끝내 동서 양당(兩黨)의 괴격(乖隔)한 의론을 조정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공평정대한 마음은 신명(神明)에 질정해도 의심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외로운 충성으로 성상의 지우를 입게 되어서는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일심으로 국가를 위해 아는 것은 시행하지 않음이 없었고 진언(進言)은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연중에서 청하기를 “미리 10만의 병력을 길러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넘지 않아 장차 나라가 토붕와해(土崩瓦解)하는 변고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서애(西厓)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무사한 상황에서 병력을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오래 평안한 세월이 지속된 터라 연대(筵對)하는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치다 하였다. 선생이 연중에서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였는데 속유(俗儒)들은 시무(時務)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진실로 그렇다 치더라도 군(君)도 이러한 말을 하시오. 지금 미리 병력을 길러 두지 않으면 필시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오.” 하고는 근심스런 기색을 보였다.
임진년의 왜란이 일어난 뒤 서애(西厓)가 조당(朝堂)에서 재신(宰臣)들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괜한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그 말을 반대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만약 그 말을 따랐다면 국사(國事)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전후로 올린 소장과 차자의 주책(籌策)도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혹 헐뜯고 반대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분명한 선견지명(先見之明)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탁월한 재주이다. 율곡이 있다면 필시 오늘의 시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사후(死後)에 백 년이 지나지 않고도 옳은 평판을 얻는다.’라는 것이다.
문장과 논설을 지을 때는 반드시 성리(性理)에 근본을 두어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는 듯, 애써 구상하지 않아도 말을 내면 그대로 문장이 되어 웅혼하여 끝없이 드넓었다. 그 문장은 숙속(菽粟)과 같고 추환(芻豢)과 같으며 대해(大海)에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고 천마(天馬)가 하늘을 달려가는 것 같아서, 읽는 사람의 마음이 융해(融解)되어 이치가 환히 드러나고 가슴속에 사욕의 찌꺼기가 말끔히 사라지게 하니, 참으로 세상을 경영하고 사도(斯道)를 보위하는 글이라 할 만하다. 문집 10권이 세상에 간행되어 있다.
아, 하늘이 태평한 세상을 열 임금을 위해서는 반드시 명세(鳴世)의 인재를 내어서 보좌하게 한다. 선묘(宣廟)가 선치(善治)에 힘쓸 때 이분을 보좌로 삼았으니, 하늘이 큰 임무를 맡을 인재를 낸 것이 우연한 뜻은 아니었던 듯하다.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난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드문 일이니, 참으로 성대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세상이 어진 이를 쓰는 것과 어진 이가 세상에 쓰이는 것이 한 가지 길만은 아니니, 작게 쓰면 작게 효과를 거두고 크게 쓰면 크게 효과를 거두는 법이다.
선생과 같은 분은 차라리 쓰이지 않을지언정 작게 쓰일 수는 없는 분이다. 선생의 정심한 학문, 순비(淳備)한 덕행, 탁월한 의론, 정대(正大)한 출처는 모두 속사(俗士)의 천견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그 풍모는 마치 세상에 나타난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 만물을 진압하는 태산교악(泰山喬嶽), 중천에 높이 뜬 해와 별, 질탕한 물결 속에 우뚝 선 지주(砥柱)와도 같았으며, 그 고원한 재주와 식견은 고금을 두루 꿰뚫었고 그 굉대한 지략과 모유(謨猷)는 우주에 높이 걸렸다.
이미 사민(斯民)을 구제할 책임을 맡았고 게다가 임금의 권우(眷遇)를 입게 되자 장차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치세로 만들어 한 시대의 예악(禮樂)을 흥기하고 백 년 동안 퇴폐한 기상을 진작하려 하였으니, 그 포부와 기대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유속(流俗)의 사람들은 선생을 알지 못하고 당의(黨議)는 선생을 배척하여, 고도(古道)를 실행하려 하면 실정에 어둡다 하고 폐법(弊法)을 제거하려 하면 번거롭게 고친다 하고 사류(士類)의 분쟁을 조정하려 하면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하고 세무(世務)를 떠맡으려 하면 권력을 전횡한다 하는 등 뭇사람들이 배척하고 비방하여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그 도를 실행하고 세상을 구제하려는 마음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은 가슴속에 간절했으나 벼슬에 나아감은 어렵게 하고 벼슬에서 물러남은 쉽게 하여 구차히 작록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 진실로 평생의 조수(操守)였다.
그러므로 충성을 다해 임금의 마음을 감오(感悟)시키다가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정을 떠났으며 정성을 다해 조정의 의론을 조정하다가 의리에 맞지 않으면 조정을 떠났다. 이에 선생이 조정에 있으면서 하루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잊은 적이 없었으며 초야에 물러나서는 하루도 세상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도는 당시에 크게 행해지지 못했으니, 선생의 심사(心事)는 슬프다 하겠으나 그 진퇴의 대절(大節)은 평소의 학문을 저버리지 않았다 할 만하다. 성상이 강건한 결단을 내려 선생에 대한 권애(眷愛)와 신임이 겨우 높아지자 선생은 이미 병들었다.
연세는 반백(半百)도 채우지 못하고 지위는 태정(台鼎)에 오르지 못해 결국 그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큰 재능을 주어 놓고 빨리 데려간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아, 조정의 의론은 양쪽으로 나뉘어 날이 갈수록 서로 어긋나고 현로(賢路)는 날이 갈수록 더욱 기구하니, 군자가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터라 비록 선생이 오래 국병(國柄)을 맡았다 하더라도 선생의 뜻과 같이 일하여 큰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을지는 진실로 알 수 없다.
위태한 화기(禍機)를 건드려 낭패를 당하여 길이 사림의 한(恨)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어찌 알겠는가. 이것이 선생이 인간 세상에 미련 없이 훌쩍 떠나 하늘로 가 버린 까닭일 터이니, 선생에 있어서야 진실로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가르침과 저술이 후학을 개도(開導)하고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이 쇠속(衰俗)을 용동(聳動)하고 있으니, 선생의 도는 당시에 크게 행해지지 못했으나 선생의 유택(遺澤)은 무궁한 후세에까지 미친다 할 만하다. 혹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 4) 봄
[註解]
[주01] 군자는 …… 근심한다 : 공자가 “군자는 평탄하여 여유롭고 소인은 늘 걱정스러워 한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하였고, “얼굴
색은 위엄이 있으면서 마음은 유약한 것을 소인에 비유하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과 같다.〔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
盜也與〕” 하였다. 《論語 述而, 陽貨》
[주02] 장공예(張公藝)의 구세동거(九世同居) : 당(唐)나라 때 장공예는 구세(九世)의 친족이 한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고종(高宗)이 그
집을 방문하여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방도를 묻자 참을 ‘인(忍)’ 자 100개를 써서 바쳤다 한다. 《小學 卷6 善行》
[주03] 근리난진(近理亂眞) :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 보이는 구절로, 불교의 설은 매우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진리(眞理)를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주04] 석갈등용문(釋褐登龍門) : 석갈은 처음 출사(出仕)한다는 뜻이다. 용문(龍門)은 황하(黃河)에 있는 물살이 매우 센 폭포로, 잉어가
이 폭포를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등용문은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뜻한다. 율곡이 처음 출사하자마자 곧바
로 높은 벼슬에 올랐기 때문에 이 제목을 내어 시를 짓게 한 것이다.
[주05] 자기(自棄) : 자신은 인의(仁義)를 실천할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자포(自暴)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自棄)하는 자는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다. 말할 때 예의(禮義)를 비난하는 것을 자포라 하고 나 자신은 인의(仁義)를 실
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자기라 한다.”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06] 요조숙녀(窈窕淑女)를 …… 생각하도다 : 《시경》 〈관저(關雎)〉에 보이는 구절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훌륭한 덕을 갖춘 배
필을 얻기 위해 고심하는 것을 읊었다.
[주07] 관저(關雎)ㆍ인지(麟趾) :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篇名)들로, 관저는 문왕(文王)과 후비(后妃)의 금슬이 좋아 그 덕화(德化)
가 천하에 베풀어짐을 노래하였고, 인지는 후비의 덕화로 그 자손들이 모두 인후(仁厚)함을 노래하였다. 여기서는 국가와 왕실의 번
영을 뜻한다.
[주08] 왕척직심(枉尺直尋) : 한 길을 펴기 위해 한 자를 굽힌다는 뜻으로, 맹자가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편다는 것은 이(利)로써 말한
것이니, 만약 이로써 한다면 한 길을 굽혀서 한 자를 펴더라도 그것이 이롭다면 하겠는가.”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09] 요순군민(堯舜君民) : 자기 당대의 임금을 요순과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자기 당대의 백성을 요순 시대의 백성과 같이 만든
다는 뜻이다. 탕(湯)이 사람을 시켜 폐백을 가지고 초빙하자 이윤(伊尹)이 아무런 욕심 없이 자득(自得)한 모습으로 말하기를, “내
어찌 탕의 폐백을 받으리오. 내 어찌 초야에 묻혀 이대로 요순의 도를 즐기느니만 하리오.” 하였다.
탕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초빙하자 이윽고 이윤이 생각을 바꾸어 말하기를, “내가 초야에 묻혀 이대로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보
다 내 차라리 이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드는 편이 낫지 않겠으며, 내 차라리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편이 낫지
않겠으며, 내 자신이 직접 그러한 치세(治世)를 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孟子 萬章上》
[주10]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을 : 옥루는 방에서 가장 으슥한 서북쪽 모퉁이의 신주(神主)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
지 않는 곳을 뜻한다. 《시경》 〈억(抑)〉에 “네가 방 안에 있는 것을 보건대 옥루에도 부끄럽지 않게 한다.〔相在爾室 不愧于玉漏〕
”라고 하여, 혼자 있는 상태에서 신중히 하는 신독(愼獨)의 공부를 말하였다.
[주11] 양 무제(梁武帝)가 …… 못하였는데 : 양 무제 소연(蕭衍)이 역적(逆賊) 후경(侯景)에게 포위를 당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
다. 양 무제가 죽기 직전에 정거전(淨居殿)에 누워 꿀을 달라고 입이 아프게 말했으나 얻지 못했고 두 차례 “하하(荷荷)” 하는 소리
를 내고 죽었다 한다. ‘하하’는 의성어(擬聲語)로 원망을 뜻한다. 《資治通鑑 卷162》
[주12] 순(舜) 임금이 …… 10명이었으며 : 《신당서(新唐書)》 권105에 보이는데, 본래 《한비자(韓非子)》에서 온 말이라 한다.
[주13] 무왕(武王)이 …… 하였으니 : 무왕이 태자로 있을 때 부친 문왕(文王)이 태공망(太公望)을 태자의 사부(師傅)로 삼았다. 태자가
포어(鮑魚)를 좋아하였는데 태공망이 포어를 태자에게 주지 못하게 하면서 한 말이다. 《新書 卷6》
[주14] 위(衛)나라 …… 감시했던 : 여론을 강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포학하니 백성들이 왕을 비방하였다. 이에
소공(邵公)이 “백성들이 명을 듣지 않습니다.” 하니, 여왕이 노하여 위(衛)나라의 무당을 시켜 비방하는 자를 감시하여 찾아내게
하였다. 《國語 周語上》
[주15] 한마디 …… 않겠습니까 : 노(魯)나라 정공(定公)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 하니,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임금 된 것은 즐거울 게 없고 오직 내가 말하면 아무도 나의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을 즐거워한
다.’ 하니, 만약 임금의 말이 선(善)한데 아무도 어기는 이가 없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임금의 말이 선하지 못한데 아무도 어기는 이가 없다면 이것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 것을 기약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
까.” 하였다. 《論語 子路》
[주16] 후씨(侯氏) : 송(宋)나라 태중대부(太中大夫) 정향(程珦)의 부인으로, 정자(程子), 즉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의 어머니이
다. 정자가 대학자가 된 것은 바로 어머니의 어진 부덕(婦德)과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정이의 어머니에 대한 술회에 “우리가 남과 다투어 분노하면 우리가 옳더라도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굽히
지 못할까 걱정해야지 남을 이기지 못할까 걱정해서는 안 된다.〔患其不能屈 不患其不能伸〕’ 하셨다.” 하였다. 《近思錄 卷6》
[주17] 주창(周昌)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신하로, 용력이 있고 강직하였으며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한 고조가 태자를
폐위하고 척희(戚姬)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자 강경하게 반대하여 막았지만 결국 여의가 조왕(趙王)이 되었다.
그 후 한 고조가 죽고 나서 여후(呂后)가 조왕을 불러서 죽이려 하자 주창이 조왕을 가지 못하게 막았으며, 여후가 주창을 부른 뒤
조왕을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여 독살하자 주창은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아가지 않고 3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도후(悼侯)이다.
《漢書 卷42 周昌傳》
[주18] 환영(桓榮) :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사부로, 박학하여 전고에 밝았다.[주-D019] 맹자(孟子)가 …… 하니 : 《맹자》 〈양혜왕 하
(梁惠王下)〉에 보인다. 맹자가 의리를 저버린 벗과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옥관(獄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제 선왕이 벗은 관계를 끊고 옥관은 파직하겠다고 대답하여, 맹자가 “사경(四境)의 안, 즉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
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제 선왕이 그것은 임금인 자신의 책임이므로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주20] 선(善)을 …… 충분합니다 : 노(魯)나라에서 악정자(樂正子)로 하여금 정사(政事)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니, 맹자가 “내가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였다. 이에 제자 공손추(公孫丑)가 “악정자는 강합니까?” 하니 맹자가 “아니다.” 하고, 악정
자는 “지려(知慮)가 있습니까?” 하니 맹자가 “아니다.” 하고, “문견(聞見)과 식견이 많습니까?” 하니 맹자가 “아니다.” 하였다.
공손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까?” 하니, 맹자가 “그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한다.” 하였다. 공손추가
“선을 좋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하니, 맹자가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도 충분한데 하물며 노나라야 말할 나
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孟子 告子上》
[주21] 국계(國系)에 관한 무함 : 명(明)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李仁
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어 국초 이래 이를 정정해 주길 누차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가 선조(宣祖) 17년(1584) 종계변무주
청사(宗系辨誣奏請使) 황정욱(黃廷彧)을 보내어 고칠 수 있었다.
[주22]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論語 顔淵》
[주23] 육적(六賊) : 북송(北宋) 말엽의 간신인 채경(蔡京), 주면(朱勔), 왕보(王黼), 이언(李彦), 동관(東貫), 양사성(梁師成) 등 6명을
가리킨다. 이들이 사당(私黨)을 결탁하여 국가에 해를 끼치자 태학생(太學生) 진동(陳東) 등이 ‘육적’이라 지목하여 배척하였다.
《宋史 卷23 欽宗紀》
[주24] 이강(李綱) : 송(宋)나라의 충신으로 자는 백기(伯起)이다. 그는 금(金)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남하(南下)할 때 팔뚝을 찔러 피를 내
어서 소장(疏章)을 써서 올려 휘종(徽宗)이 태자에게 선위(禪位)하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근왕병(勤王兵)을 내릴 것을 청하여 흠종
(欽宗)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리고 금나라 군대가 변경(汴京)을 포위하였을 때 태학생(太
學生) 진동(陳東) 등이 군민(軍民) 수만 명을 거느리고 대궐로 와서 상소하는 통에 파직되어 있던 이강을 다시 기용하여 상서우승
(尙書右丞)으로 삼았다. 《宋史 卷358, 卷359》
[주25] 지주(砥柱) : 중국 황하(黃河)의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
를 지키는 군자에 곧잘 비유된다.
[주26] 황잠선(黃潛善) : 북송 때의 간신이다. 건염(建炎) 원년(1127)에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제수되어 승상 이
강(李綱)과 어사(御史) 장소(張所)를 축출하고, 상소하여 국정을 비판한 태학생 진동(陳東)과 포의(布衣) 구양철(歐陽澈)을 죽였
다. 《宋史 卷24 高宗紀》
[주27] 동심인성(動心忍性) : 맹자가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 그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한다는
것을 말한 다음 “이는 마음을 경동(驚動)시키고 그 성질을 강인하게 하여 그 부족한 능력을 더욱 보충해 주기 위해서이다.〔所以動
心忍性曾益其所不能〕” 하였다. 《孟子 告子下》
[주28] 주즙(舟楫)과 임우(霖雨) : 훌륭한 재상을 뜻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발탁하여 재상의 일을 맡기고 자신을 가
르쳐 주기를 당부하면서 “만약 큰 시내를 건넌다면 너로써 배와 노〔舟楫〕를 삼고 만약 큰 가뭄이 들면 너로써 장맛비를 삼으리라.
〔若濟大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한 데서 유래한다. 《書經 說命上》
[주29] 잘 …… 준다 :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빈천과 우척은 너를 옥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이다.〔貧賤憂戚 庸玉
汝於成也〕” 하였다.
[주30] 명체적용(明體適用) : 본체에 밝고 실용에 알맞다는 뜻으로,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시무(時務)에 통달한 것을 말한다. 《근사
록(近思錄)》 권10의 주(註)에 “호 안정(胡安定)이 학자를 가르칠 때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시무를 익혀서 명체적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의 문인(門人)들이 모두 계고(稽古)와 애민(愛民)을 일삼았으니, 계고는 위정(爲政)의 법이요 애민은 위정의 근본이다.”
하였다.
[주31] 도유(都兪) : 도유우불(都兪吁咈)의 준말로, 도유는 찬성, 우불은 반대를 뜻한다. 요(堯), 순(舜), 우(禹) 등 성왕(聖王)이 신하들과
정사를 토론할 때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기탄없이 개진하였던 데서 유래한다.《書經 堯典, 舜典, 大禹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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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栗谷先生諡狀
先生諱珥。字叔獻。學者稱爲栗谷先生。豐德郡德水縣人。德水之李。其稱蓋久。高麗中郞將諱敦守。是其鼻祖。十代祖劭。閤門祗候。賜紫金魚帒知三司事。九代祖允蒀。民部典書贈僉議政丞。德水府院君。八代祖千善。守司空柱國樂安伯。諡良簡。七代祖仁範。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六代祖揚。始入我朝。爲工曹參議。五代祖明晨。知敦寧府事。諡康平。四代祖抽。知溫陽郡事贈左贊成。曾祖宜碩。慶州判官贈大司憲。祖諱蕆。贈議政府右參贊。考諱元秀。司憲府監察贈左贊成。悃愊樂善。有古人風。娶平山申氏。卽己卯名賢進士命和之女。英秀貞靜。博通古今。工畫善屬文。以嘉靖丙申十二月二十六日。生先生于江陵臨瀛北坪村。將誕之夕。申夫人夢黑龍騰于大海。飛入寢舍。小字見龍。以此也。生而異常。學語便知文字。甫三歲。外王母持石榴問曰。此物甚似。先生卽對曰。紅皮囊入碎紅珠。人奇之。五歲。夫人疾劇。一家奔遑。先生潛禱于外王父祠。衆驚異。嘗見人渡水而躓幾危。人皆拍手。先生獨抱柱注目。憂形於色。其人獲免乃已。其誠孝仁愛之心。天性然也。六歲。自江陵外家。隨父母入京。七歲。著陳復昌傳。略曰。君子積德於內。故其心坦蕩蕩。小人荏蓄乎內。故其心長戚戚。余觀復昌之爲人。陰懷戚戚。陽欲蕩蕩。使斯人得志。異日之患。庸有極乎。時復昌未及顯用。而適在比隣云。九歲。覽張公藝九世同居。慨然慕之曰。九世同居。勢或有礙。至於兄弟。不可離析。遂手畫兄弟奉父母同居之圖。又摭前古忠賢事蹟。題其姓名以觀之。十二歲。贊成公疾劇。先生刺臂出血。泣禱于先祠。請以身代。疾乃瘳。十三歲。中進士初試。文章日就。聲聞藉藉。而專精學問。不屑小技。十六歲。申夫人棄世。廬墓三年。不脫衰絰。喪制一遵家禮。躬執祀事。雖洗滌烹飪。不任僮僕。前後喪皆然。自傷早失所恃。日夜號泣。一日偶閱釋氏書。深感死生之說。且悅其學簡便淸淨。有欲謝人事之意。十九歲。入金剛山。貽書留別諸友。仍棲山寺。戒定堅固。至忘寢食。居無何。覷破佛氏近理亂眞處。遂盡棄其學。而專心吾道。著自警文。一以聖賢爲準則。嘗語學者曰。吾少時妄意禪家頓悟法於入道甚捷。數年思之。竟未得悟。反以求之。乃知其非也。二十三歲。謁退溪先生于陶山。厥後往來書札。辨論義理。退溪先生多從其說。趙月川穆見先生和陶山詩。稱玩不已。退溪先生曰。詩不如其人。嘗致書於先生曰。世間英才何限。而不肯存心於古學。如君高才妙年。發軔正路。他日所就。何可量哉。辛酉。丁贊成公喪。甲子。試司馬文科皆壯元。幷魁初試覆試。人稱九度壯元。卽拜戶曹佐郞。明廟以釋褐登龍門命題。製三十韻律詩以進。上嘉賞。錫賚特優。乙丑。自禮曹佐郞。拜司諫院正言。自以新進未可遽當言責上疏辭。不許。與同僚上箚。請立志勉學。親正人固邦本。丙寅。選吏曹佐郞。慨然以恢公道爲己任。戊辰。以千秋書狀官朝京。冬。拜弘文館副校理。卽宣廟初服也。陳疏辭職曰。臣髫年求道。學未知方。泛濫諸家。罔有底定。生丁不辰。早喪慈母。以妄塞悲。遂耽釋敎。膏浸水潤。反覆沈迷。從事禪門。迨周一年。賴天之靈。一朝覺悟。誣辭僞說。破綻昭著。抽臟濯腑。未足洗汚。自分爲世所棄。便欲謝絶世務。窮經讀書。以送天年。臣父惜臣稍有雕蟲末技。強令求名。父在觀志。不得自由。臣亦自念家貧親老。無以爲養。包羞掩垢。遂作擧人。科業未就。臣父棄世。名宦之念。頓絶於心。區區之意。只求升斗之祿。以救其飢寒耳。豈期好官倘來。謬恩橫被也。上答曰。自古豪傑之士。未免佛氏之所陷溺。不可以昔日耽禪之小失。輕遞論思之重任。且悔過自新。其志可嘉。復拜吏曹佐郞。聞外王母病甚。棄官歸省江陵。言官劾以非法。上嘉其孝。不允。己巳。拜校理。自陳學未進。不可從政。外祖母有養育之恩。請解官歸養。且竢學進還朝。上答曰。可往來省覲。何必解職。仍敎吏曹曰。雖非法例。特令省覲。先生感恩就職。時明廟禫後陳賀。先生曰。自 上喪制甫畢。遽受賀禮。百官哭泣之餘。旋卽陳賀。是歌哭同時也。乃上箚請以賀爲慰。嘗於經席啓曰。人君如欲爲治。必先下功於學問。學問者。非特勤御經筵。多讀古書而已。必格致誠正。實有功效。然後乃謂之學問。殿下臨御數年。未見治效。竊恐格致誠正之功有未至也。若悠悠泛泛。只事文具。則雖孔孟恒在左右。日談道理。亦何益哉。時相臣以承旨請對。非近規。恐壞體統。先生曰。只在所言之如何耳。若所言是。則何妨於體統。承旨亦經筵參贊官。請對言事。職也。今者善政不擧。百度廢弛。若不奮然振作。以新一代之規。而徒欲拘常守舊。則安能祛積弊而大有爲哉。大臣不能引君當道。而惟遵守近規。殊非所望。上臨筵不喜酬答。先生 啓曰。入侍之臣。預講所陳。晝思夜度。及至上前。壓於天威。言不盡意。十漏八九。自上雖虛心酬酢。尙患下情不達。況淵默不言以阻之乎。恭憲大王以二百年宗社。付之殿下。殿下受其憂也。非受其樂也。上曰。豈可無德行而有事業乎。且三代之治。不可猝復。先生曰。德行非一朝可辦。而政事不可一日廢也。允德未成之前。當置政事於不問。而任其紊亂乎。德行事業。當交修竝進。嘗因書堂月製。設爲問答。陳王伯治安之道。名之曰東湖問答。上曰。東湖問答。以漢文帝爲自棄。何也。對曰。文帝以質美之君。當漢道全盛之時。可以復古。而終於雜伯者。以其無大志好卑論。故謂之自棄耳。人君立志不高者。大抵皆自棄也。時壼儀未建。先生因時弊疏。幷陳擇妃之道曰。古之帝王所與婚者。莫非仁賢之後。其求之之道。不過曰窈窕淑女。寤寐求之。求之不得。寤寐思服而已。未聞聚闕庭辨優劣。如今日之爲。請自今勿以容姿服飾。推卜吉凶爲等級。先觀父母之賢否。以察家法。次觀威儀之合度。以察女德。宣問大臣。允協衆心。然後乃定。則國家之福也。一日。上語及乙巳之事。領議政李公浚慶曰。乙巳之禍。善士或有坐死者。先生曰。大臣之言。何可含糊。衛社是僞勳。其得罪者。皆善士也。仁廟禮陟。中廟嫡子。只有明廟一人。天命人心。豈歸他哉。而奸兇乃敢貪天之功。斬伐士林。以錄僞勳。神人之憤久矣。今當聖上新政之初。當削勳正名。以定國是。不可緩也。李公曰。事在先朝。不可猝改。先生曰。不然。明廟幼沖卽祚。雖不免奸兇之欺蔽。今則在天之靈。洞照其奸。雖曰先朝之事。豈可不改乎。庚午。又拜校理。時白公仁傑上疏。請雪乙巳己酉之冤。於是政府三司共論之。猶未及於削勳。先生以爲正名爲政之本。名之不正。莫甚於僞勳。乃於玉堂力主削勳之議。一時名賢大臣。亦或難之。先生獨抗議不撓。凡玉堂四十一箚。五六箚外。皆先生筆也。至丁丑。因先生前日之議。竟得回天。群情快之。先是。朴思庵淳拜銓相。累辭不出。先生謂朴公曰。今日之事。當裒集淸流。靜以鎭物。務積誠意。以感聖心。公若固辭。使俗輩操柄。則是誤國也。淳乃出。金公繼輝謂先生曰。當今朝臣可當大事者誰。先生曰。朴和叔 淳 字 表裏潔白。憂國以誠。只恨精神氣魄。稟得弱耳。白老 指仁傑 心事不凡。志切愛君。但氣麤學荒。無以有爲。若退溪先生。則學精德尊。可以有爲。而終無擔當底意思。奇明彥 大升 字 氣蓋一世。亦豪傑之士。但自許太過。無溫謙受善底意思。無已則和叔乎。至是。思菴果被大用。冬。辭歸海州。辛未。還坡州。拜吏曹正郞。不赴。尋以校理承召入朝。拜檢詳舍人,副應敎。皆辭歸海州。與學徒遊賞高山九曲。愛其泉石。遂卜居於第五曲。六月。除淸州牧使。爲政專務敎化。手撰鄕約法以敎民。未幾病遞。壬申。又拜副應敎。謝恩後復辭。歸臨津江閣。遠接使辟爲從事官辭。拜司諫副應敎辭。先生自以學未進不可從政。累辭要顯。而凡所陳說。必以唐虞三代爲言。於是上有李珥自是迂闊者之敎。拜典翰直提學。皆不就。三司交章請留而不能得。作感君恩四章。乘舟歸坡州。癸酉秋。又拜直提學。三召不置。乃入朝。上召見。責其易退。對曰。臣病深才疏。自度不能有爲。徒食廩祿。不如退免罪戾耳。上曰。爾才予所知也。從今更勿求退。先生曰。匹夫讀書。尙且志在濟世。況殿下稟可爲之質。操可爲之勢。寧無慨然自奮之志乎。殿下誠心願治。則只此一念。便是關雎麟趾之意。且人君處崇高之位。必須兼聽博聞。擇善虛受。然後群臣皆爲我師。而衆善合於君身。德業以之崇廣。若自以爲滿足。則善言何由而入乎。殿下謙沖退讓之意。溢於辭旨。而至於不從公論。自是非人之時。則反有謂人莫己若之病。三公雖欲建白。恐拂聖旨。含默度日。若聖志在於求治。則大臣亦必盡言。而廷臣各陳所懷矣。俄陞同副承旨。筵中每勸上奮發大志。仍曰。自古人之所見不同。迂儒則以爲堯舜之治。朝夕可做。俗士則以爲古道決不可行。此皆非也。爲治須以唐虞爲期。而事功則須當漸進。臣每以唐虞三代之事。陳於上前。非欲遽見其效。只願今日行一事。明日行一事。漸入佳境耳。己卯年間。趙光祖大有致澤之志。而年少士類。作事無漸。竟致士林之禍。至今任事者。輒以己卯爲戒。己卯之作事無漸。豈不愈於今日之專不做事乎。且人君須無一毫私意。可以感發人心。而近日言官論事。若涉宮禁。則上必牢挋。群下疑殿下之有私。而以含默爲得體。孰有如臣之愚者乎。且屢以未出身人通臺憲之路爲請。上下其議于大臣行之。諸臣請退溪先生諡。上以無行狀不許。先生曰。李滉一生。沈潛義理之學。言論風旨。雖古昔名賢。亦不是過。行狀有無。有何增減。殿下於已死之賢。行跡已著。而猶靳褒崇。況於一時之士。寧有好善之誠乎。李滉之諡。雖遲一二年。猶無大害。四方之士。疑殿下無好善之誠。則其害豈淺淺乎。是時。先生感激恩遇。黽勉從仕。牛溪先生成渾語之曰。儒者當以格君爲務。若上心不可回。則當速引退。不得上心。而先務事功。則是枉尺直尋。非儒者事也。先生曰。此言固然。但上心不可遽回。當遲遲積誠。以冀感悟。若以淺薄之誠。責效於旬月。而不如意。則輒欲引退。亦非人臣之義也。甲戌。上萬言疏。極陳時事。上答曰。省觀疏辭。可見堯舜君民之志。善哉論也。古之人無以加焉。有臣如此。何憂不治。深嘉乃忠。敢不書紳。第緣事多更張。不可猝然盡變。當與大臣議處。仍命謄書以進。先生雖蒙上眷。言不見用。人或疑其不去。先生曰。欲退則恐天心或可回。欲留則言不見用。是以不決進退耳。一日。上謂先生曰。漢文何以不用賈誼。先生曰。漢文雖賢。志趣不高。見誼言大疑而不用耳。凡人有大志。然後可以做大事。譬如主人欲構數間小屋。而工師乃欲構大廈。則豈肯聽從其言乎。仍白上曰。今者民困日甚。若不更張。無以爲國。非欲變祖宗之法也。至如貢案。是燕山所更定。非祖宗法也。臣非欲更張。欲救民弊耳。上以紀綱未振爲歎。先生曰。紀綱之在國家。若浩然之氣在一身。浩然之氣。是集義所生。非一事偶合於義而可襲取之也。須是朝行一義。暮行一義。義積乎身。仰不愧俯不怍。然後浩然之氣。充滿流行。紀綱亦然。非一朝發憤而可立也。須以公平正大之心。施之政事。直必擧枉必錯。功必賞罪必刑。則紀綱自立矣。時泮中儒生序齒。流俗多非之曰。尊敬狀元。此亦禮俗。豈可坐於狀元之上乎。先生曰。狀元之尊。施于榜會可也。館中乃明倫之地。長幼之序。不可亂也。世子入學。尙以齒坐。狀元之尊。何如王世子乎。嘗以病辭承旨。上答曰。爾當在予左右。輔予不德。不可辭退。拜大司諫。累辭不許。一日。上命義盈庫。納黃蠟五百斤。外間莫知所需。或云將用于佛事。先生啓曰。所需若正。則亟示聖意。以解群惑。如其不正。請寢入內之命。上曰。內用之物。非在下所敢仰問。又啓曰。宮中別無許多用蠟之處。此必出於邪蹊曲逕。不可使聞於人故耳。昔司馬光平生所爲。未嘗有不可對人言者。今臣等方以正心誠意。望於殿下。而只此一事不能宣示。則未知幽獨得肆之地。其能不愧屋漏乎。請洞示聖意若靑天白日。使群下得以仰見。上曰。昔者梁武口苦。索蜜不得。不料再見於今日。先生率同僚辭職曰。該司之物。是殿下之所有。用之以正。則群下當奉承之不暇。若用之以不正。則雖該司。亦當覆逆。況言官安敢默默。外間喧播之說。或以爲將做佛像。臣等豈無憂懼之念乎。殿下但當內省于心。有則改之。無則加勉。而祕諱峻拒。一至於此。何也。昔舜造漆器。諫者十人。武王嗜鮑魚。太公不進曰。禮。鮑魚不登於俎。此豈愛敬不足而然哉。誠以忠臣愛君以德。敬君以禮。逢迎承順。反害於愛敬故也。上曰。假使崇奉異敎。舊像亦多。新造何爲。未知聞於何人。予欲拿鞠。啓曰。傳播之說。非出於一人之口。若必一一拿鞠。則何異於衛巫之監謗。 殿下只治臣等妄言之罪。足矣。何必立威而鉗口。以駭四方之觀聽。答曰。敢諱所聞之人。此果無隱之道乎。當有造言之罪。啓曰。傳播之言。殿下非不知難詰言根。而如是迫問者。此不過折之以雷霆之威。將以杜塞言路也。臺諫凡有所聞。雖出於傳播。不敢不達者。是事君無隱之道。若必窮詰傳播之言。輒以造言之罪。加諸諫臣。則不幾於一言喪邦乎。累啓。言益切直。不少挫。旣而。上頗悔之。命還下黃蠟。先生自以累承嚴譴。不安在朝。仍入侍。力陳多病乞退。上曰。病若如此。無可奈何。隱居最好。古詩曰。洗耳人間事不聞。靑松爲友鹿爲群。豈不樂乎。對曰。臣則有不然者。古之隱士。與人主無君臣之契。故可以相忘而自適於佳山好水。今臣受恩深重。雖在畎畝。心懸冕旒。退居何樂焉。只是難於尸素。故不得不退耳。遂謝病免。旋拜承旨。辭以疾歸坡州。將行。崔公永慶曰。君之自處當如此。奈時事何。先生曰。自處未盡。而能救時者未之有也。盧公守愼謂人曰。李某於經席。多言上所厭聞。恐其生事。我欲止之而不能也。先生聞之。笑曰。我退則無言者矣。蘇齋 盧相號 可無憂矣。拜黃海觀察使。以外職乃拜命。疏陳民瘼。專以興學校尙敎化恤民隱修軍政爲務。明年疾遞歸坡州。卽拜副提學。又以疾辭不許。時有仁順王后之喪。輿疾入京。持平閔純請於卒哭後。依宋孝宗故事。以白衣冠視事。乃會廷臣議。皆曰。五禮儀。祖宗時撰定。行之久矣。今不可變。先生引古禮以啓曰。必欲盡合先王之禮。則上下當具衰絰。如儀禮之制。別造布帽布衫布帶。以爲視事之服。今旣差過。寧依宋孝宗制。爲近於古也。若玄冠烏帶之制。宋高宗朝。羅點所建白。而朱子君臣服議。辨論甚詳。豈可不從朱子之論。而泥於羅點之議乎。五禮儀撰定時。無識禮儒臣。不能導先王於正禮。豈可再誤於今日也。相臣朴淳,盧守愼,大司諫金繼輝議與之合。遂用白衣冠之制。上於朝會。特呼先生使前曰。副提學歸鄕里。仍爲監司。久不相見矣。仍問海西疾苦。溫諭良久。先生問曰。聞殿下謂侍臣曰。予欲學問。多事未遑。有諸。上曰。然。曰。臣聞此言。一以爲喜。一以爲憂。喜者。喜上有學問之志也。憂者。憂上不察學問之理也。學問非謂兀然端坐。終日讀書也。只是日用間處事。一一合理之謂也。惟其合理與否。不能自知。故讀書以究其理。若只以讀書爲學問。而日用處事。不求當理。則豈所謂學問者哉。聖上質美寡欲。其於學問。不爲也。非不能也。又曰。昨日答本館箚。有曰無甚高論。若只是殿下謙辭則可矣。若實以臣等之言爲高論。則恐非宗社臣民之福也。漢文以三代之說爲高論。故功烈如彼其卑。此豈可法乎。上皆嘉納。上謂先生曰。四書小註。多有未穩處。欲稍删改。以便觀覽。卿可任此也。曰。此非臣學力所能獨當。學問之士。不論出身與否。使參同議。上曰。前日。大臣使予招見成渾。予亦欲見之。但未出身人。無入參經席之例。雖招賢者。一見何益。曰。殿下誠欲有爲。則雖舊例所無。亦可變通。學問之士。處以閑職。使之輪日入侍經筵。則於助成允德。大有所益矣。時憲府吏執宮奴僭服。宮奴擊吏。逃入王子舍。明日憲府發他吏。獲宮奴付之獄。上聞以爲憲吏闌入王子舍。命囚憲吏于禁府。敎曰。憲府不當捉人于王子舍。憲府以此引避。明吏之不入王子舍。先生上箚曰。此事上下胥失之矣。憲吏之所爲。臺官非所目覩。安知其不入王子舍。其曰直入。亦非殿下所目覩。只聽婦寺之言耳。婦寺之言。不可盡信。且王子下人。素稱縱恣。當嚴加檢束。侯氏一婦人也。尙知敎子之方。嘗曰。患其不能屈。不患其不能伸。殿下之子。何患其不能伸乎。仍啓曰。近以憲吏一事。守法忤旨之臣。上頗厭之。臣竊悶焉。自古阿諛附托者。後必背君。守正不阿者。後必盡忠。以周昌之事觀之。昌廷諍甚強。可謂不愛趙王矣。後爲趙相。盡誠輔護。呂后欲殺趙王。昌不從。惟其平日有守正之節。故後日能保護也。此意非獨主上知之。妃嬪亦當知之。上嘿然。先生銳意格君。乃採摭經傳及史家要語切於學問政事者。彙分以修己治人爲序。名曰聖學輯要。上箚進之。他日入侍。上曰。其書甚有補於治道。但如我不敏之君。恐不能行耳。先生起而對曰。昔宋神宗曰。此堯舜之事。朕何敢當。程伯子愀然曰。陛下此言。非宗社臣民之福。今殿下之言。無乃近此乎。先是。沈義謙爲舍人。到領相尹元衡家。見士人寢具在元衡贅郞書室中。問知爲金孝元。孝元時未登第而有文名。義謙心鄙之。謂人曰。安有士人而宿於權門者乎。厥後孝元登魁科。才名日盛。銓官欲薦爲郞。義謙輒以前事沮之。後孝元竟爲銓郞。屢短義謙。倡言排之。前輩以義謙有扶護士林之功。謂孝元修郤而有此言。孝元儕輩。亦以外戚斥義謙。由是士林前後輩不相協。遂有東西分黨之跡。先生以沈,金角立。朝著不靖爲憂。言于相臣盧公守愼曰。兩人皆是士類。末路譊譊。浮言交亂。大臣陳白兩出于外。則庶可鎭靜。守愼然之。乃於筵中白之。先生 啓曰。此未必深成嫌隙。只是二人之親舊。各傳所聞。遂致紛紜。大臣此言。欲鎭靜故也。若小人目爲朋黨。爲兩治之計。則士林之禍起矣。於是特命金孝元爲富寧府使。沈義謙開城留守。孝元病不堪赴。先生獨啓曰。兩人補外之說。臣實主之。雖是士林公論。第孝元疾病深重。將此筋力。授任北塞。則安能有所籌畫。以爲固邊之計。且大臣之意。只欲鎭定非以孝元爲有罪而放逐之也。請改授內地。內全君臣之義。外固邊圉之備。上以先生爲黨於孝元。嚴批不從。後於筵中陳白益懇。乃改授三陟。先生欲保合人才。惟賢是取。或謂先生曰。天下無兩是兩非。公於今日事。不分是非。務欲兩全。人心不滿。如何。先生曰。沈金之事。非關國家。而乃相傾軋。至於朝廷不靖。眞是兩非也。雖是兩非。而俱是士類。但當和解消融。必欲是此而非彼。則相軋之勢。何時可了。僚友不用其言。先生遂決歸。右沈右金者。俱來別。先生曰。吾今欲爲定論。諸公試聽之。權奸濁亂之時。摧陷廓淸。使士論得伸。豈非方叔 義謙 字 諸公之功乎。仁伯 孝元 字 乃因私排抑。使前輩懷憤。士林阻隔。此則仁伯之罪也。旣如此。故公論裁抑。出補外官。已得中矣。而猶嫉之太甚。不相調協。此則前輩之罪也。以此論斷事情得矣。皆以先生言爲公論。三月。解官歸坡州。拜承旨大司諫吏曹參議全羅道觀察使兵曹參議。皆不赴。丁丑。歸海州。常以宗兄早歿。祖先神主。在於寡嫂家爲恨。至是築居室於高山舊卜之地。立祠堂。請伯嫂郭氏奉宗家神主。大會兄弟諸姪。同居一室。以遂平生之志。於是遠近學徒。聞風日集。至無所容。士子合力鳩材。創建精舍于居室之東。以爲藏修之所。名曰隱屛精舍。以濂洛群賢中集大成者。莫如朱子。而吾東方能謹守朱門成法者。莫如靜庵,退溪兩先生。乃立朱子祠於精舍之北。以兩先生配焉。每春秋。率諸生奠享。作學規及擊蒙要訣。以訓諸生。設社倉儲穀以救士民之艱食者。倣呂氏鄕約。以勵鄕俗。時上親祭于大院君廟。玉堂上箚以爲不可。上怒甚。先生聞之曰。主上於大院君之廟。親行祀事。於禮無違。於情所不免。玉堂何所見而請止乎。禮。有公朝禮。家人禮。學宮禮焉。公朝禮。以君爲尊。故雖諸父。恭行臣禮焉。但親父則不可臣也。家人禮。則以尊屬爲重。故人君可居父兄之下。若漢惠於宮中。坐齊王下是也。學宮禮。則以師爲尊。故雖天子。亦有拜老之儀。若漢明之於桓,榮是也。況大院君誕生聖躬。假使尙存。相見於宮中。必拜矣。今入其廟。用姪子祭叔父之禮。有何不可。俗儒徒知尊君抑臣之爲禮。而不知私親之不可絶。誠可嘆也。戊寅。有恭懿王大妃喪。以大司諫承召。入京謝恩。還向坡州。有舟行不忍終南遠。爲報篙師莫擧帆之句。五月。又拜大司諫。上疏辭職。且言臣言若見用。則臣身雖退。猶在朝也。上答曰。如有所懷。可實封以聞。乃上疏極陳時弊。凡萬餘言。言甚剴切。成牛溪讀其疏曰。眞所謂直言極諫經世之策。疏上。 命遞諫長。政院,玉堂啓以非待士之道。不許。俄拜吏曹參議。己卯又拜大司諫。皆不就。先生以士林携貳爲憂。以鄭澈,李潑俱有人望。而所見皆偏。貽書責之曰。君等論議協和。則國事可做。潑不能用時議。大加詆斥。先生乃上疏。言沈義謙雖出於戚畹。實善人也。今以義謙爲穽。收司之律。延及士類。鄭澈忠淸剛介。一心憂國。金繼輝淸白儒雅。練達治體。韓脩恬靜老成。好善愛士。而竝加以黨邪之名。使不得接跡於朝。只此三人之退。已爲可惜。況吹毛覓疵。不止於此乎。疏奏不省。參贊白仁傑上疏。請洗滌東西。老病辭不達意。要先生潤色。先生嘉其憂國之誠而許之。宋應泂劾之以匿跡代述。仁傑陳疏曰。宋之程頤。代彭思永作論濮王典禮疏。代富弼作論永昭陵疏。如此等事。先儒亦嘗爲之。故臣用李珥之文。而不以爲嫌。向人無隱。故傳者以爲珥誘臣上疏。臣雖無狀。豈敢以非臣本意。而聽人所敎而爲之乎云。庚辰冬。又拜大司諫。是時上寢疾新愈。思見先生。諭旨激切。先生感而承命入京。引見慰問曰。久不相見。有所欲言乎。對曰。歷觀古史。有爲之君不世出。殿下嗣服之初。臣民有太平之望。厥後因循。未見振起。今殿下大病之餘。善端開發。號令之下。悅服人心。臣民之望。無異初服。殿下須堅定求治之志。收召俊乂。委任責成。庶可有爲。若徒守謬規。則治道無由可成。嘗於夜對。啓曰。古人以夜對勝晝講者。群動旣息。君臣靜中相對。思慮專一。啓沃有效故也。今夜自上宜以學問可疑處及時政得失下。問於臣等也。上曰。學問必有所得。乃可會疑。故不能問也。先生曰。昔孟子問齊宣王曰。四境之內不治。則如之何。王顧左右而言他。朱子譏其不能有爲。今者四境之內不治。殿下當如之何。 上不答。上嘗有人臣食祿。則當效死之敎。先生曰。人臣當以分義爲重。若只慕恩祿者。人皆誘之以恩祿矣。故以分義爲重者。不計人君待我之厚薄。皆能伏節死義。若只以恩爲重。則其心不可信也。上然之。又曰。自上加恩於成渾。近古所罕。上曰。成渾之賢。予已聞知。第未知其才如何。先生曰。才亦非一般。有可獨任經綸之責者。有好善而能用群材者。成渾之才。若謂之能經綸則過矣。其爲人也好善。好善優於天下。此豈非可用之才乎。辛巳年間大旱。國儲已罄。先生深憂之。筵中 啓曰。若不變通弊法。以濟時艱。而只欲移粟活民。則粟亦無可移者矣。退與同僚上箚。請變通弊法。改定貢案。久任監司。倂省州縣。且請修己以淸治本。祛私以和朝廷。時國系之誣。尙未快雪。先生慨然曰。安有國君受誣二百年而不伸者乎。此由使价不得其人故也。 奏請之使。當以至誠感動。不成則爲埋骨燕山之計。請擇專對之材。朝議或以先生爲可遣。大臣曰。李珥不可一日去朝。乃止。先生承命製奏文以進。上覽之曰。善哉。蔑以加矣。大事將必諧矣。六月。特命陞拜大司憲。時議益携貳。必欲擊去沈義謙。掌令鄭仁弘發於席上。先生曰。義謙居散地已久。只以先后至親。使不失其祿而已。此於國家恩義。有何不可而必欲論之乎。群議益激。先生不能止。乃戒以毋過激毋波及。仁弘於後啓。添以援附士類等語。上問士類何人。仁弘歷擧鄭澈等諸人以對曰。相與締結。窺覘形勢。先生謂仁弘曰。季涵 鄭澈 字 介士也。若以爲締結義謙。窺覘形勢。則冤枉極矣。仁弘卽從先生言。乃獨啓避嫌。於是三司論議紛然。正言尹承勳斥先生以黨澈。先生與執義南彥經,持平柳夢井啓曰。鄭澈剛褊不能容物。憤士論之過激。屢形於辭色。時輩亦不深究澈之心事而詆斥過實。士輩之疑澈愈甚。而澈之不平愈深。造言生事者。交搆兩間。展轉阻隔。乃至於此。澈固不是。而以澈爲黨於義謙。亦不得爲公論矣。彼承勳有何識見。不過承望士類之風旨。爲趨附之計耳。兩司因先生引避請遞之。上峻批不允。屢辭乃許遞。特命尹承勳爲新昌縣監。先生因入侍。引咎自陳曰。承勳之言。有如迎合時論。故臣性愚直。率爾斥之。殿下折之太過。恐因此而直言之士有所囁嚅也。朴公淳歎曰。如叔獻。可作儒林宗匠。年少輩識見暗昧。乃以不關事。爭辨至此。置國事於度外。可謂逐鹿而不見泰山也。拜藝文館提學大司諫。上疏辭。不許。度支缺。上難其人。大臣首擧先生。特陞資憲。拜戶曹判書。時以天災。延訪先生。啓曰。自古治亂之形已定。則無災異。災異必作於將治將亂之際。我 朝立國幾二百年。此正將治將亂之機也。若於此時奮興振作。則爲億萬年無疆之休。不然則將至於潰破澌盡而莫之救也。人君必知一世之弊。然後可興一代之治。如醫者必知病根之所在。然後可用對証之藥。革弊一事。臣有妄計。請令大臣商議設局。名之曰經濟司。使大臣領之。而擇曉達時務者。建白施設。以革弊政。則實治可做而天心可回矣。且欲明敎化。必須尊奬先賢。使後學有所矜式。而聖上每以爲重難。我朝賢者。雖未得悉入祀典。如趙光祖。倡明道學。李滉。沈潛理窟。亟 宜先許從祀。以振士望。上皆然之。而其不准施者。憚於更張也。俄拜大提學。壬午。拜吏曹判書。皆屢辭不獲。專以革舊弊淸仕路爲務。秋。遞拜右參贊。俄陞崇政。拜右贊成。上命製人心道心說,善惡幾圖及金時習傳,學校規範以進。俄上萬言封事。極陳時弊。答曰。具見忠懇。非不欲策勵有爲。而眇眇寡躬。才識不逮。以至于今。事與心違。予亦竊歎焉。冬。皇朝遣翰林編修黃洪憲,給事中王敬民。頒皇子誕生詔。先生爲遠接使。江上迎詔之日。兩天使注目良久。問於譯官曰。頗有山林氣象。無乃借出林下士以待我耶。對曰。三場狀元。久在侍從。中年以疾辭職。退居林下。今則國王倚任已久。實非林下士。又問曰。然則這作天道策者耶。先生爲擧子時。對天道策居魁。一時膾炙。傳入中華而兩使亦曾見之。欽仰有素。故有此問。 對曰是也。兩使頷之。及途次酬唱。先生操筆立成。而辭意具美。自中準繩。詔使歎服曰。大手大手。禮敬甚至。必以栗谷先生稱之。至文廟。請先生講解克己復禮爲仁之義。先生卽著說以進。兩使曰。此說極好。當傳布中國。回至江上。正使宿搆七言長篇及長律。臨行。遽出求和。欲以倉卒試其才。先生卽於席上。步韻手寫以呈。兩使傳玩。稱賞再三。將別。執手戀戀。至於出涕。人以爲詔使愛敬儐相。前古所未有云。還途。拜兵曹判書。辭不許。癸未。呈告乞免。且以文衡主兵。皆是重任。請解兵務。上答曰。卿常以更張弊政。前後惓惓。是卿之素志也。今卿誠能出奇運謀。革盡流弊。作爲養兵之規。則國家幸矣。卿其努力。時北道藩胡入寇。先生遂就職。本曹事務煩宂。屬當警急。牋牒雲委。左酬右答。剖決如流。綱擧目張。細大不遺。進六條方略曰。任賢能養軍民足財用固藩屛備戰馬明敎化。又上封事曰。和朝廷而革弊政。本也。調兵食而固防禦。未也。方今黨論日激。士禍將起。請消融蕩滌。鎭定調和。陟罰臧否。一循公道。以定國是。朝廷旣和。然後可議得人而革弊矣。又請募庶孼及公私賤有武才者。入戍北邊無武藝者納粟于邊。以補軍興。庶孼則許通。賤隷則爲良。此皆世祖朝已行之規。而北鄙警報甚急。國家兵食俱乏。權宜之策。不可已也。且申請前日建白改貢案改軍籍等事。上答曰。予偶閱卿前疏。今卿疏又適來。前後惓惓。識卿不忘庸君之孤忠也。蓋先生之意。惟欲盡除燕山朝弊政之未盡剗革者。且革近來謬規之變亂舊制者。一遵祖宗朝故事。興衰補廢。率由舊章而已。所欲更張者。實欲復古也。且以 文昭,延恩一日三祭及山陵朔望之祭爲非禮。請於山陵只祭四節。文昭,延恩。日行一祭。以謹祀事。以紓民力。此先生之前後累陳不已。而上意則以一時輕改爲難者也。上於此等論議雖或厭聞。而見先生公忠不黨。至誠憂國。眷任頗專。時輩忌憚日甚。謀所以惎之。而先生之才學德望。無疵可指。乃揣知上厭聞革弊之議。遂以更張爲目。凡有建白。動輒沮撓。浮議交亂。吹毛益巧。先生正色立朝。任怨不避。夏。北胡再擧兵。久圍鍾城。邊報日急。國內騷動。先生夙夜憂勞。罄竭心力。晝則終夕在公。夜則不解衣帶。明燈達朝。公事之至。輒應之不滯。號令明肅。緩急有序。人情信服。不擾而事集。由是上益翕然倚仗。而媢嫉者媒孼益甚矣。時抄發射手。而官無戰馬難以猝辦。先生懲乙卯戰士之掠馬。深以階亂爲憂。募所抄中老孱從願納馬。以給應赴者。而應募之有無。未能預料。乃先下令而募之。於是納者雲集。而戰士行急。不可緩期。且啓且頒。上卽允之。行者以得馬爲幸。留者以免防爲喜。公私便之。一日邊報入來。上不時命召。先生素患眩暈。至是因勞瘁轉劇。力疾趨命。疾甚不省。入臥內兵曹。於是三司以專擅權柄。驕蹇慢上劾之。所謂專權慢上。指上二事也。先是。朴謹元,宋應漑,許篈皆曾爲先生所斥。三憾合勢。助之者衆。醞釀積久。至此而發。屢啓不允。乃停。先生陳疏引咎乞罪。上答曰。卿識敏才高。忠誠體國。今疆場多事。方藉卿謀猷。撫定北方。安輯兵民。其勿疑沮以副予望。凡六疏。天語諄切。促出就職。且敎曰。寥寥千載。君臣相遇。得做功業者。絶無而僅有之。卿不聞向者之敎乎。予命之退然後退。丁寧一言。鬼神亮知之。卿何忍今日欲辭去也。先生不得已詣闕自劾曰。臺諫之停啓。以久未蒙允。且以臣爲非。全然無恥者。必知所以自處故也。臣若幸上之優容。偃然從政。則從前累疏。只是固寵之計。而無義甚矣。先失其身。何以事君。請擧臣罪。咨詢左右。如以爲可貰。則臣雖未安。敢不黽勉隨行。如以爲實犯。則雖流放竄殛。臣實甘心。上答曰。在卿自處之道。雖當如是。然予若詢于左右。是不免有一毫疑卿之意。予豈敢爲此。於是大司諫宋應漑,獻納柳永慶,執義洪汝淳及典翰許篈。復劾以無臺諫蔑公論。至有禦下蔽上。其志將欲何爲等語。上以手敎下大臣曰。近因李珥言語間事。臺諫相激。比之於誤國小人。此非發於偶然也。蓋李珥自前裁抑新進。惡其趨時黨附。屢爲陳論。見忤於時論者久矣。遂乘時伺釁。必欲劾去而後已。凡公卿大夫承召不來者多。未聞有以慢上論之者。是何臺諫之言。獨能直截於珥耶。其納馬不稟。亦不過許多事務間。未及爲之耳。是豈擅權而然哉。夫擅權慢上。人臣極罪。人君於小民。尙不可以情外罪名。輕加於其身。況宰相耶。旣曰擅權慢上。則何不明正其罪。照以王法。而乃敢請以罷職。有如乙巳姦臣輩目之以反逆。而罪之以罷遞者之爲耶。大臣回啓後敎曰。李珥無出仕之理。兵務甚急。姑遞其職。以安其心。當此北方兵起。國家將亡之時。朝廷淆亂。賢邪莫辨。何以爲國。予不勝痛心。嗟乎。李珥其好歸鄕關。高臥白雲。誰得以羈縻也哉。於是朝野憤激。行路咄嗟。牛溪先生成渾被徵至京。疏白先生情事。上答曰。觀爾上疏。忠憤激烈。使姦邪聞之。足破其膽。信乎君子一言。爲國輕重也。命召三公。敎曰。排擯李珥。誰所爲也。其朋姦之類。又誰也。辨別以啓。領相朴淳請對。極陳先生忘身徇國之實。許,宋乘時搆捏之狀。兩司復劾先生及朴淳,成渾。極其醜詆。太學生柳拱辰等四百七十人。全羅道儒生徐台壽等二百四十人。黃海道儒生柳帶春等一百八十人。爲先生相繼抗疏。守闕伸辨。上答曰。觀爾等疏辭。忠讜激厲。義氣如此。夫復何憂。當今士風。遠邁漢,宋矣。王子師傅河洛上疏言三賢乃士林領袖。而被三司誣罔。都承旨朴謹元等啓以洛爲偏黨。上答曰。爾等欲杜塞人言。掩蔽聰明耶。如是而終欲爲何事。大抵公論之在世間。如水之在地中。不必以臺諫而是。不必以芻蕘而非。今茲臺諫之言。人心不服。義士奮袂。將四面而起。爾等雖竭力䌤縫。不可得矣。政院又啓以儒生爲悖亂。兩司啓以朴謹元等爲直言。上答曰。宋時六賊當朝。李綱去國。太學生陳東等上疏極論之。千載之下。聞其風節。尙不覺投袂而興起。今茲儒生目見朝論乖宜。倡義抗章。其忠肝義膽。凜凜有不可犯者。誠可謂不負所學而橫流之砥柱也。太學。公論所在。朝廷是非。可亂於一時。而太學公論。焉得而廢也。設使狂生之言。或有過中。猶不可待之如此。況其正直之氣。邁靑松而挺高節者哉。彼幺麽數臣。昵伏近密。恣爲朋比。杜絶人言。掩蔽聰明。乃敢目諸生以悖亂。是欲踵黃潛善之所爲。眞小人而無忌憚者也。予不卽擧流放竄殛之典。將使魍魉之類。騁騖於昏夜。已爲失刑爾。兩司反爲伸救耶。遂以御筆親撰敎書。命竄朴謹元,宋應漑,許篈等。其敎書曰。憸人在位。朝著不靖。司寇失刑。國是靡定。爰擧流放之典。永爲來世之鑑。朴謹元等以憸邪之性。挾斗筲之器。締結浮薄之徒。作爲朋私之黨。互相汲引。盤據要津。或塵喉舌之司。或冒臺侍之官。張皇聲勢。簧鼓邪說。擅弄權衡。脅制朝廷。傾陷大臣。排擯忠賢。朋比之跡已彰。尙稱公論。挾撼之態盡露。自謂貞方。事皆罔蔽。言悉誕誣。忠良屈抑。惡且極於濁亂。群小得志。罪難逭於誤國。遠近咸知。朝野共憤。尙寬肆市之誅。薄施惟輕之典云云。仍敎曰。以李珥爲黨云。其能以此說動予意乎。噫。苟君子也。不患其有黨。惟患其黨之少。予亦法朱熹之說。願入珥,渾之黨。自今以後。以予爲珥,渾之黨可也。惟詆斥珥渾。則必罪不赦。又敎曰。三司之論。不過以義謙爲穽於國。凡一時名臣賢士之異於己者。必擠陷於其中。而聲爲其黨。蓋其意以爲一加此名。則人不敢救。君可以疑。吾志可得。吾意可遂。殊不知自君子視之。如見其肺肝。雖論之十年。曷足以動予中而惑予意也。先生自坡州下海州。未幾。以判敦寧府事命召。上疏辭職。上答曰。噫。天未欲平治我邦家耶。意者天使卿動心忍性。增益其所不能。將任舟楫霖雨之責於後日。天之於卿。可謂曲成而玉汝矣。於卿何損焉。冬。特拜吏曹判書。先生又陳疏懇辭。上答曰。卿朝廷重臣。非林下逸士之比。卿身進退。亦不可以自任。而不辭於予。有若逃遁之爲。望卿之來。不啻饑渴。設或辭職。必須親辭於予前。於禮爲得。先生不得已承命入京。上卽引見。先生引咎陳謝。力請放還三竄。仍乞致仕。皆不許。先生謂成牛溪渾曰。三人以言官獲罪。至於遠竄。不可不反覆陳啓。以回天意。與成牛溪渾入侍。前後陳懇。而天怒終不解。先生以踽踽孤蹤。獨承恩眷。專務調和。無論彼此。惟以收拾兩邊士類爲先。而時輩皆布列臺閣。懷疑顧望。却立睨視。無意共事。先生歎曰。時輩之心公者久。久觀我所爲。必能明我赤心。無何。忽感疾易簀于大寺洞寓舍。是夜。家人夢黑龍自寢房穿過屋樑。飛躍天上。翌朝。先生屬纊。甲申正月十六日也。還朝秉政。纔六十餘日。享年四十九。前二日。聞徐益以巡撫御史。受命按北。招來欲授以方略。子弟交諫。先生曰。此乃國家大事。吾豈可過念身病。失此機事。況死生有命。吾豈必因此而死。乃扶起口號。令弟瑀書之凡六條。此乃絶筆也。書畢。奄奄有垂盡之狀。病遂革。臨絶。諄諄如夢中語。皆國事。無一言及家。卒後家無甔石。借衣以斂。無宅於京。妻子轉徙無依。不免飢寒。朋友及士子出米布。爲買一宅於京。且爲庶子二人納粟。許通仕路。先生之疾病也。上日遣太醫。藥餌交道。訃聞。哀慟特甚。哭聲徹於外。命進素膳。撤朝三日。遣禮官弔祭。且命沿路州郡護送一家。從遊之士與聞風慕義之徒。以至窮鄕村氓。莫不聚會擧哀。號痛相弔曰。生民無福。太學生數百餘人及禁軍市民流品庶官各司吏胥。皆來哭奠。盡哀而去。發引之日。望於郊外。執炬而送者。連亘數十里。塡街咽巷。悲號震野。是年三月。葬于坡州紫雲山先兆。夫人盧氏。谷山望族。宗簿正慶麟之女。仁順慈和。配君子無違德。承奉宗姒。極其誠敬。先生之歿。朝夕上食。必手自具。三年之後。亦不廢朔望哭奠。待宗族撫衆妾。一以先生在時爲法。壬辰之變。語子姪曰。大盜彌滿。必無偸生之地。與其轉死他鄕。寧死於坡山。爾輩勿以我爲念。他日好收吾骨於墓側。子姪屢諫夫人曰。吾喪所天已八年。吾之命。不亦頑乎。況逢大亂。苟且偸生。有何義乎。聞大駕西行。乃奉神主歸坡山。及賊至。罵賊不屈。遂被害於先生墓側。本州上其事。上命旌表其閭。側室子二人。曰景臨。曰景鼎。女一人。景臨有子五人。曰穧進士。餘幼。景鼎有子二人幼。女爲進士金集妾。先生天資極高。英寯出人。淸明溫粹。忠厚愷悌。寬而有制。和而不流。慕古而不泥。應俗而不混。待人開心。洞赤無隱。處事坦夷。不設崖岸。終日樂易。未見忿厲之容。光輝融徹。符彩秀朗。望之如祥雲瑞日。輒知其爲盛德君子也。少時雖汎濫諸家。流入禪學。惟其氣質明透。乃能釋然開悟。旋卽歸正。自是用力益深。進修益專。刻意覃思。精詣實踐。其於義理。洞見大原。不待師承。暗合道妙。其功程次第。一本於濂洛宗派。而得之考亭者尤多。故門路之正。雖質之前聖而無疑。至於六經之奧義。百家之異說。無不硏窮探賾。瞭然裁判於胷中矣。敎人。必以立志爲先。躬行爲務。循循有序。善誘不倦。隨人材品。開導以誠。其講論之際。分析精微。竭盡底蘊。立言著說。多有發前人所未發者。嘗見雲峯胡氏心性情論。爲文以辨之。且與退溪先生論理氣。牛溪先生論人心道心。往復長書。累數十篇。皆出自得。不襲陳言。明白證援。曲暢旁通。橫說豎說。無不當理。平生尊信小學。病其舊註訛舛。詳略互異。乃折衷群言。擇精要删繁複。其有未盡者。補以己意。名曰小學集註。四書五經。口訣釋義。多所更定。小註諸說。亦多取舍。且恐初學不知向方。爲著擊蒙要訣,學規等書。至於聖學輯要。則格致誠正之功。修己治人之方。無不備具。而尤詳於明正學闢異端之說。蓋其理明義精。養深積盛。充而爲德行。發而爲事業。皆明體適用之學。實非沈潛自守。不閑世務之比也。其居家也。孝友敦睦。出於天性。奉伯兄寡嫂于家。撫養其子女猶己出。與兄弟諸姪聚一堂。連枕而宿。歲時設酒食。命弟彈琴。使少長歌而和之。每晨整衣冠拜祠堂。朔望參奠後坐正寢。受男女子姪之拜。作同居相戒辭。讀以警之。家衆亦於庭下。分立行禮。又以方言釋戒辭。諄諄敎飭。率以爲常。奉祭祀一遵家禮。務盡誠敬。庶母性悍且嗜飮。先生事之如親母。出入必告面。晨必湯酒。適寢所問起居。祿俸亦不自專。或有不豫色。則柔辭起敬。懽其心乃已。庶母後乃感化。先生之歿。服喪三年。事仲兄愛敬俱至。應對服勤。如事嚴父。旣貴如一日。門人或疑其過。先生曰。朋友之間。過恭非禮。父兄之前。行過乎恭。禮也。儉於自奉。不問生產業。家貧屢空。鄕居或食麥飯。而每日晨起。必先經紀庶母及兄嫂供奉炊㸑之具。飯非粳米。饌無兼味。則不敢進。閨庭之間。內外斬斬。姬妾僮僕。無敢闌語。奔人之急。如救水火。接人無間親疏貴賤。一以誠悃。群居燕笑。和氣藹然。平生未嘗與人私語。胷襟洞豁。表裏如一。樂道人之善。而不求備於人。故賢愚善惡。咸得盡其情。雅好山水。曾於栗谷舊業。修花石亭故址。後改築石潭精舍。一室圖書。玩心髙明。養以沖恬之趣。積其精一之功。自是學益精。行益修。道日益尊。名日益髙。從遊之士日益衆。講劘之暇。時與冠童。婆娑水石。詠歌自娛。蕭然有出塵之想。一切世味。泊如也。其立朝也。居官必以古先賢哲自期。引君必以唐虞三代爲期。惟思竭心殫誠。盡吾之所當爲而已。不以循常守舊爲心。其於富貴貧賤毀譽榮辱。不一動其心。而惟以善人君子亨否。爲己休戚。國事治亂。爲己憂樂。常謂君心出治之本。法筵勸講。章疏陳說。勤勤懇懇。皆本仁義。每於上前。開陳治道。別白事宜。義利公私之辨。天人王伯之分。與夫治民備邊之策。無不傾倒羅列。引據古今。上亦虛心聳聽。多所歎賞。或至日仄罷對。金公應南自筵中出。謂人曰。不圖今日復見三代都兪之盛云。常以士論之携貳。爲朝廷痼弊。務欲打破東西。同濟國事。雖人心不如我心。卒未能調其乖隔。而公平正大之心。可質神明。旣以孤誠受上知。感激恩遇。一心循國。知無不爲。言無不盡。嘗於筵中。請預養十萬兵。以備緩急。否則不出十年。將有土崩之禍。西厓柳公成龍以爲無事而養兵。養禍也。時久安恬憘。 筵對之臣。皆以先生言爲過。先生出謂成龍曰。國勢危如累卵。而俗儒不達時務。他人則固無望。君亦有此言耶。今不預養。必無及矣。因愀然不樂。逮壬辰之後。西厓於朝堂。語諸宰曰。當時吾亦慮其騷擾而非之。到今見之。李文靖。眞聖人也。若用其言。國事豈至於此極乎。且其前後章箚中籌策。其時人或訾議。而今皆鑿鑿先見。眞是不可及之才。栗谷若在。必能有爲於今日矣云。誠所謂不待百年而知也。爲文章論說。必本於性理。雲行水逝。初不經意。而發言成章。雄渾無涯。如菽粟。如蒭豢。如大海廻瀾。如天馬驤空。讀之使人心融理透。蕩滌査滓。眞可謂經世衛道之文也。有文集十卷行于世。嗚呼。天爲人君開太平之業者。必有鳴世之才出爲其用。當宣廟勵精之日。有斯人爲之佐。天之降大任。似非偶然。明良相遇。千載一時。可謂盛矣。然世之用賢。賢者之用於世。亦非一道。小用之則小效。大用之則大效。若先生。寧爲不用而不能爲小用者也。蓋先生學問之精深。德行之淳備。論議之俊發。出處之正大。皆非俗士淺見所可窺測。如祥麟儀鳳之瑞世。如泰山喬嶽之鎭物。日星乎中天。砥柱乎奔流。而其髙才遠識。貫穿今古。偉略宏猷。軒擧宇宙。旣任斯民之責。又荷君上之眷。將欲挽回世道。陶鑄唐虞。興一代之禮樂。振百年之頹廢。其所抱負期待。爲如何哉。然而流俗不知。黨議相軋。欲行古道。則謂之迂闊。欲祛弊法。則謂之紛更。欲調劑士流。則謂之依違。欲擔當世務。則謂之專擅。群擠衆咻。使不得一日安於朝廷。雖其行道濟世之心。愛君憂國之念。惓惓于中。而難進易退。不爲苟容者。是固平生之所守。故竭忠以感上心。而言不用則去。推誠以協朝論。而義不合則去。是知先生之在朝也。固未嘗一日而忘退。其退也。亦未嘗一日而忘世也。先生之心事。其亦戚矣。而進退大節。可謂不負所學矣。逮夫乾綱夬斷。眷任纔隆。而先生已病矣。年未滿半百。位未躋台鼎。竟未及展布其志。天之與奪。果何意耶。噫。朝論日益乖張。賢路日益崎嶇。君子之不容於世。自古而然。雖使先生久當國柄。其能大有施設。得展功業。如先生志。固未可期也。而又安知其不觸冒危機。顚躓狼狽。爲士林之長恨也。是先生之脫屣人間。翩然長逝。在先生固無所憾。而其設敎立言。足以開牖後學。遺風餘韻。足以聳動衰俗。則先生之道。雖未及大行於當時。而先生之澤。亦可謂流及於無窮。或者斯亦天意也耶。萬曆壬子春。<끝>
月沙集 第五十三53券 / 諡狀 上。
▲율곡선생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