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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82권 / 묘지명(墓誌銘)
신독재 김집선생 묘지명 병서(愼獨齋 金集先生 墓誌銘 幷序)
1574년(선조 7) - 1656년(효종 7)
신독재(愼獨齋) 선생이 돌아가시자, 내가 외람되이 명문(銘文)을 짓고 그 아들 익형(益炯). 익련(益煉)이 문인(門人) 윤선거(尹宣擧) 등과 함께 새기어 신도(神道)에 세웠는데 얼마 후에 두 아들과 윤공(尹公)이 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제 선생의 여러 손자인 만리(萬里). 만성(萬城) 등이 나에게 말하기를, “유지(幽誌)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다시 청합니다.”하였다.
아,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배운 자가 많으나,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니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諱)는 집(集), 자(字)는 사강(士剛)으로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 조 부인(曺夫人)은 첨추(僉樞) 대건(大乾)의 딸이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2년(1574, 선조 7) 6월 6일에 선생이 한양 정릉동(貞陵洞) 이제(里第)에서 태어났다. 자질과 천성이 뛰어나 말을 배울 때에 한 손가락을 자기 입 한가운데 곧게 세우고 ‘이것이 중(中) 자이다.’ 하였다.
5세에 글 읽을 줄을 알고 큰 글자를 썼으며, 말과 행동이 망녕되지 않았다. 차츰 자라자 천곡(泉谷) 송공 상현(宋公象賢)과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글을 배웠다. 간이(簡易) 최립(崔岦)은 선생이 지은 시를 보고 말하기를,“앞으로 큰 솜씨가 될 글이다.”하였다.
임오년(1582,선조 15)에 노선생(老先生)이 상제(喪制)를 지키며 여사(廬舍)에 있는데, 선생이 모시고 전(奠) 돕는 일을 모두 예법과 같이 하였다. 병술년(1586,선조 19)에 조 부인(曺夫人)이 돌아가니, 선생이 애통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 신묘년(1591,선조 24)에는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 2)에 성균관의 추천으로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계축년(1613,광해 5) 무고옥(誣告獄)에 온 집안이 하마터면 화를 면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마침내 노선생을 모시고 호서(湖西)의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다. 당시 폐조(廢朝)의 정치가 어지러워 윤상(倫常)이 단절되었으므로 선생은 어버이를 봉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이외는 아무것도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인조 원년)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즉위하여서는 노선생이 맨 먼저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조정의 의논은 선생의 학행이 뛰어나므로 장차 대직(臺職)에 발탁시키려 하였으나, 선생이 매우 힘써 사면(辭免)을 청하고 어버이 봉양(奉養)을 위하여 부여 현감(扶餘縣監)을 얻게 되었다.
부여 현감이 되어서는 폐정(弊政)을 힘써 없애고, 교화를 베풀었으며, 날마다 선비들과 경적(經籍)을 토론하였다. 정묘년(1627,인조 5)에 병으로 그만두니, 사민(士民)들이 비(碑)를 세워 선생의 덕을 칭송하였다. 무진년(1628,인조 5)에 임피 현령(臨陂縣令)이 되었는데 얼마 후에 사면하고 돌아갔다. 이후로 연이어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 전라 도사(全羅都事)의 명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신미년(1631,인조 9) 가을에 노선생이 돌아가니, 선생이 아직은 근력(筋力)이 있어 예절을 차리되, 성신(誠愼)을 다하고 정문(情文: 인정과 예문)을 다하였다. 갑술년(1634,인조 12) 봄에 선공 첨정(繕工僉正)에 제수되고, 여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부르자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다음해에 다시 제수되었다.
병자년(1636,인조 14) 봄에 장령(掌令)에서 재차 집의(執義)에 제수되고 그사이에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병자년 겨울에 노(虜: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선생이 밤중에 싸움터로 달려갔으나, 행조(行朝)에 도착하기 전에 적이 이미 길을 막았으므로 물러나 동지(同志)와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장차 북으로 올라가 근왕(勤王)하려 하였는데, 이윽고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선생이 도성(都城)에 들어가 위로하였다.
무인년(1638,인조 16) 가을에 다시 집의(執義)로 부르니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겨울에 어떤 사람이 고변(告變)하였는데 선생의 서제(庶弟) 고(杲)가 체포되어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병든 몸으로 떠메어서 서울에 들어가 아우 참판공(參判公) 반(槃)과 함께 석고대죄(席藁待罪)하니, 상이 안심하고 물러가라고 특별히 명하고 이어 이르기를, “고(杲)가 진실로 망언(妄言)의 죄가 있으나, 특별히 그 부형(父兄)을 보아서 용서한다.”하였다.
기묘년(1639,인조 17)에 다시 소명(召命)이 있으므로, 선생이 지난겨울의 일로써 겸하여 높은 은혜에 한번 사례(謝禮)하려고 드디어 조정에 나아갔는데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승진 제수하므로 두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마침내 입시(入侍)하니, 상의 위유(慰諭)가 지극하였다.
경의(經義)를 강설(講說)하다가 인하여 규계(規戒)를 아뢰니, 상이 깊이 귀담아 듣고 이르기를,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하라.”
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온갖 교화(敎化)의 근원이니, 진실로 존양(存養)하여 그 발(發)하는 바를 살피면, 인욕(人欲)은 물러나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요순(堯舜)의 심법(心法)이니, 내가 마땅히 체념(體念)하리라.”
하고, 또 묻기를,
“마음을 다스리고 정치를 하는 데는 무엇으로 요점을 삼아야 하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경(敬)으로 주장을 삼아야 하고, 정치를 하는데는 성실(誠實)이 가장 귀중합니다.”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바꾸어 제수하매 질병으로 사양하니, 상이 의약(醫藥)을 내려 위문하였고, 선생이 더욱 힘써 체직을 원하니 마침내 윤허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제수하면서 이르기를, “경(經)에 밝고 행신도 닦아졌으니 진실로 이 책임에 합당하다.”하였다.
갑신년(1644,인조 22) 가을에 공조 참의(工曹參議).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었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대군(大君)에서 세자(世子)에 오르자, 대신이 아뢰기를, “김모(金某)는 일생을 성리학(性理學)에 침잠(沈潛)하였으니, 동궁(東宮)을 모시게 한다면 반드시 훈도(薰陶)의 이익(利益)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소지(召旨)가 매우 간절하였다.
병술년(1646,인조 24) 봄에 이산(尼山: 논산의 옛 지명)의 적(賊) 유탁(柳濯) 등이 난(亂)을 꾸미다가 복주(伏誅)되었는데, 그 원사(爰辭)에 ‘김 승지(金承旨)의 집에는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는 말이 있으므로 상이 찬탄하기를, “비록 도적 무리라도 두려워 회피할 줄 아니, 현자(賢者)가 국가에 유익함이 이와 같다.”하였다.
상은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의 말에 의해 세자 찬선(世子贊善)을 별도로 설치하고 여러 차례 불렀고, 다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명하기도 하였다. 대개 기묘년(1639,인조 17)에 물러나 돌아온 이후로 제명(除命)이 빈번하였으나, 하나같이 병으로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세도(世道)를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경인년(1650)에 효종대왕이 즉위하여 특별히 부르기를,
“이 망극(罔極)한 때를 당하여, 더욱 옛것을 상고하며 글을 읽은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구나. 네가 선조(先朝) 때에도 일찍이 하루도 조정에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나는 성의가 박하니, 어찌 올라오겠는가.”하므로, 선생이 즉시 들어와 임곡(臨哭)하고 인하여 신명(新命: 관직을 새로 임명한 것)을 사례하니, 미찬(米饌)을 풍성하게 내리고, 특별히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제수하자, 전조(銓曹)에서 격외(格外)라고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옛것을 상고하며 글을 읽은 사람을 어찌 일반적인 규칙에 구애하겠느냐.”하였다.
선생이 네 번 글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고 또 두 번을 직접 이야기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도 어진 이를 대하는 도리가 아니다.”하고, 드디어 공조(工曹)로 옮겼다. 봉사(封事)를 올려 상례(喪禮)와 시무(始務)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천서(天叙)와 천질(天秩)은 스스로 전상(典常)이 있고, 고경(古經)과 국제(國制)는 인혁(因革 연혁)하여 서로 계승되니, 당초에는 갑작스러워 놓치고 지나쳐 버림을 면치 못하였으나, 애초에 절문(節文)은 강구(講究)함이 마땅하므로, 이제 그 대개를 논하여 한 책자를 만들어 올리오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지휘(指揮)하시어 일왕(一王)의 제도로 삼으소서.”하고, 또 아뢰기를, “천하의 대본(大本)은 바로 전하의 일심(一心)이며, 오늘의 급무(急務)는 바로 기강(紀綱)을 떨치고 궁위(宮闈)를 엄숙히 하며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며 실효(實效)를 책임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또 대행(大行)의 역명(易名 묘호(廟號)를 올림)과 자강(自强) 도리를 논하였고, 끝으로 안치(安置)시킨 제손(諸孫)을 빨리 방환(放還)시켜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대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이 그 모친에 연좌되어 일찍이 외지(外地)로 귀양 갔던 것이다. 상이 손수 비답을 내리기를, “올린 여러 가지 일들은 그 절실함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모두 문제만 지적하고 방책을 말하지 않았으니, 다시 분명히 나에게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하고, 이어 《소학(小學)》의 주설(註說)과 《중용혹문(中庸或問)》의 구두(句讀)를 정정(訂定)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에 유신(儒臣)이 상의 뜻에 거슬려 엄중한 비답(批答)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사직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는 오직 마음을 비워서 잘 받아들이는 데 있고, 말씀을 할 때도 반드시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여야지, 결코 성을 몹시 내거나 불평하여 뭇 신하가 그 천심(淺深)을 의논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경(卿)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후회한다.”하였다.
세 번 사양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체직하도록 하고 사대(賜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나 보고 싶은 지가 오래되었다. 경이 이제 올라왔으니,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국가에 보배로 여길 것이 없고 오직 경만이 보배이다.”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조(先祖 인조)에서 임금의 일심(一心)만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진정 이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스리는 도리는 사람을 얻는 데 있고, 사람을 얻는 요령은 또한 임금의 정밀한 살핌에 있습니다.”하니, 상은 모두 허심탄회하게 가납(嘉納)하였다.
상이 산릉(山陵 인조의 능)과 혼전(魂殿)에 왕비를 함께 제사하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를 병행(並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선정(先正) 신(臣) 이황(李滉)이 이미 논한 바가 있습니다.”하였다. 또 반곡(返哭)한 후에 안신제(安神祭)를 베풀려 하니, 선생이 또, 아뢰기를, “예에 근거할 문헌이 없습니다.”하였다.
곧 대사헌에 제수하니, 또 아뢰기를, “근일 관직을 제수하는 데에 혹 성인(聖人)의 무편무당(無偏無黨)한 뜻을 잃으니, 이렇게 하면 국사(國事)는 다시 가망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자신의 사욕을 힘써 버리고 천리의 공정함을 힘써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나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니, 깊이 가탄(嘉歎)하노라.”하였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김 문정공(金文正公)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자못 함부로 말하므로, 선생이 또 논의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작은 관리가 원로(元老)를 침모(侵侮)하니, 나의 존경심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였다.
상은, 선생이 간절히 사양하며 마지않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바꾸어 제수하였는데, 산릉(山陵)의 복토(復土 광중(壙中)에 하관(下棺)하고 흙을 덮는 일)를 마치고 선생이 여러 차례 물러나기를 빌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入侍)하여 《중용(中庸)》을 진강(進講)하고, 이어 사치에 수반되는 폐단을 아뢰었다.
이윽고 돌아갈 뜻을 더욱 굳히니 정부(政府)와 옥당(玉堂)ㆍ태학(太學)의 제생(諸生)이 차례로 글을 올려 머물게 하기를 청하였고, 김 문정공(金文正公)은 말하기를, “옛적에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이 ‘국사(國事)는 여회숙(呂晦叔 여공저(呂公著))에게 부탁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은 장차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하고는, 마침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보건대, 김모(金某)는 유문(儒門)의 숙망(宿望)으로 노성(老成)하고 단량(端亮)하여 온 사림(士林)이 모두 우러러보면서 성명(聖明)께서 같은 조정에 있게 하였음을 기뻐하고 있으니, 신은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여 새 교화를 돕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하므로, 상이 근시(近侍)를 두 차례나 보내어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끝내 사양하고 남교(南郊)로 나가니, 상이 선생의 종자(從子)인 승지(承旨) 익희(益煕)를 특별히 침전(寢殿)으로 불러서 이르기를, “네가 가서 내 뜻을 일러라. 너를 보내는 것은 잘 타이를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하므로, 선생이 부득이 다시 들어가자, 상이 내사(內使)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선생이 또 두 차례 글을 올려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경이 눈 오는 엄동에 노년(老年)으로 집무(執務)가 어려움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잠시 멈춘다면 국가의 보익(補益)과 사림의 긍식(矜式)됨이 어떠하겠는가.”하고, 즉시 대사헌에 제수하면서 이르기를, “일상적인 규칙에 구애받지 말고 매번 강연(講筵)에 들라.”하였다.
이윽고 이조 판서로 승진시키면서 이르기를, “천위(天位)와 천직(天職)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는 왕공(王公)의 현인(賢人)을 높이는 도리가 아니다.”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나아가 사은하고 성심을 다하여 지우(知遇)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므로 조야(朝野)가 서로 다투어 기대하였다.
선생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전하가 계통을 이으신 지 이미 반년인데, 정치의 체제가 서지 않고 국가의 형세가 더욱 쇠약해지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반정(反正)에 기준(耆俊 구신(舊臣)과 준재(俊才))이 직위에 있어서 오늘날의 비교가 아니었으나 끝내 훌륭한 업적이 없었으니, 천고(千古)에 유감입니다.
그런데 혹시 오늘날이 다시 그때와 같을까 염려되어 신은 사사로운 근심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또 부견(符堅 전진(前秦)의 세조(世祖)) 같은 자는 본래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는 일시의 인재를 얻어 사업을 이룩하였고 또 진 목공(秦穆公) 같은 이는 소 먹이던 이를 등용하여 재상을 삼았으니, 그 사람이 꼭 어진 줄만 안다면 어찌 품계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하자, 선생이 또 아뢰기를, “인주(人主)의 도량은 넓고 큰 것이 귀한 것인데, 근래 전하께서 뜻에 거슬린 사람은 소외(疏外)하시는 의사가 뚜렷합니다.
그리고 대동법(大同法)의 요지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여유있게 하려는 것이나 국가의 체제가 서지 않았으니, 먼저 시행할 바는 아닌 줄로 압니다.”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모두 노성(老成)하니 기쁘다.”하였다. 선생이 마침 상위(喪威)를 만나고 또 병이 있어서 세 번 글을 올려서 사직을 청하자, 상은 위로하고 나서 병세를 물었다. 이미 대정『大政: 해마다 음력 12월에 행하는 도목 정사(都目政事)』이 실시된 뒤에 또 사퇴(辭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우상(右相) 김육(金堉)이 대동법(大同法)을 힘써 주장, 선생과 부합되지 않자 자못 선생을 침탈하므로 선생이 자핵(自劾)하기를, “지난번 우상(右相)이 찾아와서 대동법의 편부(便否)를 묻기에 신이 ‘매우 어렵다.’ 하였고, 또 지난번 경연에서도 우견(愚見)을 대략 진술하였습니다.
옛날에 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은 뜻도 같고 도(道)도 부합되었으나 악률(樂律)을 의론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맞지 않았고,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전상(殿上)에서는 구차히 같으려 한 적이 없었으나 전하(殿下)에서는 한번도 얼굴 붉힌 일이 없었습니다.
옛 군자의, 부합하면서도 꼭 같으려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한마디의 말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해서 불평한 기색을 나타내겠습니까. 이른바 ‘시기(時忌)에 저촉되었을 경우에는 죽음을 구제하려 해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을 읽고 나서는 송연(悚然)하여 능히 스스로 안정될 수 없으니, 신이 어찌 일각(一刻)인들 머물러 있겠습니까.”하고 곧 강 밖으로 나오니, 상이 간곡히 만류(挽留)하였다.
선생이 떠나기에 앞서 다시 글을 올리자, 상이 손수 서찰을 내리기를, “경은 국사를 생각하지 않고 몸을 사려 멀리 떠남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국사가 비록 위급하다 하더라도 믿는 바는 오직 한두 대신과 경이었다.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같은 전국(戰國) 시대(時代)의 명사(名士)도 오히려 욕됨을 참고 자신을 서로 낮추어 국사를 이룩하였는데, 경 같은 현인이 어찌 이런 것을 모르겠는가. 모름지기 국사의 중함을 생각하여 어서 들어오라.”하였다.
이에 김 문정공『金文正公: 문정은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이 다시 차자를 올려 선생을 소환하기를 청하였고, 성균관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제생 역시 소를 올렸다. 선생이 떠난 지 3일 만에 사관(史官)이 추급(追及)하여 돈유(敦諭)하였다. 상은 선생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특별히 우상(右相)을 면직시켜 여론을 위로하였다.
선생은 이미 돌아와서 소를 올리기를, “신은 김육(金堉)과 오래도록 사귀어 온 호의는 있고 서로 잘못한 혐의는 없었는데, 다만 대동법에 관한 의론이 부합되지 않아 한바탕 소요가 있었느니, 아랫사람이 사피(辭避)하는 것이 도리에 당연한 것이요, 애당초 염파와 인상여의 혐의와는 견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상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다음 서로 만나게 된다면 당연히 평소처럼 웃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당연히 물러나야 함은 이 한 가지 일뿐이 아닙니다. 신은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작은 도움도 없으니, 어찌 여사(旅舍)에서 죽어 천고(千古)의 비난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선생이 떠난 뒤에 시사(時事)는 더욱 수습할 수 없었고 또 오랑캐가 참소를 받아 공갈(恐喝)해 오므로 화(禍)가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으나 상이 직접 미봉(彌縫)하여 다행히 무사하게 되니, 선생은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졌다. 인조 초기(初期) 소상(小祥)에 병을 무릅쓰고 반열(班列)에 참여하자 상이 만나 보려 하였으나 선생이 이미 돌아간 뒤였다.
대사헌에 제수되었을 때 유공 계(兪公 棨)가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벼슬을 사퇴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유계(兪棨)의 어짊을 말하였으니, 신도 함께 귀양 가기를 청합니다.”하고, 글을 두 차례 올리므로 상이 비답하기를, “연이어 소장(疏章)을 보니, 황연(慌然)히 대면(對面)한 것 같다. 아, 세도(世道)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노성(老成)한 이를 등용하고 싶은 생각이 진정 마음에 간절하다.”하였다.
이 뒤에도 연이어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임진년(1652,효종 3)에 연신(筵臣)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김모(金某)는 바로 일대(一代)의 유종(儒宗)이니, 전하께서는 노성(老成)한 이를 특별히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하자, 상이 즉시 선생의 품계를 올리고 이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이미 79세였다. 나이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사양, 글을 네 차례나 올리자, 상이 마침내 허락하였고 얼마 후 하교(下敎)하기를, “김모(金某)는 나이 이미 기예(耆艾)가 되어 남은 날이 많지 않으니, 본도(本道)에서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여 나의 뜻을 표시하라.”하였다.
선생이 사례하고 사양하자, 비답하기를, “내가 경(卿)의 나이와 덕을 사모해 온 지가 어찌 어제오늘이겠는가. 아침저녁으로 덕음(德音)을 듣고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게 하지 못함이 한스러운데, 하찮은 식물을 무어 말할 게 있느냐.”하므로 선생이 그제야 종족ㆍ이웃들과 함께 먹었다.
계사년(1653,효종 4)에 전일의 명을 거듭하여 정헌(正憲)의 품계에 올리고 대신(大臣)의 주청으로 숭정(崇政) 품계에 뛰어올려 연이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ㆍ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하자, 선생이 앞뒤로 일곱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큰 의론이 있으면 관리를 보내어 물었다.
선생이 수년 전부터 잔병이 있었는데, 병신년(1656,효종 7)에 더욱 심하여졌으나 단장 검속(端莊檢束)함이 평소와 다름없었고 제생(諸生)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고 삶의 이치를 알아서 마음에 동요됨이 없는 것만은 고인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다.”하였다.
또 종자(從子) 익희(益煕)에게 경계하기를, “문형(文衡: 대제학)과 전장(銓長: 이조 판서)이 한 몸에 모였으니, 내가 너를 위하여 두려워한다. 십분 조심하여야 한다.”하였다. 5월 13일에 별세하자,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 이르기를, “김모(金某)는 유림의 영수(領袖)요. 조정의 중망(重望)이니, 특별히 예장(禮葬)을 내리라.”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으며, 뒤에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효종대왕이, 태묘(太廟)에 오름에 따라 선생을 배식(配食)하였다.
묘는 연산(連山) 천호산(天護山) 고운승사(孤雲僧舍) 북쪽에 있다.
김씨는 광주(光州)에서부터 나왔다. 신라 말기에 왕자 흥광『興光: 헌강왕(獻康王)의 아들』이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스스로 서인(庶人)이 되어 광주로 도망하였는데, 그 뒤에 자손이 더욱 현달(顯達)하여 고려 때 8대(代)를 연속해서 평장사(平章事)가 배출되었으므로 세상에서 그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국광(國光)이 좌의정을 지냈고 휘 계휘(繼輝)는 선조 때 명신(名臣)이다. 이분이 노선생(老先生)을 낳았는데, 노선생의 휘는 장생(長生),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선생은 단정(端正) 심밀(審密)하고 온아(溫雅) 화수(和粹)하여 마치 정금(精金) 미옥(美玉)과 같았으며, 청개(淸介)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았다.
오랜 선대(先代)의 미적(美績)을 계승하고 시례(詩禮) 연원(淵源)의 교훈을 들어 효제 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立身)의 근본을 삼고 궁리 거경(窮理居敬)으로 진수(進修)하는 방법을 삼았으니, 그 규모와 절도(節度)가 하나같이 가학(家學)으로 기준을 삼았다.
어려서는 문장에 유의하였다가 차츰 장성하여서는 곧 좋아하지 않고 오직 성리서(性理書)에 전념하여 밤낮없이 부지런하였으며, 마음을 가지고 직접 실천하고 공경하고 겸양하여 그 말과 행동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중년에 도(道)가 사라진 시기를 만났으나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록 더욱 통하였고 날마다 노선생을 모셔 모든 어버이 섬기는 도리에 그 힘을 다하여 시종(始終)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노선생 역시 깊이 애중(愛重)하여 부자간에 스스로 이르기를 지기(知己)라 하였고 노선생이 돌아간 뒤에도 하나같이 그 법을 따랐다.
타고난 기질(氣質)에 의하여 성취된 덕(德)은 각각 다르지만, 그 도(道)는 두 선생이 다 같았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에서 귀(貴)한 것은 언행(言行)이 서로 맞고 유현(幽顯)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말만 잘하는 앵무새와 같을 뿐이다.
옛사람이 이른바 ‘혼자 걸어도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잠자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참으로 깨닫고 살펴야 할 구절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년에 스스로 그 재(齋) 이름을 ‘신독(愼獨)’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선생은 배우는 이들이 낮은 경지에 있으면서 높은 경지를 엿보고 스스로 잘난 체하다가 아무 소득도 없음을 매우 병폐로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차라리 낮을지언정 높게 말며 차라리 얕을지언정 깊게 말며 차라리 옹졸할지언정 교묘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유가(儒家)의 법이 본래 이러한데, 정주(程朱) 이후로 미오(微奧)함을 천발(闡發)하여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으니, 후학(後學)은 오직 삼가 지키고 힘써 행할 뿐이다.”하였다.
어떤 이가 혹 신기(新奇)한 말을 만들어 선유(先儒)와 다른 의견을 세웠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옳지 않게 여기었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논학(論學)의 일단(一端)을 알 수 있다. 선생은 만년에 도(道)가 높아지고 덕(德)이 이루어져 마치 앙연(盎然)히 봄볕이 사람에게 쬠과 같아, 비록 화내지 않아도 위엄스러워서 사람마다 숙경(肅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는 그 학문이 오로지 내면(內面)에 마음을 썼으므로 지키는 바가 더욱 굳고 실천함이 더욱 독실하여 그 조예가 결국은 여기에 이른 것이다. 세상의, 이름은 유학(儒學)을 한답시고 결국은 마음에 얻음과 몸소 실천함이 없는 자와 견준다면 그 성실함과 거짓됨이 어떠하겠는가. 더욱이 예학(禮學)에 몸을 담아 일생을 마친 사실은 근세 제현(諸賢)의 따를 수 없는 바이다.
평소의 뜻이 비고 깨끗하여 처음에는 한 발자국도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 하였으나 만년에 성명(聖明)을 만나 융숭한 은례(恩禮)에 감격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았으니, 그 지성(至誠)과 고충(孤忠)은 귀신에게 맹세할 만하였다.
비록 시운(時運)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나아가고 물러남을 대의에 따랐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근심하는 한 마음은 일찍이 물러났다 해서 다름이 없었다. 전후(前後) 임금을 뵙고 정치를 논한 것이 모두 인주(人主)의 마음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알아서 체득한 것이요, 빈말과는 견줄 수 없다.
선생은 천성이 본래 겸손하여 사도(師道)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멀고 가까운 데서 흡연(洽然)히 종사(宗師)로 삼았다. 그 시문(詩文)은 단정하고 적실하며 고아하고 긴절(緊切)하여 조금도 지사 잉어(枝辭剩語)가 없으며, 유고(遺稿)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필법(筆法)은 정건 방엄(精健方嚴)하여 왕씨(王氏 왕희지(王羲之))의 해체(楷體)를 깊이 체득해서 근세의 전문가로는 따를 수 없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동방의 도학(道學)은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의 여러 유현(儒賢)이 이어 천명(闡明)하였으니, 문명(文明)의 모임이 융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도 우리 노선생(老先生)은 이 문성공(李文成公)의 적전(嫡傳)을 얻어 오로지 박실(朴實)한 데 힘을 썼고 선생은 그 지결(指訣)을 계승하여 문로(門路)가 매우 정당하였으므로 거의 폐단없이 전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좌의정 유홍(兪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병이 있고 영리하지 못하므로 가정(家政)을 대리한 이는 율곡(栗谷) 선생의 서녀(庶女)였으며, 익형(益炯). 익련(益煉)이 그 소생이다.
익련은 참봉이고 두 딸은 생원(生員) 김태립(金泰立). 정광원(鄭廣源)에게 출가하였다. 익형은 만리(萬里). 만규(萬圭). 만질(萬耋). 만량(萬量). 만당(萬堂)을 낳았고 두 딸은 송세걸(宋世傑). 김석보(金碩輔)에게 출가하였으며 익련은 만성(萬城). 만제(萬堤)를 낳았는데 다 진사(進士)이고 만방(萬坊). 만용(萬墉)은 조정에서 녹용(錄用)하고 만리(萬里)는 지금 봉사(奉事)이다.
나는 노선생을 따라 배웠고 또 선생을 섬기었으나 학문의 방향도 알지 못하여 교육해 준 은혜를 저버렸다. 지금 기실(紀實)하는 글에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으므로 우선 한두 가지를 서술하여 지언(知言)의 군자를 기다린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문원공의 학문은 / 文元之學
율곡에서 전해졌고 / 傳自栗谷
선생이 이를 계승하니 / 先生是承
그 연원 분명하네 / 淵源端的
내가 이 글 지어 / 我作斯誌
후인에게 보이누나 / 以貽後覺
<끝>
[註解]
[주01] 계축년 무고옥(誣告獄) : 계축년(1613, 광해군5) 봄에 있었던 박응서(朴應犀) 등의 옥사(獄事)이다. 박응서 등이 상인(商人)의 재
물을 강탈했다가 잡히자, 이이첨(李爾瞻)이 이것을 기화(奇貨)로, 박응서 등에게 국구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로 영창대군(永昌大
君)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려고 강도질했다고 허위자백하게 하여, 이로 인해 큰 옥사가 벌어져서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도 강화(江華)로 쫓겨나서 죽임을 당하였다.
[주02] 진 목공(秦穆公) …… 삼았으니 : 소 먹이던 사람이란 곧 춘추 시대 우(虞) 나라 백리해(百里奚)를 가리킨다. 그가 난을 피하여 진
(秦) 나라에서 소를 먹이며 은거(隱居)하고 있었는데 진 목공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주03] 대동법(大同法) : 대동미(大同米)라고도 하는데, 종래의 조공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로 했으므로, 소용되는 시기와 납부(納付)하는
때가 일치될 수 없고, 방납(防納)하는 제도가 생기어 방납자가 중간에서 작폐(作弊)함이 심하여, 일률적으로 미곡(米穀)으로 바치
게 하던 법이다. 율곡(栗谷)의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그 법을 처음 말하였다.
[주04] 염파(廉頗)와 …… 이룩하였는데 : 국가를 위하여 개인의 분노를 참고 서로 화합하였다는 고사(故事)이다. 전국 시대 조(趙) 나라
와 진(秦) 나라가 회맹(會盟)하였는데, 조 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진왕(秦王)의 기세를 꺾음으로서 조왕(趙王)이 인상여를 상경
(上卿)에 올리니 염파(廉頗)보다 윗 등급이었다.
그러자 염파가 “내가 상여를 보면 반드시 모욕을 줄 것이다.” 하니, 상여가 매양 조회 때마다 질병을 핑계하고 반열을 다투려 하지
않았고, 길을 가다가도 염파가 보이면 곧장 숨어 버리므로 그의 사인(舍人)들이 수치스럽게 여기자, 상여가 “대저 진왕의 위엄도 상
여가 뜰에서 꾸짖고 그의 뭇 신하를 모욕하였는데, 상여가 비록 미련하지만 염 장군을 두려워하겠느냐. 생각해 보면 강한 진 나라가
감히 조 나라에 싸움을 걸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 두 범이 서로 싸우면 형세가 모두 무사할 리
가 없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국가의 위급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원수는 뒤로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인상여에게 사죄
하고, 이로부터는 서로 생사(生死)를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 조창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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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愼獨齋金先生墓誌銘 幷序
愼獨齋先生沒。余猥作銘文。其胤益炯,益煉與門人尹宣擧等。刻而揭諸神道矣。旣而其二胤及尹公相繼淪沒。今其諸孫萬里,萬城等謂余曰。幽誌未具。復以爲請。嗚呼。先生之門。登炙者多。而至於今日。存者惟余矣。雖老且病。亦何敢辭。謹按先生諱集。字士剛。沙溪老先生之第二子也。妣曹夫人。僉樞大乾女。萬曆甲戌六月六日。先生生于漢陽貞陵洞里第。姿性絶異。學語時豎一指于其口曰。此中字也。五歲而知讀書作大字。言動不妄。稍長。從泉谷宋公象賢,宋龜峯翼弼學。崔簡易岦見所作詩語曰。將爲大手筆也。壬午。老先生守制在廬舍。先生所以侍奉助奠。無不如禮。丙戌。曹夫人歿。先生致哀有羸疾。中辛卯進士。庚戌。用館薦授齋郞。不就。癸丑誣告獄。闔門幾不免。遂奉老先生歸湖西之連山。時廢朝政亂。倫常斁絶。先生養親講學外。了然靡他。癸亥。仁祖大王御極。老先生首被徵命。廷議以先生學行出類。將擢置臺職。先生丐免甚力。爲養得除扶餘縣監。務祛弊政。施以敎化。日與士子討論經籍。丁卯病遞。士民勒碑頌德。戊辰。除臨陂縣令。未幾謝歸。自後仍有翊衛司衛率,全羅都事之命。皆辭。辛未秋。老先生易簀。先生尙能以筋力爲禮。克誠克愼。極致情文。甲戌春。拜繕工僉正。夏。以司憲府持平召。上辭狀翌年。復拜。丙子春。由掌令再爲執義。間爲宗親府典籤,宗簿寺正。皆以病免。丙子冬虜至。先生星夜赴亂。未及行朝。賊已塞路。遂退與同志糾合義旅。將北上勤王。俄而聞媾成。先生入都進慰。戊寅秋。復徵以執義。呈狀遞。冬。有人上變。先生庶弟杲被逮。事將不測。先生舁疾入京。與弟參判公槃席藁待命。上特命安心退去。仍曰。杲固有妄言之罪。而特爲其父兄原之。己卯。復有召命。先生以前冬事。兼欲一謝隆恩。遂造朝。陞拜承政院同副承旨。再辭不許。旣入侍。上慰諭備至。講說經義。因進規戒。上甚傾聽曰。可悉陳所懷。先生曰。人主一心。萬化之源。誠能存養。察其所發。則人欲退聽。天理流行矣。上曰。此堯舜心法。予當體念。又問治心爲政。以何爲要。先生曰。治心當以敬爲主。而爲政則貴在誠實矣。上稱善。改右副辭以疾。上問以醫藥。先生乞遞益力。遂許之。後累除元孫輔養官曰。經明行修。實合此任。甲申秋。拜工曹參議,左副承旨。孝宗大王由大君陞儲貳。大臣言金某一生沈潛性理之學。使侍東宮則必有薰陶之益。召旨甚懇。丙戌春。尼山賊柳濯等謀亂伏法。其爰辭有不敢近金承旨廬下之語。上歎曰。雖賊徒猶知畏憚。賢者之有益於人國也如是矣。上以淸陰金文正公言。別置世子贊善。屢召。復有工曹之命。蓋自己卯退歸之後。除命頻繁。而一以病辭曰。世道之責。自有其人矣。己丑。孝宗大王嗣位。特召曰。當此罔極之日。益思稽古讀書之人。爾在先朝。猶未嘗一日在朝。況予誠薄。焉能上來。先生卽入臨。仍謝新命。優賜米饌。特拜禮曹參判。銓曹以格外爲言。上曰。稽古讀書之人。何可拘於常規。先生四疏懇辭。又再告則上曰。強其所不欲。亦非待賢之道。遂移工曹。上封事論喪禮及時務。其略曰。臣竊惟天敍天秩。自有典常古經。國制因革相承。當初急遽。未免放過。前頭節文。猶宜講究。今略論其梗槩。爲一冊以進。冀殿下特賜指揮。以爲一王之制。又曰。天下之大本。殿下之一心是也。今日之急務。振紀綱嚴宮闈。用賢良恤民隱責實效是也。又論大行易名及自強之道。末言安置諸孫早宜放還。蓋昭顯世子三子。嘗坐其母竄外也。上手批曰。所上諸事。歎服其切實。第皆引而不發。願更明以敎我。仍命訂定小學註說及中庸或問句讀以進。拜司憲府大司憲。時儒臣忤旨。有嚴批。先生辭職。仍進啓曰。人主聽言之道。惟在虛心容受。辭令之間。必須從容平穩。絶不可暴怒不平。使群下議其淺深也。御批。卿言至此。予亦悔焉。三辭。令該曹議遞而賜對。上曰。欲相見久矣。卿今上來。忻幸可喩。國無所寶。惟卿是寶。先生曰。臣嘗於先朝。只以人主一心爲言。誠以此外無他道也。爲治之道。在於得人。而得人之要。又不外於一人之精鑑矣。上皆虛心嘉納。上欲於山陵及魂殿。並祭王妃。先生曰。吉凶不可並行。先正臣李滉已有所論矣。又欲於返哭後設安神祭。先生又曰。於禮無可據之文。旋拜都憲。又進言曰。近日除拜之間。或失聖人平蕩之義。如此則國事無復可望。伏願克去己私。務循至公焉。批曰。卿之愛予如此。深用嘉歎。時有一種人不悅於金文正公。頗無遜言。先生又論之。御批以爲小官侵侮元老。無乃予之尊敬未至而然歟。上以先生懇辭不已。遞拜工曹參判。山陵旣復土。先生屢乞退不許。以特進入侍。進講中庸。因言奢侈之弊。已而歸意益決。政府玉堂太學諸生交章請留。金文正公曰。昔司馬公謂國事付之呂晦叔。今日將付之誰。遂上箚曰。臣伏見金某儒門宿望。老成端亮。士林莫不嚮仰爭喜。聖明得致同朝。臣以爲不宜苟循其去。以補新化也。上再遣近侍留之。先生辭謝。遂出南郊。上特召先生從子承旨益煕于寢殿曰。爾其往諭予意。所以遣爾者。冀其善諭也。先生不得已還入。遣內使問起居。先生又再疏乞許退。上曰。亦慮其雪天嚴寒。高年行役之爲難也。爲予暫留。則國家之補益。士林之矜式。爲如何哉。卽拜都憲而曰。勿拘常規。每入講筵。俄陞拜吏曹判書曰。不與之共天位治天職。則非王公之尊賢也。先生遂出謝。思竭誠心以答知遇。朝野爭相想望。先生入對曰。殿下嗣服已半年。而治體不立。國勢愈替。厥咎安在。上曰。非不勉勵。才實不逮。先生曰。先王反正。耆俊在服。非今日比。而竟無底績之盛。可爲千古之恨。或慮今日復如前日。臣不勝私憂也。且如苻堅固不足道。然必得一時人才以做事功。又如秦穆公用飯牛者爲相。苟知其賢。何資級之可拘。上曰。卿言甚好。先生又曰。人主之量貴於恢弘。而近來忤旨之人。顯有疏外底意思。且大同之法。要可以便民裕國。然國體未立。非所當先。上曰。卿言皆老成可喜。先生適遭喪威。且有疾。三疏請辭。上慰諭問疾。旣行大政後。又乞免不許。時右相金堉力主大同之議。與先生不合。頗侵先生。先生自劾曰。頃者右相來問大同便否。臣以爲重難。亦於前席。略陳愚見。昔司馬光,范鎭志同道合。而至論樂律。則終始參差。韓琦,范仲淹上殿未嘗苟同。下殿未嘗失色。古之君子和而不同如此。何嘗一言不合。而便以不平相加哉。至其所謂觸忤時忌。救死不贍之語。臣讀來竦然。不能自定。臣何敢一刻淹留乎。卽出江外。上勉留甚至。先生行且陳疏。上下手札曰。卿之不念國事。潔身長往。何至於此。國事雖危。所恃者惟一二大臣與卿耳。廉,藺戰國之士。尙能忍辱相下。以濟國事。以卿之賢。豈不知此。須念國事之重。速爲入來。於是金文正公復箚請召還。館學諸生亦上疏。先生行三日。史官追及敦諭。上知先生不可回。特遞右相。以慰輿情。先生旣還上疏曰。臣與金堉有久要之好。無相失之嫌。特以大同論議不合。而有一場之鬧。在下辭避。道理當然。初非廉,藺相隙之比也。然右相亦何心哉。日後如得相見。當談笑如平生矣。若臣之當退。不但此一事而已。臣年迫病劇。涓埃無補。豈宜溘然於旅邸。以貽千古之譏乎。先生旣去。而時事益不可收拾矣。又敵人因譖來喝。禍將不測。賴上親爲彌縫。事幸得已。先生益無意於世。仁祖初朞。力疾赴班。上欲引見。而先生已歸矣。拜大司憲時。兪公棨有遠竄之命。先生辭職曰。臣嘗言兪棨之賢。請同被譴。疏再上。批曰。連見疏章。怳若對面。噫。世道至此。思用老成。誠切于中也。自後連辭召命。壬辰。筵臣李泰淵啓言金某乃一代儒宗。自上特加優老之典。上卽命加資。仍拜吏曹判書。時先生年已七十有九。先生辭以年未准格。至於四疏。上竟許之。俄而敎曰。金某年旣耆艾。餘日無幾。其令本道題給食物。以表予意。先生又辭謝。批曰。予之慕卿齒德。容有極乎。以不能朝暮得聆德音。爲士林矜式爲恨。顧此薄物。何足云喩。先生乃與宗族鄕黨共享之。癸巳。申前命陞正憲。有大臣言。超加崇政。連拜議政府左參贊,判中樞府事。先生前後請辭至於七疏。幷不許。朝有大議論。上遣官就問。先生自數年前有微恙。至丙申轉劇。而端莊檢束。無異平日。謂諸生曰。知死生之理。而無所動於心。此則吾無愧於古人。又戒從子益煕曰。文衡銓長萃於一身。吾爲汝懼。可十分愼之。五月十三日。啓手足。訃聞。上曰。金某儒林領袖。朝廷重望。其特賜禮葬。遣近臣致祭。後賜諡文敬。及孝宗大王祔太廟。以先生配食。墓在連山天護山孤雲僧舍之北。金氏出自光州。新羅末。王子興光知國將亡。自爲庶人。遁于光。其後子孫益顯。連八代爲高麗平章。世號其居爲平章洞。我朝。國光官左議政。有諱繼輝。宣祖朝名臣。是生老先生。老先生諱長生。諡文元公。先生端方審密。溫雅和粹。如精金美玉。淸而不激。介而不矯。承累世積美之餘。聞詩禮淵源之訓。以孝悌忠信。爲立身之本。窮理居敬。爲進修之方。其規模節度。一以家學爲準。幼有華藻。稍長卽不屑也。唯專心性理之書。早夜孜孜。操存踐履。恭敬退讓。其言談擧止。無一毫放過。中遭道消。處困而亨。日侍鯉庭。凡事親之道。必竭其力。終始如一日。老先生亦深加愛重。父子間自謂知己。老先生旣歿。一遵其法。雖以氣質之稟。而造德各異。其道則未嘗不同也。嘗曰。所貴於學者。爲其言行相顧。幽顯一致。不然則鸚鵡之能言耳。古人所謂獨行不愧影。獨寢不愧衾者。眞是警省語。故晩年自號其齋曰愼獨。蓋志其實也。深以世之學者處下窺高。自大無得爲病。嘗曰。寧卑無高。寧淺無深。寧拙無巧。吾儒家法。本來如此。程朱以後。發微闡奧。無復餘蘊。後學惟當恪守勉行而已。聞人或有刱說新奇。立異於先儒者。甚不韙之。此可見其論學之一端也。先生晩歲道尊德成。則盎然如春和襲人。雖不怒而威。人莫不肅敬。蓋其學專用心於內。故所存益固。所履益篤。而其所造詣。終至於此。視世之名爲儒學而卒無心得躬行者。其誠僞如何也。最其役身於禮。以終其世者。此實近世諸賢之不可及者也。雅志沖素。始不欲一脚出門。晩際聖明。感激恩禮。知無不言。言必中理。至誠孤忠。可質神鬼。雖時命不偶。進退以義。而愛君憂國。一心耿耿。未嘗以旣退而有間也。前後登對論治。皆本於人主之心。此其眞實見得。非空言可比也。先生性本謙退。不以師道自居。而遠近洽然宗師之。其爲詩文。端的雅緊。絶無枝辭剩語。有遺稿若干卷藏于家。筆法精健方嚴。深得王氏楷體。近世專家所不及也。竊嘗聞之。吾東道學。蓋始於圃隱鄭文忠公。而我朝諸儒賢闡而明之。奎躔之會。可謂盛矣。惟吾老先生實得李文成公嫡傳。專於朴實頭用功。而先生承其旨訣。門路甚正。則庶幾傳之無弊云。先生娶左議政兪泓女。病不慧。攝其家政者。栗谷先生之庶女也。益炯,益煉其所生也。益煉參奉。二女適生員金泰立,鄭廣源。益炯生萬里,萬圭,萬耋,萬量,萬堂。二女適宋世傑,金碩輔。益煉生萬城,萬堤。皆進士。萬坊,萬墉朝廷錄用。萬里今爲奉事。余從學老先生。又事先生。學未知方。孤負敎育之恩。今於紀實之文。不能形容其萬一。姑序一二。以俟知言之君子云。銘曰。
文元之學。傳自栗谷。先生是承。淵源端的。我作斯誌。以貽後覺。<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