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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s death he has vindicated the honor of God’s moral government, and made it just for him to be merciful. When the lawgiver himself submits to the law, when the sovereign himself bears the extreme penalty of that law, then is the justice of God set upon such a glorious high throne that all admiring worlds must wonder at it. If therefore it is clearly proven that Jesus was obedient to the law, even to the extent of death, he certainly did not come to abolish or abrogate it; and if he did not remove it, who can do so? If he declares that he came to establish it, who shall overthrow it?
그분(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정부의 명예를 변증하셨으며 그분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심이 정당하게 하셨습니다. 입법자 자신이 그 율법에 순종하셨을 때, 그리고 절대 주권자 자신이 그 율법의 극한 형벌을 담당하셨을 때, 하나님의 정의가 영광스럽고 높은 보좌위에 자리잡았으며, 모든 존경하는 세상들이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율법에 극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음이 분명히 드러났다면, 그분은 분명히 그것을 폐하거나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그분께서 스스로 가 그것을 세우러 오셨다고 선언하시면, 누가 그것을 뒤엎을 수 있겠습니까?
But, secondly, the law of God must be perpetual from its very nature, for does it not strike you the moment you think of it that right must always be right, truth must always be true, and purity must always be purity? Before the ten commandments were published at Sinai there was still that same law of right and wrong laid upon men by the necessity of their being God’s creatures. Right was always right before a single command had been committed to words. When Adam was in the garden it was always right that he should love his Maker, and it would always have been wrong that he should have been at cross-purposes with his God; and it does not matter what happens in this world, or what changes take place in the universe, it never can be right to lie, or to commit adultery, or murder, or theft, or to worship an idol God. I will not say that the principles of right and wrong are as absolutely self-existent as God, but I do say that I cannot grasp the idea of God himself as existing apart from his being always holy and always true; so that the very idea of right and wrong seems to me to be necessarily permanent, and cannot possibly be shifted. You cannot bring right down to a lower level; it must be where it always is: right is right eternally, and cannot be wrong. You cannot lift up wrong and make it somewhat right; it must be wrong while the world standeth. Heaven and earth may pass away, but not the smallest letter or accent of the moral law can possibly change. In spirit the law is eternal.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의 본질에 의해 반드시 영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옳은 것은 항상 옳으며, 진리는 항상 진리이며, 순전함은 항상 순전함이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당신에게 들지 않습니까? 시내산에서 10계명이 공표되기 전에도, 여전히 옳고 그름의 동일한 법이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의 필요성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단 하나의 계명이 말씀으로 맡겨지기 전에도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동산에 있었을 때, 그가 자신의 창조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그가 그의 하나님과 대립된 목적 가운데 있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혹은 우주에 부슨 변화가 발생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나 간음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도둑질하는 것이나, 우상신을 숭배하는 것은 결코 옳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옳고 그름의 원칙이 하나님처럼 절대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거룩하시며 항상 진실하시다는 사실과 별개로 하나님의 생각을 구분하여 제가 파악할 수는 없다고 저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의 바로 그 생각은 저에게는 반드시 영원하며, 움직일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Suppose for a moment that it were possible to temper and tone down the law, wherein would it be? I confess I do not know and cannot imagine. If it be perfectly holy, how can it be altered except by being made imperfect. Would you wish for that? Could you worship the God of an imperfect law? Can it ever be true that God, by way of favoring us, has put us under an imperfect law? Would that be a blessing or a curse?
잠시만 상상해보십시오. 율법을 완화시키고 낮추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저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상상할 수도 없다고 저는 고백합니다. 만일 그것(율법)이 완벽하게 거룩하다면 , 그것이 불완전한 것으로 변하지 않고, 어떻게 변경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완벽하게 거룩하다면, 그것이 불완전하게 변하지 않고 어떻게 변경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을 원하십니까? 당신은 불완전한 율법의 하나님을 섬길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시사 불완전한 율법아래에 두셨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축복이겠습니까? 아니면 저주이겠습니까?
It is said by some that man cannot keep a perfect law, and God does not demand that he should. Certain modern theologians have taught this, 1 hope, by inadvertence. Has God issued an imperfect law? It is the first imperfect thing I ever heard of his making. Does it come to this that, after all, the gospel is a proclamation that God is going to be satisfied with obedience to a mutilated law? God forbid. I say, better that we perish than that his perfect law perish. Terrible as it is, it lies at the foundation of the peace of the universe. and must be honored at all hazards. That gone, all goes. When the power of the Holy Ghost convinced me of sin I felt such a solemn awe of the law of God, that I remember well, when I lay crashed beneath it as a condemned sinner, I yet admired and glorified the law. I could not have wished that perfect law to be altered for me. Rather did I feel that, if my soul were sent to the lowest hell, yet God was to be extolled for his justice and his law held in honor for its perfectness. I would not have had it altered even to save my soul. Brethren, the law of the Lord must stand, for it is perfect, and therefore has in it no element of decay or change.
어떤이들은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들이 행해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근대 신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치는데 저는 그것이 실수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불완전한 율법을 공표하셨습니까? 그것은 제가 그분의 창조하심에 관해 들어본 것들 중에 첫번째 불완전한 것이 되겠습니다. 결국에는 복음이 선언된 것은 하나님이 절단 삭제된 율법에 만족하시고자 선언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까? 천만에요! 저는 말하겠습니다. 그분의 완벽한 율법이 망하는 것보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이 낫다고. 그것이 무시 무시할지라도, 그것은 우주의 평화의 기초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순종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면 모든 것이 갑니다!(역주:율법이 가면 모든 것이 갑니다). 성령의 능력이 저에게 죄를 확신시켜 주었을 때 저는 하나님의 율법의 엄위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잘 기억하는데, 제가 정죄받은 죄인으로서 그것(율법) 아래 부서져 있을 때,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율법을 존중하고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저는 그 완벽한 율법이 저를 위하여 변개되기를 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저의 영혼이 가장 낮은 지옥으로 보내진다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분의 정의로우심을 인하여 높임을 받아야 하며 그분의 율법은 그것의 완벽성을 인하여 존귀히 여겨져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그것이 변개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주님의 율법은 그것이 완벽함을 인하여 반드시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체안에 아무런 부패될 수 있는 요소나 변화될 것이 없습니다.
The law of God is no more than God might most righteously ask of us. If God were about to give us a more tolerant law, it would be an admission on his part that he asked too much at first. Can that be supposed? Was there, after all, some justification for the statement of the wicked and slothful servant when he said, “I feared thee, because thou art an austere man”? It cannot be. For God to alter his law would be an admission that he made a mistake at first, that he put poor imperfect man (we are often hearing that said) under too rigorous a regime, and therefore he is now prepared to abate his claims, and make them more reasonable.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정의롭게 요구하실 수 있는 것 이상도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다 관대한 율법을 주시고자 하셨다면 그것은 그분 자신 편에대해 그분이 처음에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상상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게으르고 악한 종의 한 말을 정당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제가 당신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심히 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율법을 변개시킨다는 것은 그분께서 처음에는 실수하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불쌍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우리는 흔히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너무 경직적인 제도하에 두었었고, 그리하여 그분은 그분의 요구들을 경감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드셨다고 시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It has been said that man’s moral inability to keep the perfect law exempts him from the duty of doing so. This is very specious, but it is utterly false. Man’s inability is not of the kind which removes responsibility: it is moral, not physical. Never fall into the error that moral inability will be an excuse for sin. What, when a man becomes such a liar that he cannot speak the truth, is he thereby exempted from the duty of truthfulness? If your servant owes you a day’s labor, is he free from the duty because he has made himself so drunk that he cannot serve you? Is a man freed from a debt by the fact that he has squandered the money, and therefore cannot pay it? Is a lustful man free to indulge his passions because he cannot understand the beauty of chastity? This is dangerous doctrine. The law is a just one, and man is bound by it though his sin has rendered him incapable of doing so.
완벽한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이 그에게 그것을 행할 의무를 면제시킨다고 말하여집니다. 이것은 매우 그럴법한 가면을 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그릇되었습니다. 사람의 무능력이 의무를 제거할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적 문제이지, 신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무능력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것이라는 오류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람이 거짓말 장이가 되어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그러므로 그는 진실함의 의무로 부터 면제됩니까? 만일 당신의 종이 하루의 노동을 빚지고 있는데 그가 스스로 너무 술취하게 하여 그가 당신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그가 그 의무로부터 면제되겠습니까? 어느 사람이 허랑방탕하게 돈을 허비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그가 채무로부터 면제되겠습니까? 음탕한 사람이 정절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기의 정욕에 빠지는데로부터 자유롭게 됩니까? 이것은 위험한 교훈입니다. 법은 정당한 것이며 사람은 그의 죄가 그것을 지키기에 무능하게 할지라도, 그는 그것(법)에 의하여 기속되어 있습니다.
The law moreover demands no more than is good for us. There is not a single commandment of God’s law but what is meant to be a kind of danger signal such as we put up upon the ice when it is too thin to bear. Each commandment does as it were say to us, “Dangerous” It is never for a man’s good to do what God forbids him; it is never for man’s real and ultimate happiness to leave undone anything that God commands him. The wisest directions for spiritual health, and for the avoidance of evil, are those directions which are given us concerning right and wrong in the law of God. Therefore it is not possible that there should be any alteration thereof, for it would not be for our good.
더구나 율법은 우리에게 좋은 것(선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중에는 우리가 살얼음이 너무 얇아 지탱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올려놓는 위험 표지판같은 것 외에 다른 어떤 계명도 없습니다. 각 계명은 마치 우리에게 “ 위험” 이라고 말하는 것같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금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어떤 것을 행하지 않은채 놓아두는 것은(행하지 않는 것은) 결코 그 사람에게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행복이 되지 못합니다. 영적 건강과 악을 회피하는 가장 현명한 처방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옳고 그름에 관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처방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어떤 변경이 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 should like to say to any brother who thinks that God has put us under an altered rule: “Which particular part of the law is it that God has relaxed?” Which precept do you feel free to break? Are you delivered from the command which forbids stealing? My dear sir, you may be a capital theologian, but I should lock up my spoons when you call at my house. Is it the command about adultery which you think is removed? Then I could not recommend your being admitted into any decent society. Is the law as to killing softened down? Then I had rather have your room than your company. Which law is it that God has exempted you from? That law of worshipping him only? Do you propose to have another God? Do you intend to make graven images? The fact is that when we come to detail we cannot afford to lose a single link of this wonderful golden chain, which is perfect in every part as well as perfect as a whole. The law is absolutely complete, and you can neither add to it nor take from it. “For whosoever shall keep the whole law, and yet offend in one point, he is guilty of all. For he that said, Do not commit adultery, said also, Do not kill. Now if thou commit no adultery, yet if thou kill, thou art become a transgressor of the law.” If, then, no part of it can be taken down, it must stand, and stand for ever.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변경된 규율아래 두었다고 생각하는 어떤 형제들에게든지 말하고 싶습니다. “ 어느 특정부문의 율법이 하나님께서 완화시킨 것입니까? 어느 교훈을 당신은 자유롭게 위반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도둑질을 금하는 계명으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까? 친애하는 선생님! 당신은 중요한 신학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저의 집을 방문할 때 제 숫가락들을 잠궈놓겠습니다. 당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계명이 간음하지 말라 입니까? 그러면 저는 당신을 점잖은 교제 사회에 추천할 수 없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부드럽게 완화되었습니까? 그러면 저는 당신을 차라리 나가게 하겠습니다. 어느 율법(계명)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면제시킨 것입니까? 오직 경배하는 율법으로부터 입니까? 당신은 또다른 신을 갖고 싶습니까? 당신은 우상들을 만들고자 합니까? 사실은 우리가 구체적인데로 갔을 때, 경이로운 황금 연결고리의 어느 한 고리도 잃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며, 전체적으로도 완벽합니다.
율법은 절대적으로 완벽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그것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전체 율법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가 하나에서 위반하면 그는 모든 것에 유죄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간음하지 말라 명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 명하셨기 때문이라. 이제 네가 간음을 범하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살인하면 너는 율법의 범법자가 되느니라”(야고보 2:10-11)
그렇다면 그것(율법)의 어느 부분도 무너 내려질 수 없으며, 그것(율법)은 반드시 서야 합니다, 영원히 서있어야 합니다.
- 챨스 해돈 스펄젼
http://www.angelfire.com/va/sovereigngrace/perpetuity.spurgeon.html

첫댓글 시편1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1)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행사에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스펄젼이 이 카페에 온다면 제가 율법에 관해 견지하고 있는 바와 동일하게 외치거나 저보다 더 율법에 대해 강조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의 율법에 관한 견해들이 매우 견고하였는데 그들은 율법을 유용한 수단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좇을 때 그분께서 율법을 준행하심을 목도하였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디엘 무디가 그러했고 웨슬레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성령을 바르게 좇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율법 준수 안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할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중 한 두개를 지키려하는 것은 율법 전체 613개 조항들을 지키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이것을 못 깨달으면 율법에 관해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 전체를 지키는 길은 오직 성령을 좇을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율법 전체를 빠짐없이 지키겠다는 사람들은 곧바로 할수 없다고 선언하며 성령님께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롬 3:19-31에 부합합니다. 그런 다음 성령님께서 그 율법을 실행하시며 준행하여 가심을 알고 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중 한두개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 중 어느 하나도 인간은 못지킵니다.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계명으로
'율법 전체를 지키는 길은 오직 성령을 좇을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율법 전체를 빠짐없이 지키겠다는 사람들은 곧바로 할수 없다고 선언하며 성령님께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롬 3:19-31에 부합합니다. 그런 다음 성령님께서 그 율법을 실행하시며 준행하여 가심을 알고 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가 올린 묵상글의 율법에 관한 내용도 이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토브님은, 제 글이 율법을 전혀 모르는 자의 말이라고 하는 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사람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 성령을 좇으며 성령께서 율법을 이루어가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논쟁의 촛점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또한 은혜로 성령을 좇아 가는데 있었는 것이 아니라, 처음 시작이 율법은 폐해졌다고 하니까, 그 후반부를 집중적으로 반박해온 것입니다. 낮은자님이 제 글에 반박하셨으니까 그 몇개의 글들을 율법 폐지론의 관점에서 쓴 걸로 이해한 것입니다.
율법의 일부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롬 13:10) 말씀을 믿지 않고, 사랑 그대로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그냥 남들을 사랑하라 하지 않고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 말한 점은 주목할 일입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랑 사랑을 부르짖는 자들은 오히려 가톨릭 같은 종교에서 많이 볼수 있습니다. 율법의 모든 가르침이 포용되지 않은 사랑은 마치 율법이 빠진 성령의 법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제가 하는 말은 웨슬레가 말하는 취지와 동일합니다. 사람들은 왜 웨슬레가 말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그를 율법주의자로
하토브님께서 처음부터 이 말씀을 전제로 제시하고 율법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더라면,
저는 하토브님을 율법주의자 혹은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분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토브님의 율법관에 대한 저의 오해는 풀렸습니다.
이렇게 도와주시는 것 또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임을 믿으며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논쟁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은혜부분부터, 구원얻는 부분을 포함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폐해졌느냐? 율법이 없어졌느냐? 율법의 정죄기능이 불신자에게만 남아있고 신자들은 거기서 해방되었느냐? 등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하는데 촛점을 두었습니다. 제가 나머지까지 균형있게 설명하지 못한 것은 인간적인 한계였을 것입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난하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이제 스펄젼의 글은 끝냈습니다만 앞으로 제가 간단히 성경 오해부분에 관하여 마무리 할 것입니다. 무디의 글은 간단히 몇 줄 올리고자 합니다.
위에 하토브님 댓글들은 그리스도인 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근데
이 위에 말씀으로 말씀결론을 지으시려고, 예수님께서 성전제사법만 이루셨다고 율법을 강조하셨다면
그동안 우리는 너무먼길을 돌아온것 같습니다.
하토브님글 90 번에다 댓글 한참달고 와서 이글 읽었습니다.
앞서서 말씀드렸듯이 율법의 계명들 간에는 상호관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율법중 모든 도덕법을 준행하지 못하였을때 2차 구제 수단이 바로 성전제사법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성전 제사법은 인생 문제 해결에 최후 보루였던 것입니다. 예를들면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전제사법은 번제, 전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을 통해서 그죄값을 갚음으로 율법을 준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약시대에 모든 죄를 마음껏 짓고 속죄제 드리라는 뜻이 아니었으며 율법 준수는 언제나 주님의 명령이고 뜻이었습니다. 그러한
수백만 마리의 동물제사로도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끝내지 못하므로 매년 계속해야 했던 희생제사를 예수님은 한번에 모든 제사들을 완벽히 치룬 것입니다. 수천억마리의, 수천억 번의 희생제사를 예수님은 한방에, 그것도 완벽하게 완수, 완성,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성령을 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육신이 결코 이룰 수 없던 율법을 이루어가십니다. 율법의 남은 부분들이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성령님을 좇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장로들, 할례주의자들은 율법을 이루지 못하였고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유대인들이 율법의 10여가지를 범하면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일반적 이해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율법을 지켜가며 주님을 따랐는데 그들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지킨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좇았기 때문에 율법을 이루어간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의 요지이며 핵심인데, 성령을 좇는다 하면서 율법을 위반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거짓말 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인류 모두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율법에 의한 형벌을 대신 갚아주기 위하여 죄값으로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대신 그분께서 피흘리신 것입니다. 위의 스펄젼 글이 그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 죽음이 십자가의 극한 형벌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 자신은 율법을 조금도, 한치도, 범하지 않으셨으므로 율법에 의한 형벌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범법함을 인하여 우리 대신에 율법의 형벌대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신 21:22). 그리하여 나무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신 21:23).
만일 율법이 침례자 요한의 때까지만 유효하였고, 그 이후로는 천국이 침노하여 들어간다는 말을 그릇해석하여 이후에는 율법이 효력이 없어졌다면 어찌하여 창조주 예수님이 그토록 잔인한 형벌을 그분의 창조물들에게서 받으셔야 했겠습니까? 어찌하여 주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받는 독생자를 형벌받게 하였겠습니까? 죄인은 죄값을 지불해야 함이 하나님의 법이며,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옥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지막 남은 호리까지 대신 갚아주시려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나무에 못박히고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침례 요한 이후에도 율법이 여전히 유효하여
율법에 따른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으셨고, 이제는 성령을 좇아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분별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야지 하면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으면 우리는 율법을 이룹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기를 살펴 율법에 혹 어긋남이 있는지를 성령께서 감찰하시사 깨끗게 하시도록 그분께 맡기는 것은 매우 유익한 길이라고 믿어집니다.그런 점이 웨슬레의 간단한 글에서도 보였습니다.
희망님 댓글에 답하면서 성전제사법은 율법준수의 최후 보루라고 할수 있고 그 계명들은 다른 계명들을 총괄 지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제사법을 매년 수없이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음을 우리는 곳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사를 단 한번에 영원토록, 영원한 효력으로 완성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분이 대신 지켜주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나가서 마음껏 놀아라는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이루었다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성전 제사를 드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양잡고 소잡아 드리는 번제나 속죄제를 드리지 않는 반면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저는 도덕법은 폐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전제사법은 완벽히 성취되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폐해졌습니다. 성전 제사법에 따르면 수많은 짐승들로 제사드려져야 했습니다. 그 법 자체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라는 법으로 바뀌었고, 또 그 법 자체를 실행하는 것도 예수님에 의해 실행 완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동물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요, 불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제사를 계속 드리는
종교가 로마 카톨릭의 미싸 행사입니다. 그들은 또다른 피와 쿠키(영성체)로 제사들 드리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로는 지금도 사마리아 지역에서 동물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안믿는 행사들입니다.
성령을 좇는다고 말하면서 율법에 모순 혹은 반대되게 행하거나 율법을 범하거나 위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성령은 항상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율법을 준수하십니다.
율법이 폐해지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효력이 정지되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이 오늘날도 계속 유효하며, 불신자에게도 유효하고, 신자들에게도 유효합니다. 인류 모두가 행위를따라 심판을 받습니다만(계 20:11-15) 그때 심판기준으로 양심이 되었든 율법이 되었든 모든 기준은 율법의 체계와 동일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까지 일점 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이루리라 하신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성령과 율법의 상호작용에 대해 잘 설명해 주신것 같습니다. 그것을 인체에 비유하다면 뇌(신경)와 심장(피)의 관계로 설명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온몸이 정상적인 유기관계를 유지하고 자라나고, 깨끗하게 되려면 신경(성령)이 피(율법)를 통해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그것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그 분의 몸(교회) 안에 속해 있어야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약속이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고 그분 안에 거하는 방법 또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있는 법을 내가 배워 얻었네~(복음성가)도 있듯이!
저는 거꾸로 성령을 피로 율법을 신경으로 말하고 싶네요. 성령께서 오셔야 그 생명력으로 율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복음 성가는 제가 떠난 뒤에 나온 것같은데요. 제가 한동안 손영진씨 찬송을 제일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구원받아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전제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지체들로 보는 견지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머리는 당연 그리스도시니, 머리로 부터 전달되는 신경이 성령이셔야 되겠지요. (피가 몇 분만 뇌로 올라가지 않아도 뇌사상태 내지 죽게되는 반면 신경 전달을 못받는 지체도 역시 마비되고 제 구실을 못함) 따라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라 하셨고, 뇌사자(腦死者)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와 같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롬 8장 1절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믿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육체를 좇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영을 좇지 아니하고 육체를 좇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죄함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는 것은 무법주의나 불법으로 나아갈 때가 아니라, 성령님께로 나아갈 때입니다., 성령님께로부터 벗어나면, 또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다시 그 율법은 신자로 하여금 성령님께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성령님은 다시 율법을 준행하게 인도 합니다.
첫 단락의 마지막 문장 '그 분께서 스스로가 그것(율법)을 세우러(to establish) 오셨다고 선언하시면'은, 마5:17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to fulfil) 하려 함이로라"인 것 같은데... '완전케 하려 함'이라 함은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가 없어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십계명'과 그 밖에 해결책으로서의 여러 '제사법'과 '민법(民法)'들 중에서도 구약 성경의 '영생 얻는 예언(약속)'(요5:39)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의미에서 'establish' 보다는 'fulfil'이 더 옳은듯 합니다! [롬3:31의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는 "We establish.'고.]
아마 스펄젼은 롬 3:31 까지 생각하여 establish 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성취함으로 (fulfill) 율법을 궁극적으로 세웠다고 보는 것이지요. 율법중 성전 제사법에 관한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할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법인 도덕법 형사법은 여전히, 정죄기능, 인도기능, 범죄예방기능, 예언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쿠바 사태가 있기 전까지 쿠바는 번성하였고, 유흥가가 많은 카톨릭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간 풍습을 갖고 있었으며, 로마 카톨릭은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런 규제가 없음을 지적하여 변명하였고, 구약에 대해서는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 결과 그 사회는 수간의 쇼를 보여주는 곳들이 번성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오늘날 쿠바로 하여금 세계 최빈국의 반열에 올려놓게 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사회에서 신약에 대한 해석은 은혜와 자유이며 각자 성령받았다며 각각 변명할 때 그것을 정확히 해석하여 지적해줄 율법은 무시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보는 시각이 좀더 구체화 되면서, 성전 제사법은 완수되었고, 나머지 도덕법은 여전히 각자가 성취해 나가야 한다 생각하면 일종의 짐과 부담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켜나가시고 우리를 그러한 지체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면 생각만 해도 피곤하며 두렵습니다. 그때 성령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달라진 점은 우리가 맡기는 영역이 크게 확장되고 무제한의 도전을 향해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성령을 좇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다가 실족한다 해도 그 모든 죄는 사실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거기에 또 은혜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도, 독생자로 하여금 율법에 의거한 죄값을 갚도록 하기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율법을 무시하고 그냥 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간 삶 하나 하나에 대하여 죄값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죄값을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율법을 무시하며 나머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좇아 살아가며 성령님은 율법을 성취해가십니다. 성령님을 좇는다면 율법을 행한다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율법 순종에 거부감을 표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그릇된 교훈에 세뇌되어 있기때문일 것입니다.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자신있게 충족시켜가므로 그 아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취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해가시는 분이심을 아는 사람들은 속사람으로 율법을 즐거워합니다(롬 7:22) 따라서 율법을 순종한다는 말에 거부 반응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확고히 할 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폐지되었고, 예수님이 끝내셨다고 세뇌된 사람들은 엡 2:15, 골 2:14, 롬 10:4의 그릇된 번역에 세뇌되어 거부감을 느낍니다.
저처럼 성령님을 좇아 살아갈 때 율법을 지켜간다, 하는 교훈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롬 6:14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을 성전제사법에 국한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성전 제사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다음 구절 15절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죄문제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로 왔습니다. 그분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모든 진리는 율법에 결코 모순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한다면 이러한 율법에 대한 인식은 성령님께 대한 무제한의 신탁과 신뢰를 가져와서 믿음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줄 것입니다.
제가 이 율법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명하신 바 마 10장 8절의 명령을 왜 실행하지 못하는가? 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병든자를 고치고, 나병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자를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오늘날은 못하는가? 반면에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요 14:12) 하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당뇨병 하나 못고치는가? 코끼리는 인간 수명과 같은데 이빨을 6번 바꾸고 상어는 매달 한번씩 치아를 바꾸는데 우리는 900여세 살때까지 한번만 치아를 바꿨겠는가? 등의 문제에 관련하여 기도하면서 저 자신에게 거리끼는 것과
거치는 것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도중에 저를 인도하신 성령께서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이 그분께 맡기는 맡김을 제한적으로만 유지되는 것이었음을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알게되었으며 더욱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그러한 장벽이나 걸림이나 거침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주하나님께서 이로 말미암아 크게쓰실 수 있는 길 가운데 들어서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하나님이 판단해주실 것입니다. 저는 매우 큰 확신 가운데 참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이 지키시며 성경을 보면 매우 명백합니다.
제가 헬라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경을 가져오는 이유는 제 지식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들에 관하여 쟁론할 때에는 원어문을 갖고 따져야지 번역자들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가미된 번역들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증거한 바와 같이 번역들은 무수히 편견을 삽입한채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이 많은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킹제임스 성경을 갖고 변증하지 않는 이유도, 그 번역마저도 때로는 틀리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 번역 마저도 다의적이어서 다른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에 원어문으로 대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신약을 갖고
번역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만, 구약은 없겠습니까? 구약은 오히려 많습니다. 다만 구약중에서 토라를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교리에 관련된 것이 적고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토라에 대하여는 많은 번역들이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제가 나중에 번역을 끝낸다음 밝힐 것입니다. 구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계하는 것은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구약의 성전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에 관하여 신약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공급합니다. 그것이 신약에서 소상히 설명되지 않은 이유는
신자들이 당연히 구약도 읽는 것을 전제로 하여 신약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구약성경을 읽으라고 권하였던 것입니다. 그 안에 율법이 당연히 포함되어서 정죄와 범죄예방과 인도 기능이 있기에,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책망과 바르게함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구약을 올바른 견해를 갖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이론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는데 십계명을 강조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웨슬레는 가장 영적인 면에서 율법의 관계를 살펴본 사람으로 보입니다.
abolish(엡2:15), blot out(골2:14), end(롬3:4) 등도 원어 성경에 차이가 많이 나 있습니까?
골 2:14의 blot out = blot out ( 계 3:5) 으로서 엑살레입소 이고, 엡 2장 15절은 카타르게사스(카타르게오) 이고 롬 10장 4절은 텔로스 입니다. 모두 다르지요. 엡 2장 15절은 무너뜨리다 허물다의 뜻도 있습니다.
카타르게오 는 render useless, unprofitable,destroy, abrogate 라는 뜻인데,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다, 파괴하다, 취소시키다 등의 뜻을 포함합니다. 스펄젼은 당시에 많은 학자들이 Abrogate(취소)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므로 그 단어에 촛점을 맞춰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보면 한국 번역자들은 스펄젼 당시에 만연하던 신학자들의 사조를 반영하여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참에 한국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스펄전'과 함께 'D. L. 무디'의 생몰 연대를 검색해 보니까, 한 분은 1834~1892, 다른 한 분은 1837~1899으로 거의 같은 시대를 사셨더라구여. 특히 한 분은 '주일성수'를 주창하셔서... 아무튼 중세 천주교의 암흑을 걷어 냈던 M. Luther나 J. Calvin 조차도 성경을 오해한 부분이 있었듯이 누구나 이런 과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계속 알아가는 수 밖에는...
무디가 안식일 준수를 주장하였지 주일 성수를 주장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디의 십계명 해설(D. L. Moody on the 10 commandments, 1896 Moody Bible Institute) 1979 권달천 譯, 생명의 말씀사 刊'에 보면, "나는 주일에 설교를 하기 때문에 토요일이 나의 휴일이다"든지 (일요 신문 발행을 반대하면서) "일요일 신문 발행을 없애는 데 앞장 서기를 바란다'는 등의 표현으로 보아 두 가지 모두에 융통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요일 신문 발행을 위해서는 토요일에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일요판을 금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위에 적은) 책 60 페이지에는, "사람은 7일 가운데서 하루는 그의 정규적인 업무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어떤 직업은 주일을 지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처한 사람들은 다른 요일을 택하여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 나는 주일 설교를 하기 때문에 토요일이 나의 휴일이다."라고 하였고, '일요신문'에 관하여 72 페이지에 "나는 일요신문에 관하여 그 발행을 옹호하는 모든 이론을 알고 있다.일요신문을 발행하기 위한 작업은 다른 요일에 진행된다든지, 또는 일요일 작업을 유발하는 것은 월요일 신문 때문이라든지 등등 이유가 많다. 그러나 일요일에 신문을 판매하는 소년이 무려 20만명"~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율법에 관련하여 위에 언급된 구절들 외에 여러 구절들이 편견을 반영하여 번역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야고보서 또한 그렇습니다. 이미 마태 11장 13절도 약간의 뉴앙스가 다르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누구를 예언했는지를 따져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요한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했겠습니까? 그들이 예언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요한까지가 바로 율법과 선지자였습니다.
마 10장8절 과 요 14장12절 을 인용하신 감동스런 간증을 잘 읽었습니다. (12시 47분 과 51분에 쓰신.)
어떤면에서 성경번역보다 이것이 더 급하다는 먼젓번 하토브님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어령씨딸 이민아 변호사가 쓴<땅끝에 아이들 >이란 책에서도 보면 하토브님과 같은
그런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민아목사는 4 년전 24살때 죽은 자신의아들 또래, 방황하는 청년들을 주님께 많이 인도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복음이란? 하토브님과 같드라구요. 병고침에 대하여.
죽은 큰아들은 이혼한 김한길씨와의 아들이고, 재혼한남편과는 아들이 셋인데, 큰아들이 자폐아 였는데
17살때 깨끗이 나았고, 자기는 여러가지 암이 온몸에 퍼져 서울대병원에서 3개월밖에 못산다했는데,
의사샘말이 암이 하나도 안보인다고. 깨끗이 나았고, 또 최근에
각막 시신경손상으로 눈이 거의 안보여 실명될것이 나은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시겠다는
여러번의 약속을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주 하나님께서 이로말미암아 저를 크게쓰실 길 가운데로 들어서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라는 하토브님의 확신간증은 놀라운 간증소식 입니다.
하나님께선 이시대에 하토브님같은 믿음의용사를 기다리고 계시겠지요.
우리도 기다려 집니다.